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간 금요일]고향 (마태 13,54-58)

2018. 8. 3. 오전 6: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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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7주간 금요일]고향 (마태 13,54-58)


예레미야 예언자는 유다의 온 백성에게, 주님께서 세우신 법대로 걷지 않는다면 도성이 폐허가 되리라고 전한다. (예레 26,1-9)
1 유다 임금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킴이 다스리기 시작할 무렵에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내리셨다.
2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님의 집 뜰에 서서, 주님의 집에 예배하러 오는 유다의 모든 성읍 주민들에게, 내가 너더러 그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한 모든 말을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 전하여라.
3 그들이 그 말을 듣고서 저마다 제 악한 길에서 돌아설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도 그들의 악행 때문에 그들에게 내리려는 재앙을 거두겠다.
4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내가 너희 앞에 세워 둔 내 법대로 걷지 않는다면,
5 또 내가 너희에게 잇달아 보낸 나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 사실 너희는 듣지 않았다. ─
6 나는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어 버리고, 이 도성을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게 하겠다.′’”
7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은 주님의 집에서  예레미야가 이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8 그리고 예레미야가 주님께서 온 백성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모두 마쳤을 때,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이 그를 붙잡아 말하였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9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집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 그러면서 온 백성이 주님의 집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몰려들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고 하신다. (마태 13,54-58)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독서 (예레26,1-9)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내가 너희 앞에 세워 둔 내 법대로 걷지 않는다면, 또 내가 잇달아 보낸 나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 사실 너희는 듣지 않았다.- 나는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어 버리고, 이 도성을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게 하겠다."  (4-6)


4-6절은 예레미야에게 선포하라고 일러주신 경고 말씀의 요지 밝힌다. 그 가운데 4절과 5절은 접속사 '임'(im)으로 시작하는 가정문으로서, 귀결절인 6절과 연결된다.


즉 4-5절은 남부 유다 백성이 주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며 범죄를 할 경우를 가정하며, 6절은 이에 대해 주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는 내용이다.


이와같은 가정문은 남부 유다 백성에게 여전히 회개할 기회 및 주님께서 이미 선언하신 멸망을 피할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본문에서 '말을 듣다' 라는 의미로 번역된 '티쉬메우'(thyshimeu)의 원형 '샤마으'(shamah)는 기본적으로 '듣다' 라는 의미이나, 본문에서 표현한 것과 같이 주님을 경외하는 태도로써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순종한다는 뉘앙스까지 함축하고 있다.


사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우선된 사항은, 예언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전달한 당신의 말씀을, 그들이 경청하여 순종하는 것이다.


본문에 '내 법대로' 에 해당하는 '뻬토라티'(bethorathi)의 원형은 '토라'(thorah)로서 모세를 통해 내려 주신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율법 지칭한다(탈출24,12). 여기서 사용된 1인칭 소유격은 율법의 신적 기원을 강조하고 있다. 쉽게 무시하거나 여겨도 되는 인간의 말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하느님의 명령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 앞에 세어 두셨다는 것은, 그들이 그 내용을 늘 가까이 하여 배우고 깨달아 실천하도록 하셨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이 잘되도록 베푸신 축복의 방편인데(신명10,13), 사실상 그들은 그것을 무거운 짐으로 여기고 실천하기를 원치 않았다.


남부 유다의 16대 왕 요시야 성전을 수리하던 중, 그동안 사라졌던 율법책을 발견하고 그 내용을 읽은 후에, 자기 옷을 찢으면서 자기 백성과 민족의 죄악에 대해 통탄해 마지 않았다(2열왕22,11.19). 이것은 그동안 그들이 율법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났으며, 율법의 말씀과 철저히 분리된 삶을 살았는가를 잘 대변해 준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율법의 말씀이 그것도 우연하게 발견되기까지, 율법의 내용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부터라도 남부 유다 백성들은 이렇게 발견된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켜 그에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율법의 말씀을 버리고 죄악의 길을 갔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여호야킴 즉위 때에 예레미야를 통해 남부 유다 백성이 이렇듯 계속해서 율법을 어기고 죄악을 자행하면, 그들을 영원한 치욕거리로 만들어 버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잇달아 보낸 나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그의 종 예언자들을 보내 말씀을 전하시는 이유는, 당신께서 직접 말씀하실 경우 당신 백성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탈출20,19). 따라서 주님께서는 모세 때부터 계속해서 당신을 대신하는 여러 예언자들을 세우시고 당신이 택한 백성들에게 보내어 당신의 말씀을 전하였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주님께서 부여하신 권위로 백성들에게 나아가는 것이며 백성들이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곧 주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과 동일한 죄악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한편, 남부 유다 왕국 마지막 시기에 활동했던 예레미야 예언자를 그 백성이 거부한 것은 그때까지 그들이 예언자들에 대해 보여왔던 반역적인 태도를 단적으로 표출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마지막 예언자까지 배척한 그들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어 마침내 B.C.586년에 바빌론을 통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셨다. 그와 동시에 예레미야는 예언자의 활동을 마무리하게 되었고, 그 후로 에즈라 등 귀환기의 예언자가 나타나기까지, 예언자를 통해 전파되는 주님의 말씀을 최소한 남부 유다 땅에서는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어 버리고, 이 도성을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게 하겠다.' (6)


본절은 남부 유다 백성이 주님의 말씀과 율법을 끝까지 듣지 않고,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지 않을 경우, 주님께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과거 실로처럼 완전히 멸망시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저주의 대상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최후의 통첩이다.


여기에서 '이 집' 에 해당하는 '합바이트 핫제'(habbaith haze)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가리키시는 표현으로서, 성전에 대한 정서적 친밀성을 암시한다. 그곳은 주님께서 그 백성 가운데 임재해 계시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 처소이지만, 그곳이 주님을 섬기는 장소로 사용되지 않고,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장소로 사용되거나 우상이 창궐하면 주님께서는 그곳을 기필코 버리실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신축되기 전, 오래동안 계약궤가 머물러 있던 실로가 파괴된 것에서 이미 확인되었다(시편78,60-61). 실로는 하느님의 계약의 상징인 계약궤가 모셔진 거룩한 장소였지만, B.C.1050년경 필리스티아의 침공으로 완전히 파멸되었다. 그리고 실로는 그후 다시 건축되었지만, 또 다시 파괴되었다.


예레미야 예언자 당시에 그곳은 폐허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이 예언을 듣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및 그 성전의 파멸 예언의 의미를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예루살렘 도성은 오직 주님을 섬기는 성으로 선택 받았기에(신명12,5),  그 거주민들은 주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면서, 이방 사람들이 주님께 합당한 경배를 드릴 수 있도록 사제직 사명을 감당해야 했다(탈출19,5.6).


그러나 과거로부터 예레미야가 말씀을 선포하는 현재까지, 그들은 주님께서 간택한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구별된(성별된) 삶을 살지 못했으며, 오히려 주변 이방으로부터 우상을 수입해 섬기며, 주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정체성을 주변 민족들에게 나타내 보이지 못했다. 그 결과로 그들은 그 주변 민족들에게 저주와 조롱을 당하게 된 것이다.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13,54-58)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7)


'그분을'에 해당하는 '엔 아우토'(en auto; in him)에서 '엔'(en)'~안에'(in)이라는 영역의 내부를 가리키지만, 아주 드물게 '~로 말미암아'라는 원인의 의미를 나타내는 전치사로 쓰이기도 한다.


여기서는 '그로 말미암아'라는 뜻으로 쓰였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걸림돌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못마땅하게 여겼다'에 해당하는 '에스칸달리존토'(eskandalizonto; they were offended; they took offence)원형 '스칸달리조'(skandalizo)'길 가운데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을 놓다', '걸림돌이 되다'는 의미의 동사이다.


여기서는 3인칭 복수 수동태로 사용되어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져 배척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런 표현은 예수님의 말과 행위로 인해 신앙이 불타올라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이 예수님에 대하여 닫혀 있음으로 인해 오히려 그것이 스스로 범죄에 빠지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로마9,33; 1베드2,8).


여기서 '스칸달리조'(skandalizo)는 3인칭 복수 수동태 뿐만 아니라 미완료 과거 시제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공생활 3년간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점점 완고하고 사악해져 갔음을 암시한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구약 시대 예언자가 고향과 집안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자신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배척을 수용하셨다.


특히 여기서 '존경받지 못한다'로 번역된 '아티모스'(atimos; without honor)'비천한'이라는 의미도 가지는 형용사이므로(1코린4,10), 나자렛 사람들이 다만 예수님을 존경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천히 여기기까지 했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통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예언자라는 분명한 자의식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요한6,14).


그리고 예수님께서 특별히 염두에 둔 예언자는 예레미야라고 볼 수 있다.


예레미야는 고향 아나톳 사람들로부터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우리 손으로 죽이겠다'(예레11,21)는 말까지 들으면서 심하게 배척받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남부 유다 사람들의 죄상을 공격하며 회개를 촉구하다가 많은 고난을 당했을 뿐 아니라, 전승에 의하면 우상숭배를 반대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장차 동족들에 의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까지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섣부른 앎이 병이다

 반영억라파엘신부


미움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상대방에게서 꼬투리 잡을 허물만이 보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사물이 구부러져 있으면 그 그림자도 구부러지게 마련이듯이 마음이 비딱하면 나오는 것도 비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굽은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라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13,5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혜의 출처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지혜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지혜는 너무나 풍요롭고 깊어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로마11,3).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신비한 비밀을 믿는 이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1코린1,24.2,7).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시어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며 날로 지혜가 성장하였으며 당신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루카2,40.콜로2,3). 그리고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 판단력입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른 것과 그른 것,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아는 것, 어떤 상황 안에서 그때그때 무슨 말과 행동을 할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지혜는 인생의 올바른 방향감각입니다. 한 번 뿐인 나의 인생여정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지인 하느님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는 균형감각, 조화 감각입니다.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면 불행합니다. 하느님과 세상,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말씀 안에서 균형과 조화의 올바르고 절대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지식의 소유자 보다는 지혜로운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지혜로운 삶 안에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하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소위 가문도 별로이고 배움도 많지 않은, 엘리트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저런 가르침을? 잘난 척 하지마라!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그들의 선입견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만들었고 결국은 믿음이 없는 그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못마땅하게 여기는지요? 혹 내 뜻에 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불평불만 하는 것은 아닌지요? 내 마음의 옹졸함이 불평을 키웁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문에는 '불평금지' 스티커가 붙여있답니다.


자기정보가 다 인양, 그리고 확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섣부른 앎이 병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입니다.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부정적인 생각과 판단을 바꾸면 변화가 옵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부정적인 생각에 골몰하면 모두가 피곤하지만 그 생각을 바꾸면 자신도 바뀌고 세상도 바뀝니다. 내면을 모른 체 외면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2017년 8월 4일 가해 연중 제17주간 금요일(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작은 동네나 시골 마을을 지나가다가 입구에 걸려 있는 현수막을 볼 때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느 이웃의 아들딸이 출세하였다고 자랑하는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부러움과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자랑스러움, 뿌듯함이 사뭇 느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릴 적에 교육을 받으셨던 나자렛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대로 환영을 받지 못하십니다. 백성의 종교 지도자들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들의 영혼이 없는 종교 체계를 뒤흔드시는 예수님의 사고방식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오늘은 나자렛의 고향 사람들이 그분에 대한 고정 관념 때문에 그분을 무시하고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목수의 아들이라는 그분의 비천한 출신이고, 둘째는 그분이 어렸을 때부터 그들과 함께 자라 왔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런 사실은 씁쓸한 현실 앞에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성찰하시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예언자는 ……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믿음은 필수불가결한 조건이고 예수님께서 당신 인격과 예언 활동으로 보증하시는 표징들을 통해 하늘 나라의 존재를 드러내시는 직접적인 이유였습니다. 영적인 말씀을 마음으로 믿지 못하는 고향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기쁘게 맞이하고 있는가요?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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