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0 주간 금요일] 간음 죄(마태 5,27-32)

2018. 6. 15. 오전 6:4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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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10 주간 금요일] 간음 죄(마태 5,27-32)

 


주님께서는 엘리야에게, 하자엘과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임금으로 세우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뒤를 이를 예언자로 세우라고 하신다.(1열왕 19,9ㄱ.11-16)
그 무렵 엘리야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 9 있는 동굴에 이르러  그곳에서 밤을 지내는데,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다.
주님께서 11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12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13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4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저는 주 만군의 하느님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일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신의 계약을 저버리고  당신의 제단들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고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길을 돌려 다마스쿠스 광야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거든 하자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임금으로 세우고,
16 님시의 손자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 므홀라 출신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 5,27-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1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제1독서 (1열왕19,9ㄱ.11-16)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11~12)


열왕기 상권 19장 9~10절은 아합의 처 이제벨의 위협을 피해 호렙산 동굴에 숨어 있던 엘리야에게 하느님께서 현현하신 사실을 기록했고, 이어지는 열왕기 상권 19장 11~14절하느님께서 엘리야를 향해 '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신 사실을 기록한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엘리야에게 밖으로 나가서 '주님 앞에 산위에 서라'고 명령하신다. 여기서 '서라'에 해당하는 '웨아마드타'(weamadtha)'서다'(신명4,10)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마드'(amad)의 기본형 완료 2인칭 남성 단수형에  접속사 '와우'(wau)가 결합된 형태로 '그리고 너는 서라'라는 뜻이다.

그리고 '앞에'에 해당하는 '리프네'(lipne)'얼굴'을 뜻하는 '파님'(panim)연계형에 전치사 '레'(le)가 결합된 형태로 '~면전에' '~앞에'라는 뜻을 가진다.


그런데 여기서 동사 '아마드'(amad)가 '주님 앞에 서다'라는 표현으로 사용될 때에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로, 창세기 18장 22절신명기 4장 10절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우선 중재 기도의 자세를 나타낼 때 사용된다.

두번째로, 신명기 19장 17절'주님 앞에 서야 한다'는 표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소송 당사자들이 주님 앞에 나아가 당시 사제들과 판관들 앞에 서는 것인데, 이것은 재판을 받기 위한 것이다.

세번째로, 사제들(에제44,15)이나 엘리야(1열왕18,15), 엘리사(2열왕3,14)와 같이 이스라엘의 몰락과 배교의 시기 동안 활동했던 주님의 종에 대해 이같은 표현이 사용될 때에는 충성과 복종과 헌신의 의미를 나타낸다.

오늘 독서의 본문은 이 중에 세번째의 의미가 강하게 드러난다.


엘리야는 이미 자신이 주님 앞에 서서 주님을 섬기는 종임을 천명했다(1열왕17,1). 그러나 이제 지칠대로 지쳐있는 엘리야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으로서 다시 일어나 당신을 향한 충성과 헌신의 자세를 보이게끔 하기 위해, 다시 당신 앞에 세우시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엘리야가 서 있을 곳을 분명히 제시했다는 점이다. '산 위'에 해당하는 '바하르'(bahar)'산'을 뜻하는 '하르'(har)전치사 '뻬(be)와 정관사 '하'(ha)가 결합된 형태로 '그 산에'라는 뜻이다.

'그 산'은 그 옛날 모세를 만나 그를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시고(탈출3장) 그에게 그 위엄을 보이셨던(탈출19,16-25) 바로 '그 산에'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세우시는 것이다. '그 산'은 바로 하느님의 산 '호렙'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지나가시는데'에 해당하는 '오베르'(ober)'지나가다'(창세15,17), '건너가다'(민수32,21) 라는 뜻을 지닌 '아바르'(abar)의 분사형이다.

여기서 분사형이 사용된 것은 주님께서 지나가시는 행위가 순간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는 지속적인 행위였음을 나타낸다.

'크고 강한 바람''지진' '불''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의 발생이 모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 동안 발생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탈출기 34장 19~23절에도 나오지만, 주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자는 그 누구라도 생명을 부지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여기에서처럼 단지 그 지나가시는 흔적만을 보이실 뿐인 것이다.


또한, 탈출기 19장 16~20절에 나오는 데로,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 그리고 '불'주님께서 현현하실 때에 일반적으로 수반되는 현상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외적 현상들 가운데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들은 하느님의 현현을 알리는 표징들이지만, 동시에 인간 편에서 보면 인간들을 멸할수도 있는 두려운 현상들이다(탈출19,21.22).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이적적 현상을 통해 찾아오시지 않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가운데서 찾아오신다. 이것은 절망에 빠져 있는 엘리야 예언자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를 조용히  돌아보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이적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을 나타냈던 엘리야는  오히려 지금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이제벨을 피해 피난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엘리야에게 주님께서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가운데에 말씀하심으로써 외적인 이적을 넘어서는 '말씀'의 중요성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끝까지 사랑하라


‘여자는 결혼할 때까지만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남자는 전혀 걱정 없이 살다가 결혼하고 나서 걱정이 생긴다’는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자기가 베푼 만큼 상대가 해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생깁니다. 상대를 통해서 덕을 보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닐진대 살다보면 그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결국 사랑한다고 혼인을 하고서도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다며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엮어진 혼인계약을 일생 동안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부부가 일심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동상이몽이 더 많게 느껴집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마음의 관심을 서로 다른 곳에 두면서 화목하고 행복하기란 불가능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하지 말라’고 강력히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잘못에서 벗어나기를 강조하시며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네 오른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버려라”하고 단호한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더 사랑해야 할 것은 덜 사랑하고, 덜 사랑해도 될 것을 더 사랑한다면 사랑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에게 마음을 두어야지 다른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기대한다면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속이 지옥이면 멀쩡하게 잘 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죄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이혼은 갑자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 또 참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고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빌미를 줄 수 있는 마음단속을 미리 잘해야 합니다. 원인제공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동상이몽’이라는 말은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이혼의 전조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마음이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이혼을 금지하는 것은 결국 가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지켜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통해 후손을 이어가야 합니다. 사실 후손의 번성은 하느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쉽게 이혼을 생각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가정이 불행해지고 자녀 또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제발, 이혼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의 신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신뢰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자주 해야 합니다. ‘구지 말을 해야 알아듣느냐?’하는 분도 있지만‘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힘내라, 수고했다’는 등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말을 자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읽힙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고와 땀 없이 좋은 열매를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원하는 만큼 서로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이 만남을 통해 부족함을 채워주고 좋은 점을 키워가며 닮아가고 만들어 가는 것이지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기대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하며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서두르지 말 것이며 충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또한 부모도 삶의 경륜 안에서 얻어진 가르침을 자녀에게 잘 전해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함께 살아가야 할 배우자를 선택하면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성격이나, 경제적인 능력도 중요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사람인가? 허물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채워줄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가를 봤으면 합니다.

준비가 소홀하면 그만큼 힘겨워합니다. 그러므로 준비된 희생을 감당하는 사랑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서로에게 덕을 보려고 하지 말고 서로에게 복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극기하여라.>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 5,27-30).”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고 말씀하셨는데,

마태오복음 5장-7장에 있는 ‘산상 설교’를,

율법 실천을 완성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계명들을 재해석하신 말씀들은(마태 5,21-48),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서 그 방법을 알려 주신 가르침들입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면,

십계명 제5계명, “사람을 죽이지 마라.” 라는 계명을 지킨 것으로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큰 상처를 주는 분노와 모욕도

살인죄라고 가르치십니다(마태 5,21-22).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입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간음을 한 것이 아니라면,

십계명 제6계명, “간음하지 마라.” 라는 계명을 지킨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에 음욕을 품은 일 자체가

간음죄라고 가르치십니다(마태 5,27-28).

사람들은 맹세를 했다면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하지 마라.” 라고 가르치십니다(마태 5,33-34).

사람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복수하는 것”과

또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복수하지 마라.”,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고

가르치십니다(마태 5,38-48).


(십계명 제7계명, “도둑질을 하지 마라.”, 제10계명,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라는 계명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해서 재해석할 수 있습니다.

뇌물과 촌지를 주고받는 것, 사치, 과소비, 낭비 등은 모두 십계명 위반입니다.

“내 돈을 내가 쓰는 것이 왜 죄가 되는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사랑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죄가 되고,

그리고 ‘내 돈’이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또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라는 말씀은,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철저하게 극기하고 절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우리를 죄짓게 하는 것은 눈과 손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

따라서 잘라 버릴 것은 눈과 손이 아니라 ‘마음’인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나를 죄짓게 하는 ‘마음’을 잘라 버릴 수 있을까?


우리는 다음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마태 14,28-30).”

이 이야기를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거센 바람’은 저항하기 어려운 거센 유혹으로,

베드로 사도가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한 일은,

그 유혹에 넘어갈 위험에 처한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라고 주님께 간청하는 것은,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즉 우리를 죄짓게 하는 ‘마음’을 잘라 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자기의 마음을 잘라 버리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사탄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 하와의 ‘마음’은 금방 그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창세 3,6).”

이 말은, 선악과의 모습을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의 ‘마음’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만일에 그때 하와가 “저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하느님을 불렀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을까?

(사탄이 유혹하는 말을 할 때 안 들으려고 귀를 막거나,

아니면 선악과를 안 보려고 눈을 감거나, 그것을 따지 않으려고 손을 묶는 것이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이미 ‘마음’이 넘어가 버렸으니, 유일한 해결 방법은 하느님을 찾는 것뿐입니다.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분께 따로,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8-29)”

이 말씀은, 원래는 마귀를 쫓아내는 방법에 관한 말씀이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온갖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유혹이 사탄에게서 오든지, 세속에서 오든지, 마음속의 욕망에서 오든지 간에...)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일에도 사탄의 유혹이 작용했습니다(루카 22,3).

만일에 그때 유다가 예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도와달라고 간청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유혹은 늘 우리 영혼의 성문 앞에 와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무방비 상태로 그 문을 열어 주는 일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은 금방 ‘유혹’에게 점령당합니다.

반대로, 평소에 꾸준히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서

영혼의 성문을 잘 지키는 것이고, 영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받는 일이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엘리야는 하느님의 산 호렙 동굴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는 주님 앞에 머물면서 외면적으로 광풍과 지진의 모습으로 하느님을 만나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만난 하느님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입니다. 죽음의 위협에 놓인 한 예언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순수함을 강조하십니다. 음욕을 품는 것 자체로 죄를 짓는다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깨끗하고 순수하여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강인함과 결단력을 요구하십니다. 눈을 하나 빼어 던져서라도, 손을 잘라서라도 하늘 나라에 들어갈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죄악을 끊어 내는 아픔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욕망의 수렁에 빠져 들어가면 나오기가 힘들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지체를 잘라 내서라도 하느님께 가려는 결심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오늘의 화답송은 이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성에 민감한 세대, 대중 매체가 전파하는 성에 노출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많은 유혹과 혼란을 경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유혹이 행동에 이르지 않도록 단절시키는 지혜가 더 요청됩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치유가 더 필요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구원자이신 주님의 반석과 산성에 숨는 영혼이 되어야 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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