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간 목요일] 곳간 (마태13,47-53)

2018. 8. 2. 오전 7: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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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7주간 목요일] 곳간 (마태13,47-53)

 


예레미야 예언자가 주님 말씀에 따라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가자,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이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당신 손에 있다고 하신다. ( 예레 18,1-6)
1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말씀.
2 “일어나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가거라. 거기에서 너에게 내 말을 들려주겠다.”
3 그래서 내가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갔더니, 옹기장이가 물레를 돌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4 옹기장이는 진흙을 손으로 빚어 옹기그릇을 만드는데,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
5 그때에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6 “이스라엘 집안아,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고 하신다. (마태 13,47-53)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7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51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53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예레18,1-6)

 

"옹기장이는 진흙을 손으로 빚어 옹기그릇을 만드는데,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   (4)


본절에는 왜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옹기장이의 손에서 부수어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진흙 자체에 결함이 었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릇의 두께나 반죽의 농도가  잘못된 것인지 전혀 말하지 않는다.


단지 무슨 이유로든 옹기장이는 그 그릇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자신의 눈을 기쁘게 할 만한 다른 그릇을 만들었다고 진술할 뿐이다. 이처럼 옹기장이가 다시 다른 그릇을 만드는 기준은 '자기 눈에 드는 그릇이 나올 때까지' 이다.



여기서 '눈에 드는'(좋은)에 해당하는 '야샤르'(yashar) '마음에 들다'(판관14,3), '곧게 하다'(이사45,13)등 다양한 의미로 번역되는 동사이다. 이 동사의 어근의 기본 의미는 '(길)을 똑바로 만들다' 이다. 이러한 의미가 발전하여 윤리적으로 '올곧고 흠이 없는 사람', '분별력 있는 사람' 특징을 언급하는 데에 사용된다.


그리고 '야샤르'가 한정 형용사로 사용될 경우에는 '정직한', '올바른', '올곧은',  '의로운' 등으로 번역되는데, 특히 자기 백성을 다스리는 하느님의 통치(신명32,4),  하느님의 길(호세14,10), 하느님의 말씀(시편111,8),  하느님의 심판(시편119,137)을 묘사할 때,  하느님의 속성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또한 의인(시편33,1)이나   완전한 사람(욥기1,1.8)속성을 강조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 나타난 이 단어의 용례 가운데, 본문과 같이 '눈'(eye)을 뜻하는 '아인'(ain)과 함께 사용될 경우, 관용적 표현으로 '~가 보기에 올바른', '~의 소견에 좋은', '~에 마음에 드는' 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특히 이 관용적 표현은 하느님의 이름이 첨가될 때, 신학적으로 중요한 표현으로 사용된다. 그 대표적인 실례로,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다' 란 어구를 들 수 있다. 이 어구는 주님의 명령(탈출15,26 ; 신명6,17.18)과  계약(신명12,28 ; 13,19)에 순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옹기장이가 주 하느님을 은유적으로 가리키는 대상임을 고려하면, 본문에서 '자신의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든다' 는 진술은, 주님께서 자신의 명령과 계약에 순종할 만한 다른 민족을 세우실 수 있다는 암시 내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이 표현은, 먼저 만든 그릇이 깨진 이유가, 그 이스라엘이라는 그릇이 주님의 명령과 계약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시사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은, 하느님께서 패역부도한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하느님의 계획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 집안아,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6)


새 성경에는 번역이 생략되었지만, 본문 문장 서두에는 '보라'(behold)란 의미를 지닌 불변사 '힌네'(hinne)란 표현이 사용되었다. 주로 이 단어는 주의를 환기시키고 관심을 집중시킬 때 사용되며, 뒤이어 나오는 내용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는 옹기장이와 그릇, 옹기장이와 주 하느님, 그리고 주 하느님과 남부 유다 백성의 상관 관계와 이런 것들이 주는 교훈의 중요성에 주목할 것을 요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이란 표현은 '옹기장이의 의도에 따라 그 진흙이 좌지우지되는 것처럼' 이란 뜻이다.


이것은 남부 유다 역시 주님의 뜻에 따라 그  운명이 좌지우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직유법적 표현이다. 남부 유다의 운명은 하느님의 절대 주권 하에 놓여진 것임을 주지시키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실물을 사용하여 교훈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본 단락의 실물 교육에 사용한 옹기장이의 비유는 앞의 예레미야서 17장 19-27절의 안식일 계명 준수에 대한 말씀과 매우 밀접한 연관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인식일 준수 계명은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주 하느님의 절대적 명령이다(17,21).


"너희 목숨을 잃지 않으려거든 조심하여라. 안식일에는 짐을 지거나  예루살렘 성문으로 그 짐을 들여오지 마라." 


이 안식일 계명 준수 요구에는 주 하느님만이 유일한 참 하느님이시며, 모든 다른 이방의 신들은 거짓되고 허황된 신임을 믿는 믿음의 요청이 수반되어 있다. 본 옹기장이의 비유 안에도 이와 유사한 교훈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옹기장이가 진흙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그릇으로 만들거나 또는 만들어진 그릇을 부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민족이나 국가를 세우거나 부술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이것은 주 하느님께서 창조주로서 모든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절대적 주권의 소유자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처럼 주 하느님게서는 한 민족이나 국가만을 주관하시고 상관하시는 단순한 민족신이 아니며, 전 인류와 그 역사를 주관하시는 참된 유일신이시며, 절대적 주권의 소유자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선택된 민족에게는 물론이요, 더 나아가 모든 나라, 모든 백성,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이 옹기장이가 하는 것과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그 무엇을 행하지 못하겠느냐' 하고 반문하실 수 있는 것이다.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복음(마태13,47~53)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47~50.52ㄴ)


마태오 복음 13장에서 전개되는 하늘 나라의 비유 가운데 마지막 일곱번째  비유인 '그물의 비유'이다.


'그물의 비유'의 핵심은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에 있지 않고, 물가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여 나쁜 것은 버리는 데에 있다.


마태오 복음 13장 24~30절'가라지의 비유'처럼,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종말론적인 심판은 의인과 악인을 구별해 내어 악인은 불구덩이에 던져 넣을 것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여기서 '그물'로 번역된 '사게네'(sagene; a net)저인망을 가리킨다. 

떼 지어다니는 고기를 대량으로 잡기 위해 두 배 끝에 그물을 고정시켜 놓거나 이러한 저인망을 이용한 고기잡이는, 움직이는 배로 그물을 끌어 그곳을 지나가는 고기들을 잡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물이 지나가는 곳의 거의 모든 종류의 고기들을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고기'로 번역된 '판토스 게누스'(pantos genus; all kinds)에서 '판토스'(pantos)'모든'(all)을 의미하는 형용사 '파스'(pas)의 소유격이며, '게누스'(genus)의 원형 '게노스'(genos)'종족', '민족', '자손', '혈통',  '같은 종(種)'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고기를 비롯하여 바다 속에 서식하고 있는 각종 생물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판토스 게누스'(pantos genus)는 각종 고기 뿐만 아니라 바다 속에서 그물로 잡을 수 있는 각종 모든 생물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것은 예인망에 잡다한 모든 바다 생물들이 걸려드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인종과 성별, 악인과 의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에서 '좋은 것'으로 번역된 '타 칼라'(ta kala; the good) '적합한 것들', '쓸모있는 것들'이라는 의미이며, '나쁜 것'으로 번역된 '타 사프라'(ta sapra; the bad)는  '썩은 것들', '무가치한 것들' 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갓 잡아올린 고기 및 바다 생물들이 썩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기에  '무가치한 것들'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그러니까 '타 사프라'(ta sapra)는 도덕적으로 악하다는 의미가 아닌, 사람의 사용 용도에 미치지 못하는 '무가치하고 쓸모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심판의 맥락에서 '악한 자'로 적용되고 있다(마태13,49).


이런 의미에서 49절'심판받을 악한 자'는 도덕적인 차원보다는, 하느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나라에서 전혀 쓸모없는, '사용 가치적 차원'에서의 '악한 자'라고 볼 수 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도 최후에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져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되는 자는 바로 '쓸모없는 종'이었다(마태25,30).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이것은 어부가 쓸모있는 고기만 그릇에 담고, 쓸모없는 고기는 내버리는 것처럼, 세상 종말의 때에 있을 심판의 양상도 똑같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여기서 '종말'로 번역된 '쉰텔레이아'(synteleia; end) '완료', '완성', '끝', '종결'을 의미하는 명사이므로, 여기서의 심판의 때는 세상이 그 사명을 완성하고 종결되는 그 종말의 때를 말한다.


따라서 이 본문은 종말론적 심판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장면이다.


종말론적 심판의 때에는 무엇보다도 '가려내는 작업'이 있게 된다.


여기서 '가려내다'는 의미로 번역된 '아포리우신'(aphoriusin; sever; separate)의 원형 '아포리조'(aphorizo)'경계를 지어 어떤 것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하다', '분리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뒤엉켜 존재하고 있던 악한 자들은 이제 의인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의인과는 영원히 다른 운명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악한 자'로 번역된 '투스 포네루스'(tus ponerus; the wicked)는 물가에서 버려진 '나쁜 것' '타 사프라'(ta sapra; the bad)일맥상통한 것으로서, 적극적인 악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가치있고 쓸모있는 '의'(義)를 소유하고 있지 못한 자들을 말한다.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여기서 '던져 버릴 것이다'로 번역된 '발루신'(balusin; throw)의 원형 '발로'(ballo)48절의 '던져 버렸다'로 번역된 '에발론'(ebalon; threw)의 원형과 동일한 동사이다.


어부가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고기들을 인정사정없이 던져 버리는 것처럼, 최후 종말의 심판자이신 하느님께 소용되는 '의'(義)가 결핍되어 있는 악한 자들을 향해 조금도 동정을 보이지 않고, 영원히 타오르는 불구덩이(the firey furnace)속에 던져버릴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의 마음은 세상이 끝나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지만, 일단 세상이 끝나고 마지막 심판 때에 이르게 되면, 악한 자들을 향해 결코 열리지 않는 것이다.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옛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여기서 '자기 곳간'으로 번역된 '테사우루 아우투'(thesauru autu)'그의 보물', '그의 창고'(his storeroom; his treasure)라는 뜻인데, 비유적으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축적한 지식의 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집주인이 그의 창고에서 필요에 따라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자유롭게 꺼내 사용하며 가족 구성원들에게 마음껏 나누어 주는 것처럼, 하늘나라(천국)의 제자가 된 율법학자들은 옛 진리, 즉 구약의 가르침과 새 진리, 즉 율법의 근본 의미와 정신을 바르게 해석해 주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고 교육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2012년 8월 2일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추수 때가 되면

 반영억라파엘신부


저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모동산이 있는 아름다운 성당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아주 작게 느껴져도 그 멋스러움은 여전합니다. 텃밭에는 콩도 심겨져 있었고 들깨도 있었습니다. 밭모퉁이에는 흔하지 않은 가로등이 밤새 켜 있었습니다. 가로등 가까이에 있는 콩과 들깨는 다른 것보다 훨씬 더 키가 크고 잎도 넓었습니다. 그러나 가을 추수 때에 보면 열매가 없었습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정작 속은 빈 껍데기였습니다. 낮에는 햇빛을 견디고 밤에는 어둠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탓입니다. 결국 곳간에 채워진 것들은 겉보기에는 초라했던 콩이고 들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겉모양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여정 안에서 겪을 것을 다 겪으면서 견디고 받아들인 삶의 모양을 헤아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삶 속에 감춰져 있는 악이 나타나지 않고 그 사람이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혹은 외적으로는 아무런 흠이 없고 유능한 사람으로 드러날지라도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은 마지막 날 추수 때에 밝히 드러나므로 지금누리는 것들이 헛된 기쁨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처한 어려움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기를 희망합니다. 시편저자는 노래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6).

 

예수님께서는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을 끌어올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13,48).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로마2,6). 사실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가 없는 법입니다. 기회를 주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여정이 이미 좋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과거에 매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이세상의 삶은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습니다. 실패가 없다는 것은 지금 정신을 차려 알곡의 삶을 살면 된다는 의미요, 성공이 없다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안치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나쁜 것을 좋게 만드는 것은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주어진 소명입니다. 우리는 인내와 관용으로 천국을 살아가야 하고 또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므로 추수라는 심판의 두려움에 주눅 들지 말고, 새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이 과거를 발판 삼아 오늘을 새롭게 하고 그리하여 복된 내일을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까운 사이라 해도 그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맞대고 서로 이야기 하고 있지만, 마음은 천 개의 산이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뱃속까지 환희 들여 다 보십니다(예레17,9). 사람이 하는 일이 제 눈에는 옳게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마음속을 보시는 하느님 앞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분 마음에 드는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맺는 모든 열매가 주님 그릇에 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 그물 안의 좋은 고기가 되어  


오늘의 복음은 그물의 비유로써 하늘나라의 사정을 가르칩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습니다.”(13,47)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늘나라가 '가득 채워진 그물'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유다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의인과 악인의 구분이 있을 뿐입니다. 

하늘나라는 밀과 가라지가 반드시 익어야 하듯이 가려내기 전까지 가득 채워지는 그물과 같습니다. 이렇듯 교회와 공동체, 가정과 사회 어디든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선과 악을 가려내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선과 악이 뒤섞여 있는 현실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든 다 때가 있습니다. 고기를 잡을 때가 있고 그것을 가려낼 때가 있습니다. 

그물이 가득 채워지면 가려내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선(善)이오, 의미이며, 자비이신 하느님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쓰라린 분리의 때’를 맞게 될 것입니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겨지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려지게 됩니다(13,48). 그런데 버려지는 곳은 다시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바다가 아니라 악취를 풍기며 죽어 시체가 될 뭍입니다. 그렇게 악인들은 비참의 불구덩이 속에서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13,50).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물의 비유가 더는 빠져나갈 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내려지는 유죄판결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만 강력한 경고의 의미로 최후심판을 상기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사랑어린 끈기에서 나오는 회개의 초대요, 선을 더 헌신적으로 실행하라는 촉구인 셈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사랑을 회상하며,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에 따라 각성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2코린 5,10)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먼저 우리 공동체와 가정과 세상살이에서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려는 식별은 해야겠지만, “그물이 가득 차기까지”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아직 때가 아닌데도 조급하게 나서서 재판관 노릇을 하지 말아야겠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선악을 가려내는 ‘어부’가 아니라 ‘좋거나 혹은 나쁜’ 고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심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순 덩어리인 세상살이에서 우리의 몫은 선악에 대한 심판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악의 현실 속에서도 오히려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1테살 5,21), “낙심하지 않고 계속 좋은 일을 해아가야 할 것입니다.”(2테살 3,13). 못 말리는 그 조급함에서 벗어나 주님의 ‘사랑의 기다림’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아울러 나 자신의 그물, 곧 내면세계도 살펴야겠습니다. 내 안에는 과연 바르고 좋은 생각, 사랑어린 마음, 긍정적인 사고, 감사와 기쁨의 좋은 고기들이 살고 있습니까? 또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나 자신이 세상을 밝히는 좋은 고기가 될 생각보다는 나쁜 고기라 판단하고 비난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사랑과 좋음을 가득 품고 의롭게 산다면, 주님께서는 나를 도구삼아 나쁜 고기들마저도 좋은 고기로 바꿔주시겠지요.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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