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0주간 토요일]맹세 (마태 5,33-37)

2018. 6. 16. 오전 6:45:50

글자


 


[연중 제10주간 토요일]맹세 (마태 5,33-37)




엘리야 예언자가 밭을 갈던 엘리사에게 자기 겉옷을 걸쳐 주자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나선다. (1열왕 19,19-21)
그 무렵 엘리야는 산에서 내려와 19 길을 가다가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열두 번째 겨릿소는 그 자신이 부리고 있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20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그냥 두고 엘리야에게 달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다녀오너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
21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며,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라고 하신다. (마태 5,33-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제1독서(1열왕19,19~21)

 

엘리야는 그곳을 떠나 길을 가다가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열두 번째 겨릿소는 그 자신이 부리고 있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19)


아합의 처 이제벨을 피하여 무기력하게 숨어 있던 엘리야를 찾아오신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세 가지 사명을 부여해 주신다(1열왕19,9~18; 19,15~16). 

그리고 오늘 독서 열왕기 상권 19장 19~21절에서는 엘리야가 세 가지 사명 가운데 엘리사를 제자로 부르는 일을 수행한 사실을 보도한다.


엘리야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즉시 호렙산을 떠나 엘리사를 만나러 갔다. 열왕기 상권 17장 19절에 나오는 '엘리야는~떠나'에 해당하는 '와이예레크'(waiellek)'만났다'에 해당하는 '와이므차'(waimtsa)에  모두 행동이 즉시 이어짐을 보여주는 '와우'(wau) 계속법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새로이 사명을 부여받은 후다시 이전과 같이 하느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한편, 엘리야가 엘리사를 찾아갔을 때 엘리사는 열두 쌍의 소겨리를 지워 밭을 가는 중이었다. 여기서 '겨릿소를'에 해당하는 '체마딤'(tsemadim; yoke of oxen)기본적으로 '두 개를 하나로 묶은 한 쌍'(이사21,7)을 의미하는  '체메르'(tsemer) 복수형으로서, 여기서는 한 멍에를 나란히 멘 한 쌍의 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열 두 겨릿소'는 곧 24마리의 소를 말한다. 

그런데 당시 24마리의 소를 이끌고 밭을 갈았다는 것은 엘리사가 상당한 부잣집 자제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그에게'로 번역된 '엘라이우'(ellaiu)'~에게','~곁에'라는 뜻의 전치사 '엘'(el)3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개신교 성경은 '그의 위에'로 번역하여 마치 엘리야가 그의 겉옷을  엘리사의 몸이나 머리 위로 던진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데, 그런 뜻이 아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겉옷'이 그 사람의 직무를 나타내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진 것이었다. 

따라서, 엘리야가 그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진 행위는 자신의 뒤를 이어 예언자 직무를 대신하고 계승하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사도 엘리야의 행동에 담겨진 그런 의미를 제대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엘리사 역시 그러한 엘리야의 행동에 대하여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1열왕19,20.21절).

 

오늘 독서의 말씀에서 보면, 엘리사는 부모와 작별인사를 하고, 제사도 지내고,  집안 사람들과 잔치를 한 뒤 엘리야의 뒤를 따랐다(1열왕19,20~21).
그러나 루카 복음 9장 6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되고자 하는 자에게 가족과의 작별 인사마저 허락하시지 않으면서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구약과 신약은 이렇게 차이가 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긴박성, 복음 선포와 영혼 구령의 중요성, 때가 얼마 남지 않을 만큼 긴박한 구원의 문제앞에 온전한 회개와 온전한 추종을 가르치는 것이라 여겨진다.



 



 <혹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맹세 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권고를 묵상하면서 같이 살았던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 녀석들 저한테 거짓 약속 엄청 많이 했거든요.

 신부님, 이번 한번만 도와주세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고 맹세합니다.”

“신부님, 나중에 내가 어른 되면 돈 많이 벌어서 1년간 외국 여행 시켜줄게요. 왜요? 거짓말인줄 알고? 두고 보세요.” 

그런 아이들 못지않게 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간 아이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많았는데, 이런 별명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양뻥’ ‘양구라’ ‘깡냉이’...

 

원인이야 이렇습니다. ‘주말에 같이 놀러가요’ ‘영화 하나 보여줘요’ ‘한 잔 사주는 거죠?’ ‘생일선물로 반지 사주기로 약속한 것 안 잊었지요?’ 등등의 조금은 일방적이고도 무리한 아이들의 요구 앞에서 늘 갈등을 하게 됩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면 애당초 안 된다고 하면 될 텐데, 마음이 약해서, 그리고 때로 건성으로, 그래 약속, 그럼 그러지, 하고 쉽게 약속해서, 나중에 아이들 실망하게 하고, 삐치게 만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돌아보니 이웃들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종신서원 때 잔뜩 긴장해서, 그러면서도 폼은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아가면서, 하느님께 약속드렸지요.

“저의 형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장 신부님 앞에서, 살레시오회의 회헌에 명시된 복음적 길을 따라 평생토록 순명, 청빈, 정결을 살도록 서원하나이다.”





매년 연례피정 끝에 서원을 갱신할 때 마다 가장 먼저 드는 느낌은 하느님 앞에 송구스러움입니다. 형제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총장 신부님 앞에서 발했던 순명, 청빈 정결 서원을 오늘 나는 과연 어떻게 지켜나가고 있는지 돌아보면 한심할 뿐입니다.


제 사제 서품 상본에 적은 내용이 또 떠오르는군요. 사제 서품 상본에는 한 평생 사제로 살아가면서 삼을 모토를 적게 되지요. 돈보스코의 아들이니만큼 당연히 돈보스코의 좌우명을 그대로 따라 적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청소년) 위하여 공부하고,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여, 여러분을 위하여 살고, 여러분을 위하여 나의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점점 더 부끄러워지는군요. ‘차라리 그런 심각한 서약을 하지나 말던지. 더 심사숙고해서 서원을 했어야지, 상본에다가는 어느 정도 적당한, 지킬만한 글귀를 적었어야지’ 하는 후회가 됩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한계, 나약함, 지속적이지 못한 속성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인간의 언약, 인간의 약속, 인간끼리의 계약은 근본적으로 미덥지 못한 것입니다. 유한합니다. 세월의 흐름 앞에 허물어지기 마련입니다.


불과 몇 십 년 세월 안에 생생히 체험한 일입니다. 한때 목숨까지 걸었던 이상적인 가치관들, 생사를 함께 하자던 동지들, 함께 설계했던 장밋빛 미래...세월과 더불어 많이 퇴색되어갔습니다. 다들 떠나갔습니다. 신기루처럼 사라져만 갔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있어 부담되는 언약, 지키지 못할 서약, 항구하게 지속되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기보다는 이렇게 말해야겠지요.

“혹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제가 노력해보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부족해서 어쩔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하느님의 절대 진실을 드러내는 삶

우리는 과거의 일이나 자기 행동에 신뢰를 주기 위해서나 미래의
약속에 대해 맹세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가문, 학교,
국가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하느님 앞에 맹세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식민 통치를 하는 황제나 군주들은 맹세를
강요하기도 했지요. 아무튼 맹세는 자기 합리화나 사익의 추구, 지배와
불의를 위해 악용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구약성경은 맹세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레위 19,12)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신명 23,22. 24; 민수 30,3)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한다.”(신명 6,13; 10,20)
“맹세를 어기면 죄악이 그와 함께 머물고 분별없이 맹세를 하면 죄가
갑절로 무거워지리라.”(집회 23,11)

맹세에 관한 구약의 말씀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것이고, 헛맹세와 거짓 증언도 금지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
증언과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다르고, 맹세하면서
거짓말까지 할 수도 있었지요. 그 결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기 위해서 피조물의 이름으로 맹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그런 관례를 비판하시며, 율법을
완성하시려고 맹세에 관한 새로운 행동강령을 제시하십니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예루살렘을
두고도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4-37)

한마디로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단순히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과 함께
살아간다면 맹세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굳이 하느님의 이름을
들어 자기 발설을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있음 그 자체로 하느님을 드러내는 절대 진실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절대 진실’이란 무엇일까요? 하느님과 함께 있어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 절대 진실입니다. 하느님은 진리이시며, 모든 진리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내고 주장하는 상대적 진실이 아니라 영원히
변함없는 참 진리가 절대 진실입니다. 아예 맹세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이신 하느님 안에 머무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 안에 머물며 생명을 위하여
투신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받기보다는 내어주고,
자기 것으로 삼기보다는 기꺼이 되돌리고 공유하는 사랑을 사는 것이
진실입니다. 불평등에 맞서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것이
진실입니다. 우리는 그런 진실을 말하고 그런 진실을 살아내야겠지요.
하느님에게서 비롯되고 하느님을 향하는 진실은 맹세나 보증과 같은
치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진실을 말하고 살아냄으로써 절대 진실이신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가짜 뉴스와 거짓이 차고 넘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절대 진실을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자문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진실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나의 삶은 과연 절대 진실이신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아울러 교회도 폭력과 노동인권의 부당한 침해, 각종 비리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며, 진실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랍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아예 맹세하지 마라!!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자, 엘리사는 자신의 일생을 스승에게 맡기고 길을 따라 나섭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을 부드러운 소리 가운데 만난 뒤 하느님으로부터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후계자로 삼으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하느님께 오롯한 사랑을 바친 엘리야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진실한 제자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두고, 그리고 어떤 대상을 두고 맹세하지 말도록 당부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은 그릇된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이나 계획을 미리 계산하고 하는 맹세는 진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하는 진실한 맹세 외에 다른 모든 약속은 헛된 것입니다.
허상을 두고 하는 맹세는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서약은 진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세례 받을 때 하느님 앞에 믿음을 고백하며 서약합니다. 수도자와 성직자들도 자신을 봉헌하며 자신이 맡은 직분에 충실할 것을 서약합니다.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 됩니다.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자유로워지고 빛을 받습니다. 그 사람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덕은 겸손의 덕입니다. 교만은 자신을 높이고 가식을 담기 때문에 그릇된 맹세를 하게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진실에 대해 변명하거나 방어하지 않습니다. 진실하신 하느님께서 그의 증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