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간 월요일]칼(마태10,34-11,1)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과 고모라에게, 주님의 눈앞에서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리라고 한다. (이사 1,10-17)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1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12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13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14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15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이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라고 하신다. (마태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연중 제15주간 월요일독서(이사1,10-17)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11)
고대 근동 지방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이 아무리 격렬하게 분노할지라도 제사만 드리면 얼마든지 달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어떤 삶을 살든 상관없이 지극한 정성이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제사, 곧 값 비싸고 가치있는 제물이 드려지는 제사를 통해 신의 분노를 달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범죄를 저지르고서 그것을 합리화시키고, 당신의 분노를 잠재우고, 그 눈을 가리고자 바치는 그러한 제사를 받지도 원치도 않으신다. 그분은 철저히 공의로우시며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성품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근면하고 성실하게 노력하며,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제사만을 합당한 것으로 받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제기한 질문에 대하여 당신이 스스로 대답하신다. 이 대답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무수한 제물이 하느님께 전혀 유익하지 않다는 것이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 물렸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굳기름'에 해당하는 '헬레브'(heleb)는 제사를 드릴 때 동물의 뱃속 내장 부분에서 떼어내 불태워 드리는 지방 성분을 가리킨다(레위3,9). 제사드릴 때 다른 부분을 먹는 것을 허락되었지만, 피와 굳기름 만큼은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성별되었으며,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레위3,17).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먹지 않고 모두 태워버리는 그 기름마저도 원치 않으셨다. 이는 다름아닌,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들의 마음과 삶, 제사가 도리어 하느님의 거룩한 성품과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었기 떄문이다.
한편, '살진 짐승'이란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릴 때 건강하고 품질이 좋은 짐승을 잡아 드렸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 시대 말기에 병든 것과 저는 것 등 값이 떨어지고 품질이 좋지 않은 것을 제물로 드렸던 것(말라1,8)에 비하여, 매우 많은 정성을 드린 제사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의 완악한 마음과 삶이 그들의 값비싼 제물의 가치를 무용지물로, 아니 하느님 대전에 역겨운 것으로 비쳐지도록 만들고 말았다.
또한 '나는 ~ 물렸다'에 해당하는 '사밧티'(sabathi)의 원형 '사바으'(sabah)는 배부르게 먹어 완전히 만족한 상태를 말한다. 본문에서는 물릴 정도로 싫증난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무언가를 물릴 정도로 먹으면,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 거북하고 그 자체가 혐오스럽고 역겨운 것이 된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제사드리는 자들의 완악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드리는 굳기름을 받지도 않으셨을 뿐더러 도리어 혐오스럽고 역겨운 것으로 여기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는 말씀으로 형식적 제사가 당신께 아무 유익이 없음을 밝히신데 이어, 이제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고 보다 직접적인 말씀으로 형식적 제사의 무용성을 밝힌다.
여기에서 '싫다'가 원문에서는 '기뻐하지 아니한다' 로 되어 있는데, '기뻐하다'에 해당하는 '하파쳇티'(haphatsethi)의 원형 '하페츠'(haphets)는 본래 관심있는 어떤 대상을 향해 몸을 기울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가 파생되었는데, 여기서는 강한 의미의 부정어 '로'(lo)와 함께 쓰여, 주님은 이스라엘이 드리는 피에 관심도 기울이지 않으며, 기뻐하지도 않으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본래 제사를 명하는 율법의 기록에 의하면,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 그리고 그중 피는 가장 거룩한 것으로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으로 묘사된다(민수18,17). 율법이 명하는 것과 똑같은 짐승, 살지고 좋은 제물을 잡아 바치는 피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주님의 반응이 다른 것은, 하느님께 제물을 잡아 바치는 그들 자신들의 손에 무죄한 희생자들, 약자들의 피가 묻어있었기 때문이다(이사1,15-17).
히브리 사회 뿐 아니라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피는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이것은 피가 생명의 원천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을 물러내는 속전의 개념으로 드리는 피는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제물의 일부였다.
더욱이 이방 여러 종교들은 그들의 신들이 피에 굶주려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피를 제물로 드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이 피를 드린 것은 이방 사람들과 다른 이유 때문이었지만(레위17,11), 피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만은 동일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소중한 제물이었던 피를 하느님께 드렸지만,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하느님께 대한 바른 인식도, 그분께 대한 바른 삶도 갖추지 못한 채, 제물인 피에만 중요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을 올바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도 않으면서 피만 드리면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들의 이같은 행태는 그들 스스로 그들의 제사 자체를 허무한 것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만 것이라 할 수 있다.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복음(마태10,34~11,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4)
마태오 복음 10장 34절에서 39절까지는 '제자들이 세상과 겪게 되는 갈등의 필연성 및 절대적 헌신'의 요청에 대해 다루고 있다.
원문에는 마태오 복음 10장 34절과 35절에는 과거 시제, 마태오 복음 10장 36절에서 38절까지는 현재 시제, 그리고 마태오 복음 10장 39절에는 미래 시제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첫 단락은 복음으로 말미암은 피할 수 없는 세상과의 갈등 및 박해에 대해서, 둘째 단락은 제자로서 요구되는 절대적 헌신의 삶에 대해서, 세번째 단락은 자신의 목숨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함에 대해서 각각 다루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러한 점층법의 구조를 통해 마지막 단락의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수준의 헌신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즉 예수님의 제자로서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스승되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하고, 그외의 것들은 희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세상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영원한 생명의 도(道)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자만이 실천할 수 있는 높은 신앙의 경지이다.
여기서 '평화'에 해당하는 '에이레네'(eirene; peace)는 세상과의 타협을, 그리고 '칼'에 해당하는 '마카이라'(machaira; a sword)는 하나의 은유로서 세상의 모든 죄악과 불신앙에 대해서 복음을 들고 싸우는 적극적인 대처를 상징한다.
칼을 주러 왔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칼은 좋은 것입니다.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좋은 것에 쓰지 않고 엉뚱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이지만 잘못 쓰임을 받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칼은 칼로 존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니 정말 귀가 막힐 일입니다. 어찌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이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죄악을 거부하는 '결단의 칼'을 써야 합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결단의 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은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원하시지만 칼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7).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받아들여 참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는 사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갈라놓는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는 집안 식구가 다 각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적대감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여서 도저히 악이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 안에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사랑이 되신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씩 버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차지하면 다른 것들은 다시 돌려받게 됩니다.
세상을 살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인간적인 것이 끊임없이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칼을 선택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넘쳐 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위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단호하게 잘라내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큰 탈 없이 계속 누리는 것을 평화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평화는 공정과 정의가 함께하는 평화입니다. 참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상처받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의 말로, 누군가의 편견 때문에, 그 누군가의 미움 때문에 칼로 베인 듯 심장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대개 상대에게 앙심을 품고 보복하거나 무기력한 자괴감에 빠져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은, 숨기고 싶은 자신의 실체를 바라보거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했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용서와 자비의 하느님 아버지를 선포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으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은폐되고, 왜곡되었으며, 부당하게 강요된 평화인지도 모릅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서로 위로하며 분노의 발톱을 감추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군더더기처럼 붙어 있는 욕망과 사심, 위선과 교만의 덩어리들을 칼로 잘라 내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평화는 내 안이하고 무디어진 나태와 게으름에 칼을 대어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칫 내 목숨 하나만 잘 챙기면 된다는 이기심에 갇히면 내가 정말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를 잊을 수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식별해 내지도 못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은 평화를 얻으려면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일깨워 줍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자신의 목숨을 잃더라도, 서로의 십자가를 짊어져 주는 것이 우리가 더 절실하게 청해야 하는 은사임을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