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8주간 화요일] 나다 (마태14,22-36)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야곱 천막의 운명을 되돌려 주고, 그들 가운데에서 그들의 통치자가 나오게 하겠다고 하신다. (예레 30,1-2.12-15.18-22)
1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말씀.
2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에게 한 말을 모두 책에 적어라.”
12 ─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너의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너의 부상은 심하다.
13 네 종기에 치료 약이 없고 너에게 새살이 돋지 않으리라.
14 네 정부들은 모두 너를 잊어버리고 너를 찾지 않으리라. 참으로 나는 네 원수를 시켜 너를 내리쳤으니 그것은 가혹한 훈계였다. 너의 죄악이 많고 허물이 컸기 때문이다.
15 어찌하여 네가 다쳤다고, 네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고 소리치느냐? 네 죄악이 많고 허물이 커서 내가 이런 벌을 너에게 내린 것이다.
1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야곱 천막의 운명을 되돌려 주고 그의 거처를 가엾이 여겨 그 언덕에 성읍을 세우고 궁궐도 제자리에 서게 하리라.
19 그들에게서 감사의 노래와 흥겨운 소리가 터져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하게 하리니 그들의 수가 줄지 않고 내가 그들을 영예롭게 하리니 그들이 멸시당하지 않으리라.
20 그들의 자손들은 옛날처럼 되고 그 공동체는 내 앞에서 굳건해지며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은 모두 내가 벌하리라.
21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들의 지도자가 되고 그들 가운데에서 그들의 통치자가 나오리라. 내가 그를 가까이 오도록 하여 나에게 다가오게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누가 감히 나에게 다가오겠느냐? 주님의 말씀이다.
22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겁에 질려 유령이라며 소리를 질러 댄다. (마태14,22-36)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22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24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25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2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27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물에빠져들기시작하자, “ 주님, 저를구해주십시오.” 하고소리를질렀다.
31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32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렀다.
35 그러자 그곳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그 주변 모든 지방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병든 이들을 모두 그분께 데려왔다.
36 그리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제1독서(예레30,1~2.12~15.18~22)
"어찌하여 네가 다쳤다고, 네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고 소리치느냐?
네 죄악이 많고 허물이 커서, 내가 이런 벌을 너에게 내린 것이다.(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들의 지도자가 되고,
그들 가운데에서 그들의 통치자가 나오리라.
내가 그를 가까이 오도록 하여 나에게 다가오게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누가 감히 나에게 다가오겠느냐? 주님의 말씀이다.(21)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리라."(22)
'어찌하여 네가 다쳤다고, 네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고 소리치느냐?
네 죄악이 많고 허물이 커서, 내가 이런 벌을 너에게 내린 것이다.'(15)
하느님께서 선민의 심각한 죄악 때문에, 그들에게 보내신 재난은
결국 그들의 회개와 회복을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를 받지 않고 거기서 빠져 나가려고만 하거나,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로 인해 원망의 소리를 내거나,
무조건적인 구원을 호소하는 것은 결코 합당한 처사가 아니다.
본절은 바로 이 사실을 수사 의문문을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다.
본문에서 '소리치느냐' 에 해당하는 '티즈아크'(tizak)의 원형
'자아크'(zaak)는 극심한 고통에 빠져있는 자가 도움을 얻기 위해
애절한 심정으로 부르짖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72회 사용되었으며, 대부분 주 하느님의
도움을 원해서 부르짖을 때 사용된다(탈출2,23; 판관3,15; 1사무12,10).
본문에서 이 단어는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어 당시 선민들이 자신들이 처한
고통스런 상황에서 헤어나고자 반복적으로 부르짖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주님께 부르짖는 것은 전혀 책망할 일이 아니며 오히려 적극 권장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예루살렘 멸망 당시 정황에서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이 쌓여서 넘칠 정도로 무수히 많은 범죄를
저질러 온 데 대한 최종적 심판 선고의 적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실 그 일을 당하기 전에 주님께로 가서 간곡히 부르짖었어야만 했다.
'내가 이런 벌을 너에게 내린 것이다.'
본문에 앞서 제시된 '네 죄악이 많고 허물이 커서' 에 해당하는
원문 표현은 14절에서의 어구와 동일하다.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선민의 윤리적 사악함과 신앙적 타락이
너무나 극심함을 또 다시 언급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그것에 대해 도저히 번명할 구실을 찾지 못하게 하며, 주님께서
그들의 죄악에 대해 징계하시는 것이 매우 정당한 일임을 확정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내가 이런 벌을 너에게 내린 것이다'라는 본문의 선언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서 '이런 벌'에 해당하는 '엘레'(elle)는 복수 지시 대명사로서
'이것들'(these)이란 의미이다.
즉 이것은 한 가지 특정한 징계가 아닌 여러 가지 다양한 징계를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바빌론을 당신의 진노를 대행하는 막대기로 사용하시어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성전을 파괴하며, 그곳에서 범죄를 자행하는 자들을
죽음에 던지고, 그들을 또한 포로로 끌려가게 하는 등의 일을 행하실 것이다.
그리고 '내가 ~ 내린 것이다'란 표현을 통해 명시되듯이
이러한 모든 사건들은 하느님께서 주도적으로 하시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들의 지도자가 되고,
그들 가운데에서 그들의 통치자가 나오리라.
내가 그를 가까이 오도록 하여 나에게 다가오게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누가 감히 나에게 다가오겠느냐? 주님의 말씀이다.' (21)
주님께서는 선민들을 위해 친히 세우시는 그 지도자를
당신께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구약적 맥락에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은 성전에 들어가
주님께 제사드릴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다는 의미의 표현이다.
남부 유다의 임금 우찌야가 오직 주님께 향을 피우도록 성별된
아론의 자손 사제들에게 맡겨진 분향을 허락없이 하려다
그 자리에서 이마에 나병이 생기는 형벌을 당했다(2역대26,16~20).
그런 점에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사제적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인 사제가 동시에 정치 지도자인 통치자가 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인물은 대사제 겸 임금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다.
시편 110장 1절에서 주님께서는 메시아에게 자신의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 가까이에 있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느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면서
당신 백성을 위해 대신 간구해 주신다(사제직 중재 기도를 올리고 계신다.)
(로마8,34; 히브7,25).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리라.' (22)
본절의 예언은 과거 주님께서 히브리 민족을 출애굽시키시는 과정에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건지시는 목적을 밝히시면서 주신 약속이었다(탈출6,7).
그 약속을 바빌론 포로 귀환 이후의 선민들에게 다시 주신다는 것은
포로 귀환이 출애굽과 같은 맥락에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은 바빌론 포로 유배기 이전에 멸망을 통해 그들이
이미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다시 한 번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로부터 참된 예배를 받으실 것을 계획하신다.
본문에서 '나는'에 해당하는 단어 '아노키'(anoki)는
주어를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인칭 대명사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바빌론으로 넘기시고 다시 유배에서 귀환케하신
주님 자신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14,22-36)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쯕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25~32)
마태오 복음 14장 24절에는 배가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나온다.
한 '스타디온'(stadion)이란 측정 단위는 약 185m 정도의 거리인데, 본문에는 이것을 수식하는 '여러'(많은)이라는 뜻의 '폴루스'(pollus; many)가 있다.
이것의 병행구절인 요한 복음 6장 19절에는 당시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여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라고 나온다.
그래서 이 거리는 4.6~5.6 km정도의 거리이며, '십여리쯤'되는 거리이다.
그리고 14장 24절의 '파도'에 해당하는 '퀴마톤'(kymaton; waves)는 '부풀다'를 뜻하는 '퀴오'(kyo)에서 유래한 '퀴마'(kyma)의 복수형인데, 이것은 쉴새없이 계속적으로 밀려오는 큰 물결들을 연상시킨다.
또한 '시달라고 있었다'에 해당하는 '바사니조메논'(basanizomenon; tossed)는 해산의 고통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는(묵시12,2) '바사니조'(basanizo)의 수동태 현재 분사형이다.
이것을 볼 때 제자들이 겪은 고난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소리지르는 산모의 고통에 비견될 만큼 극심한 고난이었다.
갈릴래아 호수는 급격한 기류 변화로 인해 돌풍이 불며, 이때 예상치 못한 큰 파도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맞아 파도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쪽으로 가셨다' (25)
여기서 '새벽'으로 번역된 '테타르테 데 퓔라케 테스 뉘크토스'(tetarte de phylake tes nyktos; during the fourth watch of the night)에서 '경'(更)으로 번역되는 '퓔라케'(phylake)는 '지키다', '파수하다'는 뜻이 있는 '퓔랏소'(phylasso)에서 유래하여 본래는 '보초', '당직', '망보기'라는 뜻을 지닌다.
그런데 로마에서 야간에 4교대로 보초를 섰으므로,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밤시간을 4부분으로 나누었고, 각각을 '퓔라케'(phylake)로 불렀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새벽'은 '밤 4경'으로서 새벽 3시부터 6시까지의 세시간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이때에 제자들에게 오셨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헤어져 육지에서 4.6~5.6 km 떨어진 그 시간부터 그때까지 계속 파도와 힘겹게 싸우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어'에 해당하는 '페리파톤'(peripaton; walking)이란 현재분사형을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오신 방법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호수 위를 육지처럼 걷는 이러한 모습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시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유령이다'
'유령'에 해당하는 '판타스마'(phantasma; a ghost; a spirit)는 '보이다'는 뜻의 동사 '판타조'(phantazo)에서 유래하여 '눈에 보이지만 실체가 없는 것', 즉 '허깨비'를 의미한다.
제자들은 사람의 형체를 한 존재가 풍랑이 이는 호수 위를 걸어오는 기상천외한 사건을 목격하고, 몹시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러나 그 존재는 보이기만 하고 실체가 없는 유령이 아니고, 바로 제2위 하느님이신 예수님이셨다.
영적 분별력이 부족했던 제자들은 미신적 사고에 빠져 신적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알고 두려워했던 것이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용기를 내어라'에 해당하는 '타르세이테'(tharseite; take courage)는 '기쁘다', '즐겁다'는 뜻을 가진 '헤데오스'(hedeos)에서 유래하여 '용기를 갖다', '담대하다', '위로하다'는 뜻을 가진 '타르세오'(tharseo)의 복수 2인칭 현재 명령형이다.
희랍어에서 현재 명령형은 계속 반복되는 동작을 명령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지금부터 계속하여 용기를 갖고 즐거워하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처럼 환난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그때부터는 계속적으로 영육간에 즐거움을 누리고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
또한 '나다'에 해당하는 '에고 에이미'(ego eimi; it's me)는 '나는 나이다'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령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스승 예수님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동시에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안심해야 할 근거이기도 하다.
이것은 과거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한 '나는 있는 나다'라는 말씀과 의미가 통한다(탈출3,14).
당신 자신을 소개하심으로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힘과 용기를 주신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동일한 말로 당신 자신을 소개하심으로써 고난 가운데서 어쩔줄 몰라하는 제자들에게 힘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에 해당하는 '메 포베이스테'(me phobeisthe; don't be afraid)에 있어서 '두려워'에 해당하는 '포베이스테'는 복수 2인칭 현재 명령형이다.
희랍어에서 금지 명령을 표현할 때 부정어 '메'(me)가 사용되는데, 여기서 '메'(me)와 현재 명령형이 함께 사용된 때는 '지금 바로 그 행위를 금하라'는 의미이다.
즉 현재 비록 풍랑이 일고 있지만 두려워하는 것을 즉각 멈추라는 뜻이다.
이 말의 이면에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되시며 보호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촉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은 세상을 바라볼 때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는 그 두려움에서 즉각 벗어날 수 있음을 확신시켜 주고 계시는 것이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여기에 해당하는 '퀴리에 에이 쉬 에이'(kyrie, ei sy ei; lord, if it's you)에서 '만일'에 해당하는 '에이'(ei)는 조건을 나타내는 불변사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단어는 호수 위로 걸어오는 존재가 예수님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에서 사용된 단어는 아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먼저 상대를 '주님'(kyrie)이라고 부르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즉 베드로는 이미 상대가 예수님임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건 불변사 '에이'(ei)를 사용한 것은 예상치도 못했던 너무나 놀라운 일을 목격한 감격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감격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면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까지 발전한다.
'물위를 걸어오라고' (29)
예수님께 대해서는 '호수 위를'에 해당하는 '에피 테스 탈랏세스'(epi tes halasses; on the lake)를 걸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25절), 베드로에 대해서는 '물위로'에 해당하는 '에피 타 휘다타'(epi ta hydata; on the water)를 걸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호수나 물은 모두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
마태오 복음 14장 29절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는 표현에는 당신 자신 스스로의 능력으로 물위를 걸으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신적능력과 예수님께 대한 요청에 의해 일시적으로 물위를 걸은 베드로의 기적 체험 현상을 차별화시키려는 마태오 복음사가의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30)
베드로가 바람을 보자마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은 '보고서는'에 해당하는 '블레폰' (blepon; when he saw)이 현재 분사로서 주동사 '두려워했다'에 해당하는 '에포베테' (epobethe; he was afraid)와 동일 시점에 일어난 일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에 해당하는 '아륵사메노스'(arksamenos; eginning)은 부정 과거 분사형으로서 주동사 '소리를 질렀다'에 해당하는 '에크락센'(ekraksen)보다 앞선 동작임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거센 바람쪽으로 시선을 돌린 베드로는 그와 동시에 두려운 마음에 사로 잡혔고, 그 순간 물속으로 빠져들어 주님께 절박한 목소리로 구조 요청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베드로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는 안전하지만, 반대로 주님이 아닌 세상을 바라볼 때는 두려운 마음과 함께 위험과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31)
호수 위를 걸으시며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걷게 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만 하시면 베드로를 물에서 건져내실 수 있었다.
그러나 굳이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는' 행동을 하신 것은 믿음이 약해 세파에 휩쓸려 고난받는 자에게 다가오셔 친히 손을 내밀어 붙들어 주시는 예수님의 관심과 깊은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 이 믿음이 약한 자야'에 해당하는 '올리고피스테'(oligopiste; o you of little faith)의 원형 '올리고피스토스'(oligopistos)는 '(크기가)작다', '(양이)적다' 등의 의미가 있는 '올리고스'(oligos)와 '믿음'이란 뜻이 있는 '피스티스'(pistis)의 합성어로서 양과 질에 있어서 보잘것 없는 믿음을 의미한다.
이 말은 모든 성경에서 제자들에 대해서 사용되었는데, 큰 믿음을 가져야 할 자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믿음을 가진데 대한 책망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또한 '의심하였느냐?'에 해당하는 '에디스타사스'(edistasas; did you doubt)의 원형 '디스타조'(distazo)는 '두 번'이란 뜻이 있는 '디스'(dis)에서 유래하여 마음을 한결같이 가지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즉 이것은 처음 생각이나 각오를 버리고 중간에 방향을 선회한 경우를 말한다.
예수님을 향한 시선을 거센 바람에 빼앗긴 상태를 부각시키기 위해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우리는 인생 여정에서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좋은 일도 어려운 일도 감당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려운 일 자체에 매달려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잃고 맙니다. 그리고 곤경에 빠져 자기 눈이 멀면 문제의 핵심을 놓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어려울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려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깨어있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제자들 곁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하고 두려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곧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의 청을 들어 주셔서 베드로를 물위를 걸어 예수님께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가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져 물에 빠져들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물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았을 때에는 물에 빠졌습니다. 일상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험한 상황이라도 그 안에서 정신을 차려 예수님을 바라보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의탁하면 능력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눈이 멀면, 자기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원자를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시련을 만나서 어려움만 생각하면 해결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센 바람이 부는 고통의 바다가 아니라 그 한복판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문제는 곧 은총입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시련과 고통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신을 단련시키는 은총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감추어진 고통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믿으십시오! 그러면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부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믿으면 발등을 찍히지만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보장받습니다. 구원의 여정에 용기와 두려움, 믿음과 의심이 혼재하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는 확실합니다. 주님은 믿고 사람은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믿음으로 손을 댄 병든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처음에는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다가 예수님 덕분으로 안전한 뭍에 도착한 제자들의 배는 교회의 고전적인 상징입니다. 마태오 복음서가 편집되었을 때 초기 교회는 신앙의 여정과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의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신자들의 공동체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여정에서도 언제나 유효합니다. 그것은 갖가지 위기 상황과 신앙에 대한 의심 그리고 온갖 두려움의 유령 앞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굳건한 믿음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 안에 사랑과 우정이 메마르고,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가 서로에게 충실하지 못하며, 사회 안에서 생명에 대한 존중과 정의와 인권이 무시됨으로써 우리 곁에서 하느님의 표징이 희미해질 때가 있습니다. 또한 악과 거짓의 충동질 앞에서 선과 진실이 뒤로 밀려나 보일 때, 질병과 사건과 사고 그리고 불행이 씁쓸하게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계속해서 하느님을 믿고 사람들을 신뢰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신앙의 위기, 하느님에 대한 의심 그리고 거의 불가능한 인간적인 형제 관계 앞에서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싸여 실의에 빠지게 되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우리를 덮칩니다.
이 모든 것은 젊은이든 어른이든 나약한 믿음의 명백한 표징입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통스러운 밤에 기도하셨고 베드로 사도가 물에 빠져 드는 위험 앞에서 외친 것처럼, 기도의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유혹을 떨쳐 버리고자 하느님과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믿음의 위기 앞에서 두려움의 유령을 떨쳐 버리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청해 봅시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