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간 토요일]단식 (마태 9,14-17)

2018. 7. 7. 오전 6:5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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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3주간 토요일]단식 (마태 9,14-17)


아모스 예언자는, 주님께서 그날에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운명을 되돌리시리라고 한다. (아모 9,11-1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11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벌어진 곳은 메우고 허물어진 곳은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12 그리하여 그들은 에돔의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린 모든 민족들을 차지하리라.─ 이 일을 하실 주님의 말씀이다. ─
13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밭 가는 이를 거두는 이가 따르고  포도 밟는 이를 씨 뿌리는 이가 따르리라.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리라.
14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운명을 되돌리리니  그들은 허물어진 성읍들을 다시 세워 그곳에 살면서  포도밭을 가꾸어 포도주를 마시고 과수원을 만들어 과일을 먹으리라.
15 내가 그들을 저희 땅에 심어 주리니  그들은 내가 준 이 땅에서 다시는 뽑히지 않으리라.” ─ 주 너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며,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단식할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 9,14-17)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제1독서 (아모9,11-15)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벌어진 곳을 메우고, 허물어진 곳을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그리하여 그들은 에돔의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린  모든 민족들을 차지하리라." (11~12)


아모스서 전체는 크게 4부 구성되어있다. 그 가운데 본문의 9장 11절 이하 15절까지는 마지막 제4부이다. 앞선 제1~3부의 내용들이 모두 심판과 관련된 진술이었던 것과 달리 이 부분에서는 선민의 구원과 회복 예언하고 있다.


비록 다섯 절의 짧은 내용이지만,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것은 아모스서 전체에서 제시된 심판 경고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돌이킴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동시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해 선민의 역사가 비록 굴곡을 겪지만 마침내 영원한 구원과 승리의 역사가 될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서의 제4부는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11)  

첫째 부분인 본절(11절)다윗 왕가의 왕권 복원 약속된다. 여기서 사용된 '그날에'라는 표현은 지금까지는 심판의 날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아모2,16; 5,18; 8,3.9).


그러나 본문에서는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 바뀌어 묘사되는 것이다. 즉 본문에서 '그날'다윗의 무너진 초막(장막)을 일으키는 날이라고 묘사된 것이다. 

그런데 '초막'(장막)이란 표현에 대해서는 해석상 이견 있다.


구약 성경에서 주로 '만남의 천막'으로 번역되는 '오헬'(ohel)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기간 동안에 하느님께서 거하실 장소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만든 성막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초막'(장막)으로 번역된 '쑥카트'(sukkath)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기간 동안에 지내던 숙소인 텐트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에도 광야에서 '쑥카'(sukka)에 지내던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일정 기간동안 초막(장막)에서 생활하는 절기를 지켰는데, 그 절기의 이름이 '초막절'(장막절) '하그 핫쑥코트'(hag hassukot)이다(레위23,42.43).


즉 이 '쑥카'(sukka)라는 단어는 출애굽 당시의 하느님의 동행과 보호하심을 상기케 하는 표현이다.


물론 다윗의 무너진 초막을 일으킨다는 표현다윗의 왕권이 회복되고,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 부흥기였던 다윗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게 된다는 예언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쑥카'(sukka)라는 표현은 그러한 회복이 하느님의 임재와 동행하심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암묵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혹자는 본문의 '쑥카트'의 모음이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고, 일반 명사가 아닌 고유 명사 '쑥코트'(sukkot) '수꼿'으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본문의 '쑥카트'다윗 임금이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통치하는 데에 중요한 군사 기지로 사용한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 된다.


아모스 당시에는 사실 아람 임금 하자엘의 공격으로 인해 침략을 당해 수꼿의 영토는 빼앗긴 상태였다(2열왕10,32.33).


이같은 역사적 정황과 연결시켜 '쑥카트' '쑥코트'(수꼿)으로 보면, 심판의 날에 하느님께서 다윗의 무너진 초막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표현은 다윗 당시에 정복하였지만 지금은 다른 나라에 빼앗긴 수꼿을 다시 찾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의미로 이해한다면, 본문 이후 제시되는 '벌어진 곳을 메우고, 허물어진 곳은 일으켜저 그것을 옛날처럼 세우리라.'고 한 표현은 수꼿의 성읍을 회복한 뒤에 다시 정비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을 수꼿의 재정복에 대한 예언으로 보든, 다윗의 왕조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예언으로 보든, 모두 다윗 시대에 가나안 지역의 많은 곳을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나라도 다윗이 통치하는 당시 이스라엘을 함부로 넘보지 못함으로써 평화를 구가하였던 당시의 영광을 회복할 것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 다윗 시대의 평화와 번영의 기초가 되었던 하느님을 바로 믿고 섬겼던 온전한 신앙의 회복이란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본문은 그날 주님의 날이 되면,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에 근거한 다윗 시대의 영광과 번영을 완전히 회복할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한편, 사도행전에서는 이방인들을 교회에 받아 들이는 문제와 관련하여 예루살렘에서 사도 회의가 열렸을 때, 이 회의를 주도하는 인물 중 야고보가 본문의 내용을 인용하여 이방인들을 하느님의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당함을 밝히는 내용이 제시된다.


"그 뒤에 나는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다시 지으리라. 그곳의 허물어진 것들을 다시 지어 그 초막을 바로 세우리라. 그리하여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모든 민족들도 주님을 찾게 되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하고 이 일들을 실행하니 예로부터 알려진 일들이다."(사도15,16~19; 아모9,11~12)


이런 점에서 볼 때, 다윗의 초막(장막)을 다시 세우고 온전하게 회복시킬 것이라는 본문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민족들의 모든 백성들로 구성된, 온전한 하느님 나라의 회복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서의 다윗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벌어진 곳을 메우고, 허물어진 곳을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본문은 다윗의 초막을 다시 세울 것이라는 상반절의 표현에 이어지는 내용으로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초막을 보수할 것인지를 예언하는 내용이다.


본문의 '벌어진 곳'이라는 표현에서 여성 3인칭 복수형은 남부 유다와 북부 이스라엘을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본서의 협의적 배경이 북부 이스라엘이기는 하지만, 아모스서 7장 15절, 8장 2절 등에 기록된 '내 백성 이스라엘'이란 표현에서 암시되는 것처럼 본서의 청중이나 독자는 북부 이스라엘 만이 아니라 남부 유다를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남부 유다와 북부 이스라엘이라는 두 개의 분단 국가로 나뉘어진 이스라엘이 하나로 통일될 것이란 의미를 내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구약의 예언서에 제시된 선민 회복 예언 중에는 다중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문을 비롯한 본 단락은 멸망한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의 정치적 회복을 의미할 수도 있고, 주 하느님 신앙의 회복에 의한 선민 위상의 복귀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메시야의 재림으로 인하여 성취되는 신약 선민의 교회의 설립과 성령의 역사에 근거한, 교회 구성원에 의한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종말의 때에 완전하게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지향한다. 

이처럼 예언서에 예언된 회복은 짧게는 외세에 의하여 멸망당한 선민 공동체의 재건으로부터 길게는 구세사의 정점에 있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의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에돔의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린  모든 민족들을 차지하리라.'(12)

앞선 아모스서 9장 11절에서는 장차 하느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이 다윗 왕가의 왕권과 다윗 때의 영광을 회복할 것을 예언하였다.  

이어지는 아모서 9장 12절에서는 모든 민족을 기업(상속)으로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회복될 때에는 아모스서 9장 11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다윗 임금시절의 영광을 모두 회복할 뿐 아니라 본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변의 모든 나라들을 그들의 통치 아래에 들어오게 할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 이스라엘이 에돔을 비롯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모든 민족들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영토를 다시 획득하며, 더 나아가 다른 나라까지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로인해 하느님의 나라가 왕성하며 더욱 견고하게 세워지고 완성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과거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세상 만국의 백성들이 하느님을 인정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이며, 즉 궁극적으로는 복음 전파를 통한 하느님 나라의 확장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복음(마태9,14~17)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16~17)


마태오 복음 9장 15절'신랑을 빼앗길 날'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빼앗길'에 해당하는 '아파르테'(aparthe; will be taken)'~로 부터' (from)라는 의미를 지니는 전치사 '아포'(apo)와 '들어올리다', '가져가다'는 뜻이 있는 '아이로'(airo)의 합성어'아파이로'(apairo)가정법 부정(不定) 과거이다.

여기서 부정(不定)과거(Aorist)가 쓰인 것은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드러낸다.


마태오 복음을 읽는 초대 교회 유다계 크리스찬들은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했으므로, 이 단어의 상징적인 뜻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A.D.1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12사도의 가르침' '디다케'(didache)를 보면, 바리사이들이 단식하던 월요일과 목요일이 아니라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는 새로운 전통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세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초대 교회 시대에 마태오 복음 9장 15절의 가르침대로 단식이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예수님을 잃은 인간적인 슬픔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인간의 죄악을 슬퍼하며 그 죄를 보속하고, 무죄하신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단식을 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단식은 아직도 메시야가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유다 공동체들의 단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으로 치우친 단식에 대해 현실의 삶 속에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단식이라고 비판했다.

그가 강조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은 자신의 삶이 변화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단식인데, 복음의 윤리적인 면이 동반되는 단식이었다(이사58,6).


한편, 마태오 복음 9장 16절에서 '헌 옷'에 해당하는 '히마티오 팔라이오'(himatio palaio; an old garment)형식적이며 경직된 이전의 모든 구질서낡은 가르침의미하며, '새 천 조각'에 해당하는 '에피블레마 라쿠스 아그나푸'(epiblema rakous agnaphou; a patch of unshrunk cloth; a piece of new cloth)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새 질서와 새 가르침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아직 줄어들지 아니한 새 옷감을 헌 옷감에 대어 기워놓으면, 당장에는 쓸모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옷을 물로 세탁할 경우에 새 옷감이 줄어들면서 헌 옷감을 잡아당겨 옷에 주름이 지거나 찢어져서 옷 전체를 망가뜨리게 되므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새 것과 헌 것이, 즉 예수님의 복음과 유다인들의 율법주의적 사고가 절대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과거의 가르침을 폐지하거나 반대로 과거의 가르침에 단순하게 덧붙인 차원의 것이 아니고, 과거의 가르침의 근본 정신을 밝히며, 이것을 형식적으로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키게 함으로써 온전하게 완성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9장 17절에서 발효되지 않은 '새 포도주'에 해당하는 '오이논 네온'(oinon neon; new wine)을 가죽 부대에 넣어두면 차츰 발효가 되어 처음보다 더 큰 부피로 팽창하게 된다.

신축성이 있는 새 가죽 부대(wineskins)는 새 포도주의 팽창력을 견딜 수 있지만, 헌 가죽 부대는 탄력성과 신축성이 없기 때문에 새 포도주의 팽창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새 포도주로, 유다교의 고루한 가르침을 헌 가죽 부대로 비유하시면서 유다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결코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이다.

바리사이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태의연한 과거의 가르침에 얽매여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비판만 해서는 안되고, 자신이 변화되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 9장 16~17절은 율법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정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구현되었으므로(요한1,45; 마태5,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계약과 약속의 말씀을 따라야만 과거의 율법을 바로 준수하는 것이 된다는 으로 이해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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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것을 헌것에 담는 사람은 없습니다. 새것을 잘 보존하려면 찢어지지 않는 새 부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바리사이들과 단식에 대해 논쟁하실 때였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신심 깊기로 소문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축일에 하는 의무적인 단식 말고도 자발적으로 단식을 하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단식이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진정한 표지가 아니라 남에게 보이려는 위선적 행위가 되는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본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식은 모든 구원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마음을 온전히 여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혼인 잔치의 신랑에 비유하시면서, 하느님의 말씀과 기적으로 세상에 구원을 베푸시는 복음의 기쁨을 맛보는 제자들이 슬퍼하며 단식할 수 없지 않느냐고 하시며 권위 있게 말씀하십니다. 비록 신심 깊은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깊이 섬기면서 단식으로 재계를 지켰지만, 그들의 낡은 율법에 대한 열정이 예수님께서 새롭게 열어 주시는 복음의 새 부대에 담겨질 수는 없음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허물어진 성읍을 다시 세우고 포도밭을 가꾸어 포도주를 마시는 새 날을 희망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이 되돌려질 날을 예언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등장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새로운 계약에 담아내는 제자들의 희망으로 이어집니다. 비록 교회가 역사 안에서 박해와 타락의 역사를 벗어나지 못하기도 했지만, 예수님의 새 부대에 담겨진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는 일은 여전히 교회의 소중한 소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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