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간 토요일] 부러진 갈대 (마태 12,14-21)
미카 예언자는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리라고 한다. (미카 2,1-5)
1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
2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안을, 임자와 그 재산을 유린한다.
3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이 족속을 거슬러 재앙을 내리려고 하니 너희는 거기에서 목을 빼내지 못하고 으스대며 걷지도 못하리라. 재앙의 때이기 때문이다.
4 그날에는 사람들이 너희를 두고서 조롱의 노래를 부르고 너희는 서럽게 애가를 읊으리라. ‘우리는 완전히 망했네. 그분께서 내 백성의 몫을 바꾸어 버리셨네. 어떻게 우리 밭을 빼앗으시어 변절자들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단 말인가?’
5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제비를 뽑고 줄을 드리워 줄 이가 주님의 회중에는 아무도 없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는,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신다. (마태 12,14-21)
그때에 14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16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8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21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독서 (미카2,1-5)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1)
미카서 1장 10-16절에서는 각 성읍을 향한 예고와 권고 형식을 사용하여 남부 유다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였다. 이제 2장 1절이하 11절에서는 선민의 사회적 악행의 사례를 제시하고 심판을 경고하며(1-5절), 또한 선민의 종교적이면서도 비인도적인 악행의 사례를 제시하고 심판을 경고한다.(6-11절) 그 가운데 2장 1절과 2절은 계략을 꾸미고 수탈을 자행하는 등의 사회적 악행의 사례가 제시된다.
'불행하여라' 라고 번역한 감탄사 '호이'(hoy)는 1장에 이어, 이스라엘에 다가올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할 것임을 암시하는 점에서, 2장 1-11절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함축하는 도입부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에서는 선민들이 잠자리(침상)에서 악을 꾸민다고 지적한다. '잠자리'(침상)에 해당하는 '미쉬코브'(mishikob)는 시서에서 신앙의 사람들이 거룩한 생각을 하는 장소(시편4,5), 하느님과 친교하는 장소(시편36,5 ;63,7)로 종종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죄악의 장소(이사57,8 ; 에제23,17), 사치와 방탕의 장소(아모6,4)로도 종종 묘사된다.
침상은 고요함의 의미,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라는 의미를 함축하며, 그곳에서 무엇을 하느냐는 것은 그의 신앙과 인격,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태를 표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후자의 용례로 사용되어, 그들이 홀로 있을 때 그들의 도모하는 바를 통해 그들의 내면이 악으로 찌들어 있음을 암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이란 구절이 쓰여진 용도는, 좀 더 구체적으로, 당시 부유한 자들이 사치스러운 침상에 누워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착취할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지탄하기 위해서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1)
2장 1절에서 사용된 세 개의 동사는 점층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이 악을 행하게 되는 과정을 점점 더 강도를 높여 묘사한다.
먼저 상반절의 '불의를 꾀하고' 라는 표현에서 '꾀하고'에 해당하는 '호세베'(hoshebe)의 원형 '하샤브'(hashab)는 죄악이 싹트는 단계로 마음속으로 범죄를 도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보다 구체적으로 타인에게 해를 가하기 위해 마음속으로 악한 일을 계획하는 것을 묘사한다(즈카7,10).
또한 본문의 '악을 꾸미는'에서 '꾸미는'에 해당하는 '우포알레'(uphoalle)의 원형 '파알'(phaal)은 '행하다' 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그런데 '파알'은 다른 사람에게 직접 위해를 가한다는 의미보다는, 머리 속에만 있던 생각을 실제 행동으로 착수하였다는 의미 내지는 죄악을 행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다하였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즉 본문의 꾸미는 행위는 마음속의 생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밤새 궁리한 악한 일을 실행하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만들고,그것을 실제적으로 착수할 구체적인 준비까지 완료된 상태임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세번째 '실행에 옮긴다' 에 해당하는 '야아수하'(yaasuha)의 원형 '아사'(asa)는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폭력이나 부당한 방법을 통해 가하는 행위를 묘사하는 단어이다. '아사'는 그 단어 자체가 부정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며,단지 어떤 행위를 한다는 의미인데 이제까지 생각하고 계획한 일이 악한 것이었기에 행하는 일도 악행일 수밖에 없다.
'아침이 밝자마자'
'아침'에 해당하는 '보케르'(boqer)는 '새벽' 혹은 '아침', '날' 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밝자마자' 에 해당하는 '뻬오르'(beor)에서 전치사 '뻬'(be)는 '~(때)에' 라는 의미이고 명사 '오르'(or)는 '빛'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막 해가 떠, 빛이 비추는 이른 아침의 때를 가리킨다. 시간에 대한 본문의 이러한 표현은 상반절의 '침상에서' 라는 장소에 대한 표현과 대구를 이룬다.
침상은 장소적 표현이지만, 모든 사람이 잠든 밤중이라는 시점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본절의 이러한 표현들은 악인이 밤새 악행을 행할 궁리를 하고,자신의 죄악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계획까지 세워두었다가 날이 새자마자 악행을 실천하였다는 뉘앙스를 지닌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본문의 묘사는 이들의 죄악이 부지불식간에 실수로 행한 잘못이나 순간적 분노로 인한 우발적 죄가 아니라,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계획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긴 죄임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물론 죄악을 미워하시고, 누구든지간에 악을 행하였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아니라 동시에 그 마음과 뜻을 살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형벌이나 사죄 여부에 대해 그 고의성 여부 또한 살피시고 헤아리신다.
또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그것을 끝내 고집하느냐 여부, 즉 예언자 등의 가르침에 대해 합당하게 반응하느냐 여부도 염두에 두신다.
이를 감안할 때, 악의적으로 죄를 계획하고 그것을 주저함없이 저지르는 자들, 그 악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중단할 것을 요청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끝내 고집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공의와 자비로우심을 멸시하는 자이므로 자비와 동정을 받을 수 없는 철저한 심판을 자초하는 자라 할 수 있다.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복음(마태12,14~21)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18~21)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신 이유를 구약의 이사야서 42장 1~4절에서 찾고 있다.
주 하느님께서 선택한 사람, 즉 이 세상에 보내실 메시야는 이방에 공의를 선포하며, 자신을 드러내기를 기뻐하지 않으며, 이방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되실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메시야로서 자기 본래의 사명을 다 완수하기도 전에 백성들의 세속적 기대에 부응하여 단지 병고치는 분으로 널리 알려지길 원치 않으셨다.
마태오 복음 12장 18절의 '종'으로 번역된 '파이스'(pais; servant)는 사회적 신분으로서 '종'뿐 아니라 혈통적인 관계에 있어서 '아들'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신분을 잘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마지 못해서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는 노예와 같은 '종'('둘로스'; doulos)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아버지께서 마음에 드시는 일을 행하는 아들과 같은 종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라는 뜻은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 내면에 하느님께서 마음에 드실 만한 요건이 충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러한 요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안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이며(요한14,10), 예수님의 가르침 또한 당신 독자적인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이다(요한7,16).
또한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i will put my spirit on him)에서 '내가 ~ 주리니'에 해당하는 '테소'(theso; i will put)는 '두다', '놓다'는 뜻을 지닌 동사 '티테미'(tithemi)의 미래 1인칭 단수로서 '내가 둘 것이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당신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두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하느님의 성령께서 그 머리 위에 내려오신 사건(요한3,16)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에서 '그가 ~선포하리라'로 번역한 '아팡겔레이'(apanggelei; he will proclaim)의 원형 '아팡겔로'(apanggello)는 '~로부터'(from)라는 기원과 근원을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와 '소식이나 사건을 알리다', '전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 '앙겔로'(anggello)가 결합된 합성 동사로서, 다른데서 얻은 소식 따위를 공개적으로 보도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민족들에게 알릴 '올바름'이 하느님께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것이 공개적으로 알려질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기서 '올바름'으로 번역된 '크리신'(krisin; judgement; justice)의 원형 '크리시스'(krisis)는 '심판'보다는 '정의'(공의)의 의미를 더 함축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 민족 뿐만 아니라 이방 모든 민족들에게 하느님의 정의를 널리 선포할 것이다.
이것은 그분께서 인류의 구원자인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심으로 전해진 '복음'이 그의 제자들을 통해 널리 증거되어질 것(마태28,18~20)을 나타낸다.
마태오 복음 12장 19절의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는 같은 뜻을 지닌 내용을 두 번 반복해서 의미를 보다 강조하는 동의적 대구법이 사용되었다.
여기서 '소리치지도'로 번역된 '크라우가세이'(kraugasei; cry out)의 원형 '크라우가조'(kraugazo)는 '크게 소리지르다', '야단스럽게 떠들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자기식의 의(義)를 내세우기 위해 타인과 논쟁한 경우가 없으며, 자신이 한 행동을 자랑하기 위해 이곳 저곳 다니면서 떠들어 댄 적도 없었고, 길에서 소리 높여 광고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메시야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입증한다(마태11,29).
그리고 마태오 복음 19장 20절의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도 마태오 복음 12장 19절과 마찬가지로 동의적 대구법이 사용되었다.
'부러진'으로 번역된 '쉰테트림메논'(syntetrimmenon; bruised)는 '깨트리다', '산산이 부수다', '상하다'는 뜻을 지닌 원형 '쉰트리보'(syntribo)의 완료 분사 수동태로서, 갈대가 '이미 썩어 부서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미 썩어 부서진 갈대는 그 자체로, 꺾지 않고 그대로 놔 두어서 되살아날 가능성이 없다. 그런데 그러한 갈대를 꺾어 버리는 것만큼 잔인한 행동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부러진 갈대'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을 비유하며,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람을 꺾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푼다는 뜻이다.
또한 '연기 나는'으로 번역된 '튀포메논'(typhomenon; smoking)은 '연기를 뿜다', '꺼져가다'는 뜻을 지닌 원형 '튀포'(typho)의 현재 분사로서, 심지가 '현재 연기를 내고 있는 것'을 뜻한다.
초의 심지에 연기가 나고 있다는 것은 그 심지의 불꽃이 금방 꺼져버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금방 꺼져버린 심지는 끄지 않고 그대로 놔 두어도 불꽃을 되살리지는 못한다.
따라서 이러한 심지를 끄는 행위 역시 잔인하며 몰인정한 것이다.
여기서의 심지도 산산조각난 갈대처럼, 죄로 말미암아 아무런 희망없이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을 비유한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종, 또한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시는 종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너무나 자비로우셔서 희망없이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분이심이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
끝으로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는 '승리를 향하여 올바름을 이끌 때까지' 혹은 '승리를 위하여 올바름을 이끌 때까지'로 번역될 수 있는데, 마태오 복음 12장 18절의 '올바름'에 해당하는 '심판' 혹은 '정의'가 무지한 사람들에게 짓밟히지 않고, 영광스럽게 그 뜻을 펼칠 때까지를 가리킨다.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고 절망에 빠진 자들에게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로 말미암아, 언젠가는 하느님의 정의가 그 목적을 성취할 것이며, 그때까지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인생들을 지켜주시는 것이다.
부러진 갈대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태 12,19)."
'다투고
소리치다.' 라는 말에서 정치인들의 선거 유세가 연상되는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활동 방식은 세상 사람들의 방식과 다르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내세우고, 물질적인 수단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상대편을 힘으로 제압하는 등의 방법으로 세력을 확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사랑과 희생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대가를 주는 것도 아니고, 박해하기만 하고...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묵묵히 일하십니다. 그런 예수님이 보기에 답답했는지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께 이런 말을 합니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요한 7,3-4)."
이 말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서 적극적으로 홍보 활동을 하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그들은(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고 설명합니다(요한 7,5).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다른 율법학자들과 같은 랍비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시기는커녕 사람들을 피하신 일이 여러 번 나옵니다.
"...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마르 1,45)."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마르 7,24)."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5)."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피하신 것은 모든 사람을 피하신 일이 아니라, 당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세속적인 이유로만 찾는 사람들을 피하신 일입니다. 들으라는
복음은 안 듣고 기적만 바라거나,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지상적이고
현세적인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라는 말은, 세속적인
방식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아볼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성체성사에 관해서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일이 좋은 예입니다(요한 6,66).
오늘날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현세적인
복을 받기만을 바라고 교회에 오는 사람들, 정치적인
이유로 교회를 찾는 사람들, 신앙생활을 취미생활처럼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아니면,
듣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사실 교회 쪽에서도 반성할 점들이 많습니다. 세상에 복음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홍보 활동을 하지만, 예수님의 복음이 아니라 교회의 겉모습만을 홍보하는 경우가 있고, 교세를 과시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일 때도 있고...(크고 멋있는 성당이 꼭 좋은 성당인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는 "구원 사업이 완성될 때까지"입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단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 노력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쪽에서 스스로 구원받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라는 말은 전 인류가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얻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부러진
갈대'와 '연기 나는 심지'는 다 끝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즉
구원받을 가능성이 하나도 안 보이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가능성도 보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나 포기하면 안 됩니다.
구원받는
일이 마치
산을 여기에서 저기로 옮기는 일처럼 어려운 일로 생각되더라도(마태 17,20),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말하는 '희망'이 꼭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구원받는 일)에 대한 영적인
희망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의 인생살이에 대한 희망도 포함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지상에서의 인생 여정을 잘 마칠 수 있도록 힘과
도움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 (현세적인
복과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바라는 그런 희망은 아니고.)
모진 고난을 겪어도 신앙을 잃지 않는 사람이 있지만, 인생살이가 너무 힘들면 기가 꺾여서 신앙을 잃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잘 들어가려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살이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힘들어도 믿음과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또 기가 꺾이지 않도록...
인생이 너무 힘들다고 자살하는 경우,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자기가 먼저 포기하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도와주시는데 그것을 믿지 않고 희망을 버리는 일입니다.
따라서
자살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스스로 끊는다는 점에서도 큰 죄가 되지만, 자기가
먼저 포기한다는 점에서도 '큰 죄'가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악의 현실은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나온다고 교회는 가르쳐 왔습니다. 하느님의 완전함은 악의 실재와 어울리지 않지만, 인간이 겪는 세상 속의 죄와 죽음 때문에 우리는 악을 생생한 현실로 느낍니다. 미카 예언자는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이 “하느님은 벌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없다!”라고 스스로를 기만하며, 세속에서 악과 타협하여 얻은 능력으로 약탈과 기만을 일삼으며, 불공정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지만, 언젠가 이 불의한 현실을 치유해 줄 메시아가 나타날 것을 기다립니다.
율법과 계명을 무기로 사람들과 차별된 인생을 산다고 자부하던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걸림돌이었습니다.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시며, 사회적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병들고 소외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없애 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 악에 타협하는 이들로 말미암아 십자가라는 운명의 길을 가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죽음은 자기 탓 없이 율법의 굴레에 갇혀 살지만, 메시아의 도래를 희망하는 성경의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위한 대속의 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선택된 종, 그분께서 사랑하시고 그분 마음에 드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운명을 거스르지 않으시고 당신의 방식이 아닌 아버지의 방식으로 인류의 십자가를 짊어지십니다. 인류는 그분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었고, 희망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무엇이 바뀌었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고백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세상 너머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음을. 세상 것이 전부인 듯 악과 타협하는 이들이 결코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을 피해 갈 수 없으며, 결국 의인이 살고, 선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