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간 월요일]요나의 표징(마태 12,38-42)
미카 예언자는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걸으라고 한다. (미카 6,1-4.6-8)
1 너희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너희는 일어나 산들 앞에서 고소 내용을 밝히고 언덕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여라.”
2 산들아, 땅의 견고한 기초들아, 주님의 고소 내용을 들어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고소하시고 이스라엘을 고발하신다.
3 내 백성아,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였느냐? 내가 무엇으로 너희를 성가시게 하였느냐? 대답해 보아라.
4 정녕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왔고 종살이하던 집에서 너희를 구해 내었으며 너희 앞으로 모세를, 아론과 미르얌을 보냈다.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고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합니까? 번제물을 가지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까?
7 수천 마리 숫양이면, 만 개의 기름 강이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죄를 벗으려면 내 맏아들을, 내 죄악을 갚으려면 이 몸의 소생을 내놓아야 합니까?
8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하리라고 하신다. (마태12,38-42)
38 그때에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40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41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독서 (미카6,1-4.6-8)
"내 죄를 벗으려면 내 맏아들을, 내 죄악을 갚으려면 이 몸의 소생을 내놓아야 합니까?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 (7ㄴ-8)
맏아들(장자)를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은 사실 출애굽 당시 하느님께서 이집트의 처음 난 모든 것을 멸하시는 중, 이스라엘 자손에 속한 처음 난 것을 구별하여 보전하시면서 그들에 대해 당신 소유로 선언하신 것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다(탈출34,19).
물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 가운데 레위인들을 구별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섬기는 일에 매진하게 하시고,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맏아들 대신에 취하셨다 (민수8,16).
그리고 이방의 몰록신을 섬기는 자들과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맏아들을 실제로 바치려는 일을 자행할까 우려하여 율법은 이를 금하였고, 예언자들도 이를 단호하게 금하였다. (이사57,5 ; 레위18,21 ;20,2 ; 예레7,31 ;19,5 ; 에제16,20-21 ;20,16) 그러나 이스라엘은 개국 이래 누누히 이러한 일을 최상의 헌신의 증표로 여기고 이를 임의로 자행하였다 (2열왕16,3 ;21,6).
진실로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결과, 불필요한 제물을 쓸데없이 허비하였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가중하게 여기시는 바, 자기 자신보다도 소중한 자기 자녀,그것도 맏아들(장자)을 죽여 번제로 바치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어리석고도 추악한 일,가증스런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8)
앞선 6,7절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인간이 스스로 묻고 답하는 형식을 통해, 주님을 향하여 선민들이 가진 잘못된 자세의 실례를 제시하는 내용이다. 반면에 8절은 예언자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시를 통해 밝히는 내용이다.
본문의 말하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착한 일' 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반절의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 과 병행을 이루기 때문이다. 즉 본절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착한 일이지, 결코 6,7절에서 제시되는 인신제사와 같은 반인륜적 제물이나 부정 부패나 불의한 방법을 통해 얻은 사치스러운 제물이 아님을 밝힌다.
특히 후반부에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착한 일은 불의한 제물과 상반되는 정의로운 삶이고, 물질적으로 대단해 보이는 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갖는 사랑이며, 형식적이고 종교적 율법 준수가 아닌 삶에서 드러내는 인격적 변화가 따르는 행동임을 제시하고 있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8)
본문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내용이다.
첫번째 부정사구인 '아소트 미쉬파트'(asoth mishiphat) 즉 '공정을 실천하는 일' 은 율법에서 요구하는 공정(정의)이 무엇인지를 단순히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공정'(정의)에 해당하는 '미쉬파트'(mishiphat)는 하느님의 속성인 동시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는 성품중의 하나이다. 이 단어는 재판관이 바른 판결을 내리는 것을 나타내거나(신명25,1 ; 여호20,6),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을 나타내는 경우에도 사용된다.(욥기22,4 ; 시편143,2)
이것은 아울러 일상적인 삶의 행동에서(시편106,3), 또는 말에서(시편37,30), 또는 그 생각이나 사상에서(잠언12,5) 보이고 간직해야 할 정의로움 내지 정직함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충분한 정의를 보장받을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치는 실천을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예레22,3).
한편, '신의'에 해당하는 '헤쎄드'(hesed)는 하느님의 당신 백성을 향한 사랑(자비와 인자)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것은 자상함, 친근함, 애정이란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가진 근본적인 의미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베푸시는 계약적 사랑' 으로 규정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오직 계약에 입각해서 무조건적으로 그 백성들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셨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과 관련해 사용하면, 하느님의 계약적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충성', '온유함', '인자함', '자비로움' 등 인격적인 덕목을 구비하는 것이며, 그것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구현하는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8)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시는 세번째 요구사항은 겸손히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여기서 '겸손하게' 에 해당하는 '하츠네아으'(hatsneah)는 '걷는 것' 에 해당하는 '레케트'(leketh)처럼 부정사형이다.
즉 본문은 하느님과의 동행만큼 동일한 비중으로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겸손의 반대는 두 말할 나위 없이 '교만' 이다. 성경 곳곳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며 심판의 지름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잠언11,2 ;16,18 ;17,19 ;18,12 ;29,23 ; 이사2,11)
그러므로 본문에 제시된 그 반대의 삶의 자세인 '겸손'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승리와 구원의 자리에 든든히 자기를 세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겸손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자신이 하느님의 피조물됨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자만이 참으로 보일 수 있는 태도이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자는 창조주 하느님께 자신이 어떤 제물을 드린다해도,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이요, 결코 그 제물만으로는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없음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절감하게 마련이다.
즉 그는 하느님 앞에 일 년 된 송아지든, 수천 마리 숫양이든, 만 개의 강물같은 기름이든, 심지어 그 태에서 난 맏아들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만으로 하느님 대전에 내세우거나 그것만을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없음을 절감해야 한다.
그가 하느님 대전에 보일 수 있는 태도는 오직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느님 대전에 겸손 외에 없다. 또한 하느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동행)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의탁한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것 역시 겸손과 일맥상통한다.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복음(마태12,38~42)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38~40)
여기에서 '표징'으로 번역된 '세메이온'(semeion; a sign)은 어떤 인격이나 사물을 다른 것으로부터 두드러지게 구별해 주는 표시와 같은 것들을 총칭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보통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기적'이나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을 보여 주는 '징조'와 같은 것을 가리킬 때도 쓰인다.
유대 랍비들은 장차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면, 그가 진정으로 하느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메시야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은 표징을 보여줄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진짜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궁금증 때문이 아니라, 메시야가 아닐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에게 표징을 구했다.
그들이 진정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있었다면, 예수님의 능력있는 가르침이나 지금까지 일으키신 많은 기적을 보고,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앞서 마귀들린 자를 고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오히려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한 것이라고 공격하였으며(마태12,22~24), 이제는 또다시 표징을 요구하는 변덕을 보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구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향해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절개없는'으로 번역된 '모이칼리스'(moichalis; aduterous)는 '간음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모이큐오'(moicheuo)에서 유래한 형용사로서 '간음하는', '혼외(婚外)정사를 하는'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단어가 하느님과 그 백성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하느님께 신실하지 못한','신앙을 버린'이라는 의미로 쓰인다(야고4,4; 에제16,15).
전에 신앙을 가졌던 자들이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말씀에 만족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기적을 찾게 된다.
지금 예수님께로부터 책망받고 있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인들 역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리울 만큼 악했으며(마태12,34), 눈에 보이는 기적으로 자신들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야 할 정도로 하느님께 신실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한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큰 물고기에서 삼키워져 죽은 줄 알았던 요나가 그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만에 온전하게 살아나옴으로써 하느님께서 그를 예언자로 세우셨음을 보여 주었던 표징을 가리킨다.
'요나에 관한 표징'이 예수님의 표징이 될 수 있는 것은 요나가 바로 예수님의 예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표징은 B.C.8세기경 북부 이스라엘의 예언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사흘간 갇혀 있다가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 당신도 죽어 땅 속에 사흘간 묻혀 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땅 속에'로 번역된 '엔 테 카르디아 테스 게스'(en te kardia tes ges; in the heart of the earth)에서 '카르디아'(kardia)는 '마음', '심장'(heart) 으로 번역되는데, '땅 속에'라는 말은 '땅의 심장 안에'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문학적으로는 땅의 가장 중심부를 가리키지만, 비유적으로는 '죽음의 영역인 저승(스올)'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요나도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 '스올의 뱃속'에 있었다고 표현하였으며(요나2,2), 이것은 그가 죽은 자의 영역에 떨어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생명 자체이시고(요한14,6)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지만(요한1,4), 죄인들을 대신해 죽음에 이르렀으며(히브2,9) 완전한 죽음의 영역에 종속되어 있었다(로마6,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므로(히브4,15) 더 이상 죽음의 권세에 매어 있을 수 없으셨고(사도2,24), 결국 사흘 만에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41ㄷ)
여기서 '더 큰 이'로 번역된 '플레이온'(pleion; a greater)은 '폴뤼스'(polys)의 비교급으로서, 양에 있어서 더 크거나 질에 있어서 더 우수하고 나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플레이온'(pleion)이 중성 단수로 쓰였다. 예수님께서 굳이 비교급 중성을 사용하신 것은 '요나'라는 사람과 예수님 당신을 비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비교하시는 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로부터 받은 심판의 메시지'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복음의 메시지와 은총'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예언자 요나의 심판의 메시지 하나만을 듣고도 회개했는데,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아들로부터 모든 좋은 것들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심판 때에 그들은 더욱 철저하게 단죄받게 될 것을 보여준다.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42ㄷ)
에디오피아 지역 스바에서 온 여왕은 단순히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만 듣기 위함이 아니라 그에게 있는 모든 지혜를 보고 듣고 알고 배우기 위해서 그에게 왔던 것이다. 그것도 유대인들이 생각하기에 유대 땅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왔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솔로몬보다 더 완전한 지혜를 소유한 분이 그들의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혜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보여줄 수 밖에 없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유대인 자신들의 눈앞에서 가장 많은 지혜의 말씀과 기적을 베풀어도 믿지않는 그들의 불신앙과 완고하고 사악한 고집 때문에, 그들의 죄를 뒤집어 쓰고 무죄하신 당신이 십자가에 처형될 수 밖에 없는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요나의 표징>
“그때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마태 12,38-40)”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것은,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불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예수는 가짜다. 그러니 표징을 보여 줄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서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 라고 부르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 라는 말은,
“죄 속에서 살면서,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의심하고 안 믿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고, 즉 악한 일이고,
그러면서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는 것,
즉 절개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신 것은,
표징을 보여 준다고 해도 그들이 안 믿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믿으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던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셔도
그 기적을 자기들이 보기를 바라는 표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기적을 보았고,
그 빵을 먹기까지 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는 않고
‘만나’와 같은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일이 좋은 예입니다.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요한 6,30-31)”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시고,
먼저 믿으라고 요구하셨습니다(요한 6,35).
믿기 위해서, 또는 믿으니까 표징을 요청하는 것과
안 믿고 의심하기 때문에 요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모세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라는 사명을 맡기셨을 때,
모세는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제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주님께서 당신에게
나타나셨을 리가 없소.’ 하면 어찌합니까?’(탈출 4,1)” 라는 말을 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자기 말을 안 믿을까봐 걱정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안 믿을까봐 걱정한 것은 아닙니다.
과연 모세라는 ‘사람’을 믿을 것인가? 를 걱정한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몇 가지 기적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이 너를 믿지 않고 첫 번째 표징이 말하는 것을 듣지 않는다 하더라도,
두 번째 표징이 말하는 것은 믿을 것이다. 그들이 이 두 표징도 믿지 않고
너의 말을 듣지 않거든, 나일 강에서 물을 퍼다가 마른 땅에 부어라.
그러면 나일 강에서 퍼 온 물이 마른 땅에서 피가 될 것이다(탈출 4,8-9).”
하느님께서 모세의 요청을 들어주신 것은,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믿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세가 하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표징’은 모세를 위한 일종의 신원증명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하느님께서 모세의 믿음에 응답하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안 믿는 자들에게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이 표징이 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믿으려는 마음이 아예 없는 자들에게는 표징을 보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는 말에 있는 ‘표징’이라는 말에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놀라운 기적이라는 뜻 외에도
‘구원과 멸망을 가르는 표지’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안 믿으면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갈림길에 서 있는 도로 표지판처럼,
‘구원의 길’과 ‘멸망의 길’로 갈라지는 갈림길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느냐, 안 믿느냐, 라는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구원의 길’로 갈 것이고 안 믿는 사람은 ‘멸망의 길’로 갈 것입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41).”
이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니네베 사람들도 요나의 설교를 한 번 듣고서
믿고 회개했는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너희는 왜 회개하지 않느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살아나온 일을
니네베 사람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중요한 것은 니네베의 멸망을 선포하는 요나의 말을
그들이 믿었고, 회개했다는 점입니다(요나 3,4-9).
이 말씀을 제자들이 하는 말로 바꿔서, “니네베 사람들은 멸망을 선포하는 요나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회개했는데, 당신들은 왜 요나보다 더 큰(위대한)
분이신 메시아 예수님을 믿지 않는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요나는 ‘멸망’을 선포했을 뿐이지만, 예수님은 ‘구원’을 선포하신 분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는 눈앞의 멸망을 피하기 위한 일이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일은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한 일입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42).”
이 말씀을 제자들의 말로 바꿔서, “남방 여왕은 구원의 복음에 비하면 별것도
아닌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는데, 당신들은 왜 당신들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솔로몬의 지혜는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긴 해도 ‘인간의 지혜’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인간을 구원하는 진리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우리가 몰라도 상관없는 것, 즉 그것을 몰라도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일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일,
즉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십자가, 예수님의 표징>
“사람의 아들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죽음이 당신의 표징이라 말씀하십니다.
무엇인가 엄청난 표징을 기대하던 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실망했고, 아무런 미련 없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적대자가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예수님의 표징을 온 세상에 드러냈습니다.
이로써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형도구가 그리스도교의 거룩한 상징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위에 가장 무기력한 모습으로 손과 발, 옆구리가 찢긴 채 매달리신 예수님께서 구세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무수히 많은 기도를 바칩니다.
순수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자신을 일치시키는 기도를 바칩니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던 사람들처럼 권력을, 지위를, 재산을, 개인적인 욕구와 안락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십자가의 핏빛 얼룩을 금빛으로 덧씌워 죽으심으로써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고백 없이 스스로 만든 헛된 우상을 그리스도로 받들기도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 무기력하게 그리고 처참하게 죽으신 십자가 사건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역설입니다.
비록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만 부활하리라는 궁극적인 희망의 약속이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 역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삶 안에서 실현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나약한 인간으로서 십자가를 변질시키려는 유혹을 언제 어디서나 쉽게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유혹을 굳건한 믿음과 실천으로 이겨낼 때에 우리는 보잘것없는 미약한 사람이지만, 온 세상을 품을 위대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 날 수 있습니다.
상지종 신부님
믿음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통해 생겨납니다. 특히 믿을 만한 사람의 말과 행동은 그 사람의 권위를 드러내 줍니다.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따르려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 몇 사람은, 예수님께서 약속된 진짜 메시아시라면 자신들이 기대하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표징은 잘못된 정보와 편견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표징은 신기한 기적이나 화려한 말잔치가 아니라, 당신께서 보여 주신 삶과 죽음 그 자체임을 예고하십니다. 그분의 표징은 요나 예언자가 보여 준 표징, 곧 사람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회개의 삶에 초대된 니네베 사람들이나 하느님의 뜻을 뒤늦게 깨달은 요나 예언자 자신을 통해 먼저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이방 민족이라고 배척당했지만, 솔로몬의 지혜를 얻어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깨달은 이들이야말로 당신께서 보여 주실 하느님 나라의 표징의 예고와도 같은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미카 예언자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리스도 신앙 속에서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는” 감추어진 작은 성인들이 많습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세속적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신의를 지키고, 자신의 재산과 능력으로 남을 폄하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 자비의 도구로 사용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스스로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 되어 보지 않겠습니까?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