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간 토요일]밀과 가라지 (마태오 13,24-30)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유다의 주민들이 그들의 행실을 고치면 주님의 집에 살게 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외치라고 하신다. (예레 7,1-11)
1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말씀.
2 주님의 집 대문에 서서 이 말씀을 외쳐라. “주님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서는 유다의 모든 주민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3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겠다.
4 ′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
5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6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는다면,
7 내가 너희를 이곳에, 예로부터 영원히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땅에 살게 하겠다.
8 그런데 너희는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짓된 말을 믿고 있다.
9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
10 그러면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받았다.′ 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11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보이느냐? 나도 이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고 하신다. (마태 13,24-30)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26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27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독서 (예레7,1-11)
"그런데 너희는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짓된 말을 믿고 있다." (8)
왜곡된 성전 숭배를 중심으로 한 총체적 신앙 오염 행태를 지적하는
7장 1-11절의 마지막 단락인 8-11절에서는,
당시 의식적으로 제사를 드리면서 온갖 죄악을 자행하는
남부 유다 사람들의 패역부도한 삶의 면모들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먼저 본문은 그들이 무익한 거짓말을 의지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일반적으로 히브리어에서는 행동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동사 표현만 가지고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인칭 대명사를 생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인칭 대명사 '앗템'(athem ; you) 사용을 통한 주어 표시와
그것을 다시 받는 재귀적 표현 '라켐'(lakem ; for yourselves)을 다시금 사용하여
특별한 의미를 전달한다. 이것은 마치 자신들 스스로 만든 거짓말로
자신들 스스로를 속인다는 뉘앙스의 표현을 풀이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 온갖 악을 자행하면서도, 성전이 있음으로써
자신들의 구원과 안전이 절대적으로 보장된다는 그릇된 성전 신학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짓말' 은 앞선 4절의 <'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는 말씀과 관련된다.
즉 주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고 제사의식과 성전 예배가 지속되고 있는 한,
자신들의 안전은 항상 보장될 것이라는 거짓 신념을 여기서는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짓말' 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 (9)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당신의 계명을 어기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
성전에 나아가서는 구원을 열망하는 남부 유다 사람들의 모순된 태도를 반어적인 질문을 통해 질책한다.
본절에 제시되는 죄목들은 선민의 삶의 기본 토대이며 윤리 강령이라
할 수 있는 십계명과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계명 전체를 위반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나타낸 것으로 풀이된다.
먼저 도둑질, 살인, 간음, 거짓 맹세는 대인(對人),대사회적(對 社會的)인
신법(神法)<신정법(神定法)>적 삶과 직결된 5계명 이하 10계명 전체를 아우르는 표현들이다.
아울러 이미 제시되는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
즉 섬긴다는 표현은,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들의 관계에 대한 계명으로 이해되는
제1계명~제3계명과 관련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하느님의 이름은 부르면서도, 하느님이 명하신 모든 계명에 역행하는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즉 그들은 성전 예배를 통해서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느님의 임재를 고백했지만,
일상 생활속에서는 하느님 없는 삶, 하느님을 무시하고 제거하는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한편, 이들이 범하는 다양한 죄악 가운데, '바알에게 분향한다' 는 표현은
그 죄악을 구체적으로 폭로한다.
즉 우상의 이름을 제시하고, 그들에게 무엇을 하였는지를 나타내준다.
여기서 제시된 '바알'(baal)은 문자적으로 '주', '자유자'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가나안 원주민에게 풍요다산을 가져다 주는 신으로 여겨졌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끊임없이 선민을 타락에 빠트린 대표적인 우상 숭배의 대상이다.
그리고 '분향한다' 로 번역된 '캇테르'(qater)는 '연기를 내다', '향을 태우다',
'제물을 바치다' 라는 의미의 동사 '카타르'(qatar)의 강조 부정사로서 예배 행위를 나타낸다.
이러한 예배 행위는 오로지 하느님께만 드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민들은 바알을 위해 예배함으로써, 하느님을 대적하고 모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는 것 역시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남부 유다가 섬겼던 '다른 신들' 을 수식하는 '모르는' 이란 표현은
히브리어에서 가장 강한 의미의 부정어 '로'(lo)에,
'알다', '이해하다' 란 뜻을 지닌 '야다으'(yadah)의 미완료형에,
남성 3인칭 복수 접미어가 부착된 것으로,
'그들이 결코 알지 못한다' 는 의미의 표현이다.
사실 선민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역사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체험했으며
선조들을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충분히 들어 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배반하여 알지도 못하는 우상을 숭배한 그들의 죄악은
실로 용납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13,24-30)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때까지 둘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24-30)
하늘나라(천국; 하느님의 다스림)는 '~하는 사람과 같다'는 의미를 가지고
하나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방식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해설하는 데 있어서
'A는 B와 같은 경우와 유사하다'는 아람어의 관용적 형식을 따르고 있다고
J. Jeremias는 말한다.
여기서 '씨'로 번역된 '스페르마'(sperma; seed)는 '어떤 사물을 발생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제라'(zera)의 희랍어 역어로서 식물의 씨앗(창세1,11.12) 뿐만 아니라
후손을 번성케 하는 동물의 정액(레위15,16; 18,21) 이라는 뜻도 있다.
신약성경에서 '스페르마'(sperma)는 43회 쓰였는데,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영적 기업을 상속으로 받게 되는 '계약(언약)의 후손'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마태22,24; 루카1,55; 사도3,25; 로마9,8; 갈라3,16; 히브2,16등등).
이 비유에서도 '스페르마'(sperma)는 '좋은'('칼로스'; kalos)이라는
형용사의 수식을 받아 영적으로는 하느님의 기업을 유산으로 상속받게 될
'하늘나라(천국)의 자녀들'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마태13,38).
'좋은 씨' 즉 '하늘 나(천국)의 자녀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이 세상에서 왕성한 생명력으로 번창해 나갈 것이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기 밭'에 해당하는 '토 아그로 아우투'(to agro autou;
his field)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은 이 세상 혹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소유임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 친히 창조하신 이 세상과 더불어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한 인간은
원천적으로도 현상적으로도 하느님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지금도 이 세상을 돌보시고 가꾸시며 인간을
당신의 섭리 안에 두고 계신다.
한편, 본문의 '그의 원수'에 해당하는 '아우투 호 에크트로스'(autou ho echthros;
his enemy)는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인 '사람의 아들'(인자; 人子; 마태13,37)인
예수님의 원수인 '악마'(마귀; 마태13,39)를 가리킨다.
그리고 '가라지'로 번역된 '지자니아'(zizania; tares; weeds)의
원형 '지자니온'(zizanion)은 성장 기간에는 밀과 닮아 보이지만,
그 낟알에는 독소를 품고 있는 독보리를 가리키는 명사이다.
흔히 밀밭에는 낟알이 약간 거무스름할 뿐, 쉽게 분별하기 힘든
독보리들이 성장하게 되는데, 밀 사이에 자라고 있는 독보리들은
그 뿌리가 밀의 뿌리에 엉켜있다.
그래서 독보리의 낟알이 검은 것을 보고 농부가 그 줄기를 잡아 뽑게 되면,
옆에 있는 밀 줄기까지 따라 뽑히게 된다(마태13,29).
따라서 경험이 많은 농부들은 추수 때까지 그 독보리를 그냥 놓아둔다(마태13,30).
본문에서 '지자니온'(zizanion)은 복수로 되어 있어서 마귀가 독보리를
수없이 많이 뿌렸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비유에서 이 수많은 독보리들은
'악마'(악한 자)의 자녀들을 상징하고 있다(마태13,38).
그런데 마태오 복음 13장 26절에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고 한다.
'열매를 맺을'에 해당하는 '카르폰 에포이에센'(karpon epoiesen)을
직역하면 '그것이 이삭 혹은 열매를 만들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그것이 만들다' 즉 '에포이에센'(epoiesen)의 주체는
마태오 복음 13장 24절의 '좋은 씨'이다.
좋은 씨가 그 속에 배태하고 있던 생명으로 말미암아 좋은 이삭을 막 맺기 시작할 때,
가라지는 그 좋은 씨가 맺은 이삭과는 다른 이삭을 맺게 된다.
따라서 농부들은 줄기 끝에 맺혀 있는 이삭을 보고
가라지를 쉽게 구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열매를 보고, 그 나무의 정체를 알 수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7,16)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어디서'로 번역된 '포텐'(pothen; from where)은 기원이나 근원을 캐는 부사로서
'어떤 장소로부터'라는 의미와 더불어 '어떤 존재(사람)로 부터?'라는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마태13,54.56절).
여기서는 곡식 밭에 가라지를 덧뿌린 원수를 가리키므로,
장소보다도 사람의 의미로 쓰였다.
'생기다'는 의미로 번역된 '에케이'(echei)는 '가지다','소유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에코'(echo)의 현재 능동형 3인칭 단수로서
'그것이 현재 ~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좋은 씨가 뿌려진 주인의 밭에서 가라지가 스스로 생겨나고 성장한 것이 아니라
외적 요인에 의해서 그 씨가 뿌려지고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것은 선(善)하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어떻게 악(惡)이 존재하며,
그 악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의 문제를 드러낸다.
'원수가 그렇게 하였다'
마태오 복음 13장 25절에서 '원수'가 '호 에크트로스'(ho echtros)였는데,
여기 28절에서는 '에크트로스 안트로포스'(echtros anthropos)가 되었는데,
같은 실체인데 의미가 더 강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크트로스'(echtros)는 '증오받는', '가증한', '적대 감정을 가지고 있는'이란
의미의 형용사이며, '안트로포스'(anthropos)는 보편적인 '사람'을 의미하는
명사이므로 '에프트로스 안트로포스'는 '가증한 사람', '집주인에게
적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바로 '악마'(마귀)를 뜻하는데,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심한 적대 감정을 가지고서, 그리스도의 선교와 구원 사업을 방해하고
분쇄하려고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심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저희가 ~거두다'(뽑다)는 의미로 번역된 '쉴렉소멘'(sylleksomen)의 원형
'쉴레고'(syllego)는 '긁어 모으다'는 의미인데, '그릇에 담다', '열매를 따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여기서는 가라지의 윗부분을 잡고 '긁어 모어듯이 훑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종들은 영적 통찰력이 부족해 당장이라도 가라지를 훑어버리고 싶어하지만,
신적 통찰력을 가지신 하느님을 상징하는 집주인은 전후 모든 사정을 잘 알고서
그것을 원치 않는다고 '아니다'('ou'; '우'; no)라고 말한다.
마태오 복음 13장 29절의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뽑다)는 의미로 사용된
'쉴레곤테스'(syllegontes)의 원형 '쉴레고'(syllego)는 28절에도 쓰인 단어로서
'긁어 모으다', '모으듯이 훑어버리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밀까지 함께 '뽑다'는 의미로 사용된 '에크리조세테'(ekrizosete)의
원형 '에크리조오'(ekrizoo)는 '뿌리째 뽑아버리다'는 뜻이다.
가라지의 뿌리는 주변에 있는 밀의 뿌리와 너무나 얼키설키 엉켜 있어서
가라지의 목을 잡고 그것만 훑는다 해도 밀의 뿌리가 뽑혀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가라지를 훑으려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내와 사랑으로 서로를 품는 하느님의 정원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얼핏 보면 세상은 늘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 악행과 불의 저지르고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이들은 당장 처벌해야 한다든가 이곳에 발도 못 붙이게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신앙공동체에서도 어쩌다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 행동이나 미운 짓하는 이를 보면 참지 못하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서기 70-80년경 마태오가 복음을 쓰던 당시 유다계 그리스도교인들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들은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악의 권세에 짓눌리고, 바리사이들의 교란 책동으로 신앙 또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인과 악인들이 왜 섞여서 살아야 하며 악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오늘의 비유는 그에 대한 답입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종들은 정의감에 불타 현세에서 서둘러 가라지 곧 악인을 가려내려 합니다(13,28). 그러나 악의 세력에 대한 선의 승리를 확신하는 주인은 수확 때까지 둘 다 자라게 놓아두라고 합니다(13,30).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악과 불의, 거짓과 부패와 위선을 당장 처벌하시지 않으시고 세상 끝날까지 인내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는 선인들끼리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사회든 신앙공동체든 악인과 선인이 함께 살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내 안에도 늘 선과 악이 공존하지 않습니까? 이런 실존적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그것은 우리 손에 달린 일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죄로 기우는 경향과 나약성을 지녔기 때문이지요.
자기중심적인 행동방식과 사고방식은 강한 자기주장으로 표현되고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기 기준으로 다른 이를 판단하게 되고 바리사이들처럼 자신만은 의로운 사람처럼 처신하기도 합니다. 남의 눈에 티는 잘도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지요.
내 안의 무성한 가라지 밭을 방치한 채 ‘남의 가라지는 당장 뽑아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하느님 사랑의 질서를 이해 못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판단하시고 마지막 날에 가려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며 사랑은 항상 정의에 앞섭니다. 아무도 ‘다른 이를 뽑아버릴 권한’이 없으며, 모두 ‘하느님 정원의 잡초들’일 뿐입니다.
하느님 정원은 ‘추수할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는’ 하느님의 인내와 사랑이 가득 찬 곳입니다. 그 정원에는 남의 큰 잘못을 판단하지 않고 그분의 손에 맡기고 그것을 회복하도록 기다려주는 사랑, 상처를 받고도 미워하지 않는 관대함, 오해받고 멸시를 당하고도 끝까지 참으며 비난하지 않는 인내의 꽃이 피어납니다.
주님의 정원에는 자신에 대한 비난 앞에서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 남의 허물을 입에 담지 않는 넓은 마음, 타인의 좋은 점에 대해 시기하지 않는 열린 마음, 가진 것 없어도 기쁘게 하느님께 의탁하는 가난한 마음의 향기가 피어오릅니다. 우리 각자는 이런 마음의 꽃이 가득한 하느님의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각자가 인간다운 아름다움과 존귀함을 회복할 수 있도록 유예기간을 주시고 악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선과 사랑에 감사드려야겠습니다. 나아가 자신을 찍어 내리는 도끼의 날에까지 향이 배이게 하는 백단향 나무처럼 서로를 뽑아버리기를 마다하고 서로에게 조건 없는 인내와 사랑의 향기를 뿌렸으면 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는 현실 속에서 하느님 말씀을 기억해 내고, 미래에 다가올 암흑의 역사를 경고하며 현재의 악행과 모순을 비판하는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잊고 바알 신을 숭배하며,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 왕권의 잘못된 행태를 날카롭게 비판한 예언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는다면” 살리라고 합니다. 계약을 어기며 역겨운 짓을 일삼는 백성을 보면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 백성의 타락과 몰락에 비통해 하고, 하느님을 중심에 두지 않는 유다의 임금들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종말의 표징들을 경고합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을 보면서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 마지막 때에 가라지들을 거두어 태워 버리시겠다는 예수님의 경고도 귀담아 들을 말씀입니다. 세상의 악을 허용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두 가지 가능성을 우리에게 열어 놓으십니다. 살면서 자기 주변의 숨겨진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회심하여 악행을 버릴 기회를 찾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죄악의 결과에 대하여 마지막 날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계약과 배반의 역사는 하느님을 섬기는 우리 자신의 역사의 예표가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악과 악행을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가라지로 가득 찬 밭에서 헤쳐 나오지 못해 결실을 맺지 못하는 밀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고도 됩니다. 비록 내 삶의 밀밭에서 많은 가라지들을 한꺼번에 뽑아낼 수는 없겠지만, 밀이 자랄 수 있도록 하나씩 뽑아 버리는 용기를 가져 보는 하루이기를 바랍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