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간 수요일]철부지 (마태오 11,25-27)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를 주님께서는 불꽃으로 태워 버리시리라고 한다. (이사10,5-7.13-1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5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6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 약탈질을 하고 강탈질을 하며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려는 것이었다.
7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한 뜻을 마음에 품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의 마음속에는 멸망시키려는 생각과 적지 않은 수의 민족들을 파멸시키려는 생각뿐이었다.”
13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나는 민족들의 경계선을 치워 버렸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왕좌에 앉은 자들을 힘센 장사처럼 끌어내렸다.
14 내 손이 민족들의 재물을 새 둥지인 양 움켜잡고, 버려진 알들을 거두어들이듯 내가 온 세상을 거두어들였지만 날개를 치거나 입을 열거나 재잘거리는 자가 없었다.”
15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마치 몽둥이가 저를 들어 올리는 사람을 휘두르고 막대가 나무도 아닌 사람을 들어 올리려는 것과 같지 않으냐?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 버리시리라.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린다고 하신다. (마태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제1독서(이사10,5~7.13~16)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 약탈질을 하고 강탈질을 하며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한 뜻을 마음에 품지도 않았다." (5~6.7ㄱ)
앞선 이사야서 9장 8절에서 10장 4절은 주님을 거부한 북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엄정한 심판으로 장차 멸망하게 될 것을 네번이나 예언한 내용이다.
이제 이사야서 10장 5절이하 19절은 북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하느님의 도구로 쓰임받은 아시리아가 스스로의 신분을 망각함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예언하는 내용이다.
하느님을 배제하고 인간 역사를 고찰하면, 북부 이스라엘을 패망시키고 아람을 패망시키며, 남부 유다를 함락 직전의 위기까지 몰고간 아시리아가 근동에서 오랜 세월동안 절대 주권을 휘두를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막강한 힘을 지닌 아시리아를 향한 하느님의 예언은 역사는 주권자 하느님의 손 안에서 움직이며, 아시리아는 단지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주님께서 사용하신 심판의 도구였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확인시켜 준다.
아시리아는 자신의 위치와 분수, 즉 하느님의 심판 도구임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을 자랑함으로써, 주님께로부터 북부 이스라엘처럼 심판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아시리아를 통해 북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또 바빌론을 통해 그 아시리아를 심판하심으로써, 역사를 운행하는 자는 강력한 전제 군주나 제국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신다.
다른 각도에서 아시리아는 당시 히브리 민족의 관점에서 볼 때 불경건하고 사악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어찌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을 심판하는 도구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가?
이것은 그들이 사악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북부 이스라엘은 그들보다 더 불경건하고 더 사악한 자들이었다는 데 해답이 있다.
또한 북부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의 깊이까지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이러한 내용은 아시리아 사람을 향하여 저주를 선언하는 내용으로 시작딘다. 거기서 '불행하여라' 에 해당하는 '호이'(hoy)는 이사야서 10장 1절의 맨앞에서도 쓰여 북부 이스라엘의 부패한 지도자들에게 심판이 임박했음을 나타냈었다.
이제 바로 북부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주님께서 선택하신 아시리아에 대해 동일한 단어가 사용됨으로써, 그들이 비록 하느님의 도구로 선택되기는 하였지만 그들도 임박한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이 예언되고 있다.
그들에게 화가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자만심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강해져 근동의 패자가 되었다고 자만하여 정복 과정에서 온갖 비인륜적인 만행을 저지르며 파괴와 약탈을 일삼았다(7).
심지어 아시리아는 이 과정에서 주변 열강의 신들, 북부 이스라엘의 우상들과 북부 이스라엘의 전능자이신 하느님을 동격으로 취급하고,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신성 모독적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주님은 그러한 아시리아의 교만을 단죄하시고 그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신 것이다.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이사야서 10장 5절이하 6절에서는 아시리아를 심판의 도구로 택하신 주님의 주권과 의도를 밝힌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아시리아가 하느님의 진노의 막대기에 불과함을 선언하신다.
여기서 '내 진노'에 해당하는 '압피'(apphi)의 원형 '아프'(aph)는 '코'(창세2,7)를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이 단어는 코에서 뜨거운 김이 품어져 나올 정도로 감정이 격앙된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극도의 분노를 나타낸다. 여기서도 이 단어는 주님의 활활 타오르는 진노를 의미한다.
그 진노의 방향은 북부 이스라엘에게로 맞추어져 있으며, 그 진노를 대행하도록 선택된 자가 바로 아시리아 사람들이었다.
'막대'에 해당하는 '셰베트'(shebet)는 왕권을 상징하는 '홀'이나 '규'를 의미하기도 한다(창세49,10 ; 민수24,17 ; 판관5,14).
그러나 뒷 문장과의 대등관계를 고려할 때 징계하는 데 사용되는 매, 혹은 막대기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원문의 뉘앙스를 고려하여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그들의 손에 들려있는 몽둥이는 나의 격노의 표현이다'가 된다.
여기에서 '그의 손에'에 해당하는 '베야담'(beyadam)은 '손'을 의미하는 명사 '야르'(yar)에 3인칭 복수 소유격 접미어와 '~안에'란 뜻의 전치사 '뻬'(be)가 붙어 '그들의 손 안에'라는 의미이다.
또한 '나의 분노이다'에 해당하는 '자으미'(zahmi)의 원형 '자암'(zaam)은 본래 입에 거품이 뿜어져 나올 정도의 격노를 나타낸다.
여기서는 죄에 대한 주님의 분노가 얼마나 격렬한 것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이사30,27; 38,4;시편102,11).
이러한 하느님의 분노는 인간의 분노와 달리 죄의 속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 의노(義怒; 의분; 義忿)이며, 잘못된 것을 심판하여 의(義)를 이루시는 것이다.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복음(마태11,25~27)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5~26)
원문은 '아버지'와 '하늘과 땅의 주님'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 여기서 '아버지'에 해당하는 '파테르'(pater)는 호격이다.
사실 예수님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는데, 그 이유가 마태오 복음 11장 27절에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의 독특한 친밀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마태26,39.42).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것을 빌미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예수님을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으로 죽이고자 했다(요한5,18).
'아버지'라는 호칭은 그만큼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친밀성을 드러내는데 적합한 용어였지만, 무지한 유대인들의 눈에는 그것이 하느님을 망령되이 부르는 신성모독적 언행으로 비쳐진 것이다.
한편,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는 말은 사도 바오로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사도17,24).
그리고 창세기 14장 19절에도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이라는 표현이 발견되는데, 여기에는 '하늘과 땅의 창조주'(Maker of heaven and earth)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흥미롭게도 창세기 14장 19절에서 이 말을 했던 사람은 살렘 임금 멜키체덱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멜키체덱의 반열을 따른 영원한 대사제였다(히브6,20).
멜키체덱보다 이천여 년 뒤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예표하는 구약의 인물인 멜키체덱과 같은 말로써 하느님을 호칭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서 창조주되심을 다시 한번 확증하셨던 것이다.
창조주이시기에 당신이 가지는 창조물에 대한 주권(이사64,8)을 높여 표현한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는 호칭은 피조물인 인간이 하느님께 바쳐야 할 또 하나의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신' '이것'은 무엇인가?
원문은 단수가 아니고 복수('타우타'; tauta; '아우타'; auta; them)이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히 한 가지 사실이나 가르침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사건과 가르침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의 주된 관심사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이며, 앞의 마태오 복음 11장 20~24절의 예수님의 책망과 심판 경고의 주된 이유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 즉 복음을 의미한다.
한편, 본문에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와 '철부지'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슬기롭다는'에 해당하는 '쉬네톤'(syneton)은 '이해력을 가진', '신중한', '학식이 있는', '지성을 갖춘'이란 뜻이다.
보통 자칭 지혜롭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를 가리킨다고 말한다(마태23,24).
그러나 단지 그들만이 아니고, 마태오 복음 11장 16절에 나오는 '이 세대', 즉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을 받고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모든 불신자들을 언급한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에 '철부지들'로 번역된 '네피오이스'(nepiois)는 '젖먹이','경험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의 제자들'
혹은 '순박한 사람들'을 말한다.
결국 본문은 많이 배워서 자기 스스로 사리분별에 신중하고 학식있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지혜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제 젖먹이처럼 경험없고 순박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지혜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의 아이러니같은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누구에게 당신의 진리를 나타내는가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얻어 입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데 있다.
끝으로, '그렇습니다,아버지!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에서 '아버지'로 직역된 '호 파테르'(ho pater)에서 정관사 '호'(ho)가 사용된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이 일반적인 부자(父子)관계가 아니라 유일하고 특이한 부자(父子)관계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요한10,14.15).
더군다나 '뜻'으로 번역된 '유도키아'(eudokia)는 '좋다', '잘되다'는 뜻의 부사 '유'(eu)와 '생각'이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추정되는 '도키아'(dokia)의 합성어로서 원래 '선의'(good will), '기쁘신 뜻'(good pleasure), '은혜로운 뜻'(gracious will)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따라서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고 자비로운 뜻을 알고 있는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감격적인 표현이 잘 담겨져 있다.
즉 하느님께서 누군가에게 당신의 뜻을 감추든지 감추지 않는지는 순전히 하느님의 기쁘신 뜻에 달려 있음에 대한 예수님의 전적인 동의가 나타나고 있다.
아는 게 병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반영억신부-
컴퓨터 인터넷을 통한 가상공간에서의 부작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남의 개인 정보를 훔치고 사기 치며 익명을 이용하여 어이없는 글을 올리고 비난하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상처를 주고 좌절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컴퓨터를 사용할 줄 아는 것이 병입니다. 차라리 모르기나 하면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으련만…. 아는 것이 좋은데 쓰여 힘이 될 수 있고, 능력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는 쉽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촌놈들, 상것들, 별 볼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겸손과 단순함이 있었고 그것이 사실 세상의 희망입니다.
잘난 사람은 남을 등쳐먹으려 애를 쓰고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서로를 헐뜯고 깎아 내리지만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결코 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 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 ‘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11,27) 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10,15)단순한 마음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온전히 부모에게 의존합니다. 계산하지 않고 부모를 따릅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인간의 교만한 지식을 경계하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지혜를 선포합니다. 인간의 지식은 때로 차별과 편견을 만들고, 이기적 자아에 집착하여 오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의 영을 받은 인간은,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섭리된 존재임을 깨닫고, 마음이 겸손하고 가난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짓밟고 약탈하고 강탈하며 유배지로 끌고 가는 아시리아의 만행에 분노하며, 그들이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이룬 폭력의 결과를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것임을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대의 지혜롭다는 율법 학자나 원로들, 스스로 경건하다고 내세우는 바리사이들을 향해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법은 독특합니다. 절대 권능의 힘으로 인간을 당신 필요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시고,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희생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인간의 눈에는 어리석고 걸림돌이지만, 하느님께는 힘이고 지혜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자비는 철부지 어린아이 같은 이들에게만 체험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철부지’는 유치하고 참을성 없으며,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뭐라 해도 하느님의 존재를 확실히 믿고, 자신의 잘못을 외면하거나 남에게 책임을 떠맡기지 않으며, 오히려 남의 죄를 대신 짊어져 주고, 불안한 현실에 대한 불평보다는 미래를 하느님께 맡기고 날마다 충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뜻합니다. 이제 하느님 앞에서 철부지 인생을 살아 보고 싶지 않습니까?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