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동태복수법 (마태 5,38- 42)
아합 임금은 아내 이제벨의 간계로 이즈르엘 사람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밭을 차지한다.(1열왕 21,1ㄴ-16)
그때에 1 이즈르엘 사람 나봇이 이즈르엘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포도밭은 사마리아 임금 아합의 궁 곁에 있었다.
2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포도밭을 나에게 넘겨주게. 그 포도밭이 나의 궁전 곁에 있으니, 그것을 내 정원으로 삼았으면 하네. 그 대신 그대에게는 더 좋은 포도밭을 주지. 그대가 원한다면 그 값을 돈으로 셈하여 줄 수도 있네.”
3 그러자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제가 제 조상들에게서 받은 상속 재산을 임금님께 넘겨 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4 아합은 이즈르엘 사람 나봇이 자기에게, “제 조상님들의 상속 재산을 넘겨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한 말에 속이 상하고 화가 나서 궁전으로 돌아갔다. 아합은 자리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음식을 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5 그의 아내 이제벨이 들어와서 물었다. “무슨 일로 그렇게 속이 상하시어 음식조차 들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6 임금이 아내에게 말하였다. “실은 내가 이즈르엘 사람 나봇에게 ‘그대의 포도밭을 돈을 받고 주게.
원한다면 그 포도밭 대신 다른 포도밭을 줄 수도 있네.’ 하였소. 그런데 그자가 ‘저는 포도밭을 임금님께 넘겨 드릴 수 없습니다.’ 하고 거절하는 것이오.”
7 그러자 그의 아내 이제벨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에 왕권을 행사하시는 분은 바로 당신이십니다. 일어나 음식을 드시고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제가 이즈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밭을 당신께 넘겨 드리겠습니다.”
8 그 여자는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그의 인장으로 봉인하고, 그 편지를 나봇이 사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냈다.
9 이제벨은 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단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의 첫자리에 앉히시오.
10 그런 다음, 불량배 두 사람을 그 맞은쪽에 앉히고 나봇에게, ‘너는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다.’ 하며 그를 고발하게 하시오. 그러고 나서 그를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이시오.”
11 그 성읍 사람들, 곧 나봇이 사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은 이제벨이 보낸 전갈 그대로, 그 여자가 편지에 써 보낸 그대로 하였다.
12 그들이 단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의 첫자리에 앉히자,
13 불량배 두 사람이 들어와서 그 맞은쪽에 앉았다. 불량배들은 나봇을 두고 백성에게, “나봇은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습니다.” 하고 말하며 그를 고발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나봇을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인 다음,
14 이제벨에게 사람을 보내어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고 전하였다.
15 이제벨은 나봇이 돌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합 임금에게 말하였다. “일어나셔서, 이즈르엘 사람 나봇이 돈을 받고 넘겨주기를 거절하던 그 포도밭을 차지하십시오. 나봇은 살아 있지 않습니다. 죽었습니다.”
16 나봇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아합은 일어나, 이즈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곳으로 내려갔다.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말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신다.(마태 5,38-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제1독서(1열왕21,1ㄴ~16)
그때에 이즈라엘 사람 나봇이 이즈르엘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포도밭은 사마리아 임금 아합의 궁 곁에 있었다.(1)
열왕기 상권 20장에서는 아람 임금 벤 하닷이 이끌고 온 대군을 맞이하여 북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두 번이나 놀라운 승리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북부 이스라엘 왕 아합이 하느님의 말씀을 거슬러 벤 하닷을 자기 마음대로 살려 주었음과, 그로 말미암아 아합이 익명의 한 예언자로부터 하느님의 심판 신탁을 듣게 되었음을 기술하였다.
즉 외국과의 전쟁이라는 대외적 행적에 있어서 아합의 불신앙적 면모를 드러낸 것이다.
이어지는 21장에서는 20장과 대조적으로 대내적 통치에 있어서, 아합 왕의 불순종에 초점을 맞추어 아합 왕의 악정과 그로 인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여 주는 일례로, 아합의 나봇 포도밭 탈취사건을 중심으로 일련의 기사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열왕기 상권 21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전반부 1~16절은 아합이 이제벨의 악한 계교를 따라 나봇의 포도밭을 탈취한 사건의 기록이며, 후반부 17~29절은 이러한 악행을 저지른 아합과 이제벨을 향해 엘리야 예언자의 심판 경고가 주어지고, 이에 아합 왕이 회개하여 겸손한 모습을 보인 사실을 보도한다.
'그 때에 이즈르엘 사람 나봇이 이즈르엘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매일 미사 책은 '그 때에'로 말씀이 시작되지만, 새 성경은 '그 뒤에 일어난 일이다' 라고 시작한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이다'에 해당하는 원문은 '아하르'(ahar; after) 이다.
본문의 '그 뒤에'(그 후에)는 앞선 20장에 기록된 내용, 즉 '벤 하닷과의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를 체험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 벤 하닷을 살려줌으로써 심판 신탁을 들은 뒤에(후에)'라는 의미이다.
이러현 표현은 열왕기 상권 21장의 기사를 20장의 후반부와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면서 아합의 죄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합 왕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주권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또한 하느님의 심판 신탁을 들음으로써 자신의 모든 행위를 하느님께서 낱낱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같은 일들을 체험했던 아합은 마땅히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느님의 율법에 따라 이스라엘을 다스려 나가는 반응을 보였어야 했다. 그러나 아합은 하느님의 율법과는 애당초부터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끝까지 그러했다.
아합은 이전에 아람과의 전쟁에서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성전(聖戰)에서의 승리를 자기 승리로 착각하고 임의로 행동한 것처럼, 열왕기 상권 21장에서도 하느님의 율법에 절대적으로 양도나 매도, 착취가 불가능한 것으로 규정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속 (기업)으로 허락된 땅에 대한 규례(레위25,23)를 어기고 죄악된 방법으로 이를 취하고 만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25,23)
아합의 행동은 신정(神政)왕국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이신 하느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일뿐 아니라 고대 근동의 이방 군주들처럼 왕의 사유지 증대를 통하여 왕의 힘을 강화시켜 전제주의적 왕권을 지향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행해진 사악한 범죄였다.
그리고 이러한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아합은 결국 거짓 증인을 내세워 나봇을 죄인으로 몰아 죽이는 파렴치하고 흉악한 죄악을 저지른다.
열왕기 상권 21장 1절에서 '포도밭'에 해당하는 '케렘'(kerem)은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을 나타낼 정도로(이사5,7; 예레12,10)팔레스티나에 정착한 이스라엘의 전통적이고도 주요한 산업 기반이었다.
이와 관련해 신명기 20장 6절에서는 포도밭을 만들고서도 그 첫 수확을 보지 못한 자들에게는 병역의 의무를 면제하라는 규정이 기술되어 있는데, 이것은 수고한 댓가를 단 한번도 누리지 못하고 죽는 불행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팔레스티나에서 포도밭이 갖는 경제적 비중과 그 대표성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본문에서 포도밭의 소유주로 소개되는 '나봇'(Naboth)이라는 사람의 이름은 '열매들'이라는 의미로 '싹트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하였다. 포도를 기르는 것을 업으로 하는 농부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이러한 이름은 아마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생업에 충실하였던 그의 아버지가 많은 수확을 기대하며 붙여준 이름이었을 것이다.
또한 본문에는 '이즈르엘'(yzreel)이라는 지명이 두 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한 번은 포도밭의 소유자인 나봇의 출신지를 밝히기 위해서이며, 다른 한 번은 포도밭의 소재를 밝히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결국 나봇이 자신이 거주하는 그 곳에 자신의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한편으로는 나봇이 그의 조상의 대를 이어 이 포도밭을 경작하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나봇이 조상으로부터 이 포도밭을 물려받은 정당한 소유자임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즈르엘'은 '하느님이 뿌리시다' 라는 의미로서 부근에는 수량이 풍부한 샘이 었었고 그 이름이 암시하는 것처럼 비옥한 땅이었다.
이처럼 본문에서 소개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생업의 기반이요 상징인 '포도밭', 소박하면서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기업에 충성스럽다는 것과 연결된 '나봇' 이라는 의미,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을 암시하는 '이즈르엘'과 같은 소재들은 하나같이 목가적 이미지와 연결되어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평안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로움은 열왕기 상권 21장에 기술된 아합과 이제벨 부부의 과도한 욕심과 비열한 음모, 협작에 의해서 산산조각 나고 만다.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복음(마태5,38~42)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38~41)
마태오 복음 5장 38절에서 구약의 형법 규정(탈출21,24; 신명19,21; 레위24,20)과 고대 형법의 근간을 이루었던 '동태복수법'(lex talionis)의 내용이 소개된다.
하느님께서 주신 절대 불변의 율법이며, 고대 세계에 널리 통용되던 정의 구현의 보루라고 생각되었던, 악(惡)을 행한 자에 대하여 동일하게 보복을 가하여 징계하는 '동태복수법'을 예수님께서는 새롭게 해석해 주신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에서 '맞서지'로 번역한 '안티스테나이'(antistenai; resist)의 원형 '안티스테미'(anthistemi)는 '반대하다', '대신하다'는 뜻이 있는 전치사 '안티'(anti)와 '두다', '세우다' 등의 뜻이 있는 '히스테미'(histemi)의 합성어로서 '~에 대항하여 일어서다'는 뜻을 지닌다.
여기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복수와 더불어 법정에서의 공방까지 가리킨다. 그리고 '악인'으로 번역된 '포네로'(ponero; evil person)의 원형 '포네로스'(poneros)는 마태오 복음 5장 37절에서 '악'으로 번역된 단어와 같은 단어로서 '악을 행하는 자', '비열한 자'라는 뜻이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자신에 대해 위해를 가하는 비열한 상태에 대해 그 어떠한 복수도 삼가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피해자가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피해 보상의 권리를 포기하라는 교훈으로서 '동태복수법'을 절대 진리로 알고 있었던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5장 29절에서 '치다'로 번역된 '라피조'(rapizo; strike; smite)는 막대기로 '때리다'(마태26,67)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비록 손으로 때리는 것이지만, 큰 고통을 줄 만큼 매우 세게 쳤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손으로 뺨을 때리는 것은 매우 모욕적인 일이었다.
특히 히브리인들은 오른손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오른뺨을 때렸다는 것은 정면에서 손등으로 치거나 뒤에서 손바닥으로 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유대 풍습에서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보다 두 배나 모욕을 주는 것이다. 또한 등 뒤에서 때린다는 것은 상대방이 모르게 불의의 공격을 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럴 경우 다른 뺨도 돌려 대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실제로 왼쪽 뺨까지 때리도록 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 어떤 경우에도 직접적으로 복수하지 말고 고통과 모욕을 견디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어떤 문제에 직접 대응함으로써 복수가 악순환되는 것을 막고, 오히려 상대방을 너그럽게 대하는 관용과 무저항으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5장 40절의 '너를 재판에 걸어'에서 '재판에 걸다', '송사하다'로 번역되는 '크리노'(krino; sue at the law)는 '재판하다'는 뜻도 있고, '비난하다', '헐뜯다'는 뜻도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반드시 재판을 염두에 둔 상황이라고 볼 필요가 없다. 이 구절은 재산상의 분쟁이나 강도를 당한 상황에서 속옷까지 가지려는 상대에 대하여 저항하지 말고 오히려 애덕을 베풀라는 뜻이다.
그 당시 속옷은 겉옷보다 가격이 싸고 보잘 것없는 가치를 지닌 것이다. 반면에 겉옷은 가격도 비싸고, 일교차가 심한 팔레스티나에서 밤에 덮고 자야 하는 필수품이기에 전당잡힐 수조차 없는 품목이었다(탈출22,26; 신명24,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더 비싸고, 없으면 당장 추위에 떨어야 하는 겉옷까지 아무 저항없이 양도하라는 것은 무조건적인 자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마태오 복음 5장 41절에서 '억지로 ~가게 하거든', '가자고 강요하거든'로 번역된 '앙가류세이'(anggareusei; force~to go; compel~ to go)는 페르시아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강제로 봉사하게 하다'는 뜻을 지닌다.
즉 페르시아 국왕이 조서를 전달할 때 사람들을 징발하여 짐을 지게 만들거나 문서를 전달하게 한 것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로마에서는 이러한 양민 징발 규정이 적용되었고, 로마의 식민지 유다에서도 시행되었다. 마태오 복음 27장 32절에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을 보고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천 걸음'에 해당하는 '밀리온 헨'(milion hen; one mile), 즉 '오리'를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기꺼이 '오리'를 더 동행해 주는 너그러움을 가지라는 말씀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오늘 말씀은 상대방에게 호의를 보여야 할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그것을 묵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의견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박할 생각을 하며 심지어는 골탕을 먹일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는 ‘넉넉한 마음으로 품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냉정’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네가 그런 식으로 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협박하기도 합니다. '끼리끼리'도 있고 소위 '줄서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고 하십니다. 천 걸음을 걷기도 힘들거늘 이천 걸음을 걸어야 하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시니 그저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정말 이렇게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하라고 하시니 이유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 친히 갖은 조롱과 모욕을 안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으니 오늘도 여전히 그 방법이 유효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철저히 허약함을 선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만납니다. 십자고상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입은 상처는 상처로 되갚을 때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운 사랑으로 흡수될 때 그 악은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악이 스스로 설 자리를 잃을 때까지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모 기업회장이 폭행을 당한 아들의 분노를 폭력으로 되갚으려 했다가 더 큰 원한을 키웠고, 그로 말미암아 물적인 손해뿐 아니라 동안에 쌓아놓은 명예는 물론 물질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의 고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야 위로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폭력으로는 결코 악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해 주었습니다. 그 아들이 또 마약에 손을 대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자식사랑도 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사랑은 상처만 낳게 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맞서려거든 사랑으로 맞서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 사랑으로 대결하십시오. 사랑은 악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불의를 크게 앙갚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겁이 나서, 마음이 약해서 피한다면, 심지어는 상대방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기 싫어서 맞서지 않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차원 높아져야 합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악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마음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에 굴복 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21).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넓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양억라파엘신부
아합 임금은 나봇의 포도밭을 탐합니다. 이제벨 왕비는 나봇을 모함하여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합니다. 나봇의 탄원은 정의로우신 하느님께 도달합니다. 나쁜 짓을 하는 자와 거짓을 말하는 자를 역겨워하시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징벌을 내리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권력자의 오만함과 불의를 결코 용인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수의 악순환을 끊고 관대한 사람이 되도록 권고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오른뺨을 치는 사람에게 다른 뺨마저 돌려 대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정의로우신 분인데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맞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불의에 대항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성전의 장사꾼들에게 채찍을 휘두르시며 성전의 거룩함을 수호하시고,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사제 한나스의 심문을 받으실 때, 경비병 하나가 당신의 뺨을 치자 그의 무례함과 불법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를 지적하시고 악에 대항하셨습니다. 그러나 폭력의 악순환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진정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사랑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평화가 복수와 폭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으로 이루어짐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저주와 모욕은 사랑의 불꽃으로 사라집니다. 악의 힘보다 선한 힘이 세고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정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용서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