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화요일]일꾼 (마태9,32-38)

호세아 예언자는, 송아지 신상은 대장장이가 만든 것일 뿐 결코 하느님이 아니라며, 주님의 분노를 전한다. (호세 8,4-7.11-13)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4 임금들을 세웠지만 나와는 상관없고 대신들을 뽑았지만 나는 모르는 일이다. 그들은 은과 금으로 신상들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망하려고 한 짓일 뿐이다.
5 사마리아야, 네 송아지를 내던져 버려라. 내 분노가 그들을 향해 타오른다. 그들이 언제면 죄를 벗을 수 있을까?
6 송아지 신상은 이스라엘에서 나온 것 대장장이가 만든 것일 뿐 결코 하느님이 아니다. 정녕 사마리아의 송아지는 산산조각이 나리라.
7 그들이 바람을 심었으니 회오리바람을 거두리라. 줄기에 이삭이 패지 못하니 알곡이 생길 리 없다. 알곡이 생긴다 하여도 낯선 자들이 그것을 집어삼켜 버리리라.
11 에프라임이 제단들을 많이도 만들었지만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요 그 제단들은 죄짓는 제단일 뿐이다.
12 내가 그들에게 나의 가르침을 많이 써 주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낯선 것으로만 여겼다.
13 그들은 희생 제물을 좋아하여 그것을 바치고 그 고기를 먹지만 주님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제 주님은 그들의 잘못을 기억하고 그들의 죄를 벌하리니 그들은 이집트로 돌아가야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신다. (마태 9,32-38)
그때에 32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마귀가 쫓겨나자 말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호세아8,4-7.11-13)
"사마리아야, 네 송아지를 내던져 버려라. 내 분노가 그들을 향해 타오른다. 그들이 언제면 죄를 벗을 수 있을까? 송아지 신상은 이스라엘에서 나온 것, 대장장이가 만든 것일 뿐, 결코 하느님이 아니다. 정녕 사마리아의 송아지는 산산조각이 나리라. 그들이 바람을 심었으니,회오리바람을 거두리라." (8,5-7ㄱ)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우상을 두번씩이나 '그것'(it) 이라는 의미의 대명사 '후'(hu)로 칭하신다. 우리 가톨릭 새 성경은 '그들' 이라고 번역했으니, 너무나 들어 높인 잘못된 번역이라 생각된다.
주님께서 송아지 우상을 '그것'(it) 이라고 부른 것은, 당시 이스라엘이 그것을 인격적 존재로, 신적 권능을 지닌 것으로 여긴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지적하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즉 그것은 인격적 존재도 아니며, 신적 존재는 더더욱 아니며, 인격이 아예 없는, 생명 없는 물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바로 '그것'이라는 대명사를 반복 사용하여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것이 '대장장이가 만든 것일 뿐'(6) 이라는 표현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우상이나 조각품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기술자가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그들은 주님의 명령을 받아 만든 것이 아니라, 북부 이스라엘의 창건자 예로보암 1세의 지시로 만들었다. 예로보암 1세는 북부 이스라엘 백성이 남부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희생 제물을 바치러 올라갔다가, 남부 유다 임금에게로 마음이 돌아설까봐, 북부 이스라엘 자손들이 지킬 축제일을 새로 정하고, 베텔과 단에 성소를 새로이 세운다(1열왕12,25-33). 그러고 나서 성소 두 곳에 금송아지를 하나씩 세워 둔다.
본문에 '이스라엘에서 나온 것'(6) 이라는 진술에서 이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 이처럼 사람이 고안하고 사람이 명을 내려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그것이 신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에 신성을 부여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다.
본문에서 '참된 신'에 해당하는 '엘로힘'(elohim)은 '하느님'을 지칭하는 장엄 복수형 표현으로 전능하신 하느님 자신을 지칭한다(창세1,1). 그 우상이 '하느님' 이 아니라는 진술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금송아지 우상을 '하느님'으로 생각했거나, '하느님'과 대등한 어떤 신적 존재로 인정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왕의 정책을 지지하고자, 그처럼 거짓된 주장을 사실처럼 왜곡시키는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정녕 사마리아의 송아지는 산산조각이 나리라' (6)
'정녕'으로 번역된 '키'(ki)는 많은 경우 이유 접속사로 사용되지만, 문맥에 따라 이어지는 문장을 강조하는 부사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본문에서도 바로 이러한 용례로 사용되어,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산산조각 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반드시 그같은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이 바로 이'키'(ki)라는 부사를 통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산산조각이 나리라'에 해당하는 '쉐바빔 이흐예'(shebabim yihye)는 번역 그대로 그 우상이 박살나버릴 것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은 생명 없는 우상이 맞이할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오래 동안 헛된 망상을 쫓아 스스로의 멸망을 재촉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장차 필연적으로 박살나버리고 말 것을 참 하느님으로 착각하면서, 하느님처럼 떠받들며 살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그것이 무참하게 파멸할 때마다, 비로소 그것이 믿고 의지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을 것이지만, 그때의 상황은 결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늦은 것이 되고 만다.
'그들은 바람을 심었으니,회오리바람을 거두리라.' (7ㄱ)
본문은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바람'이란 이미지를 사용하여 부각시킨다. 그들은 '바람'을 심고 '회오리바람'(광풍)을 거두는 자들로 소개된다. 즉 여기서는 씨 뿌림과 수확의 원리가 나타난다.
봄에 씨앗을 뿌리면 가을에 수확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정하신 자연의 이치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경우 '바람'을 심는다고 진술된다. 여기서 '바람'은 비유적으로 '공허함', 덧없음', '허망함' 등을 의미한다.
즉 이스라엘이 바람을 심는다는 말은, 그들이 열과 성을 다해 하는 모든 일들이 허망하고 공허한 일들 밖에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들의 우상 숭배와 그들의 간음과 탐욕 등은 아무 결실도 맺을 수 없는 공허하고 덧없는 것들일 뿐이다.
사마리아의 우상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나, 국제 관계 속에서 앗시리아나 이집트 등에 의존하는 것은 공허한 행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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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오리바람'에 해당하는 '쑤파타'(suphatha)는 매서운 폭풍이나 거친 회오리바람, 광풍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본문에서는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을 상징하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자주 죄인들에 대한 의로우신 하느님의 진노의 심판을 상징하는 용법으로 사용된다 (시편83,16 ; 잠언1,27 ; 이사66,15 ; 나흠1,3).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복음(마태9,32~38)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36~38)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에 해당하는 '에스플랑크니스테'(espllangchnisthe)는 '~을 불쌍히 여겨 마음이 움직이다'(be moved with compassion for)이다.
'보기에 답답하고 딱해서 걱정하고 안쓰럽게 여기는' 단순한 감상적인 느낌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죄와 질병으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인간들을 향해, 인간들을 창조하셨고 또한 구원하러 오신 하느님의 마음을 드러낸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이유가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마태오 복음 사가가 전한다.
여기서 '시달리며'에 해당하는 '에스퀼메노이'(eskylmenoi; fainted; harassed)는 '지치고 쇠약해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기가 꺾여'에 해당하는 '에르림메노이'(errimmenoi; helpless; scattered abroad)는 '의지할 데 없고 길거리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이라는 뜻이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인 결핍 상태에 있었고,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구심점이 없었다.
이런 차원에서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을 포함하는 온 우주의 갈망을 충족시키는 것이며, 예수님은 여기서 영적인 목자의 의미를 통해 영적으로 방황하는 인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구원하실 메시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 9장 37절에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추수할 것은 많은데'라는 의미는 '양(羊; lamb)의 수효가 많음'에 대한 강조라기 보다는 '때가 가까웠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의 말씀이다.
즉 하느님의 나라('바실레이아 투 테우'; basileia tu theu; the kingdom of god)가 드디어 도래했으며,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을 불러모아야 할 때가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심으로써 이 땅에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전파할 일꾼이 많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일꾼의 수에 대해 언급하시는 이유가 단지 해야 할 일에 비해 현재의 일꾼의 수가 너무 적기에 지금보다 더 많은 수의 일꾼들이 필요하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이것은 그 다음 장인 마태오 복음 10장에서 언급되는 열 두 사도를 뽑으시고 파견하시는 일을 소개하기 위한 도입구의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수확할 것이 많다'는 의미는 '추수할 때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에, '일꾼이 적다'는 표현 역시 '일꾼을 선발할 때가 임박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보내 주십사고'에 해당하는 '에크발레'(ekballe; to send out; he will send forth)는 '에크발로'(ekballo)의 변형인데, '밖으로'라는 뜻의 '에크'(ek)와 '던지다'는 뜻이 있는 '발로'(ballo)의 합성어로서 '밖으로 던지다'는 뜻이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축출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일꾼은 인간의 의지적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에 의하여 주도적으로 파견된 자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부르심(성소; 聖召; vocatio)을 받은 주님의 일꾼은 자신의 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거부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주도적인 역사(役事)만을 기다릴 수 없다.
여기서 '청하여라'에 해당하는 '데에테테'(deethete; ask; pray)는 '제발 허락해 달라', '청하여 ~하라'는 의미를 지닌 매우 간곡한 부탁을 말한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주님 추수 밭에 합당한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수확할 밭의 주인님이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점점 죄의 유혹이 많아 믿음의 생활이 힘들고, 선악의 분별력을 잃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이 속출하는 이 시대에, 아버지께 가는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갈림없는 사랑과 온전한 봉헌과 추종을 통해 확실하게 착한 목자의 성소길을 생명을 바쳐 걸어갈 수 있는 사제들과 수도자들을 많이 달라고, 성소의 주인이신 주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일찌기 '성소란 있다고 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다'는 말씀을 창설자 신부님으로부터 들었다.
이 말씀은 사제로서, 수도자로서 성소를 받았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제로서 수도자로서 부르심을 받고, 사제로서 수도자로서 잘 살다가 사제로서 수도자로서 죽어 관 속에 들어가야 성소의 결실을 맺는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과 자유 의지의 협력처럼, 부르심을 받은 사제와 수도자도 자신의 성소를 아끼고 사랑하고 잘 키워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소받는 당사자들도, 하느님의 자녀들도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 시대는 은총없이 성소받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8).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돌봐줘야 할 사람이 많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보는 일을 할 사람이 적다니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 희생 봉사하는 사람보다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거두는 날 진정한 봉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확을 한다는 것은 일을 마무리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마태3,12) 분으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수확한다는 것은 우리인생 마지막 날의 심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정 심판의 날에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라는 곳간을 차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준비시킬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 일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입니다. 주님의 도구요, 연장으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추수 날에 곳간에 모아들일 알곡이 된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성장되는 것입니다. 씨앗을 뿌렸으면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내며 관리를 해야 합니다. 햇볕을 쬐어야 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뿌려졌다면 그 영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하고 영의 비추임을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실 매 순간이 마지막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천국을 살지 못하는데 훗날 어찌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고 또 우리의 이웃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꾼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일꾼으로 복음의 선포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 주셨듯이 교육사업과 선교, 병원 사목과 복지사업에 헌신할 일꾼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헌신을 통해 구원사업이 완성되는데 한 몫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측은지심,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희망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엾은 마음!', 다시 말하면 애간장이 녹아나는 아픔으로 함께하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바로 그 자리가 기적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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