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1주간 토요일]걱정 (마태6,24-34)

2018. 6. 23. 오전 5:4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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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11주간 토요일]걱정 (마태6,24-34)                

 

 

요아스 임금이 자기에게 충성을 바친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를 죽이자, 신하들이 모반을 일으켜 임금을 살해한다. (역대하 24,17-25)
17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 유다의 대신들이 와서 임금에게 경배하자, 그때부터 임금은 그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18 그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19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20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21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임금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22 요아스 임금은 이렇게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 즈카르야는 죽으면서,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해가 끝나 갈 무렵,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러 올라왔다. 그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들어와  백성 가운데에서 관리들을 모두 죽이고, 모든 전리품을 다마스쿠스 임금에게 보냈다.
24 아람 군대는 얼마 안 되는 수로 쳐들어왔지만, 유다 백성이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을 저버렸으므로, 주님께서는 그토록 많은 군사를 아람 군대의 손에 넘기셨다. 이렇게 그들은 요아스에게 내려진 판결을 집행하였다.
25 아람 군대는 요아스에게 심한 상처를 입히고 물러갔다. 그러자 요아스가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을 죽인 일 때문에, 그의 신하들이 모반을 일으켜 그를 침상에서 살해하였다. 요아스는 이렇게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를 다윗 성에 묻기는 하였지만, 임금들의 무덤에는 묻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시며,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마태 6,24-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예언자 즈카르야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2역대24,17-25)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 유다의 대신들이 와서 임금에게 경배하자,  그때부터 임금은 그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7-19)

 

여호야다 사제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장례에 대하여 기술한 15-16절에 이어지는 17-19절은 여호야다 사제가 죽은 직후의 요아스의 타락과 우상 숭배에 대하여 보도한다. 

요아스왕의 정신적 지주였던 여호야다 사제가 죽자, 요아스는 마치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상실한 배처럼 산같은 파도에 흔들리고 풍랑을 따라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가 만일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면, 주위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하느님 앞에서 일관되게 선을 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여호야다 사제에게 의존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까닭에 여호야다 사제가 그에게 영향을 미칠 동안에는 우상을 척결하고 성전을 수리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지만, 여호야다 사제가 죽고 악한 자의 마수가 그의 목을 잡는 순간부터는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로 돌변하고 말았다.


한편 17-22절은 요아스가 하느님의 집을 버리고 아세라 우상을 섬기며, 하느님의 책망의 말씀을 전하는 즈카르야 예언자를 성전 뜰에서 돌로 쳐죽인 사실이 기록되어 나온다. 그런데 병행 본문인 열왕기 하권 12장에는 이러한 사실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처럼 저자가 열왕기 저자와 달리 요아스의 추악한 부분까지 낱낱이 기록한 것은 아람 군대에 의한 요아스의 대패(2역대24,23-24절)와 신복들에 대한 암살(2역대24,25-26) 사건이 하느님을 버린 자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라는 사실을 후대의 독자들에게 교훈하기 위해서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어제가 어떠하였든지간에 오늘 하느님 앞에 바로 서서 올바로 살지 않으면, 넘어질 수 밖에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대신들'에 해당하는 '사레'(sare)의 원형 '사르'(sar)는 본래 '주권을 소유하다', '통치권을 행사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사라르'(sarar)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기본적으로 '통치자'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무려 369회나 사용된 이 단어는 '장관', '감독', '족장', '귀족', '방백', '신하' 등등 상당히 다양한 의미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번역에 나타나는 '사르'의 공통점은 한 나라의 왕은 아니지만, 왕에 버금가는 권한을 가지고 어떤 지역을 다스리는 상당한 권력자라는 사실이다. 

여호야다 사제가 죽은 후에 요아스 왕에게 찾아온 유다의 '사르'들은 당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형성하고 있던 사람들로서, 여호야다 사제의 생존시에는 저신들의 목소리를 죽이고 있다가, 여호야다 사제 사후 즉각적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세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임금은 그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그들의'로 번역된 '알레헴'(allehem)은 '그들에게' 또는 '그들을 향하여' 라는 의미인데, 왕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부추긴 인물은 한 명이 아니라 여럿이었던 것이다. 또한 '말을 듣게 되었다' 로 번역된 '샤마으'(shamah)는 주의를 기울여 듣고 따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요아스는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말을 아무런 비판 의식도 없이 듣고 따름으로써, 남부 유다 왕국 전체를 타락의 길로 몰아가고 말았다.

 

'그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 주체가 요아스 왕을 비롯한 남부 유다 백성 전체임을 보여준다.

특히 왕으로 즉위하여 하느님의 집을 수리하는 데 열정을 바쳤던 요아스는 이제 스스로 그 성전을 버리는 자기 모순에 빠졌으며, 이로 인해 백성들 전체도 하느님의 집을 버리게 되었고, 더 나아가 선민 유다 백성들이 하느님을 몰아낸 그 자리에 우상을 얹혀 섬기는 일까지 저지르게 되었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요아스 왕 당시 하느님의 진노가 요아스 왕 한 사람의 죄로 인해서가 아니라, 그와 그로인해 우상숭배에 빠진 남부 유다 모든 백성들의 죄로 인해 발생한 것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진노'에 해당하는 '케체프'(qetseph)는 구약 성경에서 범죄한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흔히 쓰인다.(민수17,11 ;1역대27,24)

24절에 '이렇게 그들은 요아스에게 내려진 판결을 집행하였다' 는 진술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하느님의 진노는 아람 군대의 침략으로 가시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하느님의 진노는 요아스와 백성들이 하느님의 집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한 바로 그날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언자들을 통한 하느님의 경계가 충분히 행해진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19절,33절)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예언자들'으로  번역된 '네비임'(nebiim)은 '나비'(nabi)의 복수형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단 한 명의 예언자만 보내신 것이 아니라 여러명의 예언자들을 보내신 것이다. 이렇게 보내어진 예언자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20-22절에 기록된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였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은 두 가지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 주는데, 첫째는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보내실 때마다 요아스와 백성들이 듣지 않는 강퍅함을 보였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요아스와 백성들의 거듭되는 거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상당한 인내를 가지고 그들을 돌이키려고 부단히 애쓰셨다는 사실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한 여러가지의 경계를 통하여,그들이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올 수 있도록, 기회를주시는 자비와 인내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들이 '증언하였지만'으로 번역된 '와이야이두'(waiyaidu)원형 '우드'(wud)는 본래 '반복하다', '거듭 행하다' 라는 의미의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확고한 진리를 반복적으로 진술하여 듣는 자들로 하여금 그 진리를 확실히 알게 할 경우에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다.(신명8,19 ;1열왕21,10)

그러니까 여러 명의 예언자들이 서로 다른 말을 전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동일한 경고를 발하였음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아스와 백성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해당하는 '우일로 헤에지누'(welo heezinu)는 '듣지 않으려고 완강하게 버티다' 라는 뉘앙스를 나타낸다. 예언자들의 증거와 경고가 거듭되는 동안, 요아스와 백성들의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회개하라는 세미한 음성이 들렸지만,  이미 어둠의 마수에 사로잡힌 그들은 세미한 음성까지도 억누르면서 예언자들을 배척해 버렸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악인들의 전형적인 삶의 자세이다.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복음(마태6,24~3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4)


마태오 복음 6장 24절은 하늘 나라의 시민된 자가 재물에 대해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를 기록한 마태오 복음 6장 19~24절의 결론에 해당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재물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길 것인지 양자택일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여기서 '섬기다'에 해당하는 '둘류에인'(douleuein; serve)의 기본형인 '둘류오'(douleuo)'종', '노예'라는 뜻을 지닌 '둘로스'(doulos)같은 어근에서 비롯된 단어로서, '종으로서 예속되다', '노예처럼 섬기다'뜻을 갖는다.

노예는 그 목숨이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으며, 주인의 명령에 대해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당시 상황을 염두에 볼 때, 이것은 종이 목숨을 바쳐 섬길 대상은 절대로 하나 이상이 될 수가 없다는 뜻이다.


한편, '재물'에 해당하는 '마모나'(mamona; mammon; money)의 원형 '맘모나스'(mammonas)는 히브리어로 '믿다', '신뢰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멘'(amen)같은 어근을 갖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신뢰하는 자'라는 뜻을 갖는다.


고대로부터 재물은 사람들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며 집요하게 추구하여 왔던 중에 하나이므로, '맘모나스'(mammonas)'재물'과 동의어으로 쓰였다.

영어의 '재물'을 뜻하는 '맘몬'(mammon)이 이 단어에서 나왔다.  

여기서는 이 '재물'이라는 단어를 의인화시켜 섬김의 대상으로 삼아 '재물'이 충분히 사람들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마태 6,24-34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온전히 의탁하라

 

일상을 살아가면서 근심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남모르는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사실 모두가 근심걱정을 하지만 결정적으로 무엇을 걱정하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걱정해 봤자 소용없는 것을 걱정하는 어리석음은 그만둬야 하겠습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이랍니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라고 합니다. 즉 96%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시편저자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4-5).하였습니다. 결국 믿음을 가진 사람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어떤이는 주님께 의탁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여 근심을 끌어안고 삽니다. 그러나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 믿고 맡기며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는 주님의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루카복음에 보면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에게 주님께서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1-42). 하시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위치를 확인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 머물면 쓸데없는 일로 바쁘지 않을 것이요, 또 괜한 걱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유지하기위한 음식과 몸을 보호하기위한 의복의 걱정에 앞서서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변함없이 주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의 섭리 안에 있고, 주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공중의 새나 들판의 꽃들조차도 하느님의 안배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만물의 영장’입니다. 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우주 만물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고 신뢰하며 모든 근심걱정을 송두리째 맡겨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이러한 물음은 인간적인 걱정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노력으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고 거기에 행복이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도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헛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여정에 우선적인 선택이 주님이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의탁하고 섭리에 맡기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 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5,7).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의 영원한 생명에의 약속에로 이끌고 계시다는 확신 속에 뽑아주신 좋으신 분께 대한 응답으로 오늘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 영원한 새 삶이 시작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2010년 6월 19일 -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사람들이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기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예언합니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즈카르야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요아스 임금의 명령에 따라 돌을 던져 그를 죽입니다. 요아스 임금은 하느님의 벌을 받아 모반을 일으킨 신하들에 의해 침상에서 살해당합니다.
이 세상에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교만하기 쉽습니다. 이 세상의 재산과 명예와 권력이 많은 사람일수록 걱정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재산이 줄어들까 봐, 자신의 권위가 손상될까 봐, 자신의 위상이 추락할까 봐, 걱정하며 사람들을 감시하고 억압합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은 모두 평등하며 이 지상에서 귀중한 삶을 살 권리가 있습니다. 참새를 먹이시고 들꽃을 입히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본 의식주를 보장해 주십니다. 그러나 자주 인간의 탐욕과 권력의 쟁탈전으로 소중한 삶을 살 권리와 기회들이 박탈되며 위험 지대로 밀려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걱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권고는 무엇보다도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을 위한 말씀입니다. 한숨과 탄식 속에 사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걱정이 많아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지 못하며 방황하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약하여 하느님을 원망하고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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