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사도 축일]믿음 (요한 20,24-29)

2018. 7. 3. 오전 6: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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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사도 축일]믿음 (요한 20,24-29)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모퉁잇돌이라고 한다. (에페 2,19-22)
형제 여러분,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나타나시어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하시자, 그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고백한다. (요한 20,24-29)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에페2,19-22)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17)


에페소서의 주제 교회의 일치의 당위성이다. 에페소서 2장 19-22절은 교회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된 절대 유일한 하나의 구원 공동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구원받기 이전의 이방인들은 아무런 소망이 없는 상태였으나(11-12절),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더불어 수평적 평화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13-15절), 구원받은 성도들 모두가 하느님과 수직적 평화를 이루었다는(16-18절) 사실에 근거를 두고, 19절 이하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오로는 11-18절에서 갓 교회에 속하게 된 이방인 출신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 공동체인 교회가 어떻게 신약 시대에 이르러 자기들 이방인들까지 포함시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였다.


이제 19-22절 단락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통하여 구원을 얻은 자들을 대상으로, 교회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머리로 하여 형성된 단일 공동체라는 중요한 사실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우케티'(uketi)'더 이상 ~이 아니다'(no more)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강조 부정어이다. '크세노이'(ksenoi)'파로이코이'(pharoikoi) '외국인' 혹은 '이방인'(나그네)이라는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처럼 바오로는 강조 부정어와 더불어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명사를 반복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하느님께 나아감을 얻는 특권을 받았으므로, 이제부터 이방 성도들 역시 더 이상 천국의 시민권과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바오로는 본절에서 영어의 'not ~ but'의 용법과 동일하게, 앞선 부분의 부정을 통하여 뒷부분의 내용을 더욱 강조하는 '우케티~ 알라'(uketi ~alla) 용법을 사용하여 이방 성도들이 '외국인'과 '이방인'이 아니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 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 이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갖는 신분의 변화첫째,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 되는 것이다. '성도'에 해당하는 '하기온'(haghion)은 구약의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사용되던 구약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뜻이다(다니7,18).

바오로도 본문에서 성도를 구약적 개념으로서 사용하였다. 즉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민족적, 지리적으로는 비록 외국인이지만, 한 성령 안에서 완전히 성도와 동일한 시민으로 대접받을 수 있게 된다.


둘째,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은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된다. 여기서 '가족'에 해당하는 '오이케이오이'(oikeioi)의 원형 '오이케이오스'(oikeios)는 '가족', '식구', '권속' 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는 표현은, 과거에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간택받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임을 자랑하며 유대인들이 자주 사용하던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으로 말미암아 육체적인 혈통을 뛰어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이 말이 적용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한 가족'은 하느님을 가장으로 모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말은 더 이상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어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0)


20-22절에서 바오로는 교회를 건물에 비유하고 있다. 단순히 건물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을 자기 육체로 허무신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세우신 성전이다. 이 성전 건물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터)위에 세워졌고, 그 모퉁잇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20-21절), 건물의 재료는 그로 말미암아 거듭 난 성도들이다.(22절 ;1코린3,9)


여기서 '사도들'과 병행하여 쓰인 '예언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신약 교회를 창설한 후, 교회가 이 땅에 뿌리 내리던 초대 교회시대에만 있었던 신약 교회의 예언자들을 가리킨다. (1코린12,10.28.29 ; 에페4,11)


한편,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란 표현은 다음의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코린토 전서 3장 11절에서는 성전 건물의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으며, 바로 그 전절인 10절을 보면, 사도 바오로 자신이 그 기초를 놓았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본문의 기초 역시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라고 보고, 그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위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복음 전파에 의하여 확장되어 간다는 의미가 된다.


둘째로, 본문의 '기초'를 건물의 '기초'라고 보지 않고, '시작'이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지어진 새 성전에 놓인 최초의 돌로서, 그 위에 계속해서 다른 성도들이 돌이 되어 세워질 수 있는 '시작'이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기초'로 번역된 '테멜리오'(themelio)가 '기초', '토대', '터' 뿐만 아니라 시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두 견해 모두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따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의 복음을 깨달은 자이다. 그들은 자신이 깨달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교회의 '기초'를 닦았고, 또 친히 교회 구성원의 구심점이 되어 다른 모든 성도들이 그들을 따라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모퉁잇돌'에 해당하는 '아크로고니아이우'(akrogoniaiu)의 원형 '아크로고니아이오스'(akrogoniaios)는 '끝'(마태24,31), '머리'(히브11,21)를 의미하는 '아크론'(akron)과 '모퉁이'(마태21,42), '구석'(사도26,26)을 의미하는 '고니아'(gonia)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모퉁잇돌'(the chief corner stone),'구석머리'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는 건물의 벽과 벽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서 건물의 기초로 삼을 뿐 아니라 벽과 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기초들을 말한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건물을 세우는 자가 자신의 이름을 바로 이 모퉁잇돌에 새겨 건물이 자신의 소유임을 표시하였다.


본문은 이사야 28장 16절의 말씀의 성취라고 볼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기초이실 뿐 아니라 교회가 그분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모퉁잇돌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친히 자신이 직접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품질이 입증된 돌, 튼튼한 기초로 쓰일 값진 모퉁잇돌이다. 믿는 이는 물러서지 않는다. "  (이사28,16)



성 토마스 사도 축일 복음(요한20,24-29)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는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8-29)


'토마스'에 해당하는 '디뒤모스'(Didymos; Thomas)는 아람어(Aramic)적인 표현으로 '쌍둥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중성'이라는 뜻도 갖는다.


여기서 요한 복음사가가 이것을 밝힌 것은 육적인 열정에 비해 영적인 믿음이 뒷받침되지 못한 그의 신앙 상태를 그대로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이런 토마스가 7일간 계속되던 유월절 축제 기간이 완전히 끝나고,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나타나신 주일로부터 7일이 지나 다시 주일이 된 '여드레 뒤에'  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체험하고 신앙 고백을 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에 해당하는 '호 퀴리오스 무 카이 호 테오스 무' (ho kyrios mou kai ho theos mou; My Lord and my God)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이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여기서 '저의'에 해당하는 '무'(mou; my)라는 1인칭 단수 소유 대명사두 번이나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전에는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해서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분께서 하느님의 진정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체험하여 깨달았음을 보여 준다.


특히 원문에서는 '~이시며''~이십니다'에 해당하는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희랍어 '에이미'(eimi) 동사가 생략되었고, 각 단어들 앞에 각각 '호'(ho)라는 관사가 각각 사용되어서 예수님의 유일성과 신성(神性)이 더욱 강조된다.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게 되자 직접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먼저 볼 필요도 없이 그의 의심들이 눈 녹듯이 모두 사라졌고, 이 고백의 말을 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잘 정리된 신앙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놀라움에 가득찬 탄성과 같은 것이다.


특히 여기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토마스가 이전에 자신이 함께했던 역사의 예수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의심많은 토마스와 같은 사람에게도 능력을 발휘하는 영혼의 부활이요, 육체의 부활이며,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부활이었다.


토마스가 체험한 이 부활의 능력은 그를 의심많은 제자에서 참된 신앙을 고백하며 결단하는 제자로 바꾸어 버렸다.


한편, 요한 복음 20장 27절에서는 '믿음없는 자'에 해당하는 '아피스토스'(apistos;  faithless)'믿는 자'에 해당하는 '피스토스'(pistos; believing)가 서로 대조 되었고, 요한 복음 20장 29절에서는 토마스로 대표되는 '보고 믿는 자들'에 해당하는  '헤오라카스~페피스튜카스'(heorakas~pepiteukas)와 '보지 않고 믿는 자들'에 해당하는 '호이 메 이돈테스 카이 피스튜산테스' (hoi me idontes kai pisteusantes; these  who have not seen and you have believed)가 서로 대조되었다.


첫번째의 대조불신앙을 버리고 신앙을 촉구하는 요한 복음서의 기록 목적 (요한20,31)을 반영한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선택은 당시의 등장 인물들에게 부과된 선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 복음에서 독자들인 초대 교회 성도들과 오늘날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던져지는 핵심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두번째 대조는 성경의 어떤 인물들도 당시까지는 다다르지 못한 높은 신앙에 대한 촉구이다.


즉 토마스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조차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그들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지 못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이후의 시대에 태어나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들은 모두 보지 않고서도 믿는, 참으로 더 복된 자들이라는 말이다.



정직한 믿음

 

믿음의 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주님을 영접하는 체험이 없어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체험한 이야기를 전해주면 부러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직접체험하지 않았으니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 중에 토마스라는 사람은 주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깨우러 갈 때 거기에 있었고,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라고 말할 정도로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고별사를 할 때는 아버지께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20,25)하고 말하였을 때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아주 솔직한 답변입니다.


그렇다면 믿지 못하는 토마스라고 말하는 것보다 정직한 토마스라고 말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여드레 뒤에 토마스도 같이 있는 제자들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는데 특별히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20,20,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미 토마스의 마음을 아시고 그의 마음을 풀어주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 누락되어 실망할 수 있는 제자를 위한 배려를 볼 수 있고,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안배를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토마스 혼자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였다면 혼자만 왕따가 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데 장애가 될 요소를 없애주시며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큰 사랑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결국 토마스는 감히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도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최고의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을 알아챘고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내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신 말씀이 ‘못자국을 직접 보고, 손가락을 넣어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한 토마스 자신의 의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토마스가 단순히 "진짜네! 주님의 부활하셨어!'라고 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하느님!'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부활 후 그리스도의 신성을 처음 고백한 제자입니다.

 

주님께서 한 말씀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 그렇다면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성전과 성경을 통해 전해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있으니 행복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고 만지고 감각적으로 느끼고 싶어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믿든, 그렇지 않든 구애 받지 않으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십니다. 우리의 주님은 '임마누엘'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믿고 또 믿어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거짓으로 믿는 것보다는 정직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편이 훨씬 더 주님 마음에 듭니다. 따라서 정직한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삶의 변화를 통해 믿음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믿음은 깨달음에서 시작됩니다. 한 사람의 말이 내 편협하고 미천한 생각을 정화시켜 줄 때 신뢰가 생겨나고, 상대의 삶과 행동에 존경과 감탄이 일어날 때 믿음은 생겨납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고 난 뒤에’ 감탄하고 놀라는 것에서, ‘듣고 난 뒤에’ 느끼고 깨닫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의 말이 자기의 생각과 판단 기준으로 믿을 만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토마스에게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못과 창에 찔리신 당신 손과 발을 보여 주시며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을 ‘보고’ 믿은 것처럼, 토마스도 보고서야 비로소 믿은 것입니다. 그러니 토마스를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그도 우리처럼 내 눈으로 보아야 믿는 믿음의 기초 과정을 따른 것일 뿐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의 증언을 후대의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의 공동체를 향하여,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라고 합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 곧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체험한 이들의 증언과 이 증언을 신뢰하며 복음 선포와 빵 나눔의 성찬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현존을 삶의 중심에 두며 성장했습니다. 보지 않고 ‘들음’만으로도 믿음은 전해집니다. 그래서 말씀 선포는 선교의 시작입니다.
믿음의 내용은 같아도 믿음을 표현하고 실천하는 방식은 서로 다릅니다. 교회는 모두의 믿음이 든든하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의 정도는 서로 다르지만 성령의 인도로 그 부족함을 채우는 운명 공동체이기에 아름답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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