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믿음 (마태 9,18-26)

2018. 7. 9. 오전 7: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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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믿음 (마태 9,18-26)



호세아 예언자는,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영원히 아내로 삼으시리라고 한다.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16.17ㄷ-18.21-22)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6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17 거기에서 그 여자는 젊을 때처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올 때처럼 응답하리라.
18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는 네가 더 이상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21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22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혈루증을 앓는 여자에게, 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하시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어 그의 죽은 딸을 일으키신다. (마태 9,18-26)
18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20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21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23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24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25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26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제1독서 (호세2,16,17ㄷ-18.21-22)

"그 날에는 네가 더 이상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고,(18)

 ~~~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21~22)


고대 근동 지방의 최고의 신은 '엘'(el)이고, '엘'의 부인이 '아세라'

(바다의 신)이며, 그 아들이 '바알'(baal)이다.

나중에는 어머니(아세라)와 아들(바알)이 같이 산다.


'바알'은 하늘의 신으로서 햇빛과 비를 주관하면서 '풍요다산'을 가져다 주는 신이다.

한마디로 부자로 만들어 주는 신이다.


이교도의 신전에서 '아세라'를 섬기는 것은 남녀가 공개적으로 내놓고 혼음하는 것이며,

이것을 보고 하늘의 신 바알이 기뻐 햇빛과 비를 내려준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은밀한 욕구(정욕)를 투사하여 만든 신이

아세라 신이며, 물질적인 탐욕을 투사하여 만든 신이 바알이다.


그러니까 '아세라''바알'이니 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채워주는, 인간이 만든 우상이요,

없는 신들이다.


이스라엘이 '야훼 유일신 신앙'을 저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졌다는 것

하느님의 뜻을 준수하여 살기 보다는 기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자신의 입맛대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맞추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내 바알'이라고 부르는 해프닝이 일어난 것이다.


탈출기 23장 13절에 보면,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다른 신들의 이름을 찬미하여 불러서는 안된다.

그것을 입 밖에 내어 들리게 해서는 안된다" 는 명령이 있다.


탈출기 23장 13절의 '불러서는 안된다' 해당하는 원어는

'로 타즉키루'(lo thazkkiru)이고, 호세아 2장 18절의 '부르지 않고'

해당하는 원어는 '이작케루'(izakkeru)인데, 원형이 둘 다 '자카르'(zakar)이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기억하다'(remember)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탈출기 23장 13절에서는 분명 우상숭배자들이 제사 의식을 수행하면서

그 신들을 불러내기 위해 주문 따위로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와

관련된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며, 이것은 동일한 문법 패턴을 따르는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로 타즉키루' 원문상 '결코(또는 영원히) 부르지 마라' 절대 금지 명령인데,

이스라엘은 그 명령을 수백년동안 계속해서 어겨왔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들을 회복시키는 때가 이르면,

과거 그 계약적 금지 명령을 당신 자신이 주도하셔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행하도록 하실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하고자 하느님께서는 '웰로 이작케루'

(yello izakkeru)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수백년 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하느님께서 주도적으로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21~22)


호세아서 2장 21절과 22절은 연결된 구절인데, 여기서 '나는 너를 아내로 삼아'

해당하는 '웨에라스티크 리'(yeerastik li)라는 어구가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다.


이러한 삼중적 반복은 결혼 사실을 최상급으로 강조한다.


그리고 이 두 구절은 앞의 호세아서 2장 18절과 19절의 선언과 대조를 이룬다.

앞의 두 구절의  선언은 물론 공허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혹독한 심판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공의에 입각해 그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혹독한 심판을

당하였고,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므로

그 효력이 다 채워지고 소실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전혀 새로운 혼인 관계로

들어가 영원히 그 관계를 지속하실 것임을 선언하신다.


이러한 혼인 관계는 과거 주님께서 시나이산에서 맺었던 계약(탈출19,5.6;

24,1~8)을 통해 혼인 관계에 들어갔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혼인 관계이다.


옛 시나이산 계약에서 시작된 혼인 관계는 이스라엘의 일방적 부정 행위

배교와 범죄 행위로 말미암아 완전히 깨져 버렸다.


하느님께서는 그 실패의 책임을 물어 이스라엘 자손을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를 통해 심판하시고,

이방인의 땅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하시고 유배 생활을 하도록

하시는 등 극한적인 환난을 내리셨다.


그러나 훗날, 하느님께서 회복된 이스라엘과 맺으신 새 계약은

과거와는 달리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완전한 혼인 관계를 이룩할 것이다.


호세아서 2장 21절에서만 두 번 사용된 '나는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해당하는 '웨에라스티크'의 원형 '아라스'(arash)는 어원상 공식적으로

또는 계약상으로 정혼(약혼)하는 것을 의미한다(신명20,7; 22,28; 2사무3,14).


이를 확인하는 정혼식(약혼식)에서 미래의 신랑은

미래 신부의 부친(장인)에게 결혼 지참금을 지급하였다.


정혼식(약혼식)은 법률상으로는 공식적 결혼을 행한 것이나

다름없는 결혼식 직전의 최종 단계였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는 정혼식을 마친 여인은 율법상

결혼한 것과 동일하게 취급되었다(신명20,7; 22,23).


여기에서 이같은 의미를 지닌 표현을 통해 주님께서 이스라엘과

혼인할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은 그 혼인이 완전히 새로운 혼인,

즉 첫 신랑과 첫 신부가 행하는 정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이 이미 약속되었으니 실제적인 혼인과 혼인 관계도

뒤따라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과거 자신과의 첫 혼인에 실패한 이스라엘을

마치 전혀 혼인하지 않은 존재처럼 여겨서 새로운 신부로

맞아들이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옛 계약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맺어지는

새 계약의 측면을 암시한다(예레31,31~34; 마태26,28).


이러한 새로운 계약은 '계약'이나 '언약'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지 않고

혼인 관계로 표현한 것은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


즉 계약(언약)은 당사자간의 사랑이 없어도 이행 가능하지만,

혼인이라는 관계는 부부 사이의 사랑없이는 이행이 불가능하다.


이를 감안할 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고 하신 것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그들과 계약 관계를 맺으신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부부가 그러한 것처럼 그들과 완전한 한 몸처럼 결합(일치)를 이루고(창세2,24)

뜨거운 사랑의 관계를 영원토록 간직하고 지키실 것임을 선언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신랑의 위치에서 신부에게 장가를 들어

호세아서 2장 21~22절에 전치사 '뻬'(be)로 이끌리는 다섯 개의 명사로

비유되는 결혼 지참금을 신부에게 지급하신다.


다섯 가지 지참금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행위가 아니라 모두

본질적으로 하느님께 속하는 그분의 속성 혹은 태도를 의미한다.


이 다섯 가지 요소는 원래 하느님의 본질에 속하는 속성

(the essential attributes)이다.


그분은 회복된 이스라엘과의 새로운  혼인 관계를 영원히 유지시킴에 있어서

이와같은 다섯 가지 속성으로 그 관계를 완전하게 만드실 것이다.


이제 전적으로 하느님께 속하는 다섯 가지 지참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의'에 해당하는 '뻬체데크'(betsedeq)이다.

        이 단어의 원형은 '체테크'(tsedeq)로서 이것은 이 문맥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그에게 요구하시는 어떤 도덕적 완전성이 아니라

        그 분이 그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행위라는 것을 입증하는

        하느님의 완전성 지칭한다.


둘째, '공정' 해당하는 '우베미쉬파트'(ubemishphat)이다.

        이 단어의 원형은 '미쉬파트'(mishiphat)이며, 어원적으로 법률적인 입장에서의

        합당한 정의나  혹은 법률에 따라 재판하는 판결 또는 규례 등을 의미한다

        (창세18,19; 탈출15,25; 28,15; 민수15,16; 시편48,12; 89,15).

        이 문맥에서는 절차상의 정당성, 즉 주님께서 불법적으로 혹은 편법으로

        이스라엘에게 장가드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절차를 밟아 그 어떤 세력에게도

      흠이 잡히지 않는 면모를 갖추어 장가드실 것을 의미한다.


셋째, '신의'에 해당하는 '우베헤쎄드'(ubehesed)이다

        이 단어의 원형은 '헤쎄드'(hesed)이며, 어원상 언제 어디서든지

        변함없는 신실함을 보이는 충성된 사랑(steadfast love)를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혼인 관계로 들어가시면서 그 신부가 되는 자기 백성에게

        그런 성실함으로 끝까지 사랑하실 것이다.


네째, '자비' 해당하는 '우베라하밈'(uberahamim)이다.

        이 단어의 원형은 '라함'(raham)으로 어머니의 자궁(womb)이나

        사람의 내장(bowel)을 의미하며(창세49,25; 1열왕3,26), 여기에서 유추하여

        구약 성경에서 대부분 상대방, 특히 자녀나 혈육 관계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무한하고 뜨거운 사랑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사용된다

        (창세43,30;1열왕3,26; 2역대30,9).

       

        본문에서 이 단어는 주님께서 회복된 이스라엘을 자신의 혈육으로 생각하시며,

       마음이 탈 정도로 뜨겁게 사랑하시고,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며,

       그들의 필요를 풍족히 채워 주시는 분으로 그들에게 장가드실 것을 나타낸다.


         특히 여기에서 이 단어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그 사랑의 정도를 강조하는

         기능을 하며, 과거 자기 백성에 대해 '로 후라마'(lo ruhamah; 가엾이 여김을

       받지 못하는 여자)라 칭하면서 자비를 거두셨던 상황(호세1,6)을

         근본적으로 바꾸실 것임을 보여준다.


다섯번째, '진실' 해당하는 '뻬예무나'(beemunah)이다.

        이 단어의 원형은 '에무나'(emunah)로서 이것은 확고히 서 있는 상태를

        강조하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하느님의 거짓없는 진실성,

      영원히 변치 않으심, 참된 진리등을 나타낸다.


주님께서 이상에서 밝힌 다섯 지참금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장가들어

그들과 영원히 사실 것이다.

이것은 그 새 혼인 관계가 영원히 파괴되지 않고 지속될 것을 나타내며,

이 혼인이 종말론적 의미를 갖는 혼인임을 암시한다.

그 결과 그들은 주님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네가 알게 되리라'에 해당하는 '웨야다앗트'(yeyadaath)의 원형

'야다으'(yadah)는 단순히 사실 관계를 아는 지적 앎을 말하는 단어가 아니고,

직접적이고 생생한 체험을 통한 앎이나(판관3,2) 육체적, 인격적 관계를 통해

상대방을 보다 깊이 확실히 아는 것 의미한다(창세4,1; 탈출8,18; 32,22).


혼인 관계를 나타내는 문맥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본문에서 이것은 신부되는 이스라엘이 주님과의 혼인 관계에 들어감으로써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육체적으로 아는 것처럼, 하느님을 본질적으로 인격적으로

깊이있게 알고, 그들에 대한 그분의 진심을 알고, 그분의 뜻을 깨닫고,

영원히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가 될 것임을 나타낸다.


나와 하느님이 혼인 즉 영적 혼인을 한 관계라는 걸 상상한 적이 있나요?
그런데 오늘 호세아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몸소 오셔서 새 계약을 맺어 주신다.
우리는 부부 즉 인격적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부부라고 말씀하신다.


유교적 가부장적 권위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감이 잘 오지 않는 이야기인 것처럼 들린다.
하느님의 이러한 일방적인 사랑(one side love)에 대해 

우리 인간은 무응답과 무관심에 죄로 응답하니 답답할 뿐인 것이다.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복음(마태9,18~26)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0~21)


여기에 '그때에'에 해당하는 '카이 이두'(kai idou; and behold)는 회당장의 딸을

소생시키는 기사 도중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의

삽입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예수님께 다가와 옷자락의 술을 만진 여자가 앓고 있던 병은 '혈루증'(hemorrhagind)인데,

이것은 지속적으로 하혈을 하는 증세를 보이는 부인병의 일종으로서 레위기 15장

25~27절에 의하면 부정한 병으로 간주된다.


또한 혈루증을 앓고 있는 사람만 부정한 것이 아니고, 그 병을 앓는 사람과

접촉을 한 사람까지 부정하게 되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았으므로, 위의 유다인의 율법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여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그분의 옷자락의 술을 만지려고 한 행위는

거의 목숨을 건 시도였다.


그러나 그 여자가 겪어 온 12년간의 육체적 고통과, 그에 못지 않게 종교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겨지고,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배척당하고 소외되는 고통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옷자락의 술만이라도 만지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마태9,21)은 그 여자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서라도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만든 것이다.


결국 12년간 그 여자가 겪은 고통은 예수님이라는 하느님의 아드님께 대한

믿음을 갖게 하고, 그분을 직접 만나게 하는 중요한 매개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인생의 여정에서 고통과 괴로움을 겪을 때마다 그 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로 나아오며, 그리고 나와서 그분의 옷자락의 술이라도 만지는

믿음을 가지라는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신호(sign)로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인에게서 어떤 비관론적 인생관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마태오 복음 9장 21절에서 '만약'(if)에 해당하는 '에안'(ean)은 번역하지 않았고,

'대기만 하여도''만'으로 번역된 '모논'(monon; only; but)이 나오는데, 이것은

'유일하게', '오직', '다만'이라는 뜻의 부사로서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그 일만을 하여도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 여자의 믿음이 매우 확고하였음을 잘 나타낸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 여자가 예수님의 옷자락의 술만 만져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으로

생각한 것을 미신적인 믿음으로 그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하느님으로

영접하여 구원받는 인격적인 믿음으로 묘사하고 있다(마태9,22).


여기서 그 여자의 혈루증과 예수님의 겉옷'인간의 부정함''하느님의 거룩함'

상징물로 대조되고 있는데, 인간 자신의 부정은 오로지 하느님의 거룩함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 9장 2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스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믿음으로 만진 손'을 가진 그 여자를 찾으셔서 보시며,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구원하였다'에 해당하는 '세소켄'(sesoken; has heald; has made

whole)영적 구원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는 '구원하다'라는 뜻의 '소조'

(sozo)원형으로 취한다.


그 여자의 예수님을 향한 인격적인 믿음은 자신을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까지 구원하는 결과를 나은 것이다.



믿음은 새로운 나로 살게 합니다

 

어느 한 수도원이 있는 깊은 산속에 한 은수자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도원의 원장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한창 번성하였던 수도원이 쇠퇴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원장은 수도원을 어떻게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은수자에게 조언을 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은수자는 죄송합니다. 저는 아무런 조언도 드릴게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당신들 가운데 구세주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수도원장은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다섯 명 밖에 남지 않은 수도원에 “구세주가 계시다는 은수자의 말을 모두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들 중에 구세주가? 구세주가 있다고? 다섯 중에 누가 구세주란 말인가? 그 날부터 수도자들은 구세주일지도 모르는 서로를 깊은 존경심과 사랑을 가지고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수도원의 분위기는 전과는 사뭇 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점차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수도원을 찾아와 그 수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고 수도자가 되겠다고 지원하는 젊은이들도 많아져 옛날처럼 번창한 수도원이 되었답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이웃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있는 눈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개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는 생각을 가지고 당신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을 아시고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9,22). 하고 이르시며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불치병을 낫게 하셨지만 내가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육적인 치유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주님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에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의 공로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의지에 의한 협력을 기다리십니다. 여인은 감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당시의 율법으로는 부정을 탄 여인이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내어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과거에 매여 있지 않고 새로운 구원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능력의 손길에 협력하면서 내 믿음이 나를 구원 하였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결코 인간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새로운 나로 살게 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이상을 체험케 합니다. 인간은 끝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란을 피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곧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몰아내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그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한번 비딱해지면 기적을 보고도 또 비웃을 것이며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가득한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딸의 손을 잡아주셨듯이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고 일으켜 주십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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