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간 화요일]가라지 (마태오 13,36-43)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 그들과 맺으신 주님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시라고 탄원한다. (예레 14,17ㄴ-22)
17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도 참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18 들에 나가면 칼에 맞아 죽은 자들뿐이요 성읍에 들어가면 굶주림으로 병든 자들뿐이다. 정녕 예언자도 사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라 안을 헤매고 다닌다.
19 당신께서 완전히 유다를 버리셨습니까? 아니면 당신께서 시온을 지겨워하십니까?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회복할 수 없도록 저희를 치셨습니까? 평화를 바랐으나 좋은 일 하나 없고 회복할 때를 바랐으나 두려운 일뿐입니다.
20 주님, 저희의 사악함과 조상들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참으로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21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저희를 내쫓지 마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옥좌를 멸시하지 마소서. 저희와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
22 이민족들의 헛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비를 내려 줄 수 있습니까? 하늘이 스스로 소나기를 내릴 수 있습니까? 그런 분은 주 저희 하느님이신 바로 당신이 아니십니까? 그러기에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 당신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밭의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시며,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 마태 13,36-43)
그때에 36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독서 (예레14,17ㄴ-22)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나 참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 (17ㄴ)
앞선 15절, 16절에서는 하느님의 심판이 백성을 거짓 예언으로 유혹하는 예언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의 유혹을 받아 참 예언을 배척하고 죄를 범하였던 백성들에게도 미침을 예언하였다. 이제 17절과 18절은 하느님의 심판이 시행된 결과로 야기된 참혹한 참사을 부각시킴으로써, 하느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반드시 임할 것임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은 '그들에게 이 말을 하여라' 란 하느님의 명령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명령하는 주체는 하느님이시며, 명령을 받는 '너'는 예레미야이고 '그들'은 파멸을 겪게 될 남부 유다 백성들이다.
본절의 1인칭 표현은 예레미야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즉 이 부분은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레미야가 심판을 당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하느님 자신의 슬픔을 전하되, 전하는 예레미야 자신을 '내' 라고 칭하면서 전하라고 명령하는 주문으로 이해한다.
그럴때, 이러한 본문은 눈물의 예언자로서의 예레미야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 된다. 즉 이 부분은 예레미야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면서 심판받고 고통받는 동족에 대한 자신의 슬픔을 나타내는 예언이 소개되는 구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본절 후반부에는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처녀 딸, 내 백성' 이란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원문에는 '뻬툴라트 빠트암미'(bethullath bath-ammi)라고 되어 있다.
'처녀'(the virgin)에 해당하는 '뻬툴라트' 와 '딸'(daughter)에 해당하는 '빠트'는 모두 한 단어처럼 연결되어 있는 연계형이다. 이러한 연계형의 의미를 정확하게 살려 이를 다시 번역하면, '내 백성의 처녀 딸' (the virgin daughter of my people)이 된다.
특히 '빠트'와 '암미'(내 백성 ; my people)사이에는 두 단어를 한 단어로 결합시키는 연결 부호 '막켑'(magkep ; '-')이 있으므로, 이것은 '딸 내 백성' 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내 백성의 딸' 로 번역해야 한다.
여기서 '처녀 딸, 내 백성' 이란 의미로 볼 경우, 하느님의 입장에서, '내 백성' 인 남부 유다 백성이 순결한 '처녀' 처럼 다른 민족에게 유린당한 적이 없는 사랑스러운 '딸'이었으나, 지금은 유린당한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내 백성이 처녀 딸' 이란 표현으로 볼 경우에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입장에서, 남부 유다 백성 가운데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이며, 남자가 아닌 연약한 딸조차 멸망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표현이 된다.
또한 고대의 전쟁에서는 패배한 쪽의 처녀들이 무자비한 모욕을 당했으므로, 전쟁에서의 패배와 큰 모욕을 받게 됨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 결국 남부 유다의 멸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면, 본문은 전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연약하고 어린 여자들까지 큰 파멸과 중한 상처를 입는 끔찍한 현상에 대하여 또한 전쟁에 패하여 극한 수치와 모욕을 받게 된다는 사실로 인하여, 예레미야가 너무나 슬퍼 밤낮으로 눈물을 그치지 않고 흘린다는 의미가 된다.
'들에 나가면 칼에 맞아 죽은 자들뿐이오, 성읍에 들어가면 굶주림으로 병든 자들뿐이다. 정녕 예언자도, 사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라 안을 헤매고 다닌다.' (18)
본절은 남부 유다가 함락되는 날의 참상을, 성 밖의 들과 성읍 안의 광경을 예언함으로써 눈에 보는 듯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는,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그런데 보라'(then behold)로 번역할 수 있는 '웨힌네'(wehinneh)란 표현이 2회 등장한다. 이것은 들에 칼에 맞아 죽은 자들이 널려 있고, 성읍 안에는 기근으로 병든 자들이 널려있는 참혹한 상황에 대한 놀라움의 표현이다.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14장 13절에 나오는 '너희는 칼을 보지 않고 굶주림이 너희에게 닥칠 리도 없을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너희에게 참 평화를 주겠다'는 거짓 예언자의 예언이 완전한 허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정녕 예언자도 사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라 안을 헤매고 다닌다.'
본문 서두에는 '정녕', '진실로' 로 번역된 접속사 '키'(ki)가 나오는데, 이 의미로 보면, 예언자나 사제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도 하느님의 심판으로 인한 전쟁과 기근으로 인하여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비참한 지경에 처해진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접속사 '키'(ki)를 '오히려'로 번역하면, 백성들이 적의 칼에 죽고 기근으로 죽어가는 상황에,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위로하며 하느님께 기도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그 장소를 떠나 도망다닌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어떤 의미를 취하더라도, 종교 지도자들도 심판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의미만은 동일한다.
그리고 '헤매고 다닌다' 에 해당하는 '싸하루'(saharu)의 원형 '싸하르'(sahar)는 기본적으로 '배회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재앙의 땅 남부 유다를 떠나 방황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보다 보편적인 해석은, 그들이 종교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저버리며, 고통당하는 동족을 버리고 도피하여 이리저리 헤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 지도자들이 비록 남부 유다 땅을 빠져나왔지만, 어디로 가며 어떻게 해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지, 혹은 장래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 지를 알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바빌론의 침공 때 주로 귀족 계층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포로로 잡혀갔다는 점에서, 18절의 의미를, 그들에게 있어 익숙하지 않았던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복음(마태13,36~43)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1~42)
마지막 심판 때가 되면, 처음에 씨를 뿌렸던 '사람의 아들'(인자)이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자로 서게 된다.
그는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자신의 나라에서 극성을 부리고 있던 악한 자의 자녀들을 그 나라 밖으로 거두어 내어, 영원히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던져넣으실 것이다.
여기서 '그의 나라'에 해당하는 '테스 바실레이아스 아우투'(tes basileias autou)는 '그의 왕국'(his kingdom)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그'(he)는 '사람의 아들'(人子)을 가리키므로, '그의 왕국'은 '사람의 아들의 왕국', 즉 '그리스도의 왕국'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그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왕국이지만, 거기에는 악한 자의 자녀들도 활동하고 있던 것이다.
하나의 밭에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서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왕국이라는 하나의 세상에 천국의 자녀들과 악한 자의 자녀들이 서로 뒤엉켜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결국에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 그 나라에서 거두어 내던져질 것이다.
여기서 '~에서'로 번역된 '에크'(ek; out of)는 어떤 공간이나 영역 '밖으로'라는 의미를 지닌 전치사이므로,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왕국에서 버젓이 활동하고 있던 악한 자의 자녀들을 그의 왕국 밖으로 완전히 축출할 것을 보여 준다.
이런 사실은 '거두어'에 해당하는 '쉴렉수신'(sylleksousin; they will weed; they will gather)는 마태오 복음 13장 28절과 29절에서 '뽑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쉴레고'(syllego)의 미래 능동태로서, 적극적으로 뽑아 격리시킬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서도 확인된다.
한편 마태오 복음 13장 41절은 주님의 원수인 악마에 의해 그리스도의 왕국 가운데 심기워지고, 종말에는 그 왕국 밖으로 거두어 내어져 불구덩이에 던져질 악한 자의 자녀들(마태13,38.39)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행하는 자들인지 보여 준다.
여기서 '남을 죄짓게 하는 자'로 번역된 '스칸달라'(skandala; thing that offend; thing that causes sin)의 원형 '스칼달론'(skandalon)은 중성 명사로서 동물을 잡는 '덫'이나 '올가미', 또는 길에 숨겨 놓아 지나가는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을 뜻한다.
'스칼달론'은 중성 명사이며 뜻도 중성적이지만, 심판받을 대상은 사람이므로 본문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는 그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임을 알 수있다(마태16,23참조).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은 원문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으로 직역될 수 있는데, 여기서 넘어지게 한다는 것은 확신과 결단력이 약하거나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을 죄로 유혹하여 범죄하게 하고, 신앙에서 떠나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믿는 이들 가운데 존재하면서 이러한 행위를 하는 자들은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 '불의'로 번역된 '아노미안'(anomian; iniquity)의 원형 '아노미아'(anomia)는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사 '아'(a)와 '율법'이라는 뜻의 명사 '노모스'(nomos)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율법이 없는 자의 상태'라는 뜻이다.
여기서 '율법'은 하느님의 의로우신 통치의 근간을 이루는 하느님의 모든 신적(神的)인 법률을 말한다.
따라서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그의 통치 원리인 신, 구약의 모든 율법이 그 사람 안에 아예 없는 자들과 인위적으로 그 법을 조작하거나 무시하며 깨뜨리는 자들로서, 하느님 나라의 통치 체제 자체를 뒤흔드는 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곳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져 영원한 지옥 형벌에 떨어진 것 때문에, 과거의 자기 행위를 후회하면서 극도의 절망과 비탄으로 절규하게 된다.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 13,36-40)”
예수님의
설명에서는 가라지에 대한 심판과 처벌이 강조되어 있는데, ‘가라지의
비유’를 보면, 수확 때까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는 주인의 말이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28-30ㄱ)”
수확
때까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즉
하느님께서 우리가 죄를 지을 때 곧바로 처벌하지 않고 내버려 두시는 것은,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는 밀로 바뀌지 않지만, 죄인은 회개해서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의인이 타락해서 죄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누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아무도 자신은 구원이 보장되어 있는 의인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또 자기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포기해도 안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2베드 3,13-15ㄱ).”
그런데 사실,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이 죄를 짓고도 세속의 법으로도 처벌받지 않고, 하느님의 심판도 안 받는 것을 볼 때, 그리고 그들이 회개하기는커녕 자기들은 죄 없다고 주장하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비웃기만 할 때, 우리는 “하느님은 도대체 뭐하시나?” 라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하느님께서 기다리신다는 말이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밀밭에
섞여 있는 가라지를 완전히 제거하고 싶은 심정.)
그럴 때에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남의 심판’보다 ‘나의 구원’이 나에게 더 중요하고 절실한 일이라는 것을...나 자신이 ‘가라지’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
말에 대해서, “나의 회개와 나의 구원만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사회
정의에 대해서는 무관심해도 된다는 말인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회개와 나의 구원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말은, 자신의
구원만 생각하고 다른 일은 모두 외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은 힘없고 가난한 이들, 즉
‘작은이들’에 대한 사랑 실천이고, 이것은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이웃 사랑’ 없이는 ‘하느님 사랑’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나의 회개’와 ‘나의 구원’이 가장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치면 안 되고, 이웃과 함께 회개하고, 이웃과 함께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사랑
실천은 신앙인의 의무이고 본분이니까, 신앙인은
당연히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1요한 5,14-17).”
(여기서 ‘죽을죄’는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죄’, 또는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로 해석됩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하면, 아무리 작은 죄를 지어도,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용서받기를 거부하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 경우에 처음에 지은 죄는 작은 죄였더라도, 회개와 용서를 거부함으로써 큰 죄가 되고, 그래서 구원받지 못하게 됨으로써 죽을죄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밀로 변화되기를 거부하는 가라지에 대해서, 즉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인들에 대해서 엄하게 경고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41-43).”
이 말씀은, 바뀔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호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나기를 바라십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인생의 끝에 서면
인생의 끝에서면 하루라도 더 세상에 머물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명의를 찾고 장수를 위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기도합니다. 이러한 행동을 욕심이라고 하기에는 모두가 가진 기대요, 바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바오로 사도는 선언합니다.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하게 될 것입니다”(갈라6,8-9).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13,43). 이 말씀을 보면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아름답고 축복으로 가득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엄중한 경고와 질책의 말씀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집니다.
사실 세상의 종말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죽음의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여정의 수확 때인 죽음의 순간에도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가라지의 상태로 있다면 불구덩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의 상태였다면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삶은 해처럼 빛나게 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많은 경우 불구덩이에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에는 쇄신이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아 왔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더 소중함을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내가 가라지가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가라지를 보고서 흔들려서도 안 됩니다. 세상에 담을 쌓고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영혼이 피폐해 집니다. 그러니 결코 악에 굴복당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의인은 희생의 제물이고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제사입니다”(성녀 벨라뎃다). 의인의 삶이 빛나듯 우리의 삶이 해처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