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간 토요일] 믿음 (마태 8,5-17)
애가의 저자는 예루살렘의 파멸을 보고 탄식하며, 주님께 소리를 지르라고 한다. (애가 2,2.10-14.18-19)
2 야곱의 모든 거처를 주님께서 사정없이 쳐부수시고 딸 유다의 성채들을 당신 격노로 허무시고 나라와 그 지도자들을 땅에 쓰러뜨려 욕되게 하셨다.
10 딸 시온의 원로들은 땅바닥에 말없이 앉아 머리 위에 먼지를 끼얹고 자루옷을 둘렀으며 예루살렘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까지 내려뜨렸다.
11 나의 딸 백성이 파멸하고 도시의 광장에서 아이들과 젖먹이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 눈은 눈물로 멀어져 가고 내 속은 들끓으며 내 애간장은 땅바닥에 쏟아지는구나.
12 “먹을 게 어디 있어요?” 하고 그들이 제 어미들에게 말한다, 도성의 광장에서 부상병처럼 죽어 가면서, 어미 품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13 딸 예루살렘아, 나 네게 무엇을 말하며 너를 무엇에 비기리오? 처녀 딸 시온아, 너를 무엇에다 견주며 위로하리오? 네 파멸이 바다처럼 큰데 누가 너를 낫게 하리오?
14 너의 예언자들이 네게 환시를 전하였지만 그것은 거짓과 사기였을 뿐. 저들이 네 운명을 돌리려고 너의 죄악을 드러내지는 않으면서 네게 예언한 신탁은 거짓과 오도였을 뿐.
18 주님께 소리 질러라, 딸 시온의 성벽아. 낮에도 밤에도 눈물을 시내처럼 흘려라. 너는 휴식을 하지 말고 네 눈동자도 쉬지 마라.
19 밤에도 야경이 시작될 때마다 일어나 통곡하여라. 주님 면전에 네 마음을 물처럼 쏟아 놓아라. 길목마다 굶주려 죽어 가는 네 어린것들의 목숨을 위하여 그분께 네 손을 들어 올려라.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시며 그의 종을 고쳐 주시고, 베드로의 장모를 비롯해 많은 이들을 고쳐 주신다. (마태 8,5-17)
5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6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12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다.
14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을 때,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드러누워 있는 것을 보셨다.
15 예수님께서 당신 손을 그 부인의 손에 대시니 열이 가셨다. 그래서 부인은 일어나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6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애가2,2.10-14.18-19)
애가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성문서로 분류된 축제오경(아가, 룻기, 코헬렛, 애가, 에스테르기) 가운데 넷째 책이다. 애가는 본디 기원전 587년 바빌론 침공과 예루살렘의 함락을 애도하는 성전 방화일(음력7월)에 낭독하였다.
애가의 저작 연대는 바빌론 유배시절이다. 1장, 2장, 4장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 도성을 애도하고, 3장과 5장도 바빌론의 통치 아래에서 겪는 유다 주민들의 고통을 아주 생생하게 증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루살렘이 함락된 직후에 쓰인 노래들은 520년 바빌론에서 돌아온 유배자들이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할 때 하나로 모아졌을 법이다. 저작 장소는 바빌론이 아니라 예루살렘이다. 저자(저자들)는 예루살렘 폐허를 바라보면서 이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히브리어로 성전 방화일을 '티스아 베압'(thishah beab ;압 달 아홉째 날=음력 7월 9일경)이라고 하는데, 제1성전(솔로몬이 지은 성전)과 제2성전(B.C.515년에 복구한 성전)의 파괴를 비롯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난 주요 재앙들을 모두 기억하는 날로 정했다.
유다교에서는 이 날은 속죄일(욤 키푸르)과 더불어 공식적으로 단식하는 유일한 날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유다교 회당에서는 이 날 유다교 신자들이 바닥이나 낮은 의자에 앉아, 저녁 기도와 다음날 아침 기도때에 애가를 봉독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성주간 전례에 애가를 낭송한다.애가를 내용으로 분류해 보면, 1장, 2장, 4장은 시인 개인의 인격화된 도성 시온의 애가이고, 3장은 개인과 공동체의 탄원 기도이며, 마지막 5장은 공동체의 애가이다.
오늘 독서는 애가서 2장의 내용 중 일부인데, 2장은 시인의 애가(1-19절)와 시온의 애가(20-22절)가 같이 나온다. 그런데 시인의 애가가 더 많은 지면을 자치하는 것이 1장과 다른 점이다. 또한 애가의 강조점도 다른데, 1장에서는 예루살렘의 절망과 비탄에 초점을 맞추지만, 2장에서는 하느님의 분노를 부각시킨다.
하느님은 딸 시온과 예루살렘을 난폭하게 파괴하는 성난 원수처럼 묘사된다. 그분은 진노의 날에 딸 시온을, 야곱의 모든 거처를, 딸 유다의 성채들을 사정없이 쳐부수시고 허무신다. 주님은 그들이 당신을 기리고 예배하는 축제의 날과 안식일을 진노의 날로 바꾸시고 전례의 중심인 제단과 성소까지도 버리셨다.
20-22절의 애가는 의인화된 시온이 주님께 하소연하는 기도이다. 여기서 언급된 인육을 먹는 비극은 포위된 예루살렘 도성의 극한 상황을 가리킨다.(2열왕6,28-29 ;예레19,9 ;예레5,10참조)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포위되었을 때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전한다.(유다 전쟁사 6권 3장 4절) 신명기 저자는 이스라엘이 계약을 위반할 때, 이런 상황을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신명28,53-54)
'야곱의 모든 거처를 주님께서 사정없이 쳐부수시고, 딸 유다의 성채들을 당신 격노로 허무시고, 나라와 그 지도자들을 땅에 쓰려뜨려 욕되게 하셨다.' (2)
애가서 2장 1-8절은 진노하시는 주님의 격정적 심판 행동에 대한 경악과 비판의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여기서는 주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적 관계가 심판의 배후에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요 거룩한 나라였다.(탈출19,5.6)
하느님께서는 초자연적 능력으로 구원의 역사를 진행시키셨고(탈출14,21-31), 모든 삶의 과정을 세심하게 책임져 주셨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은혜로 만방 중에서 선택을 받은 계약의 백성이므로, 하느님께 특별히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은 하느님께 범죄하였고 이 때문에 하느님의 불같은 진노가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을 심판하신다.
2장 1-8절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격정적 심판에 대한 예레미야의 경악과 비탄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2절의 서두에 나오며, '사정없이 쳐부수시고' 로 번역된 '삘라으'(bilah)의 원형 '빨라으'(balah)는 사람(이사28,4), 물고기(요나2,4), 뱀(탈출7,12)등이 어떤 것을 집어 삼키는 모습을 나타낼 때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이다.
하지만 본문에서처럼 강조형으로 사용될 때에는, '멸망'의 의미로 사용된다. 주님께서 심판을 내리시어 살아 있는 무리의 사람들을 삼키게 하심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데, 홍해에서 이집트 군대가 바다에 수장되는 장면(탈출15, 12)과 민수기 16장에 코라와 다탄과 아비람의 반역시에 땅이 그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산채로 삼키는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특히 예레미야는 이 동사를 본절에서 4번이나 사용함으로써(5절, 16절), 이스라엘의 처절한 상황을 현저하게 부각시켜 표현하고 있다.
한편, 주님께서 삼키신 것은 야곱의 모든 거처들이다. 여기서 '거처들'로 번역된 '나오트'(naoth)는 '나아'(naah)의 복수형이다. 이 명사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성읍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초장'(푸른 풀밭)(시편23,2 ;아모1,2), '목장'(시편83,13)을 뜻하는 표현으로, 사람은 물론 특히 짐승이 먹고 휴식을 즐길 수 있는 들판이나 개방된 장소를 의미한다.
이 말은 본절 중반부에 나오는 '성채들'과 비교되는 표현으로서,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 뿐만 아니라 광야와 들판의 초장들까지도 완전히 폐허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유다의 철저한 멸망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의 첫째 행은 유다 주요 산업의 근거지인 푸른 풀밭들을 초토화시켜 더 이상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하게 하셨음을 나타내며, 둘째 행은 국방의 초석인 견고한 성채를 파괴하여 적들의 공격을 무력하게 하셨음을 나타내고, 세째 행은 이로 인하여 나라와 나라를 다스리던 지도자들이 모두 수치를 당하게 된 상황을 나타낸다. 이러한 모든 표현은 유다 멸망의 처참한 상황을 자 보여 주고 있다.
'누가 너를 낫게 하리오?' (13)
본문에서 사용된 '고치다', '치료하다', '낫게하다' 란 뜻의 동사 '라파'(rapha)는 일차적으로 병으로부터의 치료를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때로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는 보다 특별한 동사로서 때로는 '완전하게 만들다', '수리하다' 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1열왕18,30 ;2열왕2,21 ;예레19,11)
특히 예레미야는 이 어근을 주님께서 행하시는 치료나 회복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하였다.(예레3,22 ;8,22 ;17,44 ;30.17등) 그런 점에서 본문은 인간적인 방편으로는 그 누구도, 그리고 무엇으로도 예루살렘의 멸망과 고통을 회복시키거나 완전히 치료할 수 없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슬픔과 고통, 파괴와 멸망은 오직 이러한 심판을 주관하시는 주 하느님만이 고쳐주실 수 있음을 암시한다.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복음(마태8,5~17)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8)
'저는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에 해당하는 '우크 에이미 히카노스'(ouk eimi hikanos; I am not worthy; I do not deserve to)에서 '히카노스'(hikanos)는 '가치 있는', '적합한', '알맞은'으로 번역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 8장 7절에서 '유다인인 내가'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이방인들의 집에 들어가거나 합석하지 않고 거리를 두어야 하는 유다인임을 밝히셨는데, 이것은 이방인인 백인대장의 믿음을 시험하신 거라고 볼 수 있다.
'유다인인 내가 굳이 너에게 가서 그를 고쳐야 하느냐?'의 질문에 대해, 이방인인 백인대장은 '저는 주님께서 저희 집에 들어오실 만한 가치조차도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표현했다.
이것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거나 그들과 식사를 함께 하는 등의 교제를 금지하는 유다인의 관습을 잘 알고 있었던 이방인 백인대장의 사려깊은 배려이기도 하며, 또한 마태오 복음 15장 25절과 27절에서 가나안 여자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게 해 달라는 겸손과 믿음의 모습과도 비슷한 것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렇게 이방인 백인대장의 겸손하고 믿음있는 모습을 강조하여 마태오 복음의 독자인 유다계 크리스챤들에게 큰 믿음을 가질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저'로 번역된 '모논'(monon; only)는 수식하는 문장의 의미를 제한하거나 분리하는 역할을 하는 부사로서 '단순히', '오직'이라는 뜻을 갖는다.
그리고 '말씀'에 해당하는 '로고'(logo; the word)는 '말씀'이라는 뜻의 '로고스'(logos)의 수단을 나타내는 여격 단수형이다.
따라서 이 구절을 직역하면 '다만 한 말씀으로 하옵소서'이다.
백인대장은 구약의 나아만 장군과 같은 이방인이면서도 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고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병을 고쳐 주기를 바라는(2열왕5,11) 주술적 요구를
하지 않았다.
이방인 백인대장이 바라는 것은 이방의 우상 숭배자들처럼 주문을 외거나 주술적 기원을 하는 행위가 아니었고, 스스로의 이름과 신적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고침(치유; 나음)을 입으라'는 단 한마디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이방인 백인대장은 주님의 한 '말씀'(logos) 자체에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은 참된 믿음의 소유자였던 것이다(루카4,26; 히브1,3).
믿음이 구원의 문을 열게 합니다
오래도록 위암으로 고통을 받고 계신 형제님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언제나 맑고 밝은 웃음을 가지고 미사참례를 하고 구역모임에도 빠지지 않으시려 애를 쓰셨습니다. 근황을 여쭈며 어떤 생각을 하시느냐? 고 했더니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자유를 누릴 때가 곧 오겠구나!”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꿈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좋은 꿈도 있고, 그렇지 않은 꿈도 있는데 요즘은 아주 나를 옴싹달싹 못하게 하는 꿈에 시달리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꿈이란 것을 가톨릭 성가29번 ‘주 예수 따르기로” 1절에 비유해 주셨습니다. “주 예수 따르기로 나 약속했으니 내 친구 되신 주여, 늘 함께하소서. 주 함께 계시오면 나 든든 하옵고 주 나를 이끄시면 바른 길 가리다.” 그리고 좋지 않은 꿈은 2절 “이 세상 온갖 유혹 내 맘을 흔들고 내 모든 원수들이 늘 괴롭히오니 주 나를 돌아 보사 내 방패 되시고 내 옆에 계시옴을 깨닫게 하소서.”에 빗대시며 3절은 주님께 맡기고 또 주님의 고유권한이시라고…. “저 영광 빛나는 곳 주 내게 보이니 그 아름다운 곳을 사모합니다. 주 예수 섬기기로 나 약속 했으니 끝까지 따라가게 용기를 주소서.”
‘성가로 하는 기도는 2배로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냥 입으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을 담아 간절히 기도하시는 모습에 감사했습니다. 내용하나하나가 나의 미래를 비춰주고 유혹을 극복하는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성가를 부를 때 가슴으로, 온 마음으로 불러야 하겠습니다.
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씀드립니다.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나빠도 꿈입니다. 그러나 그 꿈을 주님의 눈으로 보고, 더 큰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꿈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귀합니다. 꿈을 통해 메시지가 주어지기도 하지만 모든 것은 주님의 섭리 안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백인 대장이 예수님께 자기 하인이 중풍으로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씀 드리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마’하셨습니다. 이에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하시며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 주셨습니다. 참으로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이방인 군인이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는 이들이 많고 이들은 훗날 반드시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빛을 거부하는데서 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세례를 먼저 받고 나중에 받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래된 신자, 새 신자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얼마나 의탁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세례를 받은 지 오래 되었다고 저절로 믿음이 생기는 것도 더 많은 은총을 체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새로 영세받은 신자가 훨씬 더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시기 질투하지 마십시오.“믿음은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까롤로 까레또). 매 순간 하느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사는 믿음이 구원의 문을 열게 합니다.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구하는 바를 넘치게 받고 또 다른 것도 더 받을 것이지만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감히 청하지도 못하고 그럼으로써 얻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믿음에 믿음을 더하여 믿는 대로 이루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밤에도 야경이 시작될 때마다 일어나 통곡하여라. 주님 면전에 네 마음을 물처럼 쏟아 놓아라.” 이러한 통곡은 예루살렘의 붕괴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비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징벌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배 후에 애가는 과거의 고통을 잊지 않고 하느님의 법을 잘 지키려는 참회의 기도로 바쳐집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애가는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기도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이 인류의 고통을 치유하고 구원하도록 바치는 기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부하 사랑과 종에 대한 배려를 눈여겨보십니다. 몹시 괴로워하는 종을 위해 애쓰는 백인대장의 모습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며 그의 집으로 가려고 하시자, 백인대장은 더욱 놀라운 말을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커다란 감동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믿는 대로 그의 집에 가시지 않고 한 말씀으로 멀리 있는 종의 질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치유의 은총은 관심과 사랑을 통해서 옵니다.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에 대한 연민은 주님의 능력을 끌어옵니다. 우리가 권력자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면 많은 상처와 미움을 상대방에게 줄 수 있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치유시키시는 힘이 있습니다. 겸손한 모습으로 이웃을 만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