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수요일]열두 사도 (마태10,1-7)

2018. 7. 11. 오전 6: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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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4주간 수요일]열두 사도 (마태10,1-7)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은 죗값을 치러야 하고 사마리아는 망하리라고 하며,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라고 한다. (호세10,1-3.7-8.12)
1 이스라엘은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 열매를 잘 맺는다. 그러나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들도 많이 만들고  땅이 좋아질수록 기념 기둥들도 좋게 만들었다.
2 그들의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하니 이제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분께서 그 제단들을 부수시고 그 기념 기둥들을 허물어 버리시리라.
3 이제 그들은 말하리라. “우리가 주님을 경외하지 않아서 임금이 없지만  임금이 있다 한들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리오?”
7 사마리아는 망하리라. 그 임금은 물 위에 뜬 나뭇가지 같으리라.
8 이스라엘의 죄악인 아웬의 산당들은 무너지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그 제단들 위까지 올라가리라. 그때에 그들은 산들에게 “우리를 덮쳐 다오!”, 언덕들에게 “우리 위로 무너져 다오!” 하고 말하리라.
12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신다. (마태10,1-7)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제1독서(호세10,1~3.7~8.12)

 

"그들의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하니, 이제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분께서 그 제단들을  부수시고, 그 기념 기둥들을 허물어 버리시리라.

 이제 그들은 말하리라. "우리가 주님을 경외하지 않아서 임금이 없지만,

 임금이 있다한들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리오?" (2~3)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을 향하여 두 마음을 품었음을 고발하고,

그로 인해 징벌을 받을 것을 지적한다.

 

본절 하반부의 '그 제단들' '그 기념 기둥들' 에 해당하는 '미즈뻬호탐'

(mizbehotham)'맛체보탐'(matsebotham)은 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지중지하면서 섬겼던 것들로서 본절이 직접적으로 1절과 관련이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이스라엘은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 열매를 잘 맺는다.

 그러나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들도 많이 만들고, 땅이 좋아질수록

 기념 기둥들도 좋게 만들었다."(1)

 

또한 그런 점에서 본절의 '그들의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하니' 해당하는

'할라크 립밤'(halaq libbam)이라는 표현이 바로 앞선 1절의

'이스라엘은 열매를 잘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는 어구와

거의 동의어이거나 깊은 관련을 갖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일단 '할라크'(halaq)라는 단어는 무엇인가를 매끄럽게 하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로서

무엇인가를 둘 이상으로 나누거나(창세14,15; 탈출15,9),

혀로 아첨을 하는 것(시편5,10; 잠언28,23)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본문에서는 '그들의 마음' 해당하는 '립밤'(libbam)이 주어가 되어서

문자적으로 '그들의 마음은 나뉘어졌다'(their heart is divided)라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거짓되다는 의미로서(their heart is deceiful)

혼합주의적 신앙과 더불어 그들이 주님으로 인해 부강해지고,

또 겉으로는  번영을 이루는 등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울창한 포도나무 같았지만,

주님께 대해서는 그분이 원하는 열매를 아무것도 맺지 못하는,

공허하고 텅빈 포도나무와도 같았음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그들은 주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고대 근동에서 풍요 다산과 번영의 신으로 알려진 바알을 위해

제단을 쌓고, 번성을 기원하기 위해 남성 주상(기념 기둥)들을 만들고

아름답게 꾸미는데 열성을 다 바치고 있었다.

 

이것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제단들을 다 부수시고,

그 기념 기둥들을 다 허물어 버리실 것이라는 심판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원문으로 보면, 제단들을 부수시고 기념 기둥들을 허물어 버리심으로써

심판을 단행하시는 주체인 '하느님'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이에 해당하는 '후'(hu)남성 3인칭 단수 대명사이다.

이 표현은 '부수시고'나 '허물어 버리시리라' 에 해당하는 동작을 행하는

주체가 바로 하느님이심을 강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즉 바로 '그분께서' 부수시고 허물어 버리실 것을 나타낸 것이다.

바로 그분은 이스라엘에 번성(번영)의 축복을 주셨지만, 그들로부터

아무런 보답이나 기쁨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멸시를 당한

주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경외하지 않아서 임금이 없지만'(3ㄱ)

 

앞선 1절과 2절에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하고 사악함의 근원이

신앙 변질과 우상 숭배에 있음을 지적하고 심판을 경고하였다.

 

이제 이어지는 본절(3절)과 4절은 이스라엘이 주님을 떠남으로써

이스라엘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타락하였다는 것이것 때문에

사회 전반이 혼란에 빠져 있으며 부패하였음을 질책하는 내용이다.

 

3절(ㄱ)의 해석은 세 가지로 가능하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을 당한 이후,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어진 상황에서 냉소적으로 임금이 없다는 사실을 탄식하고, 설령 임금이 있어도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며 탄식하는 넋두리 정도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이들의 패망의 확실성과 그 패망이 얼마나 절망적인가를 부각시킨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에 멸망하기 이전 상황에서 예로보함 2세 통치 이후,

거듭된 암살과 권력 투쟁으로 임금이 수없이 많이 교체되는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전의 다윗와 같은 임금다운 임금이 없음을 탄식하고,

또한 그런 임금이 등극할지라도 자신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듯이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의미라고 보는 것이다.

 

세번째는, 백성들이 순리와 법도와 질서를 거스르는 오만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임금이 무능력하여 전혀 필요없다는 백성들의 오만한 말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경외하지 않아 설사 임금이 없어진 상황이 된다고 해도,

그들이 잘못을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임금까지도 필요없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하는 극한적 교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세 가지 견해는 각각 그 시점이 포로시기, 포로시기 직전,

현재와 매우 가까운 상황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 모든 견해가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여기서 말한 첫번째와 두번째의 견해를 따른다면,

'이제'에 해당하는 단어 '앗타'(attha)'장차'라는 의미가 되며,

'그들은 말하리라' 해당하는 '요메루'(yomeru)미완료 시제로서

훗날 본절과 같이 말할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그들이 말할 것이다).

 

북부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B.C.722년에 멸망하게 되는 것은

야훼 유일신 신앙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진 교만에 있다.

 

주변 잘 사는 국가들이 임금이 있는 것을 보고 임금을 만들어 달라고 외쳐서

신정(神政)체제가 왕정(王政)체제가 되었지만, 임금은 항상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의 백성을 다스려야

하느님께로부터 축복받는 나라가 된다.

 

그러나 북부 이스라엘의 임금들은 자신의 권력과 힘이 세어지면 세어질수록

하느님을 버리고 주변 이방 국가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이방 민족들이 섬기던

우상 숭배에 빠지는 교만과 불순명을 저질렀고, 결국 그들이 섬기던

이교 잡신들의 제단들과 기념 기둥들을 주 하느님께서 직접 허물고

임금도 나라도 잃게 만드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항상 신명기 6장 4~5절의 말씀을 명심하고

야훼 유일신께 절대적 신앙을 드러내어야 했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복음(마태10,1-7)


예수님께서 이 열 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잃은 양들에게 가라." (5~6)

 

마태오 복음 10장 5절'보내시며'에 해당하는 '아페스테일렌'(apesteilen)

원형은 '아포스텔로'(apostello)이다.

이 단어는 '~로부터 멀리 떨어져'라는 의미가 있는 전치사 '아포'(apo)

'떠나다'는 뜻이 있는 '스텔로'(stello)가 결합하여 '~를 멀리 떨어진 곳에

떠나 보내다'는 뜻을 가진다.

 

그런데 이 단어는 단순히 '보낸다'는 데 강조점이 있지 않고,

'어떤 임무를 주어 대리로 파견한다'는 데 강조점이 더 있다.

 

따라서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제자들을 천국 복음을

전할 대리자로 파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이때 파견된 자는 파견하는 자의 권위를 가지고 파견자가 준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이 단어의 명사형인 '아포스톨로스'(apostolos)가 바로 왕의 전권 대사를 

의미하며, 후에 예수님의 열두 제자인 '사도'(Apostle)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제 마태오 복음 10장 1~4절의 열두 사도의 임명에 대한 내용 다음에,

5절부터 15절까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주신

선교의 대상과 내용 및 선교사로서의 자세에 관한 선교 교훈

(mission instruction)이 나온다.

 

그중에서 마태오 복음 10장 5절과 6절은 예수님께서 복음 전파를 위해

열두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이방인(다른 민족들)이나 사마리아인들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교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당부한다.

 

이것은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로서의

예수님과 유대인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으로,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를 잘 아는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인들로 만들기 위해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오 복음사가의

고유한 신학과 영성이다.

 

실제로 위의 본문의 내용은 병행 구절인 마르코 복음 6장 8~10절과

루카 복음 9장 2~4절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마태오 복음에만 있다.

 

사마리아인들은 과거 아시리아인들과 혼인하여 순수한 이스라엘의

혈통을 더럽혔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로 매도당했으며,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개처럼 취급되었다.

 

더군다나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유일신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고

우상숭배를 하던 자들이었다.

 

결국 마태오 복음 10장 5~6절의 내용 이러한 사마리아인들과 이방인들을

열두 사도의 선교 대상에서 일단 유보시킴으로써, 예수님의 선교의

일차적인 대상은 마태오 복음 9장 36절에 나오는 것처럼, 목자없는 양들처럼

뿔뿔이 흩어져 있고 영적으로 구심점이 없이 약해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특히 마태오 복음 10장 6절에서 새 성경은 번역하지 않았는데, '차라리',

'오히려'에 해당하는 부사인 '말론'(mallon; rather)은 여기서 반어법적인

긍정의 개념으로 '반드시'로 번역해야 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치 복음을 이방인들이나 사마리아인들에게 전할 바에는

차라리 ('~대신에'; instead of)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는 것이 낫다는

뉘앙스로 말한 것이 아니고, 당시의 시점에서도 반드시(surely)

이스라엘에 대한 복음 전파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본문은 '반드시 이스라엘 집안의 길잃은 양들에게 가라'로 번역해야 한다.

 

여기서 '이스라엘 집안의 길잃은 양들'이란 말은 마태오 복음 9장 36절의

'목자없는 양들'의 이미지와 동일한 은유를 사용한 표현이다.

 

이것은 마태오 복음에서 여러번 반복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시려 오신

예수님의 강생(육화)의 목적을 강조하기 위해 수록한 내용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8장 19절과 20절 복음 전파의 대상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까지 선교의 대상을 확장하라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을 볼 때, 마태오 복음사가가 본 단락에서

강조하는 것예수님의 이방인들에 대한 배척이 아니라

하느님의 간택된 백성이요 소유였던 유대인들에 대한 애착으로

알아 들어야 한다.

 

결코 마태오 복음 10장 5~6절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에 상반되는

내용이 아니라 선교의 우선 순위에 대한 말씀으로 알아들으면 좋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유대인들의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거절로 인해 복음의 혜택을 받고 구원의 대열에

들어서 있음을 감사하고, 우리 주변의 가장 가까운 곳에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사도가 될 것을 결심하며, 주님께서

우리를 파견하심을 명심해야 하겠다.

 

그렇게 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되어야 하고,

하느님과의 인격적이고 체험적 신앙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성령 충만으로 주님의 현존과 임재를 체험하고,

주님 사랑을 뜨겁게 느끼지 못한 사람은 결코

이렇게 좋으신 주님을 증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약속을 기억하라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주시어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삼았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삶의 자리는 주님께서 마련하신 꽃자리입니다. 상황에 구애됨이 없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로 서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자매의 부르심에 대한 묵상글을 적어봅니다.

 

나를 부르신 주님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부르셨는데

파아란 잔디 위에서도

잔잔한 호숫가에서도

때로는 떠오르는 아침 태양과 저무는 낙조의 여울 속에서도

그분은 밤낮없이 부르고 손짓하셨는데도.

스쳐가는 바람소리에서도

노도와 같은 파도 속에서도

당신의 손길 속으로 부르시고 이끌어 주셨는데도

나는 외면하고 뒤돌아서며 눈길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분은 조금도 섭섭해 하거나 노여워하지도 않으셨으며

끊임없이 기다려 주셨고

내가 방황의 끝자락에서 지치고

좌절과 절망 속에 일어설 수 없어 누워 있을 때에

그분은 살며시 내 손을 잡아 주시며

나다, 일어나거라. 나와 함께 가자. 하고 나를 일으켜 주신 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그 한 말씀으로

내 온 생애의 모든 어둠과 죄를 용서해 주신 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사랑이라는 한 말씀으로 죽음의 긴 터널에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신 내 사랑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선택받은 자녀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내가 느끼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마음을 열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에로 부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하느냐? 또는 얼마나 널리 영향력을 미치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범위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은 '하고 싶은 일을 우선하기 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나를 뽑아주신 분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복음은 바로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선택된 민족이라는 이스라엘의 자긍심은 그들의 교만과 우상 숭배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다윗 왕조의 참된 후계라고 서로 맞서면서 세속적 권력과 이익에 눈이 멀었고, 결국 북 이스라엘은 화려한 성전과 제단과는 달리 위선과 거짓으로 하느님과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북 이스라엘을 상대로 호세아 예언자는,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라고 외쳤지만, 북 이스라엘은 물론, 뒤에 남 유다도 이민족에 의해 멸망의 비운을 맞을 때까지 예언자의 회개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하느님 백성을 상징하는 숫자였기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통하여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 모아 새 계약을 맺으시고 새 백성으로 일으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름받은 첫 제자들이 유다 사회의 뛰어난 지식층이나 엘리트는 아니었습니다. 바다에 목숨을 걸고 살아야 하는 어부들, 이민족에 빌붙어 먹고 살던 세리, 혁명을 꿈꾸던 사람, 셈에 밝았지만 결국 예수님을 배신한 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아픔을 겪고 사는 이들과 함께 지내시며 메시아의 도래를 예고하시고, 제자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심으로써 새 계약을 맺으시고, 하느님의 구원의 능력을 온 세상에 선포하게 하십니다.
세속을 벗어나 예수님의 마음을 찾고 수도원 공동체를 세워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고자 했던 베네딕토 성인의 열정이 우리 시대에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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