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기도 (마태 6,7-15)

2018. 6. 21. 오전 7:01:50

글자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기도 (마태 6,7-15)


집회서의 저자는,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으로 가득 차 살아생전에 기적들을 일으켰고, 죽어서도 그의 업적은 놀라웠다고 전한다 (집회 48,1-14)
1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2 엘리야는 그들에게 굶주림을 불러들였고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다.
3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
4 엘리야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5 당신은 죽은 자를 죽음에서 일으키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말씀에 따라 그를 저승에서 건져 냈습니다.
6 당신은 여러 임금들을 멸망으로 몰아넣고  명사들도 침상에서 멸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7 당신은 시나이 산에서 꾸지람을 듣고 호렙 산에서 징벌의 판결을 들었습니다.
8 당신은 임금들에게 기름을 부어 복수하게 하고  예언자들에게도 기름을 부어 당신의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9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10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12 엘리야가 소용돌이에 휩싸일 때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엘리사는 일생 동안 어떤 통치자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13 그에게는 어떤 일도 어렵지 않았으며 잠든 후에도 그의 주검은 예언을 하였다.
14 살아생전에 엘리사는 기적들을 일으켰고 죽어서도 그의 업적은 놀라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며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 마태 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제1독서 (집회48,1-14)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서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엘리야는 그들에게 굶주림을 불러들였고,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  당신은 불소용돌이 속에서 불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잇습니다."(1~3. 9~10)  


집회서유다 지혜 문학의 총결산이라 한다. 이 책의 원문은 히브리어로 쓰였는데(bc180년경), 원 저자의 손자가 이를 그리스어로 옮겼고(bc130년경), 이 그리스어 본문이 현존하고 있다.

그리스어 본문의 필사본들은 대부분 이 책의 제목을 '시라의 아들 예수의 지혜' 한다. 불가타(vulgata: 라틴어성경)에서는 '에클레시아스티쿠스'(ecclesiasticus)라고 하였고,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리베르 에클레시아스티쿠스'(liber ecclesiasticus; 교회의 책)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치프리아누스 시대 이후 서방 그리스도교에서 새로 입교할 사람들을 교육할 때에, 이 책의 가르침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우리말 '집회서(集會書)'도 이 불가타와 서방 교회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오늘 독서 말씀은 하느님의 영광과 조상들의 올바른 삶을 기리는 내용중에 일부이다. 저자는 집회서 44~50장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인물들 하나하나 나열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임금, 현인, 예언자, 사제들이다.

집회서 저자는 사제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특히 아론과 대사제 오니아스의 아들 시몬에 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역사의 인물들에 대한 평은 찬미와 권고와 기도로 마무리한다(50,22~24).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48,1)

'엘리야'란 이름은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다'는 뜻이다. '불','횃불' 표상은 여기서는 '사랑' '열정' 혹은 '심판'의 의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해석한다. 

'엘리야는 그들에게 굶주림을 불러 들였고'(48,27)란 말씀은 48장 3절의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와 연결이 되어 있다. 가뭄 예언과 관련된 말씀 (1열왕17,1; 18,1~3; 1열왕 18,45참조)이다. 

하늘 문을 닫고 여는 하늘의 신, 풍요다산의 신인 바알을 숭배하던 아합왕과 이스라엘의 변절된 신앙에 대한 질타로 가뭄이 예언되고, 그 결과로 기근(굶주림)을 체험하는 것이다. 

즉 가뭄을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진짜 하늘(햇빛과 비)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또한 집회서 48장 2절(ㄴ)의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다'는 것은 카르멜산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 키손천에서 바알의 예언자 450명을 사로잡아 죽인 사건을 가리킨다(1열왕18,40).

그리고 집회서 48장 3절에 '세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는 말씀이 나온다. 이것은 열왕기 하권 1장에 아하즈야왕이 자기 옥상 방의 격자 난간에서 떨어져 다친 후, 하느님을 찾지 않고 사자들을 보내어 에크론의 신 바알 즈붑에게 가서 병의 회복에 관한 문의를 하라고 명령한 것에 대한 벌(심판)의 이야기이다. 

 

두 차례나 엘리야가 예언한대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오십인 대장과 부하 쉰 명을 삼켜버린 사건을 말한다(2열왕1,10ㄷ.12ㄷ).

이 두 번과 450명 바알 예언자들과의 카르멜산 대결에서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린 사건을 말한다(1열왕18,38).

그리고 집회서 48장 9절의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라는 말씀은 엘리야와 엘리야 영의 두 몫을 청하는 엘리사의 이별이야기에 나온다.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 두 사람을 갈라 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에 실려 올라간 사건을 말한다(2열왕2,11).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48,10)

이 구절은 말라기 3장 1절과 23절에 있는대로, 죽지 않고 산 채로 불수레를 타고 승천한 예언자가 하느님이 세상을 심판하기 직전에 다시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키고 열두 부족을 재건할 거라는 말씀이다.

엘리야는 종말 심판자이신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 메시아의 선구자(선주자)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세례자 요한에 이어 예수님이 활약하셨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요한 세례자(=엘리야)가 예수(=메시아)의 선구자(선주자)라는 입장을 취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말라3,1)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려치지 않으리라.'(말라3,23)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복음(마태6,7~15)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7~8)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에 해당하는 '메 밧탈로게세테'(me battalogesete; do not keep on babbling; do not use vain repetitions)에서 '빈말을 되풀이하다'로 번역된 '밧탈로게세테'(battalogesete)원형 '밧톨로게오'(battologeo)'말을 많이 하다', '생각없이 말하다', '쓸데없이 말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기도는 카르멜 산에서 바알의 예언자들이 했던 기도나(1열왕18,26), 에페소에서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외쳐댔던 아르테미스 숭배자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사도19,34). 

또한 하느님을 대상으로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기도를 반복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믿는 이들 가운데서도 은총의 지위를 상실하고 죄중에 기도하거나, 하느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기도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이들이 때로는 눈물로 애원하고, 때로는 논리적으로 하느님을 설득하는 조로 미사여구를 늘어 놓으며 장황하게 기도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하느님 앞에 아무 의미없는 말들을 많이 쏟아내는 것에 불과하며, 이런 기도는 하느님 대전에 올라갈 수가 없다. 

마태오 복음 6장 8절'알고 계신다'에 해당하는 '오이덴'(oiden; knows)완료형이다. 

희랍어에서 완료형은 말하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이미 동작은 끝났지만, 동작의 결과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여기서도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이미 기도하는 이의 형편을 과거로부터 알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우주의 삼라만상과 인류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당신께서 직접 창조하신 피조물이며, 당신께서 선택한 자녀의 청원 내용을 모르실 리가 없다. 

따라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적인 기도가 아니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진실한 기도라면 반드시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라고 하더라도, 그 기도의 응답이 늦어질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때와 사람의 때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가장 적절하게 응답해 주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기도>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7-8).”


여기서 ‘다른 민족 사람들’은 미신을 믿는 사람들,

또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우리는 미신을 믿는 사람들도 간절한 심정으로,

정성을 다 쏟아서 기도할 때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섬기는 ‘그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고, 듣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에게 바치는 기도는 아무 의미 없는 ‘빈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정성을 다 쏟아서 기도하고, 소원을 빌어도,

빈말을 되풀이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라는 말씀은,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외적으로 거창한 무엇인가를 많이 해야만

소원이 이루어지는 줄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복채를 많이 바치거나 거액을 들여서 큰 굿을 하거나...)

“그들을 닮지 마라.” 라는 말씀은,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는 뜻이고,

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뜻이고, 생명 없는 우상들과는 달리

언제나 항상 우리 가운데에 살아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전지하신 분’이기 때문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고,

또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필요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알고 계신다.” 라는 말씀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그것을 주신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시는 것이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모르고 있다면 하느님이 아니고, 알지만 줄 능력이 없어도 하느님이 아닙니다.

알고 있고 줄 능력이 있어도 사랑이 없어서 안 준다면, 역시 하느님이 아닙니다.)


좋은 예가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마르 4,36-38).”

제자들은 죽을지도 모른다고 무서워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라는 제자들의 말에서

‘저희’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모두 포함하는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을 제외하고 자기들만을 가리키는 ‘저희’입니다.

즉 제자들의 말에는 예수님에 대한 걱정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은, 자기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무관심한 예수님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다른 배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다른 배들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상황은 어땠을까?

그들도 죽게 되었다고 두려워하면서 예수님께서 주무시는 것을 비난했을까?)


예수님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경험과 기술을 믿었기 때문에

아무 걱정 없이 주무실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무서워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렇게 편안하게 주무셨던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정말로 제자들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다면,

제자들보다 예수님께서 먼저 걱정하셨을 것이고,

그들이 청하기도 전에 먼저 어떤 조치를 취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상황을 모르셨던 것도 아니었고,

관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만일에 제자들에게 그런 믿음이 있었다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과 함께 잠을 잤거나,

아니면, 힘은 많이 들었겠지만, 그냥 노를 저어서 호수를 건너갔을 것입니다.

(성령 강림 후에 제자들은 바로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면서 비난했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믿음의 사도들로 변화되었습니다.)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라는 말씀은,

청하지 않아도 된다, 또는 청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기도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계시는 하느님께

그것을 알려 드리는 일이 아니라,

우리보다 먼저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것을

 받기 위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을 때가 많고,

잘못된 것을 청하면서도 잘못된 것을 청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함으로써 하느님 뜻을 깨닫게 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게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기도를 어떤 식으로 하란 말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아플 때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힘들 때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일의 결과나 어떤 방식으로 도움을 주실 것인지는

예수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시기와 방식과 결과를 고집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는 주님께 자비를 청하는 일이지 명령하듯이 강요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기도를 한 다음에는 원하는 대로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실망하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시기에, 더 좋은 방식으로,

우리가 청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송영진 모세 신부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이며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입니다. 하느님과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은 신앙인으로서 존재 이유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화라는 것이 쉽게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씀드리고,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어야 하는지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대화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겠지만, 진정한 대화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도 애정이 있고, 신뢰와 상호 이해가 있으면
아이들이 참새처럼 지저귑니다. 서로가 말이나 행동으로 자신들의
기쁨을 표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족들 사이에 신뢰가 없고,
미움이나 불화가 있다면, 서로 각자의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립니다.
무엇을 어떻게 얘기할까 고민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기 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그분과
대화할 필요도 못 느끼고 그 대화의 의미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신뢰하는 마음으로 대화하다 보면,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동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갖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야 기쁠
때뿐만 아니라, 어려움과 고통 중에 있을 때에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할 수 있습니다. 병자는 아버지께 건강을 주시라고
기도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그에게 인내의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주시라고 기도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보내 주십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거룩하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시며,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먼저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는 자녀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됩니다. 우리를 초월하여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사랑으로 영으로 늘 살아계시지요. 하느님은 온갖 사랑과 온유를 전해주시는 매우 친근한 ‘아빠’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아빠’라 부르도록 해주신 것 자체가 헤아릴 수 없는 자비이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그분 친히 우리에 대한 사랑과 용서, 관용, 양육의 의무를 져 주십니다.

그러니 그보다 더 큰 은총이 있을까요?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며 깊은 감사를 드리며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더욱 더 사랑해야겠지요.

우리의 ‘아빠’는 하늘에 계십니다. 이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하늘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위적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 선(善)과 영원한 사랑이 있는 영원의 시간과 존재의 자리입니다.

'하늘’은 영원한 생명과 기쁨이 우러나오는 샘입니다. 하늘은 현세의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와 자비가 넘치는 하느님의 정원입니다. 내 영혼과 이 세상을 그런 정원으로 바꿔가야겠지요.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자녀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바라고 청할 것은 아버지이지 자신이 아니지요. 자녀들의 거룩하고 으뜸가는 소망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각자의 삶의 자리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면 그것은 교만이요 위선입니다. 그건 자녀이기를 포기하는 셈이니 결국 하느님의 선물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이 세상 한복판에 드러나는 것이 곧 행복이지요.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십니다.”(6,9) 우리는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오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지요. 아버지의 나라는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선이 드러나는 세상이요, 탐욕과 교만과 불평등이 없는 행복한 나라인 까닭입니다.
따라서 내 가정, 수도공동체, 교회, 사회 등 어디서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행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하십니다. 거룩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로 더 거룩해지실까요? 아닙니다. 거룩하신 주님께는 우리의 기도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 뜻인즉 자신의 열정적인 사랑과 책임 있는 응답을 통해 하느님의 거룩함을 반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인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고, 각자의 삶으로 주님의 거룩함을 반사하도록 불렸습니다. 따라서 이 소명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양식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날의 삶을 온전히 의탁해야 합니다. 이 신뢰 안에서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를 청해야 합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뜻이 지금 여기서 드러나도록 하는데 필요한 ‘육신의 빵’도 청해야겠지요.

또한 예수님께서는 사랑이신 하느님 때문에 서로 용서하며 사랑의 일치를 이루라 하십니다. 사랑 받으려면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용서 받으려면 먼저 용서해야겠지요. 용서하려면 먼저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해야만 할 것입니다. 사랑 없이 사랑할 순 없지 않습니까?

끝으로 예수님께서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6,13) 하고 기도하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넘치도록 우리를 사랑해주시지요.

그러나 연약하고 믿음이 부족한 우리는 자주 영혼의 나락으로 떨어지곤 합니다. 유혹은 집요하게 우리를 뒤흔들지요. 하느님을 외면하고 예수님의 제자이기를 포기하라고 부추깁니다.
따라서 자신을 믿지 말고 겸손하게 주님의 도움을 청하고, 그 힘으로 하느님의 일에 전념하여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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