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간 월요일]겨자씨 (마태 13,31-35)

2018. 7. 30. 오전 5:4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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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7주간 월요일]겨자씨 (마태 13,31-35)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아마포 띠를 강가에 숨겨 두고 썩게 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의 교만을 썩혀 버리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다. (예레 13,1-11)
1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서 아마포 띠를 사, 허리에 두르고 물에 담그지 마라.”
2 그래서 주님의 분부대로 나는 띠를 사서 허리에 둘렀다.
3 그러자 주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나에게 내렸다.
4 “네가 사서 허리에 두른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프라테스 강으로 가거라. 그리고 거기 바위 틈새에 띠를 숨겨 두어라.”
5 주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대로 나는 유프라테스 강으로 가서 띠를 숨겼다.
6 여러 날이 지난 뒤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유프라테스 강으로 가서, 내가 너더러 거기 숨겨 두라고 명령한 띠를 가져오너라.”
7 그래서 유프라테스 강으로 가 흙을 헤치고, 숨겨 둔 곳에서 띠를 꺼냈다. 그런데 그 띠가 썩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었다.
8 그때 주님의 말씀이 다시 나에게 내렸다.
9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도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그처럼 썩혀 버리겠다.
10 이 사악한 백성이 내 말을 듣기를 마다하고, 제 고집스러운 마음에 따라 다른 신들을 좇아 다니며  그것들을 섬기고 예배하였으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띠처럼 되고 말 것이다.
11 이 띠가 사람의 허리에 붙어 있듯이  내가 온 이스라엘 집안과 온 유다 집안을 나에게 붙어 있게 한 것은 ─ 주님의 말씀이다. ─ 그들이 내 백성이 되어 명성과 칭송과 영광을 얻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며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마태 13,31-35)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31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제1독서(예레13,1~11)

 

"나도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그처럼 썩혀 버리겠다.

 

 이 사악한 백성이 내 말을 듣기를 마다하고, 제 고집스러운 마음에 따라

 다른 신들을 좇아 다니며 그것들을 섬기고 예배하였으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띠처럼 되고 말 것이다. 

 

 이 띠가 사람의 허리에 부어 있듯이 내가 온 이스라엘 집안과  

 온 유다 집안을 나에게 붙어 있게 한 것은 - 주님의 말씀이다.-

 그들이 내 백성이 되어 명성과 칭송과 영광을 얻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다." (9~11)

 

'나도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그처럼 썩혀 버리겠다.'(9)

 

본문은 하느님께서 남부 유다와 예루살렘이 보여왔던 교만에 대한 응분의 심판으로

그들을 물가에 두었던 아마포(베) 띠와 같이 썩혀 쓸모없게 만들겠다는 예언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의 이면에는 과거 남부 유다와 예루살렘이

찬란한 영광 가운데에 있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본절에서 두 번 쓰이며 모두 '교만'으로 번역된 '께온'(geon)의 원형

'까온'(gaon)이 많은 경우 '교만', '오만', '거만'이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지만

(잠언16,18; 아모6,8; 나훔2,3), 때로는 하느님의 위엄이나 크심(탈출15,7; 이사2,10),

혹은 어떤 대상의 화려함이나 영광스러움(이사4,2; 60,15; 아모8,7)을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는 점에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하느님께서 선택한 백성 남부 유다와 하느님의 현존(임재)를 상징하는

처소인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큰 위엄을 가졌었고, 영광과 화려함을 누렸었다.

 

그러나 남부 유다가 하느님의 선민으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고

또한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우상을 숭배하는 처소로 변함에 따라

하느님께서는 남부 유다의 위엄과 영광을 썩게 만드셔서

남부 유다를 이방의 포로로, 예루살렘 성전과 시가를 폐허로

만들어 버리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본문에는 하느님께서 남부 유다와 예루살렘의 교만을 제거하신다는

의미와 더불어 당신께서 과거 남부 유다와 예루살렘에 축복으로 주셨던

영광과 탁월함을 빼앗아 버리신다는 의미까지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악한 백성이 내 말을 듣기를 마다하고, 제 고집스러운 마음에 따라

  다른 신들을 좇아 다니며 그것들을 섬기고 예배하였으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띠처럼 되고 말 것이다.'(10)

 

본절에서 남부 유다가 썩은 아마포 띠같이 쓸모없는 민족이

되는 이유로 세가지 죄 지적된다.

 

첫째는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 듣기를 거절하는 것이며,

둘째제 고집스러운 마음의 완고함 안에서 행하는 것이며,

셋째다른 신들의 뒤를 좇아 섬기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원문의 표현은 문법적으로 정적인 것에서

동적인 것으로의 점진적 움직임을 묘사하는 효과를 전달한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거절하는 남부 유다의 마음 상태가

보다 동적인 상태, 즉 자신들의 마음의 완고함 안에서 행하는 상태로 발전하고,

급기야는 활발하게 다른 신들의 뒤를 좇는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는

뉘앙스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선택받은 남부 유다가 우상을 좇아가는

망령된 자들로 변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지선악과를 따먹은 인류 최초의 아담의 범죄로부터

이 세상의 모든 범죄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결국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최대의 범죄인 극악한 우상 숭배로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임을 보게 된다.

 

따라서 이와같이 타락한 남부 유다는 본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결국 썩어서 쓸 수 없게 된 띠와 같은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이 띠가 사람의 허리에 부어 있듯이 내가 온 이스라엘 집안과  

 온 유다 집안을 나에게 붙어 있게 한 것은 - 주님의 말씀이다.-

 그들이 내 백성이 되어 명성과 칭송과 영광을 얻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다.'(11)

 

본절은 양보절과 귀결절이 결합한 구문이다.

양보절 전체는 구약 성경에서 60회 정도 사용되었는데,

'~처럼 ~그렇게' (as ~ so)란 직유적 의미를 전달하는 구문에 사용된다.

 

따라서 본문은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하여 있는 것처럼, 바로 그렇게

온 이스라엘 집안과 온 유다 집안을 하느님께 속하게 하였음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양보절은 온 이스라엘 집안과 온 유다 집안이

하느님께 속하게 되었을 때의 결과를  네 가지로 전달하고 있다.

 

그들로 하여금 '내 백성','명성','칭송','영광'이 되게 하는 것으로 전달한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온 이스라엘 집안과 온 유다 집안을 '내 백성'

되게 하신 것은 그들을 선민으로 부르셨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들을 '명성'(이름)이 되게 한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움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그들을 '칭송'이 되게 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찬양이 된다는

의미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선민들의 삶을 보면서

주변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의 명예를 드높인다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선민들로 하여금 '영광'이 되게 한다는 것은 선민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영광을 구현하는 도구로 삼으셨음을 의미한다.

 

이 모든 내용은 선민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아주 소중하게 여겨져

축복을 받고, 하느님께 중요한 사명을 부여 받았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구약의 선민 뿐만 아니라 신약의 선민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성도는 하느님의 백성이며 하느님의 이름(명성)이고,

하느님의 칭송(찬양, 명예)이며 하느님의 영광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다.'(11)

 

앞선 양보절은 길게 기술된 반면, 귀결절은 단 두 단어로 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양보절에 나타나는 것처럼, 선민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노력은 너무나 컸으나 선민은 너무나 쉽게 그리고 너무나 단호하게

하느님의 사랑과 노력을 거부하여 버렸다는 뉘앙스를 전달한다.

 

본문에 나오는 부정어 '로'(lo)가 강한 부정을 나타내듯이 선민은

하느님의 모든 관심과 배려를 일거에 단호하게 배격했던 것이다.

선민의 모든 불행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로 하여금 아마포(베) 띠를 구입하고 착용하여

유프라테스 강가에 은닉한 후 다시 회수를 명령하는 지금까지의

번거로운 과정을 거친 까닭이 바로 이러한 사실을 계시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복음(마태13,31~35)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1~33)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13장에서 천국에 관한 비유 가운데

세번째 비유인 겨자씨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겨자씨 비유의 주제천국('하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he basileia ton uranon; The kingdom of heaven)

처음에는 미약하게 보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놀랍게도 확장된다는 것이다.

 

이 비유의 핵심 단어인 '겨자씨'로 번역된 '시나페오스'(sinapeos; a mustard

seed)의 원형 '시나피'(sinapi)'겨자씨'뿐 아니라 '겨자' 자체도 의미한다.

 

이 겨자의 씨앗은 비록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만큼 작지만, 그것이

땅에 심겨져 완전히 다 자라면 3m가 더 될 만큼 커지게 된다.

 

따라서 겨자는 그 씨앗의 원래 크기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성장하는 식물의 상징으로 그려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겨자씨를 소재로 하여 천국을 설명하신 데에는 이유 있다.

 

겨자씨와 같이 작은 씨앗이 싹이 나서 자란 후에는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커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국도 비록 작고 미미한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완성된 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안식과 평화를 누릴 만큼

외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한편, '뿌리다'는 의미로 번역된 '에스페이렌'(espeiren; and sowed)의

원형 '스페이로'(speiro)마태오 복음 13장 3절에서 '씨를 뿌리다'는 의미로

번역된 단어와 동일한 동사로서, 큼직한 씨앗이나 묘목을 손으로 하나하나 심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작은 씨앗들을 흩뿌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새들'에 해당하는 '타 페테이나'(ta peteina; the birds)

13장 3절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는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가 버리는

'악한 자'(19절)를 상징했지만, 여기서인생이라는 고통스럽고 기나긴 여행에서

지친 심신을 쉬러 몰려드는 보편적인 인간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깃들이다'는 의미로 번역된 '카타스케눈'(kataskenun; lodge;

perch)의 원형 '카타스케노오'(kataskenoo)는 원래 '자신의 천막을 치다',

'자신의 거처를 정하다'는 의미이며(사도2,26), 구약 희랍어 번역본인 칠십인역

(LXX)에서는 주로 '천막에 거주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샤칸'(shakan)의 역어

사용되었다(창세9,27; 민수14,30; 35,34).

 

광야 생활에서 유목민들이 그들의 천막에서 거처하며 쉬는 것처럼,

공중을 날아다니다 피곤에 지친 새들은 상당히 성장하여 그늘까지 제공하는

겨자나무(마르코 4,32)의 가지 틈새에 자신의 거처를 정하고 쉼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뇌와 슬픔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상처받고 지친 영혼들도

안식처를 찾아 헤매다가 천국의 메시지를 듣고 복음을 받아 들이게 될 때,

하느님의 통치 아래 자신의 참된 안식처를 얻게 되는 것이다(마태11,28.29).

 

이제 천국 외적 성장에 초점을 맞춘 겨자씨 비유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천국의 내적 성장을 보여 주는 누룩의 비유를 설명하신다.

 

이것은 천국이 처음에는 미미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작은 것이지만,

나중에는 한 개인의 인생은 물론 사회를 변혁시키며 역사의 흐름을

바꾸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여기서 '말'로 번역된 '사타'(sata; measures)의 원형 '사톤'(saton)

곡물의 중량을 재는 도량형으로서, 히브리어 '스아'(sah)의 역어이며

(창세18,6), 7.33리터 정도의 양이다.

 

따라서 '서 말'이면 '세 스아', 약 22리터(12되) 정도 되는 밀가루이다.

 

밀가루 세 스아에 누룩을 섞어 그것을 반죽한 후,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원래 크기의 몇 배로 부풀어 오르게 된다.

 

여기서 '누룩'으로 번역된 '쥐메'(zyme)'열로 끓다', '끓어 오르다'

의미를 지닌 동사 '제오'(ze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밀가루 반죽 속에서

끓어올라 그것을 부풀게 하는 '효모'(leaven), '누룩'을 의미한다.

 

신, 구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누룩은 과월절과 같은 절기 때에 빵반죽에 넣어서는 안되는 재료였으며(탈출13,7),

바리사이와 사두가이의 교훈(마태16,6), 전염성이 강한 부도덕한 행위인

불륜(1코린5,6) 등에 비유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누룩'은 부정적인 의미가 전혀 담겨져 있지 않고,

다만 그 발효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밀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간 누룩은 지극히 적은 양이지만 그로인해 밀가루 반죽이

엄청나게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천국의 시작 역시 지극히 작고 미미한 것이지만

그 천국을 확장시키는 복음의 능력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통치의 영역과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진다는 것이다.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1-32).”


‘겨자씨의 비유’의 뜻은, “예수님의 나라는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나라처럼 보여도

마지막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위대한 나라가 될 것이다.”입니다.

여기서 ‘새들’은 전체 인류를 뜻하는 것으로,

새들이 와서 가지에 깃들인다는 말은,

인류 전체가 당신의 나라로 들어오기를, 즉 구원받기를

예수님께서 바라신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스라엘 최고의회가 사도들을 박해할 때,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 5,38-39).”

이 말에는 초대 교회의 모습이 그냥 내버려 두면 저절로 없어질 것 같은,

보잘것없는 모습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교회가 하느님께서 세우신 교회라면 아무리 보잘것없게 보여도

사람의 힘으로는 없앨 수 없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겨자씨처럼 작은 씨가 큰 나무로 자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또는 예수님의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예수님의 나라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겨자씨의 비유’를 “너희는 각자 하나의 씨가 되어라.” 라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비유는 밀알 하나에 관한 말씀과 비슷한 말씀이 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내가’ 들어가서 살기를 희망하는 나라이기 때문이고,

그 희망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를 작은 선행과 사랑 실천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물 한 잔을 주는 일을 인간의 눈으로만 보면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일에서 큰 사랑을 보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을 꾸준히 사랑하십시오.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히브 13,1-2.공동번역).”

아브라함의 경우, 그가 대접한 나그네는 하느님이었습니다(창세 18장).

나의 선행이, 나의 기도가, 지금은 ‘작은 일’로 보여도

그 ‘작은 일’이 하나의 씨가 되어서 나중에 큰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33).”

예수님의 말씀에는 이 세상을 당신의 나라로 변화시키는 힘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서 변화된 사람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좋은 예가 초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4-47).”

사랑으로 가득 찬 신자 공동체의 ‘삶의 모습’을 좋게 본 세상 사람들이

자기 발로 공동체를 찾아와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신자 공동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제대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실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온전히 실천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누룩이 될 수 있었습니다.


‘누룩의 비유’에서 누룩에 관한 다른 말씀이 연상됩니다.

“제자들이 호수 건너편으로 가면서 빵을 가져가는 것을 잊어버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우리가 빵을 가져오지 않았구나.’ 하며

저희끼리 수군거렸다(마태 16,5-7).”

현세의 삶만, 즉 먹고사는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에 물든 모습입니다.

(제자들이 빵이 없다고 걱정한 일은,

그들이 그때에는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그리고 아직은 예수님의 누룩으로 변화되지 못한 상태였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누룩’으로 변화된 신앙인은 먹고사는 일을 걱정하지 않고,

하느님의 나라와 그 나라에서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을 추구합니다(마태 6,31-33).

신앙인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사는 사람입니다(마태 4,4).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되어 있지 않다면 세상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누룩이 밀가루를 부풀어 오르게 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 일도,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도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따라서 인내가 필요한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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