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2 주간 화요일]좁은문 (마태 7,6.12-14)

유다 임금 히즈키야가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의 위협 편지를 받고 기도하자,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보호하여 주시리라는 말씀을 전한다. (열하 19,9ㄴ-11.14-21.31-35ㄱ.36)
그 무렵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9 히즈키야에게 사신들을 보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10 “너희는 유다 임금 히즈키야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네가 믿는 너의 하느님이, ′예루살렘은 아시리아 임금의 손에 넘어가지 않는다.′ 하면서, 너를 속이는 일이 없게 하여라.
11 자, 아시리아 임금들이 다른 모든 나라를 전멸시키면서 어떻게 하였는지 너는 듣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너만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으냐?’”
14 히즈키야는 사신들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읽었다. 그런 다음 히즈키야는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서, 그것을 주님 앞에 펼쳐 놓았다.
15 그리고 히즈키야는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세상의 모든 왕국 위에 당신 홀로 하느님이십니다. 당신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16 주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주님, 눈을 뜨고 보아 주십시오. 살아 계신 하느님을 조롱하려고 산헤립이 보낸 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7 주님, 사실 아시리아 임금들은 민족들과 그 영토를 황폐하게 하고,
18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것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작품으로서 나무와 돌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것들을 없애 버릴 수 있었습니다.
19 그러나 이제 주 저희 하느님, 부디 저희를 저자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왕국이, 주님, 당신 홀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20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히즈키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 때문에 네가 나에게 바친 기도를 내가 들었다.’
21 주님께서 그를 두고 하신 말씀은 이러합니다. ‘처녀 딸 시온이 너를 경멸한다, 너를 멸시한다. 딸 예루살렘이 네 뒤에서 머리를 흔든다.
31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오고 생존자들이 시온산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라.’
32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시리아 임금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고, 이곳으로 활을 쏘지도 못하리라. 방패를 앞세워 접근하지도 못하고, 공격 축대를 쌓지도 못하리라.
33 자기가 왔던 그 길로 되돌아가고 이 도성에는 들어오지 못하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34 나는 이 도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니 이는 나 자신 때문이며 나의 종 다윗 때문이다.’”
35 그날 밤 주님의 천사가 나아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다.
36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그곳을 떠나 되돌아가서 니네베에 머물렀다.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라고 하신다. (마태 7,6.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6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2열왕19,9ㄴ-11.14-21.31-35ㄱ.36)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오고, 생존자들이 시온산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라." (31)
열왕기 하권 19장 30절에 '유다 집안의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다시 밑으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라고 나오는데, 남부 유다가 앗시리아의 침략으로부터 해방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번영된 미래가 있으리라는 보장을 하느님이 하신다.
이러한 남부 유다의 회복을 대구법을 사용하여 19장 31절에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남은 자'는 '생존자'와, '예루살렘'은 '시온산'과 각각 대구를 이루고 있다. 열왕기 하권 18장 13-16절과 관련된 앗시리아의 비문 기록에 의하면, 산헤립은 남부 유다 1차 침입시 약 20만명을 포로로 잡아 갔다고 한다. 따라서 이번 2차 원정에서도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희생되고 포로로 잡혀갔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본문에서 '남은 자'와 '생존자'는 이러한 난리를 피해 예루살렘성 안과 시온산으로 피한 자를 지칭한다. 이들이 예루살렘과 시온산에서 나온다는 것은 앗시리아가 물러갈 것을 감안한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그들이 더 이상 은신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각자의 처소로 돌아가게 된 상황을 나타내 준다.
한편 '남은 자'에 해당하는 '셰예리트'(sheerith ; a remant)는 30절에서 '남은 자'로 번역된 '한니쉬아라'(hanishiara)와 마찬가지로, 그 어근은 '남다'란 뜻의 '샤아르'(shaar)이다.
이것은 모두 일차적으로 북부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상황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남부 유다 백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신학적 의미에서 '남은 자'는 어둡고 망가진 세상 속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 순종하여 그를 떠나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남은 자'에 대한 결정적인 신학적 계시가 나오는 성경 말씀은 로마서 9장 27-29절이다. 여기서 바오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같다 하여도 남은 자들만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고 선언하고 있다.
즉 '남은 자' 사상은 하느님 구원의 역사를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용어로서, 이것은 현실의 암울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자비와 베풀기로 정하신 은혜에 기초하여,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구원의 진정한 수혜자들을 의미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일차적으로 앗시리아가 물러감으로 인하여 남부 유다 백성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상황을 예언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죄와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 보호받아 구원에 이르게 된 신약의 백성들까지 염두에 둔 예언이라 할 수 있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리라.'
본문은 '남은 자'와 '생존자'가 난리를 피해 숨어 있다가, 앗시리아가 퇴각하자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구원 사건이 전적으로 '주님의 열정'에 근거하고 있음을 설명하는 구절이다.
'주님의 열정'에 해당하는 '키느아트 예흐와'(qinath yehah)란 표현이 이사야 예언서 9장 6절과 37장 32절에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선택하여 세운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신실하심을 의미한다.
여기서 '열정'으로 번역된 '키느아트'의 원형 '키느아'(qinah ; zeal)는 본래 '시기'나 '질투'를 의미하는데(잠언6,34 ; 에제8,3 ; 즈카1,14),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원수들로부터 보호하셔서 빼앗기지 않으시려는 강한 시기심 내지는 질투심을 갖고 계심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주님의 열정'은 당신 백성들을 향하신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의 역설적 표현이다.
그리고 '주님의 열정' 앞에 붙은 '만군의'로 번역된 '체바오트'(tsebaoth)는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낸다. 하느님의 약속에 더하여 이러한 표현을 덧붙이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확실히 이루어질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즉 택하신 백성들을 반드시 구원하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에는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전능하심(Almighty)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복음(마태7,6.12~14)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6)
마태오 복음 7장 1~4절은 타인에 대한 무책임한 심판(비판)을 금하고, 마태오 복음 7장 5절은 자신의 과오를 먼저 해결한 후에 사랑을 가지고 타인의 결점을 지적하여 해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태오 복음 7장 6절은 비록 상대방에 대한 무책임한 비판을 금한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죄악에 대해서까지 묵인해서는 안된다는 취지에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죄와 구별되는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개들'에 해당하는 '퀴신'(kysin; dogs)의 원형인 '개'로 번역된 '퀴온'(kyon)은 팔레스티나에서 야생 상태로 생활하는 사납고 더러운 짐승이다.
성경에서는 구원의 진리를 모르는 이교도들이나(마태15,26; '강아지들') 신도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유다인들(필리3,2; '개들') 또는 거짓 예언자들을 (묵시22,15; '개들') 개에 비유하기도 했다.
마태오 복음 7장 6절에서도 타락하여 복음을 훼방하며 진리는 안중에도 없는 자들을 가리키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시 완고하며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셨다고 본다.
개들이 '거룩한 것'에 해당하는 '토 하기온'(to hagion; what is sacred; what is holy)의 가치를 모르는 것과 같이, 이들 역시 복음의 가치를 몰라서 진리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훼손하려 들 것이므로, 이들에게는 복음조차 전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는 문장도 앞의 문장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반복되는데, 그 의미를 한층 더 강조하는 문장의 기교가 사용되었다.
'너희의 진주'에 해당하는 '투스 마르가리타스 휘몬'(tous margaritas hymon; your pears)는 '거룩한 것'에 해당하는 '토 하기온'(to hagion; what is sacred)과 같은 의미이며, '돼지들'에 해당하는 '토 코이론'(to choiron; pigs)은 '개들'에 해당하는 '토이스 퀴신'(tois kysin; dogs)과 같은 의미이다.
돼지는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불결하고 부정한 동물로 취급되어 식용이나 사육이 금지되었기에, 여기서는 야생 상태의 맷돼지로 볼 수 있다.
팔레스티나의 야생 맷돼지들은 매우 사나워서 사람들을 어금니로 받고, 발로 짓밟아 해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 7장 6절은 진주와도 같은 고귀한 천국의 복음을 그 가치도 모르는 영적으로 무지하고 사나운 자들에게 전하면, 돼지와 같은 자들은 복음을 팽개칠 뿐만 아니라 이것을 전하는 자들까지 해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진리의 가치를 모르는 타락한 자들에게는 아예 복음을 전하지도 말라는 명령을 거듭 내리고 있는 것이다.
바라는 그대로 해주어라
사람은 살아가면서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바가 있고, 자식이 부모에게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부부간에는 물론 이웃간에도 친구에게도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와 바람에 만족하고 기쁨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대에 못 미친다고 느낄 때가 훨씬 많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는 이 정도는 따라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자기는 잘하고 있는데 상대는 그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기일쑤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상처를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대접 받기를 원한다면 남을 똑같이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사실 내가 받는 고통이나 기쁨은 내가 남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정된 사람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한정된 테두리를 극복 하도록 촉구하십니다.“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루가6,32).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온갖 유혹을 거슬러 살려면 문이 좁고 길이 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밑지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옳은 길과 옳은 문을 찾는 수고는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나의 기대와 바람만큼 걸 맞는 수고와 땀을 소홀히 하지 않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길이라 해도 그 길이 목적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서둘러 그 방향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험하고 힘든 고된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이 천상과 연결되어 있다면 군소리 없이 걸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매 순간이 세상을 감당하는 도전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넓고 편한 문으로 들어가면 많은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우리는 돈을 많이 벌려고 밤잠을 자지 않고 먹을 것을 아껴 가며 노력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반대로 우리는 돈을 쉽게 벌려고 사기를 치고 일확천금을 바라며 돈을 찾아 헤매는 사람을 만납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인생의 가치를 돈과 재물에 두고 일희일비하는 삶을 삽니다.
정말로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은 적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가치에 자신의 삶과 목숨을 거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찾더라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쾌락을 찾는 사람이 많더라도 유혹에서 빠져나와 주님을 올곧게 섬기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영원한 행복과 상급을 받는 길은 생각보다 좁고 험하여 마음 준비를 잘해야 한다고 권고하십니다. 좁은 문은 마음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머리를 숙여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신을 높이지 않고 마음을 비우는 사람이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특권과 능력을 온전히 주님을 위해 내어 놓는 마음을 가집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