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간 화요일]실행 (마태 12,46-50)
미카 예언자는 주님께,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시기를 청한다. (미카 7,14-15.18-20)
주님, 14 과수원 한가운데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15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18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20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당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신다. (마태 12,46-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미카7,14-15.18-20)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18~19)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18)
미카서 7장 18절이하 20절에서 미카 예언자는 선민을 향한 주님의 용서와 어지신 사랑을 바라며 선취적으로 찬양을 드린다. 이러한 새로운 단락의 서두에 나오는 본문은 '누가 당신과 같은 신인가?(Who is a God like you?) 이다.
이것을 잘못 알아 들으면 하느님 외에도 여러 신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주 하느님께서 최고의 신(神)이신 것처럼 보인다. 즉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을 인정하는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그런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이 아니다.
이러한 표현은 구약 성경 곳곳에서 사용되는 표현으로(탈출15,11; 시편81,10; 86,8; 95,3; 135,5) 하느님의 권능과 절대 주권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고 강하심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18)
본문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죄악을 묻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로 번역된 '노세'(nose; pardon)와 '(죄악을) 묻지 않으시는'으로 번역된 '오베르'(ober; forgive)를 구분해야 한다.
이 두 단어 중 '노세'(nose)의 원형 '나사'(nasa)는 지은 죄에 대하여 형벌을 내리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사면의 의미가 강하다. 반면,'오베르'의 원형 '아바르'(abar)는 단지 죄에 대한 형벌을 내리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죄악 자체를 말끔히 소멸시킨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나사'(nasa)는 하느님께서 선민들에 죄악에 대하여 형벌을 면제하는 '집행유예'의 의미를 전하는 것이라면, '아바르'(abar)는 그 죄악 자체를 아예 없는 것으로 여기는 '공소기각'의 의미를 강조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이란 표현은 '그의 기업의 남은 자'(the remant of His possession or inheritance)이다. 남은 자들이 기업(소유)에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라 기업(소유)과 남은 자를 동격으로 본다.
이것을 감안하면, 하느님께서 남은 자들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이유가 더 분명해진다. 이것은 그들이 바로 하느님의 기업, 곧 거룩한 소유이기 때문이다.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19)
하느님께서 미카서 7장 18절에 언급한 것처럼 선민에 대한 분노를 오래 품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본절 상반절에 기록된 것처럼 선민을 불쌍히 여기신다.
이제 본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버려 기억도 나지 않게 하시는, 즉 죄악을 이길 수 있는 능력까지 주시는 분으로 고백되고 있다.
선민의 연약함과 관련된 하느님의 이런 성품에 대한 묘사가 점진적으로 더 강력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죄악에 대한 용서만이 아니라 죄악을 극복할 수 있는 힘까지 주시는 자비와 권능의 하느님이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모든 죄악' 이라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어떤 죄를 용서하시고 어떤 죄는 남겨 두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악과 죄책(죄의 형벌)에 대하여 완벽하게 청산하실 것임을 강조한다.
또한 '바다 깊은 곳으로' 으로 번역된 '뻬메출로트 얌'(bemetsloth yam; into the depths of the sea)은 바다 위에 던질 뿐만 아니라 바다 밑바닥 까지 내려가게 한다는 의미까지 지닌다. 즉 원문은 완전한 폐기 처분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폐기되는 죄악의 범위가 전부이고, 죄악에 대한 폐기의 정도가 완전하고 철저한 것임을 서술한 것이다. 즉 하느님 용서의 온전성과 완정성, 철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12,46-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50)
여기서 '실행하는 사람이'로 번역된 '포이에세 ~ 아우토스'(poiese ~autos; dose~the same)는 '실행하면, 바로 그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바로 그 당사자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주고 있다.
'포이에세'(poiese)의 원형 '포이에오'(poieo)는 어떠한 일을 적극적으로 행하거나 존재하는 물질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인데, 여기서는 '내 아버지의 뜻'을 목적어로 취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여기서 '포이에오'(poieo)는 '~하는 자는 누구든지'를 뜻하는 '호스티스 안' (hostis an; whoever)과 함께 가정법으로 쓰여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만 하면 누구든지'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바로 그 조건이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본 문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실행한 것은 그저 예수님의 말씀을 긍정하면서 묵묵히 듣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에는 눈에 보이는 행위 뿐만 아니라, 눈에 띄지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결단을 내리는 마음을 가지는 것까지도 포함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로마8,14~16)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실 때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아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도 혈연관계를 중시하시어 그들을 배려하실 것이라 기대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새 공동체는 혈연관계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으로 구성된 새 가족 공동체였습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태어나 관계 속에서 성장하며 결국 관계 속에서 나의 흔적과 기억을 남기고 떠납니다. 그러기에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를 맺고 사는 가족과 혈연이 관계 맺기의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혈연보다 더 중요한 인간관계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념과 가치를 공유하고, 신의와 공정을 기초로 삼아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국가라는 이념으로 왜곡되고, 특정한 이익 집단으로 폄하되기도 하며, 친구라는 미명으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결국 인간이 살고 죽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함께’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친척들이 혈연관계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의 특권을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새 가족, 새로운 인류 공동체는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하는 이들로 묶인 친교의 공동체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누구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실천하신 분이셨기에 예수님과 깊이 결합되신 분이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성찬례를 통하여 같은 식탁에서 빵을 나누고, 함께 하느님 말씀을 들으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여 교회라는 가족 공동체를 이룹니다. 신앙은 결코 교회 없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혹시 내가 교회 안에서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교회 없는 나 홀로 신앙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형제와 자매를 얻다
우리는 부모와의 혈연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 혈연관계를 통하여 형제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시며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50)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새로운 형제자매를, 어머니를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자체이신 분과 하나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8,14-15). 그리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5,1).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3,26). “여러분은 한 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폐5,8).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에페5,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히브2,11-13).
하느님께 향한 믿음으로 형성된 새로운 부모 형제의 관계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성당에 잘 나오지 않는 남자 분들이 가끔 “아내가 열심히 해서 치맛자락만 붙잡고 있으면 반 천당은 갈 것”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주님과 맺은 관계와 내가 맺는 관계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데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아내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지 묵주를 끼고 신자라고 폼 냅니다. 그것도 금으로 만들고, 때로는 보석을 박아 자랑합니다. 자동차 안에는 십자가나 묵주를 걸어놓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주님을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매달고 다니고 간직하면 좋은 일이 생기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요?
스승과 제자, 스승과 나의 관계는 어떤 물질 적인 것이나 상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혈연이나 가정, 민족이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장차 완성될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가족을 미리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뜻을 살고 있는 이들은 이미 한 가족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창조물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태양을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노래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행실이 하나였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는 차원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사는 가운데(갈라2,20) 형제자매, 어머니를 많이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