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1.대림 제1주간 화요일] 행복한 눈 (루카 10,21-24)

2015. 11. 30. 오후 6: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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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대림 제1주간 화요일] 행복한 눈  (루카 10,21-24)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난 햇순, 곧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물게 될 메시아 시대를 노래한다. 그는 하느님을 경외하며 정의를 세워, 세상에 평화가 넘치게 될 것이다. (이사야 11,1-10)
그날 1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2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3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4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
5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6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7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8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9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10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이사11,1-10)

"그날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1~2) 

오늘 독서의 말씀의 앞 부분에 이사야서 10장 33절이 있다. "보라, 주 만군의 주님께서 무서운 힘으로 가지들을 잘라 내신다.  높이 솟아 오른 것들은 잘려 나가고, 드높은 것들은 거꾸러진다." 

삼림을 가지치기하고 솎아내는 산림 감독관의 비유를 통해  아하츠가 통치하던 불안한 시대를 묘사한다. 동시에 나라의 분할과 축소된 왕권, 부러지고 잘린 왕조를 묘사하는 단어가 이사이의 그루터기다. '그루터기'에 해당하는'게자'(gueza) 나무나 풀 따위를 베고 남은 밑동을 말한다. 

그런데 '햇순'에 해당하는 호테르'(hoter)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돋아나고, '새싹'에 해당하는 '네체르'(necher)가 그 뿌리에서 나온다. 햇순과 새싹이 새로운 왕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그루터기와 뿌리에서 나온다. 이사이의 자손들이 새 생명을 얻음으로써 다윗 왕조가 소생하는 것이다.

그 위에 생존과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주님의 영이 머무른다. 주님의 영은 왕에게 다스리는데 필요한 능력들을 부여한다.  '지혜'(sapientia)와 '슬기'(깨달음; intellectus)는 임금에게 요구되는 기본 자질이다. 

임금으로 하여금 선한 판단을 할 수 있게 하는 자질'지혜'이며,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한 보다 깊은 지적 통찰력으로 정책을 수립하는데 요구되는 자질'슬기'이다.

'경륜'(의견; consilium)과 '용맹'(굳셈; fortitudo)잠언 8장14절과 이사 9장 5~6절에도 나온다.  "나에게는 조언과 통찰이 있다. 나는 곧 예지이며, 나에게는 힘이 있다." (잠언8,14)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라.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위에  놓인 그 왕국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  그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공정과 정의로 그 왕국을 굳게 세우고 지키리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정이 이를 이루시이다." (이사9,5~6) 

'경륜'은 나라를 위한 전략 구성, 전쟁과 정책의 계획 등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며, '용맹'은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전쟁을 주도하는 임금이 가져야 할 힘과 담대함을 말한다. 

'지식'(scientia)과 '주님을 경외함'(두려움;경외심; timor)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나타내는 기본적인 용어이다.  '지식'주님과 주님의 뜻에 대한 참된 이해와 관계를 말하고, '주님을 경외함'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 가운데 계시며, 오직 경배만 받으셔야 하는 거룩한 하느님께 임금이 드리는 근본적인 경외와 복종을 묘사한다. 

교회는 위의 6가지에다 '효경'(pietas; 하느님을 참 아버지로 알아서 사랑하게 하는 은혜)를 합쳐서 '성령 칠은'을 가르친다.  

위의 것들은 왕권의 카리스마적 특성 나타낸다. 이렇게 주님의 영이 내리면, 주님의 영이 하느님의 기름부은 자를 통해  말하고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은 주님의 경외함으로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는다(3절).

힘없는 이들과 이 땅의 가련한 이들에게 베푸는 정의(공의)가 가능해지는데, 하느님께서 재판과 심판에 관여하시기 때문이다.

'입에서 나오는 막대기' 법령을 의미하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 질서정연한 사법 과정을 말하는데,  주님의 권능 이 둘을 통해서 표현된다(4). '정의'(공의)와 '신의'(성실)허리와 몸을 두르는 띠가 된다는 말이 11장 5절에 나오는데, 이것은 11장 6~8절에 드러나는 평화의 질서의 선행 조건이다. '정의''신의'선한 임금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특성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오는 것이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6~8)

목축 생활의 평화로움과 평온을 그리는 이 묘사 가축을 돌보는 목동이 아침에 양, 염소, 송아지들을 모아 풀밭으로 인도했다가 저녁에 다시 몰아서 데려오는 관습에 의존한다. 

풀을 뜯어먹은 다음 가축들은 뜨거운 햇볕을 가릴 그늘을 찾아 풀밭에 눕는다. 사무엘 1권 17장 34~37절에 다윗이 아버지의 양떼를 사자와 곰으로부터 지킨  이야기가 나오듯이, 성경의 기사들은 이 직업의 위험들을 반영한다.   '어린 아이' '젖먹이','젖 떨어진 아이' 천진난만함어떠한 위험도 해악도 없는 세상을 강조한다. 

'나의 거룩한 산'(9)의 표상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시고 재창조하신  세상의 완전함을 암시한다.

주님의 영에 의해 전달된 '주님을 아는 지식'('주님을 앎으로'; 9절ㄴ)은 '땅'(온 세상)으로 하여금 주님의 성소가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주님께 대한 올바른 관계와 헌신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관계와 헌신에 의해 주님과의 친교가 가능하고, 어디에서나 주님의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게 된다.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 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10절) 그날이 오면, 분열되고 분할된 다윗 왕조가 파기된 그 기능을 회복하고, 다윗 왕조에 영광이 되찾아지게 된다.

임금이 자신의 야망과 욕심과 능력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을 통치하지 않고 주님의 영을 받아 주님의 뜻에 따라 주님의 백성들을 다스릴 때, 예루살렘에 주님의 분명한 임재와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이사야 예언서는 도래하는 메시아 왕국을 미리 보여 주며, 주님의 영으로 충만한 평화의 왕국을 예언한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 평화의 반대인 전쟁과 분열, 불목과 투쟁이 활개치는 이 세상안에서, 평화와 일치의 도구 역할을 해야 할 교회,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독서 말씀은 분명히 우리가 평화를 선물로 받으려면, 먼저 정의와 신의가 바탕이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영을 충만히 받아 주님의 영의 카리스마(특은)을 누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오소서 성령님!   오시어 저희에게 양심의 평화를 주시고, 저희들이 몸담고 있는 가정과 본당과 직장 공동체들과 이 조국에 평화와 일치와 사랑의 선물을 내려 주십시오.


복음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아닌 철부지들에게 하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시는 하느님을 찬미한다. 그분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시어 많은 예언자들이 기다려 온 약속의 실현을 보게 하셨다. (루카 10,21-24)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오늘의 묵상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이스라엘은 장차 올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를 서서히 알게 되는데, 그 출발점은 임금이었습니다. 훌륭한 임금을 기대하던 이스라엘의 희망이 점점 발전하여, 다윗 왕조가 완전히 무너진 다음에도 새로운 햇순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사야가 예고하는 메시아는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이룩하는 분입니다. 교회는 지혜와 슬기, 경륜과 용맹, 지식과 경외라는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에 효경을 더하여 성령 칠은을 고백합니다. 성령의 모든 은사를 지닌 메시아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올바른 재판을 하고, 억눌린 이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불의를 심판하기에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평화의 전제 조건이 무엇인지 알려 줍니다. 평화는 정의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더욱이 하느님에 대한 경외가 없으면 정의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 두려운 줄을 모르는 인간이 자기 힘만 믿고 횡포를 부릴 때 정의는 무너집니다. 불의가 힘없는 이들을 덮치는 세상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려면 사자가 여물을 먹어야 합니다. 사자가 염소를 잡아먹는다면 염소와 사자는 같이 지낼 수 없습니다. 힘을 내세우면서 평화를 말하는 것은 거짓과 위선입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기다리며 갈망해 온 정의와 평화의 나라가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시작됩니다. 그 나라의 완성을 희망하며, 우리도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시다.




<행복, 지혜>  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4)."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메시아를 볼 수 있고, 메시아와 함께 살 수 있어서 행복하다." 라는 뜻입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라는 말씀은,
"구약시대 사람들은 메시아 시대를 갈망했지만 보지 못했고" 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라는 말씀은,
"메시아의 복음을 듣기를 갈망했지만 듣지 못했다." 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이 메시아를 보지 못하고, 메시아의 복음을 듣지 못한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닌데,
그래도 그토록 갈망했던 메시아 시대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은
확실히 불행한 일이긴 합니다.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시대 사람들의 불행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제자들의 행복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너희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 행복은 오늘날의 우리들의 행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입니다.


우리의 행복을 박해시대와 비교해 볼 수도 있습니다.
종교박해 때에는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못했고,
박해자들 모르게 숨어서 미사를 드리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시절의 신앙인들은 '종교의 자유'를 간절하게 원했습니다.
아마도 목숨보다도 종교의 자유를 더 소중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박해 때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을 향해서
"순교를 각오하고 당당하게 드러내면서 신앙생활을 해야지 왜 숨어서 했느냐?"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죽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또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드러내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자살 행위입니다.
순교는 자살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마태 10,2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박해를 피하라는 말씀만은 아니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박해가 아니더라도 어떤 특수한 상황 때문에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최전방 GOP 지역에서 복무하는 군인들의 경우,
주일을 지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민간인이라면 언제든지 쉽게 할 수 있는 일상적인 신심 행위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다가 휴가를 나와서 미사 참례를 하고 영성체를 하게 되었을 때,
그게 얼마나 큰 행복이 되고 위안이 되는지...
경험해 본 사람은 압니다.


냉담 상태에 있으면서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다가
어느 날 문득 예수님을 그리워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냉담 상태에 있었더라도 고해성사를 보고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는 것이 무척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용기를 내기도 어렵고,
그래서 망설이다가 시간만 흘러가고, 갈망은 더욱 커지고...
그랬다가 어찌어찌 해서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을 때,
처음 세례를 받았을 때보다 그때가 더 기쁘고 행복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실, 행복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불행을 잘 모릅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메시아를 갈망하긴 했지만,
그들은 메시아 시대의 행복을 상상하기만 했을 뿐이고,
그래서 자기들이 얼마나 불행한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잘 몰랐습니다.
또 지금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도 신앙생활의 행복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인지를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계속 행복한 상황 속에서만 살고 있는 사람은
불행한 상황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의 행복을 잘 모릅니다.
태어나서 바로 유아 세례를 받고, 아무런 어려움 없이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불행을 겪어 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이, 즉 신앙생활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기 위해서
일부러 예수님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자기가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기의 행복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금 하는 말은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건강을 잃은 다음에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 것보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마음껏 할 수 있을 때,
그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더 자주 묵상하면서
그 행복을 계속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세속에서의 성공과 출세를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자칭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루카 10,21)
신앙인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들입니다.
언젠가는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것을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진짜로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자신을 조금씩 덜어내는 일>

 

 

    나이가 조금 더 들면 하고 싶은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선호하는 기술 한 가지 확실하게 익혀 하루 온종일 아이들 곁에서 보내고 싶은 바램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한적한 바닷가에 아이들 집 하나 마련해서 머리 쓰기 싫어하는 아이들만 따로 골라 함께 살며 밥해주는 일입니다. 함께 밭을 일구고 함께 낚시를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추억을 쌓아주는 일이 제 꿈입니다.

 

    살면 살수록 단순한 삶이 얼마나 은혜로운 삶인가를 실감합니다. 비록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매일의 노동이 기다리고 있고, 그래서 매일 땀흘려 일하다보면 하루해가 짧은 소박한 삶이 진정 행복한 삶입니다.

 

    너무 머리 쓰지도 않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 한적한 자연 속의 삶이 별 가치 없어 보이는 삶 같지만 사실 본래 인간 본연의 삶이었고, 정상적인 삶이었습니다.

 

    지나치게 복잡하고 세분화된 사회구조와 인간관계의 틀 안에서 잠시의 여유도 없이 빡빡하게 돌아가는 우리들의 일상입니다. 잠시의 여유라도 있으면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의아심이 들 정도입니다. 할머니들도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일일이 스케줄을 확인하시는 세상입니다. 바쁜 사람이 잘 사는 사람, 유능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에 살다보니 한적함, 단순함, 소박함, 겸손함, 천진함, 동심, 비움, 버림, 떠남과도 같은 단어들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너무도 어색한 단어, 별세계에서나 사용되는 단어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눈만 떴다하면 머리를 회전시키고, 밥만 먹었다하면 복잡한 문명의 바다로 우리의 온몸을 던져버리니 철저하게도 영적인 존재인 하느님을 체험할 여유가 참으로 부족합니다.

 

    이런 우리 앞에 예수님께서는 보란 듯이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기도를 드리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보다 단순하게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보다 여유 있고, 보다 자연스럽게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우리 삶의 여백에, 우리 삶의 주변 어디든 자리잡고 계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조금이나마 인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도록 말입니다.

 

    가난하게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가난하다는 말은 잃을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결국 가난한 사람은 소유의 상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에, 성낼 필요도 없게 됩니다. 결국 가난함으로 인해 자유를 느끼고 가난함으로 인해 영적인 눈이 뜨여 하느님의 손길을 보다 자주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버리면 버리는 만큼 진리와 자유에로 결국 하느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을 닦는 다는 것은 날마다 자신을 조금씩 덜어내는 일입니다.

 

    쫓기듯이 살고 있는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 

    늘 바쁜 걸음을 천천히 천천히 걷게 하시며, 

    추녀 끝의 풍경소리를 알아듣게 하시고 

    거미의 그물 짜는 마무리도 지켜보게 하소서. 


    꾹 다문 입술 위에 어린 날에 불렀던 동요를 얹어주시고 

    굳어있는 얼굴에는 소슬바람에도 어우러지는 풀밭 같은  

    부드러움을 허락하소서. 

    책 한 구절이 좋아 한참 하늘을 우러르게 하시고 

    차 한 잔에도 혀의 오랜 사색을 허락하소서.

 

    돌 틈에서 피어난 민들레 꽃 

    한 송이에도 마음이 가게 하시고 

    기왓장의 이끼 한 낱에도 배움을 얻게 하소서.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10,21-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아루어졌습니다." (21)

루카 복음 10장 21절에서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신다. 여기서 '즐거워하며'에 해당하는 '에갈리아사토'(egalliasato; rejoiced)의 원형 '아갈리아오'(agalliao)'높이다'는 뜻을 지닌 '아갈로'(agallo)'껑충껑충 뛰다'의 뜻을 지닌 '할로마이'(hallomai)가 결합된 합성 동사로서 '몹시 기뻐하다', '크게 기뻐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종말론적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와 관련된 기쁨을 표시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크게 즐거워하신 것예수님의 열린 영안에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펼쳐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루카 복음 10장 21절과 22절의 말씀 또한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속에서

신적(神的) 통교와 성령의 감동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 준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하느님과 직접 대화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는 표현은 유대인에게 익숙한 구약적 표현으로서,

창세기 14장 19절과 22절에서 비롯되는데, 무엇보다도 온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위엄을 보여주는 호칭이다.

 

또한 '아버지'에 해당하는 '파테르'(pater)아람어 '압바'(abba)에 해당하는데, 여기서는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간의 부자 관계를 잘 보여주는 매우 친근한 호칭인 것이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여기서 '이것을'로 번역된 '타우타'(tauta)가까운 사물이나 내용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 '후토스'(hutos)의 복수형으로서 '이것들'(these things)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즉 그가 베푼 기적들과 말씀의 선포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 나라의 복음 및 일흔 두 제자들이 체험적으로 터득한 것들모두 다 가리킬 것이다(루카10,9.11절). 

하느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음을 대조법을 통해 매우 선명하게 나타낸다. 

'지혜롭다는'으로 번역된 '소폰'(sophon; wise)'지혜있는'을 뜻하는 '소포스'(sophos)에서 비롯되었고, '슬기롭다는'으로 번역된 '쉬네톤'(syneton;prudent)'지식있는', '이해하는'(마태11,25; 사도13,7)을 뜻하는 '쉬네토스'(synetos)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지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지식도 있는 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들은 율법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지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겼던 당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들은 공교롭게도 자신이 가진 지혜와 지식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느님의 계시, 곧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루카11,42~52).

그렇다면,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과 대조되는 '철부지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철부지들'이라고 번역된 '네피오이스'(nepiois; little children; babes)'어린아이와 같은 이들' ,'편견과 아집으로 때묻지 않고 천진무구하여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율법이나 종교 위식을 엄밀히 수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부족한 지혜와 보잘것 없는 지식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루카14,13.21.24).

이 구절은 전통적 유대 사상인 지혜로운 현자들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는다는 생각을 완전히 뒤엎는 역설적인 말씀이다. 

교만과 아집으로 가득 차 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하느님의 나라가 숨겨진 반면에, 영적으로 주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했던 세리와 죄인, 가난한 이들, 병자들, 소경들과 장애인들(루카14,21)에게는 계시로 나타나졌음을 밝혀 주고 있다.

이 구절은 하느님의 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마음을 갖지 아니하면,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마태18,3.4)이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 상통하고 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루카 10,21)

올해의 마지막 한장 남은 달력을 시작합니다.
이 마지막 한달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고민하였는데
오늘 독서와 복음은 그 답을 주시네요.

"주님의 영 안에서 즐거워하라."
그냥 희희낙낙 웃고 떠들며 지내라는 건 아니겠지요.

주님의 영은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라고 하시네요.
이러한 영 안에 머물러 살면 얼마나 흐뭇하고 즐거울까요.

그러나 욕심부리지 말고
하루에 한가지 영 안에서만 살려고 노력해보면 어떨까요?
그리하여 12월 한달이
주님의 영 안에서 즐거워하며 보내는 그런 달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아무나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무나 듣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무나 맛보지 못한 것을 맛보게 될 것이니
참으로 즐겁고 흐뭇하지 않겠습니까?
그리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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