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간 금요일]죄인 (마태9,9-13)

2018. 7. 6. 오전 6:4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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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3주간 금요일]죄인  (마태9,9-13)


아모스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날이 온다고 한다. (아모 8,4-6.9-12)
4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5 너희는 말한다.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다 팔지?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 에파는 작게, 세켈은 크게 하고 가짜 저울로 속이자.
6 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으로 사들이자. 지스러기 밀도 내다 팔자.”
9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나는 한낮에 해가 지게 하고 대낮에 땅이 캄캄하게 하리라.
10 너희의 축제를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를 애가로 바꾸리라. 나는 모든 사람이 허리에 자루옷을 두르고 머리는 모두 대머리가 되어  외아들을 잃은 것처럼 통곡하게 하고 그 끝을 비통한 날로 만들리라.
11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12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찾아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찾아내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있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과 함께 음식을 드시며, 당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다. (마태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아모스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제1독서 (아모8,4-6,9-12)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 


앞선 아모스서 8장 4~6절에서는 타락한 선민의 대표로서의 북부 이스라엘 왕국의 지배층을 향하여 주 하느님 심판의 원인으로서의 저들의 악행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아모스서 8장 7~10절에서는 저들의 악행을 결코 잊지 않으시는 주 하느님께서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이는 심판을 내리실 것이며,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애통할 것을 예고하였다.


이제 아모스서 8장 11절이하 13절에서는 심판날이 반드시 도래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때에는 말씀이 단절될 것을 경고한다.

이러한 내용을 시작하는 본문은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라는 표현보다 '보라, 그날이 온다'라는 표현이 먼저 나온다.


하느님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기를 마지않던 자들이 멸망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아모스서 8장 11절부터 13절까지 단락의 첫 부분에서 '보라'라는 의미의 감탄사를 가장 먼저 기록한 것은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동시에 청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그날이 온다' 에 해당하는 '야밈 빠임'(yamim baim)에서 '빠임'(baim)'오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뽀'(bo)의 분사형이다.


분사형은 문맥에 따라 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의미를 모두 가질 수 있지만, 본문에서처럼 '힌네'(hinne; 보라)와 같은 감탄사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에는 모두 미래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단순한 미래에 대한 예상이 아닌, 예언자에 의해 선포되는, 반드시 성취될 미래독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도록 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즉 본문은 북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아모스서 8장 11~13절의 맨 앞에 기술함으로써 그것을 확실히 선언하고 그것의 성취를 강조한 것이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심판으로 보내실 기근의 성격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본절 상반절의 하느님께서 내리신 '굶주림'(기근)이라는 표현이나 본문의 '양식'이라는 표현은 모두 '라아브'(laab)로 동일하다.


창세기 41장 54절 등에서 '흉년'이라는 의미로 번역된 '라아브'(laab)개인적 가난이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굶주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보다 자연적 재해나 인위적 전쟁등으로 인해 국가적으로 굶주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이 기근이나 주림은 개인적 노력으로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재앙의 결과 것이다.


또한 '양식'에 해당하는 '레헴'(lehem)은 장기적 생존을 위해 넉넉하게 쌓아 둔 양식이라는 의미보다 하루 정도의 식사를 의미하는 빵(떡)으로 번역되는 단어로서(창세18,5; 판관8,5),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기본적 식사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영역본들은 '레헴''빵'(bread) 혹은 '음식'(food)이라고 번역하였다.

즉 본문이 말하는 먹을 것의 부족은 쌓아 놓은 양식이 없어서 앞으로가 걱정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당장 한 끼의 식사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긴박한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물이 없어 목마르다는 표현에서 '목마름'(갈증)에 해당하는 '차마'(tsama)라는 표현도 전쟁 등으로 인해 마실 물이 없어 당장 사람이 목말라 죽어가는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는 경우에 사용되는 표현이다(애가4,4; 호세2,3).


그런데 본문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기근 이러한 양식이나 물을 먹지 못한 기근이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굶주림과 갈증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 심판의 근본적 원인이 육신을 위한 양식과 물을 먹지 못해서 생긴 기근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을 먹지 못해서 생긴 기근 때문임을 나타내며, 육식의 양식과 물보다 영적인 양식, 즉 주 하느님의 말씀의 중요성과 그것을 지금 당장이라도 취해야 한다는 긴박성 동시에 나타낸다.


이상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준다. 

첫째, 인간 존재가  먹고 마시는 일과 관련한 육체적 필요만을 충족해서 살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적인 양식과 영적인 음료인 하느님의 말씀이며, 이것을 먹고 마셔야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신명8,3; 마태4,4).

둘째,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상징하므로 하느님의 말씀이 기근이라는 표현하느님의 현존과 임재가 떠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것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보호하심과 자비로이 여기심, 하느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즉 하느님의 떠나심은 먹을 것이나 마실 물로 인한 기갈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은 먹을 것이나 마실 것만을 추구하였지만, 이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시는 하느님께 대해서는 추구하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어리석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핍박하며 심지어 그들의 말씀 선포를 가로막기까지 하였다(아모 7,13; 12,12).

북부 이스라엘에 닥칠 심판 단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바닥나서 발생한 기근이 아니고,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추구하기는커녕 거부하고 배척한 북부 이스라엘의 교만이 자초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9,9-13)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12)


이 구절은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의 행위를 비난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일침을 가하시는 대목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메시야이신 당신의 사명이 바로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이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건강한'에 해당하는 '휘기아이논테스'(hygiainontes; healthy; whole)'건전하다', '바르다', '참되다'는 뜻을 지닌 '휘기아이노'(hygiaino) 현재 분사로서, 육체적으로 건강하다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지만, 그보다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바르다'는 뉘앙스를 더 강하게 띄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말씀하시는 스스로 '건강한 이들'이란, 종교적, 윤리적으로 올바른 이들이 아니다.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스스로 올바르다고 자부하면서, 인간의 영적 악함을 깨끗하게 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불필요하다고 하며 거부하는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바로 당시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비방하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모두 지칭하며, 그 외에도 예수님을 필요하지 않다고 거부하는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 모두를 포함한다.

그리고 '병든'에 해당하는 '카코스'(kakos; sick) 육체적으로 병들고 허약한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악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기에, '병든 이들'이라는 표현에도 '죄인들'이라는 뜻이 있다.


이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정해 놓은 종교적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로서, 하느님 대전에 진실로 구원자를 필요로 하여 자신의 죄에 대해 가슴을 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킨다.


'의사'에 해당하는 '이아트루'(iatrou; a physician; a doctor)이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을 위해 오신 분이며, 마태오 복음에서 잔치에 초대되어 온 모든 죄인들도 그 중에 포함될 것이다.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며, 예수님이 구원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은 예수님께 선택 받을 수 있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계속해서 자신들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율법주의와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선택에서 영원히 제외될 것이다.


'회개시키러'로 번역된 '메타노이아'(metanoia)'마음을 고치다'라는 동사 '메타노에오'(metanoe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마음을 바꿈'이라는 뜻이다.

루카 복음 5장 31절에서 예수님께서 막연히 죄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님을, 루카 복음 5장 32절에서 죄인들을 선택한 목적을 분명하게 언급하시면서 밝히신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를 인식하고 참회하는 죄인들의 마음을 고쳐서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부정하게 여겨 접촉하는 것을 꺼리는 죄인들과 함께 친교를 나눔을 밝히신 것이다.


    주님 품 안에 모두가 잘난 사람

     

    우리는 기왕이면 깔끔하고 멋있어 보이는 사람과 만나고 싶어합니다. 얼굴도 잘 생기고 돈도 있어 보이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호감이 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은총이요 복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매력이 흘러넘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갈수록 밥맛인 사람도 있습니다. 겉보기와는 너무도 달라서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도 참 소중한 사람인데 담을 쌓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다가 세금 징수원으로 천대를 받는 사회계급에 속해 있는 마태오라는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길을 가시다가 부르셨다는 것은 하루하루 삶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부르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삶의 현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길이란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에 이르는 통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현장인 이세상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세상은 간이역입니다. 종착역은 하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악명 높은 사기꾼이나 탐욕이 가득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공개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 집의 식탁에 앉아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죄인과 의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세리는 부정한 수단과 방법으로 돈을 버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주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혐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자기가 번 돈을 가치 있게 쓸 줄을 몰랐던 인색한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천대 받고 따돌림 당하던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과 자리를 함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렇게도 안목이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안목이 없다고 생각하는 만큼 예수님의 품이 넓다는 것입니다. 그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문을 크게 열어도 스스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바리사이들이 꼭 그러했습니다. 마태오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바로 영적성장이 멈춘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안주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돌림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고 그곳을 떠나는 것이 두려웠고, 그곳을 떠나면 죽는 줄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을 생각하면 떠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은총의 날, 진정한 행복의 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여전히 옛 생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안주를 탈피하여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안주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큰 품을 우리의 마음으로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희생제사가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할 때,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될 때 거기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자비로운 사람, 연민을 지닌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북 왕국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에 빠져 세상 탐욕에 집착하며 하느님을 저버렸을 때, 하느님께서는 아모스 예언자를 뽑아 그들에게 파견하시고 그들의 방탕과 만용을 징벌하십니다.

    “너희의 축제를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를 애가로 바꾸리라.” 그들이 지금은 먹고 마실 것이 넘쳐 나고 가난한 이들의 것까지 빼앗아 자기 배를 채우지만, 그들이 곧 굶주리게 될 것이고, 양식과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게 될 것이라고 아모스 예언자는 경고합니다.


    세상살이가 넉넉하고 물질이 풍요로워지면, 더 잘 먹고, 잘 입고, 잘살려는 고민이 늘어납니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리고, 상대적 빈곤감에 싸여 충분히 가지고도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돈은 모든 근심과 죄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돈이 쌓이는 곳에는 영적인 가치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세리였던 마태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주저 없이 따라나서는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먹고사는 데 큰 문제가 없던 세리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은, 돈과 재물을 관리하면서 본 인간의 탐욕의 결과를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돈 때문에 울고, 재산 때문에 분쟁을 겪고, 친구를 잃고 나면 비로소 깨닫습니다.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쌓아야 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가진 재물이 아니라, 남에게 베푼 사랑으로 우리를 평가하시기 때문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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