[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요한 19,31-37)

2018. 6. 8. 오전 5: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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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요한 19,31-37)

 

호세아 예언자는, 주님께서는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르시어, 타오르는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으신다고 한다. (호세 11,1.3-4.8ㅁ-9)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3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
4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8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9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빈다. (에페 3,8-12.14-19)
하느님께서는 8 모든 성도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나에게 은총을 주시어,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를 다른 민족들에게 전하고,
9 과거의 모든 시대에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밝혀 주게 하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이제는 하늘에 있는 권세와 권력들에게도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매우 다양한 지혜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1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영원한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12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14 이 때문에,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15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종족이 아버지에게서 이름을 받습니다.
16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17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18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군사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온다. (요한 19,31-37)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5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36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37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






 

 예수 성심 대축일 제1독서 (호세11,1.3-4.8ㅁ-9)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9)


이유의 접속사 '키'(ki)로 시작되는 본문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키 엘 아노키 웰로이시'(ki el anoki weloish), 주님은 사람이 아닌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인칭대명사 '아노키'(anoki)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화자(話者)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강조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즉 본문은 주님 자신이 사람이 아닌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지칭하는 '엘'(el)하느님의 초월성과 전능하심 강조하는 호칭이다. 그분은 사람처럼 감정에 압도되어 분별없이 분노를 발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신적 의지와 지혜는 타오르는 분노의 감정 또한 억제하실 수 있다.


아울러 그분은 오직 정의(공의)로 심판을 내리시지만, 진노 중에도 당신 백성들에 대한 자비와 불쌍히 여기심을 잃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전능하심, 그분의 초월자 되심은 바로 이같은 측면을 견지할 때 보다 선명하게 이해된다.

그러면서 본절 중반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거룩한 분이심 밝힌다. '거룩한 이' 에 해당하는 '카도쉬'(qadoshi)는 어원상 다른 속된 것들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 거룩함을 유지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주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시고 죄인들을 심판하신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으신다말씀하시는 것은 어찌보면  이율배반적으로 들린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다는 표현 가운데는 하느님께서 죄인들에 대해 진노하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죄인에 대한 심판을 통해 나타나지만, 그것은 죄인을 완전히 진멸해 버리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들에 대하여 공의에 입각한 심판을 행하시되,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도록 징계하고 돌이키게 하는 것이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의도하시는 바이다.


즉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악을 제거하고 청소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선민에 대해서는 진멸하는 것이 아닌, 의로운 징계를 통해 그들을 거룩하게 빚으시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다.


또한 거룩함이란, 곧 다른 존재와 구별된다는 의미를 부각시키는 표현이다. 인간이라면 결코 용서하거나 용납할 수 없겠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차원이 다른 존재로서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서 용서와 불쌍히 여기시는 연민을 베푸신다는 뜻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이와 함께 사용된 '네 가운데에 있는' 이라는 표현은 '거룩' 이라는 표현과 역설 관계를 이루며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특별한 하느님의 사랑 보여주고 있다.





 예수 성심 대축일 복음(요한19,31~37)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3~34)


로마 시대의 가장 몹쓸 죄를 지은 사형수에게 내리는 형벌이 십자가형이라고 하는데, 보통 십자가에 못박히면 못박힌 자리의 근육이 파열이 되어 흘러내리는 그 피가 사람의 폐에 차면 죽는데, 일반적으로 72시간(24시간×3일)이 되면 죽는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오전 6시에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3시간 동안 조롱과 매질을 당하신 후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며(마르15,25), 오후 3시에  운명하셨으니(마르15,37) 6시간 만에, 거의 반나절 정도에 이렇게 빨리 죽으신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육신적으로 너무나 연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십자가에서의 격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빨리 숨을 거두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전날 겟세마니 동산에서 한숨도 주무시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심문 과정에서 두 차례에 걸쳐 잔인한 채찍질을 당하시는 등 극심한 고난을 받으셨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께 휘두른 채찍의 끝에는 차랑이 박혀 있어 때릴 때마다 등에 고랑이 파여져 시편 129장 3절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했던 것이다. 

'밭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고랑을 길게 내었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관저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골고타까지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닌데도, 수없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넘어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이미 힘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예수님의 죽음은 겉으로는 인간의 잔인한 물리적 고통, 타율적 고통에 의해 이루어진 것 같지만, 인간 생명의 절대권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기에, 당신 자율적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 자신의 영혼을 성부 하느님께 능동적으로 봉헌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요한19,30).

인간 예수님의 봉헌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수락해 주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음 날의 유월절(과월절)을 준비하시기 위해서 양들을 잡는 정오부터 오후 6시까지의 시간에 맞춰 당신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께 바쳤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요한 복음 19장 34절에서 당시 로마 군인들이 사용하던 '창'으로 번역된 '롱케'(longche; with a spear)'송곳 끝'이라는 뜻에서 파생된 '창 끝'이다.

이 창은 그만큼 가늘고 길어서 예수님의 시신 옆구리 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예수님을 찌른 날카로운 창은 뼈와 몸 안의 내장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피와 수액이 흘러나오게 했다.

이러한 내용은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요한 1서 5장 6절의 증거처럼 사람이 물과 피로 이루어졌다는 고대 팔레스티나 지역의 인간관에 기인한 내용을 보이기도 한다.


이 인간관에 의하면, 사람은 물로 말미암아 출생하고, 피로 말미암아 생명이 유지되며, 영'(프뉴마; pneuma)출생시에 들어왔다가 죽을 때에 나가는 비(非)물질적 존재로 여겨졌다. 따라서 피와 물이 나왔다는 것은 그 육체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공관 복음서의 저자들이 기록하지 않고 사도 요한 복음사가에 의해서만 기록된 이 내용실제 사실에 대한 목격자인 사도 요한의 정확한 증거일 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의도를 가지고 씌어진 것이다.


첫째로는 사도 요한이 고대 가현설론자(假現說論者)들의 주장, 즉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논리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서 자신이 스스로 목격한 것을 분명하게 기록했다는 주장이다.

둘째로는 초대 교부들 가운데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금구), 성 아우구스티누스 등은 예수님의 몸에서 나오는 피 마태오 복음 26장 28절에서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는 구절의 성취로 보았고, '물''새로 남'(거듭 남)을 얻기 위한 세례 성사의 상징으로 보았다.


특히 예수님의 죽음에서 세례성사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세례성사의 신학적 목적 중의 하나가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이처럼 새로운 생명을 얻기 이전에 죽음이 전제되어야 함을 보여 주고, 무죄(無罪)하신 성자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의 은총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이 베푼 세례는 회개를 가져오는 세례에 불죄과하지만(마태3,11), 예수님의 세례는 당신 자신의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세례인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최초의 성사(聖事)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면서, '피'는 '성체성사'를, '물'은 '세례성사'를 의미하며, 바로 여기에서 교회가 출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요한 19,33-34).”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려 있는 죄수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은

죽음을 앞당기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예수님을 찌른 것은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예수님의 죽음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옆구리’를 찌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가슴, 즉 심장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을 상징으로 해석하면,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가 생겨난 것처럼

예수님에게서 교회가 생겨났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에 ‘피’는 성체성사를, ‘물’은 세례성사를 상징합니다.

두 가지를 합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과 봉헌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은 글자 그대로는 예수님의 성심(심장)을 공경하는 대축일인데,

뜻으로는, 우리를 구원하려고 당신 자신을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기념하고,

또 우리도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는 대축일입니다.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예수님의 사랑’의 정점에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마르 15,39).”

여기서 백인대장은 아마도 당시에 십자가형을 집행했던 군인들의 지휘관,

즉 십자가형 집행 책임자였을 것입니다.

그 백인대장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증언을 한 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서 ‘큰 사랑’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큰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이고,

따라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다 ‘사랑의 말씀’이지만,

특히 다음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1-42)”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도 사랑이고,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고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신 것도 사랑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르 14,21).”

이 말씀은 당신의 제자가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인데,

안타까워하시는 그 심정이 곧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에서 다윗 왕의 눈물이 연상됩니다.

다윗 왕의 아들 압살롬은 다른 왕자를 죽인 살인자였고(2사무 13,28-29),

반란을 일으켜서 왕국을 분열시킨 반역자였고(2사무 15장),

아버지 다윗 왕의 후궁들을 범한 패륜아였습니다(2사무 16,22).

그런데도 압살롬이 죽었을 때, 다윗 왕은 몹시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 임금은 부르르 떨며 성문 위 누각으로 올라가 울었다. 그는 올라가면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다(2사무 19,1).”

“임금은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며 울부짖었다(2사무 19,5).”

다윗 왕의 통곡에는

인간적인 부성애(父性愛)보다 더한 안타까움이 들어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아들 압살롬이 회개하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회개하지 않았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다윗 왕은 아들의 영혼이 멸망의 길로 간 것 때문에 그렇게 통곡했을 것입니다.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심정이 바로 그런 심정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도 예수님의 사랑을 잘 나타냅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15,4-7).”

목자가 잃은 양을 되찾고 크게 기뻐하는 것은,

그 양을 잃었을 때 크게 슬퍼했음을 뜻합니다.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간다는 말은 바로 그 ‘큰 슬픔’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의인 아흔아홉이 주는 기쁨보다 죄인 한 사람 때문에 생긴 슬픔이 더 크다.”

라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큰 슬픔’이 곧 사랑입니다.

(만일에 아흔아홉이 주는 기쁨에 만족하고서, 잃어버린 하나를 매몰차게

포기해 버린다면? 그것은 사랑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히브 5,7).”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살려달라고 탄원을 올리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죄 속에서 멸망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내가’ 죄를 지으면 크게 슬퍼하시는 분이고,

‘내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면 크게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살기만을 바라시고, ‘내가’ 행복하기만을 바라시는 분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사랑, 헤아릴 수 없는 그 사랑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심장’은 인간의 감정과 마음의 변화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창에 찔려 피와 물을 쏟으신 예수님의 심장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무한한 사랑을 보여 줍니다(요한 15,13 참조).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예수님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를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교회는 오늘 미사 감사송에서 “심장이 찔리시어 피와 물을 쏟으시니, 거기서 교회의 성사들이 흘러나오고, 모든 이가 구세주의 열린 성심께 달려가, 끊임없이 구원의 샘물을 길어 올리나이다.” 하고 찬미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물은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은총을 말합니다. 그 피는 무한한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우리에게 주는 생명의 양식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적이면서도 무한한 가치와 능력을 지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측은지심을 복음의 여러 대목에서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한 11,35 참조). 온몸이 피땀에 젖으실 정도로 겟세마니에서 근심에 짓눌리셨습니다(루카 22,44 참조). 예루살렘의 멸망을 미리 보시며 우셨습니다(루카 19,41 참조).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인간의 지각을 뛰어 넘는 그리스도의 사랑, 심연을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을 발견하도록 권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바쳐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줄로 우리를 끌어당기시는 예수 성심께 나아가 속죄의 선물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거룩하신 그분을 응시하십시오


오늘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 성심을 특별히 생각하는 날입니다. 또한 ‘사제 성화의 날’로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 그 삶을 충직하게 사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우리 각자의 마음으로 간직하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인간적인 마음이 지배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심지어는 기도 안에서도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니 언제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뀔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소망은 있지만 그에 따르는 노력과 정성은 여전히 소홀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그 사실을 확인하느라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피는 심장에서 나온 것이고, 물은 늑막에 있던 림프샘의 액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흘러넘치도록 주시는 영원한 생명수이며, 그래서 세례성사를, 그리고 흘러나온 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먹고 마셔야 하는 성체성사의 상징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모두를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의 샘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성체성사만큼 잘 말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사실은 이미 예언된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이냐시오에 의하면 사랑의 두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은 말보다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둘째, 사랑은 받는 것보다는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당신 목숨을 십자가에 내놓음으로써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받은 것 없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신의 모두를 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것에 앞서 그분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누구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냐가 소중합니다. 우리는 분명“주님 앞에”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로마8,5. 8).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한 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 진실로 주님을 닮고자 원한다면 모든 것의 모범인 거룩하신 그분을 응시하십시오.” 


알퐁소 성인은 “예수님의 성심은 당신의 사랑을 애원하는 사람들에게 청하는 바 무엇이든 틀림없이 채워주신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말가리다 성녀도 “예수님의 성심을 열심히 공경하고 의탁하는 영혼은 구원의 항구로 안전하게 도착할 것” 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성심 안에 모든 바람을 이루시고 또한 구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오! 저는 그분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그분이 저를 사랑하고, 더 나아가 제가 그분 마음에 들고 그분의 뜻을 실천할 수 있도록”(비르지니수녀).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렐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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