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야고보 사도 축일]섬기는 사람 (마태 20,20-28)
바오로 사도는,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고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 한다. (2코린 4,7-15)
형제 여러분, 7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8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2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마태 20,20-28)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제1독서(2코린4,7-15)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룻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7)
바오로는, 코린토 후서 4장 7절이하 15절에서 약함 속에서 고난을 무릅쓰고 사도로서의 직분을 수행하는 사목 자세에 대해 설명한다.
사도 바오로가 여기서 '이 보물(보배)' 이란 무엇을 지칭할까? 어떤 이는 코린토 후서 4장 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 직분' 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문맥상 바로 앞에 나오는 코린토 후서 4장 6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이 값진 보물이 값싼 질그릇 속에 담겨 있는 것으로 묘사하며 양자 사이에 극명한 대조를 이끌어 내고 있다. 이 질그릇 비유의 상징어는 그 그릇의 가치가 형편없다는 뉘앙스가 담겨져 있다.
즉 바오로는 질그릇이란 표현을 통해 인간의 육체가 지닌 한계성과 연약성을 설득력있게 표현한 것이다.
바오로의 복음 선교 활동이 연약한 자신의 인간적인 본성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지식의 빛을 받아 그것을 전하면서 자기 자신을 내세울 자로 여기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을 높이 드러내실 분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자신의 연약함과 비천함을 깊이 아는 자일수록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심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0)
'죽음을' 에 해당하는 '네크로신'(nekrosin)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뿐 아니라 그때 수반된 죽음의 고통까지 말한다.
바오로는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갈라6,17)하고 말한 것처럼 그의 경험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가 당했던 죽음의 고통에 날마다 동참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위대성은 이처럼 예수님의 삶을 철저하게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실천한 데 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이 본질적으로 새로운 생명 곧 부활의 씨앗이 되었음을 함축한다.
비록 죽음의 상황에 처해지더라도, 그 고통에의 동참은 결코 무익하지 않다. 이것이 무익한 인내가 아닌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 부활의 첫 열매를 쫓아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 것이며 그와 함께 영원히 왕노릇할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부활의 생명이 궁극적으로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복음(마태20,20~28)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기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26~28)
'너희 가운데에서'에 해당하는 '엔 휘민'(en hymin; among you)이란 표현은 제자들을 다른 대상과 구분짓는 말로서, 이미 제자들은 이 세상 나라와는 구별되는 하느님 나라에 속한 자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처럼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속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고방식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겸손, 섬김이 기본이 되는 천국의 본질과 관련해서 역설적인 진리를 가르치신다.
여기서 '섬기는 사람'으로 번역된 '디아코노스'(diakonos; minister; servant)는 '심부름을 가다'라는 뜻이 있는 '디아코'(diako)에서 유래하여 '일꾼','하인'(요한2,5.9), '하인'(마태22,13)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초대 교회 때 교회 공동체 안에서 봉사하는 자를 가리키는 '봉사자','집사' (필리1,1; 1티모3,12)라는 호칭이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한편, 마태오 복음 20장 27절에서 '첫째가'에 해당하는 '프로토스'(protos; first; chief)는 장소나 시간에 대해 '~보다 앞에'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프로'(pr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여기서는 지위나 계급 등에 있어서 '제일 높은 자'를 가리킨다.
반면에 '종'에 해당하는 '둘로스'(doulos; servant; slave)는 '묶다'(마태13,30), '묶다', '결박하다'(마태12,29)라는 뜻이 있는 동사 '데오'(deo)에서 유래하여 주인에게 완전히 예속된 '노예'(slave)를 의미한다.
종은 자신이 아니라 주인을 위하여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쳐야 한다.
사랑과 겸손, 섬김이 기본이 되는 하느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상대방을 섬기는 자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위의 마태오 복음 20장 28절의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육화(강생)하신 목적만을 밝히시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 아니고,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을 본받아 하느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합당한 자질을 갖도록 촉구하는데 있다.
여기서 '몸값'에 해당하는 '뤼트론'(lytron; a ransom)은 '풀다'(마태16,19), '벗다'(사도7,33) 등으로 번역되는 '뤼오'(lyo)에서 유래하여 '의무나 속박에서 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타인의 속박아래에 있는 노예나 죄수에게 자유를 부여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죄와 죽음의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여 참된 자유와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인간들의 이러한 죄와 죽음과 사탄의 속박을 끊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무죄하신 당신 자신의 목숨을 그들을 대신하는 제물로 바쳐야 했다.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과 의노를 풀어드리기 위해, 하느님 아버지와 위격이 같으신 무죄하신 예수님이 죄지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상에서 대속(代贖; Redemption)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대속물로서 죽으신 것은 '많은 이들'을 위해서이다.
'많은 이들'로 번역된 '폴론'(pollon; many)의 원형 '폴뤼스'(polys)는 수적으로 많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길다는 뜻과 정도에 있어서 광범위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특히 여기서 우리는 '모든'이라는 뜻이 있는 '파스'(pas)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데에 유념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지만, 모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출세와 섬김>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20,20-23)”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입니다.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 자리는 다른 사도들의 자리보다 높은 자리입니다.
앞의 19장 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이 말씀은, 종말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면, 사도들이(신앙인들도) 예수님의 왕권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더 높은 자리를 주시겠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두 사도가 청한 예수님의 오른쪽 자리와 왼쪽 자리는 그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두 자리로 해석됩니다.
아마도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하느님 나라를 세속의 왕국과 같은 왕국으로, 또 ‘열두 옥좌’를 그 왕국의 고위직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두 사도의 어머니가 청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고, 사실은 두 사도가 청한 것입니다.)
두
사도가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고 청한 것은, 인간적인
권력욕과 명예욕에서 비롯된 일로 생각됩니다.
이 이야기 바로 앞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시는 말씀이 나오는데(마태 20,18-19), 사도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고, 자기들이 인간적으로 바라고 있는 것을 얻을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두
사도의 권력욕과 명예욕은 세속 사람들의 그것과 같은 악한 것은 아니고,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아직 모르기 때문에 품게 된 것입니다.
즉 불순한 욕망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예수님의 왕권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생긴 단순하고 초보적이고 인간적인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거절도 아니고 승낙도 아닙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두
사도가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왕권에 참여하기를 바란다면, 그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뒤따라가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의 십자가에 동참할 수 있느냐?” 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면 자동적으로
높은 자리를 얻게 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라는 두 사도의 대답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감수하겠다는 정도의 뜻일 뿐입니다. 두 사도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서 대답한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청한 것처럼 자기들이 무슨 대답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대답한 것입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두 사도의 순교를 예언하신 말씀인데,
야고보
사도는 서기 44년에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그즈음 헤로데 임금이 교회에 속한 몇몇 사람을 해치려고 손을 뻗쳤다. 그는 먼저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쳐 죽이게 하고서, 유다인들이 그 일로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아들이게 하였다. 때는 무교절 기간이었다(사도 12,1-3).”
요한
사도의 순교 사실을 전하는 기록은 없는데,그는
일생 동안 순교와 다름없는 모진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왕권에 참여하는 일은, 예수님과의
인간적인 친분 관계로 결정되는 일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인간적으로 친하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실천해야 그 나라에 들어갑니다.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셨다는 뜻도 아니고, 또
하느님께서 어떤 기준도 없이 당신 마음대로 정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마음에 들도록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여라.”로 해석됩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이들’ 속에 포함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과 예수님의 왕권에 참여하는 일은,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한다고 아무나 그렇게 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행하는(마태 7,21) 신앙인만이 그렇게 됩니다.
다른 열 사도가 그 두 사도를 불쾌하게 여기는데(마태 20,24), 이것은 그들도 두 사도와 같은 것을 바라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5-28).”
이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너희는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라. 나를
본받아서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속 권력자들의 모습을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라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는 것은 안 믿는 자들이나 짓는 죄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신앙인들은 남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되려는 욕심과 바람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그런
욕심과 바람을 버리지 않으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남보다 높은 사람은 없고 남을 섬기는 사람만 있는 나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술잔을 생각하시면 이해하시기가 아주 쉽습니다.
내 앞에 있는 잔은 내가 마실 분량입니다.
그래서 잔은 어떤 사람의 몫, 그의 운명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잔을 함께 마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들이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 잔이 어떤 잔인지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 것일까요?
당신의 잔이 무엇인지를 아셨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아버지께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잔을 결국 마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그들이 계속하고,
그분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를 선포하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을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하면,
당연히 그 잔을 마실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사도들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한 야고보는,
그가 마실 잔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을 때에 그 잔을
거부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고난을, 그분의 죽음을 함께 지고 갔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지니지 않고서는 부활을 선포할 수 없습니다.
죽음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은연중에 죽음 없는 부활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 또한 적극적인 자세로 우리의 신앙에서 십자가와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곰곰이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