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간 금요일]열매 (마태13,18-23)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주님의 옥좌’라 부르고,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이름을 찾아 예루살렘에 모일 날이 오리라고 한다. (예레 3,14-17)
14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의 주인이다. 나는 너희를 이 성읍에서 하나, 저 가문에서 둘씩 끌어내어 시온으로 데려오겠다.
15 내가 너희에게 내 마음에 드는 목자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너희를 지식과 슬기로 돌볼 것이다.
16 너희가 그날 그 땅에서 불어나고 번성하게 될 때, ─ 주님의 말씀이다. ─ 사람들은 더 이상 주님의 계약 궤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마음에 떠올리거나 기억하거나 찾지 않을 것이며, 다시 만들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17 그때에 그들은 예루살렘을 ‘주님의 옥좌’라 부를 것이고,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이름을 찾아 예루살렘에 모일 것이다. 그러고는 더 이상 자신들의 악한 마음을 고집스럽게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8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연중 제16주간 금요일독서 (예레3,14-17)
"너희가 그날 그 땅에서 불어나고 번성하게 될 때, 주님의 말씀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주님의 계약 궤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마음에 떠올리거나 기억하거나 찾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만들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16)
남부 유다와 북부 이스라엘 선민 모두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궁극적으로 실현될 선민의 종말론적 회복을 약속하는 14-19절의 내용 가운데, 본절 16절과 17절은 종말론적으로 회복될 선민 사회의 완전성을 묘사하고 있다.
먼저 본문에서는 회복의 일환으로 번성과 풍요가 약속된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 일이 이루어질 시점이 강조된다. 즉 비록 이방 나라의 포로 생활이라는 징벌을 통과한 이후의 번영과 축복일지라도 그 귀환의 시대를 기대하게 하는 '때' 이다.
본절에서는 '불어나고' 와 '번성하게 될' 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귀환의 시대인 '그날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서 재산과 인구의 번성과 증가를 누리게 될 것을 예언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적으로만 이해될 수 없는 내용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약속대로 포로에서 선민들이 귀환하였지만, 그들이 귀환한 이후 군사적,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으로 괄목할 만한 번영과 성장을 누린 적은 없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영적인 의미로 알아 들어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목자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실 새로운 계약의 백성인 신약의 성도들과 교회를 성장케 하시며,그로 인해 하느님 나라를 확장케 하실 것임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주님의 계약궤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것이다.'
본절에서는 하느님 임재와 현존의 상징이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의 증거였던 '주님의 계약궤' 가 5회나 사용된 부정어 '로'(lo)를 통해 지금까지 그 백성 가운데서 차지하였던 중요한 위치와 기능을 상실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북부 이스라엘은 분단과 함께 하느님의 계약의 상징인 '계약궤'와, 임재의 상징인 성전이 있는 예배의 처소인 예루살렘으로부터 스스로를 배제시켰다. 이로 인해 북부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란 영광스런 신분을 잃고 말았으며, 그 중에 하느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소수의 남은 자들도 예루살렘 성전 예배와 동떨어져 있었기에 남부 유다 사람들로부터 하느님과 무관한 자들로 여겨지기에 이르고 만다.
그러나 주님 신앙의 정통성과 주님 계약의 계승을 두고, 정통성이 없다고 여겨졌던 북부 이스라엘이 남부 유다와 함께 포로에서 귀환할 때에는 더 이상 '계약궤'의 유무를 두고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하느님 백성들의 영적 성숙을 반영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계약궤와 성전은 선민들에게 있어 계약적으로, 신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상징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징일 뿐, 실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위치한 예루살렘,거기 거하는 예루살렘과 남부 유다 거주민들은 상징을 맹신하고 그것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면서도, 그 실체인 하느님의 계약과 하느님의 임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그러나 상징은 그것이 아무리 거룩하고 특별한 것이라고 해도, 그 실체를 가리는 것이 된다면, 도리어 없는 것만 못한 것이 된다.
하느님께서 바빌론의 침공 당시 성전을 파괴하게 하신 것, 그리고 계약궤를 이동시키게 한 것(2 마카 2,4-8)은 이처럼 형식적으로 거짓된 신앙을 벌하신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문의 사람들이 계약궤를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징에 얽매이거나 그것을 매개로 하느님을 신뢰하고 따르는데서 나아가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눈에 보이는 매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일치를 통해 하느님을 경외할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본문의 표현 가운데는, 하느님의 백성들 사이에도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질 것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과거 성전과 계약궤라는 상징물을 내세우며, 북부 이스라엘과 자신들과의 구별을 강조하던 남부 유다 사람들, 그리고 동일하게 성전과 계약궤로부터 자신들을 배제시킨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로 일치하며 오직 하느님과의 인격적 일치에만 마음을 둘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을 마음에 떠올리거나 기억하거나 찾지 않을 것이며, 다시 만들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앞선 상반절에 이어 본문에서는, 히브리어에서 가장 강한 의미의 부정어 '로'(lo)를 반복 사용하여 계약궤 기념이 더 이상 필요없는 시대가 올 것임을 예고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찾지 않을 것이며, 다시 만들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란 표현에서도 역시 부정어 '로'(lo)를 거듭 사용하여, 계약궤가 있는 장소를 방문하거나 이방 나라의 침략에 의해 이동되어진 계약궤가 다시 제작되는 일이 더 이상 없는 영적인 성숙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러한 본문 표현 가운데는, 우상 숭배자들이 나무 기둥이나 돌기둥을 섬기던 것처럼, 선민들이 상징물에 불과한 계약궤를 맹신하던 일들이 있었음을 함축하며, 이것을 질책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것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계약궤와 더불어 성전을 맹신하던 남부 유다의 형식적 신앙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인지를 질책하는 의미 또한 내포되어 있다.
아울러 이것은 상징물에 불과한 계약궤나 성전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 참된 신앙이 장차 하느님의 백성들의 심령에 견고히 세워질 날을 희망하게 한다.
곧 계약궤와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과, 하느님 백성들의 심령에 하느님의 계약을 새기시고 인호를 새기실 성령의 강림으로 세워진 교회를 통하여, 완전하게 대체될 날을 희망하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계약궤는 이제 성령께서 영혼의 역할을 하시는, 주님 구원 사업이 계승되는 교회안에서 성체를 모시는 감실(tabernacle)을 말하게 된다.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모신 성모님이 계약궤이며, 말씀과 성체를 모시는 우리 자신이 성령의 궁전과 새로운 계약궤로 하느님 뜻따라 거룩하게 살기를 바라시는 말씀이겠다.
그럴 때,구약의 계약궤도, 지성소도, 성전도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체험하게 되는 거룩한 것이 된다.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복음(마태13,18~23)
"너희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18~23)
마태오 복음 13장 1~52절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7가지 비유'의 말씀이며,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스런 성격을 매우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등을 말씀하신 이유 중에 하나는 말씀의 씨를 뿌려도 바리사인들과 같이 완고하고 사악한 무리들의 마음은 말씀을 거부함으로인해 결실을 하지 못하는 밭인 반면에, 말씀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듣는 제자들과 같은 무리들의 마음은 결실을 맺는 밭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비유'로 번역된 '파라볼라이스'(parabolais)의 원형 '파라볼레'(parabole)는 원래 어떤 것을 다른 것의 곁에 놓음으로써 비교한다는 뜻을 지닌 명사이다.
즉 '파라볼레'는 심오한 사상이나 어려운 이야기를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실례에 빗대서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는 이야기 진행 방법이다.
'씨뿌리는 사람'에 해당하는 '호 스페이론'(ho speiron; a sower)에서 '씨뿌리는'으로 번역된 '스페이론'(speiron)은 '씨를 뿌리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스페이로'(speiro)의 현재분사로서 앞에 있는 관사 '호'(ho)와 함께 분사의 독립적 용법으로 쓰였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자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씨뿌리는 사람'(파종하는 자), 즉 농부(a farmer)를 가리킨다.
농경사회에서 밭에 파종하는 자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낯익은 풍경인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농경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복음 전파와 그것의 결실에 관한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농부는 복음을 전하는 자를 가리키고, 씨 뿌리는 네가지 밭은 복음을 전해 받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등장하는 네가지 밭은 별개의 각각의 밭이 아니라 한 밭에 있는 다양한 땅의 상태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원래 팔레스티나에서는 밭을 경작하기 전에 씨 뿌리는 풍습이 있었으며, 씨가 떨어지는 밭은 대부분 돌이나 가시도 섞여 있었고, 잡초도 어느 정도 나 있었기 때문이다.
농부는 자신이 뿌리는 씨가 어떤 땅에 떨어지든 상관하지 않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씨앗을 이곳 저곳에 뿌린다.
그러던 중 씨앗의 일부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리게 된다.
여기서 '길에'에 해당하는 '파라 텐 호돈'(para ten hodon; along the path)인데, 씨앗의 일부가 밭 사이의 길 내지는 밭을 가로지르는 딱딱한 길을 따라 뿌려진다.
말하자면, 여기서 '길'이란 밭 사이에 나 있는 좁은 길이나 농부들이 밭일을 하기 위해 자주 걸으면서 다져져 길과 같이 된 땅을 말한다.
그래서 밭 사이에 나 있는 다소 딱딱한 좁은 길에 떨어진 씨앗은 땅을 뚫고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농부의 기대와는 달리 결실은 커녕, 뿌리 한 번 제대로 내려보지 못하고, 그 주위에 날아다니고 있는 '새들'('타 페테이나'; ta peteina; the birds)의 눈에 띄게 되고, 결국 그들의 먹이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이 새들은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버리는 악한 자를 상징한다(마태13,19).
또한 '흙이 많지 않은 돌밭'은 '흙으로 얇게 덮인 바위가 많은 밭'이라는 말인데, 밖으로 싹이 돋지만, 곧바로 무섭게 뜨거운 태양이 솟아올라 그 열기와 빛으로 말미암아 메말라 죽게 된다.
이 비유에서 '솟아오르는 해'는 '환난이나 박해'로 상징되고 있다(마태13,21).
우리의 내면이 마치 돌밭과 같이 깨어지지 않는 완고한 자아로 가득 차 있으면, '환난이나 박해'가 신앙을 단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 자체를 소멸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세번째로 '가시덤불'로 번역된 '아칸타스'(akanthas; thorns)는 '가시'나 '가시덤불'을 뜻하는 명사 '아칸타'(akantha)의 목적격 복수형으로서 '가시들' 내지 '가시덤불'을 의미한다.
이 '가시덤불'위에 떨어진 씨앗은 그보다 먼저 높이 자라버린 가시에 찔리고 그 그늘에 막혀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고사(枯死)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우리의 내면을 기도와 말씀과 성체로 일구고 돌보지 않으면, 우리 마음의 내면은 이미 선점하고 있는 가시와 같은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무성해질 것이다(마태13,22).
그래서 그 마음에서 복음의 씨앗은 자라지 못하고 사그라들고 말게 된다는 것이다.
끝으로, '좋은 땅'에 해당하는 '에피 텐 겐 텐 칼렌'(epi ten gen ten kalen; on good soil; into good ground)에서, '좋은'으로 번역된 '칼렌'(kelen)의 원형 '칼로스'(kalos)는 기타 다른 것보다 더 우수하고 좋은 모든 것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이다.
이것은 씨앗이 자라기에 '적합하고'(suitable),'쓸모있는'(useful) 땅을 말한다.
이 땅은 위의 세 가지 종류의 땅보다 훨씬 우수하고 좋은 땅으로서 씨앗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식물 경작에 매우 적합한 땅'을 말한다.
여기서 '어떤 것'에 해당하는 '호'(ho; some)는 지시 대명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호스'(hos)의 주격 중성 단수로서 '어떤 것 하나'라는 뜻이다.
이것은 각각의 씨앗들이 좋은 땅에서 나름대로 열매를 맺었다는 것을 보여 주며, 또한 씨앗들의 조건이 동일한 땅에 떨어져도, 그 결실의 양은 씨앗의 '질'(質)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종합하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씨앗이 아무리 부실해도 열매맺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는 사실과 결실의 양은 씨앗의 질에 따라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열매를 맺으려면
몇 개의 작은 화분을 한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보기는 좋은데 물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고 물을 싫어하는 화초가 있습니다. 햇빛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을 한 바구니에 담았더니 관리가 쉽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 보이는 화초가 있어 물을 주고 강한 햇빛을 가려 주면 옆에 있는 화초가 힘들어 합니다. 옆에 있는 화초를 위해 햇빛에 내 놓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조화를 이룬 겉모양은 아름답고 좋은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다릅니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의 성격과 취향이 같지 않아서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 자기 기준에 맞춰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편하게 내 방법을 선택하면 상대방이 그만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입맛에 맞으면 최고요, 내 스타일에 맞지 않으면 모두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겉모양은 모두가 멋진데 속을 보면 멀미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정말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배가 될 수도 있고 예순 배, 서른 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서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개별적으로 보면 우리 마음의 밭이 다 좋은 땅인데 열매를 맺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그것은 마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듣는 사람 마음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말씀을 듣고 힘써 그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진짜로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4,12).하고 말했습니다.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앞에서 거저 얻으려 하니 부끄럽습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면서도 그만한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과는 너무도 뻔합니다. 수고와 땀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서로의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서 풍성한 열매를 맺길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커가고 그 사랑이 이웃으로 향할 때 비로소 열매가 생성되는 것입니다. 포도원지기가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루가13,8).하였듯이 다른 이에게 거름을 주는 포도원지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이 길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하는 태도입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세상 것들에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능이 가까워 오면 점집을 간다든지, 혼사를 앞두고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가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여러 가지 욕심 때문에 말씀을 따르려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한 편으로 가시덤불은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오만가지 근심걱정, 과거의 상처와 모욕으로 자신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열매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최우선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살아가면서 말씀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되고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말씀을 새기고 행하는 만큼 주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야말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하느님의 좋은 밭이 되어야 할 공동체와 사회
-기경호신부-
오늘 복음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단락의 말씀들을 먼저 개인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는 각자가 말씀을 받아들여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이 되어야겠지요. 과연 우리의 마음 밭은 좋은 땅이라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어떻게 받아들여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이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깊이 새기지도 깨닫지도 못합니다. 또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뿌리가 없어 환난과 박해가 오면 쉽게 무너져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편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도 있지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열매를 맺는 근본적인 원인은 하느님께서 씨를 뿌리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고 맺지 않는 조건은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달려 있지요.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들어 깊이 새기고, 깨달으며, 깨달은 것을 사랑으로 실천하는 좋은 땅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의 단락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태오 공동체의 다양한 모습에 대한 자기비판이기도 합니다. 마태오 공동체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사람, 확고한 믿음 없이 살아가는 사람, 세상 근심과 유혹에 휘둘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복음의 공동체적, 사회적 차원에도 주목해야겠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기 공동체의 모습을 보면서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구원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신이라는 소우주에 갇혀 자기만족적인 신심과 하느님의 뜻과 무관한 생활방식과 습관에 젖어 안일하게 산다면 구원받을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지요.
말씀의 씨앗은 우리 원의와 상관없이 우리 신앙공동체나 사회에도 뿌려집니다. 각자의 마음 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와 사회 또한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는 밭인 셈입니다. 따라서 공동체나 사회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도록 이기심과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주변을 살펴야 합니다. 분노와 탐욕, 지배와 폭력의 가시덤불을 거둬버리지 않고 묵인하는 사회는 부패하고 말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물, 사랑의 물을 아낌없이 주어야 공동체라는 밭이 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공동체와 사회에 불의의 독버섯이 자라지 않도록 정의이신 하느님의 눈으로 살펴야겠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짓밟는 잡초가 자라나지 않도록,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의 밭을 강한 믿음과 사랑으로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서로 부축하며 애써 하느님을 회상하고, 말씀을 깊이 되새겨 깨달으며, 환난과 박해에도 끝까지 견뎌냄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부패한 권력, 물욕과 명예욕에 눈이 먼 자본가,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하느님의 좋은 밭’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마음의 밭, 사회공동체와 신앙공동체의 밭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가시밭이 되지 않도록 깨어 살펴야겠습니다. 특히 돈의 힘에 의지하거나 재물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겠지요. 왜냐하면 돈이야말로 각 개인은 물론 사회와 교회를 타락으로 내모는 가장 막강한 우상인 까닭입니다. 지금이 바로 증오와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모든 사람을 해방시키려는 예수님의 선포를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