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금요일]아버지의 영 (마태10,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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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보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하며,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간다고 한다. (호세14,2-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3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4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5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6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7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8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
9 내가 응답해 주고 돌보아 주는데 에프라임이 우상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싱싱한 방백나무 같으니 너희는 나에게서 열매를 얻으리라.
10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라고 하시며,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신다. (마태10,16-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독서 (호세아14,2-10)
"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 (7-8)
이스라엘이 풍요와 번성을 위해 섬겼던 바알은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아무런 풍성함도 주지 못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진정 풍요로운 삶의 자리로 인도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예언하는 본문에서 '그의 싹들이 돋아나' 에 해당하는 '엘르쿠 요네코타이우'(ellku yoneqothaiyu)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어린 가지(싹)들이 나무에서 점차 돋아나 계속해서 밖으로 퍼져 나가는 모습을 강조한다.
'요네코타이우'의 원형 '요네케트'(yoneqeth)는 봄이 되면 막 돋아나는 어린 싹(순)을 지칭한다(욥기14,7). 그리고 '돋아나'에 해당하는 '엘르쿠'는 미완료의 표현으로 그러한 일이 일회적이거나 종결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될 것임을 나타내 준다.
한편, '올리브 나무'에 해당하는 '자이트'(zaith)는 가지와 잎사귀가 매우 많은 나무이므로, '그 아름다움'에 해당하는 '호도'(hodo)는 그의 찬란함(his splender)이라는 의미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이 올리브 나무처럼 찬란하고도 웅장한 민족으로 성장한다는 의미이다.
이어서 이스라엘의 향기는 레바논의 백향목(삼나무 ; cedar)과 같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향기'에 해당하는 '레아흐'(reah)는 하느님께서 과거 계약적 저주 예언 가운데 그들의 향을 맡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되었다(레위26,31).
그러나 본 문맥에서는 이 단어가 이러한 계약적 저주가 다 해결되고, 이스라엘이 다시 향기로운 나라가 되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런 점에서, 본문에서 제시되는 이 레바논의 향기는 '은총을 회복할 성도의 모습' 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고(2코린2,14), 이스라엘이 온 세상의 존경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보다는 계약적 저주가 예언되는 레위기 26장 31절의 반전으로, 회복된 이스라엘이 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와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그들은 다시 내 그들에서 살고'는 문자적으로는 '거주하는 자들이 그의 그늘에 돌아올 것이다' (Those who dwell under his shadow shall return.)이라는 의미이다. '내 그늘'에 해당하는 '뻬칠로'(betsillo)는 문맥적으로, 앞서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비유된 '이스라엘의 그늘'을 말하지만, '뻬칠로'를 '나의 그늘 아래'(beneath my shadow) 또는 '하느님의 그늘'로 번역하여 자기 백성에 대한 보호와 통치의 영역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설명된다(시편17,8 ;36,8).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에 해당하는 '예하이유 다간'(yehaiyu dagan)은 문자적으로는 '그들은 곡식을 살릴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에 대해 이스라엘이 복을 받은 후, 마치 곡식이 사람을 살리듯, 다른 사람들 즉 이방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어 부양하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단순히 이스라엘이 회복된 땅에서 곡식을 재배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훗날 이스라엘이 복을 받을 때 번성할 뿐 아니라, 다른 여러 민족들까지 풍성하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는 포괄적 의미로 접근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본다.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에 해당하는 '웨이프레후 칵가펜'(yephrehu kagaphen)은 회복된 이스라엘이 포도나무처럼 싹이 나서 꽃이 만발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스라엘이 구약 시대에 포도나무로 비유되는 것과 관련지을 때 (이사 5,1-6), 이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아주 번성할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 에 해당하는 '지크로 케엔 레바논'(zikron keen lebanon)은 문자적으로 '그의 기념은 레바논의 포도주처럼'(His memorial is as wine of Lebanon)이라는 의미이다.
'명성을 떨치리라'로 번역된 '지크로'의 원형 '제케르'(zeker)는 '기억하다' 라는 의미의 동사 '자카르'(zakar)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기억', '기억에 남는 것', '오래 기억될 만한 명성'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탈출17,4 ; 예레9,28 ; 욥기18,17 ; 시편102,13).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느님의 치유의 축복을 받은 후 그들의 명성이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될 것이라는 예언은 그들이 하느님의 계약의 말씀을 듣고 지킬 때에, 하느님이 그들에게 이루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 즉 '세상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신명28,1)이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10,16-23)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게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6)
열두 사도의 파견과 관련된 '선교 활동 대상과 내용 및 복음 전파자로서의 자세에 관한 교훈'(마태10,5~15)을 마친 후에, 복음 전파자로서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와 고난에 대한 예고 및 교훈(마태10,16~23)이 나온다.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는 유다인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이방의 권력자들로부터도 올 것이다(마태10,17~18).
또한 마태오 복음서의 일차 독자인 유다계 크리스챤들에게 이글이 읽히는 시기도 여러 가지 박해 가운데 있을 때였다.
그리고 본 단락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박해받는 자를 도우시는 성령과(마태10,20), 구원 (마태10,22)과 주님의 재림(마태10,23)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복음 전파자로서 박해 받는 일이 영원하지 않으며, 종국에는 하느님의 축복이 있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이라고 번역된 '에고'(ego)는 일인칭 남성 단수 대명사 주격이다.
희랍어에는 동사에 주어의 인칭이 포함되므로, 굳이 인칭 대명사 주격을 기록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에고'(ego)라는 주어를 사용한 것은 제자들을 복음 전파자들로 파견하시는 일의 주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유다교의 글에서 '양'에 해당하는 '프로바톤'(probaton)은 이스라엘을, 그리고 '이리'에 해당하는 '뤼코스'(lykos)는 이방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에서는 '양'은 거의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교회'를 가리키고, '이리'는 신약 성경에서 교회를 해치려는 세력을 상징한다(요한10,12; 사도20,29)..
한편 마태오 복음 10장 16절에서 '뱀'으로 번역된 '오페이스'(opheis)는 직역하면 '뱀들'(serpents)이며, 원형 '오피스'(ophis)는 희랍어 구약 성경인 70인역(LXX)에서는 창세기 3장 1절에 나오는 '뱀'과 동일한 단어이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코린토 2서 11장 3절에서도 '뱀'(ophis)이 하와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한 간계와 교활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10장 16절에서는 뱀의 특성 가운데 교활함이 아닌 '슬기', '지혜'(wisdom)를 가진 것으로 말하고 있다.
또한 '비둘기'에 해당하는 '페리스테라'(peristera; dove)는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분노하지 않는 '선'(virtue)과 악에 오염되지 않는 '순박', '순결'(purity)의 상징이었다.
여기서는 두 짐승이 모두 '박해'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로마서 16장 19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교훈한 것처럼, 악한 세력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때 악에 대해 실제적인 통찰력을 가짐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간교하지 않은 선(善)을 가지고 악(惡)을 이기라는 뜻이다.
선(善)이 없는 지혜(슬기)는 간교함이며, 지혜(슬기)가 없는 선(善)은 악한 세력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양자의 균형잡힌 구비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지혜(슬기)는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믿는 이들 안에 계셔서 도우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지혜를 말한다.
예수님이시라면?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기에 한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사실 참다 보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풀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가족 간에도 마음이 갈라질 텐데 그 때에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서로의 뜻이 다르고 오해가 있을 때 참고 기다려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때이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할 때입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그래서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깁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도 더욱이 주님을 증거 하는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구애됨이 없이 예수님 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이깁니다. 감정이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신앙 안에서 굳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사에 '예수님이시라면?'이라는 자문이 필요합니다.
열왕기 하권 20장에 보면 히즈키야 왕이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히즈키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즈키야 왕이 마주한 벽은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죽음의 벽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 왕 자신의 한계상황을 하느님께 내어 놓고 울며 기도했을 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세상에서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15년을 연장해 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벽이 참으로 많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상황의 벽이 산 너머 산입니다.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고독, 미움과 분노, 죄가 한계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견디는 것입니다. 특별히 일상 안에서 히즈키야 왕처럼 벽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참을 수 없다면 잠시 동안 하느님께서는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주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따지지 않고 참아 주시는 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서 되겠는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다면 사랑으로 하느님께 앙갚음하십시오.
참고 견뎌서 모두가 구원을 얻기를 바랍니다. 모함이나 수근 거리는 소리에 속상해 하지 말고, 뒤에서 딴 소리하는 사람 때문에 억울해 하며 상처 받지도 말고 오직 주님의 이름 때문에 견디시길 바랍니다. 잠잠하게 참고 견디면 의심 없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순간 다가오는 한계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극복하시길 기도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하느님의 모든 사랑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악, 고통, 죽음은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과 희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미움과 실패, 그리고 죽음의 도구에서 사랑과 승리와 영광, 그리고 생명의 표징으로 변화되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2013,726세계청소년대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 제자직의 본질인 고통의 수용 ♣
오늘 복음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 시련, 고통, 재판, 미움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10,21). 이러한 일은 사람들이 ‘올곧지 않아’(미카 7,6)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정의와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기쁠 때보다는 고통스러울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암담한 미래의 벽 앞에 좌절하는 젊은이들, 기본적인 생계유지마저 힘든 비정규직 노동자들, 늘어만 가는 가계 부채 앞에 한숨 쉬는 수많은 서민들, 고독사를 택하는 노인층 등 고통과 시련은 그렇게 호흡처럼 우리들 가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 때문에 더한 고통과 박해를 받게 된다니 참 힘든 삶입니다.
어떻게 고통 가운데서 예수님을 따라야 할까요? 먼저 인간의 죄로 인한 고통은 힘을 모아 저항하고 극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괴로워하시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고통도 있습니다. 그런 고통은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콜로 1,24)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고통 앞에 무조건 인내해야 한다거나 고통을 하느님의 벌로 생각한다거나 정화의 과정이라고 쉽게 단정해버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막연히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칠 때에는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고통 그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고통을 함께 지려는 의지와 마음이며, 구체적으로 함께 나누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삶에서 십자가의 수난을 수용하지 않은 채 부활의 영광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고통은 피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고 끝까지 참아내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서로 나눌 때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박해 상황을 주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순박함과 지혜로움, 신뢰와 인내, 곧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10,16).
고통은 인생의 본질적인 부분이요, 고통의 수용은 예수님의 제자직의 본질입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갖은 박해와 멸시를 받으시고 고통 중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의 이 무거운 짐’을 그분께로 가지고 갑시다. 보이지 않지만 참으로 고귀한 예수를 따르는 삶에 힘과 용기를 모아 앞만 보며 그분께로 달려갑시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겪는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우리를 영원 생명에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이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듣고 용기를 냅시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3-5)
우리 모두 삶이 고달프고 나를 속일지라도 주님 안에 머물고 그분만 차지할 수 있다면 고통은 오히려 기쁨이 될 것임을 믿어야겠습니다. 오늘도 일상에서 하느님의 선과 정의를 위하여 예수님의 마음으로 겪어내는 고통의 씨앗에 숨겨져 있는 참 행복의 보화를 알아보는 기쁜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