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2. 대림 제1주간 수요일]사천명을 먹이신 기적 (마태 15,29-37)

2015. 12. 1. 오후 7: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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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 대림 제1주간 수요일]사천명을 먹이신 기적  (마태 15,29-37)

제1독서

이사야는 이 세상의 불의와 억압이 사라질 날을 노래하는데, 그때에는 모든 민족이 주님께서 계신 시온 산으로 모여 오고, 주님께서는 모든 이가 당신을 알도록 이끌어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실 때, 모두가 그분의 구원을 기뻐하게 될 것이다.(이사야 25,6-10ㄱ)
그날 6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7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8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9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이사25,6-10ㄱ)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8)

'죽음'에 해당하는 '함마웨트'(hammaweth) 죄의 결과에서 오는  인간의 죽음을 의미하는 '무트'(muth)에서 유래한 명사로서(창세2,17), 육체적 죽음 뿐만 아니라 영적 죽음까지 모두 포괄한다.

영적 죽음은 하느님의 생명이 없는 상태로서(에페4,18),  생존시에도 하느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없으며, 죽어서는 하느님의 의노의 심판에 처해지는 운명을 나타낸다.

죄를 범함으로 이 땅에 들어온 육체적 죽음과 더불어 이러한 영적 죽음이 지배하는 한, 완전한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주 하느님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마련하여 사람들이 거기에 참여하기 전에 죽음을 완전히 없해 버리실 것이다.

한편 '없애 버리시리라'에 해당하는 '빨라'(balla)의 원형 '빨라으'(ballah)는 일반적으로 음식물 따위를 목구멍 아래로 삼켜 버리는 것의미한다(창세41,7; 탈출7,12; 민수16,30; 욥기20,15). 

이 죄많은 세상에서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지만 (1베드5,8), 장차 다가온 종말의 날에 주님께서 생명의 원수인 죽음을 삼켜 버리실 것이다. 이 단어는 본문에서 강조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그 의미가  한층 강조되어 있으며, 완료 시제로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완료 시제는 과거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적 완료(prophetic perfect)로서 비록 미래의 일이지만 그 실현이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분명히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한다. 한편 이러한 죽음의 파멸에 대해서는 묵시록 21장 4절확정적이고 선명하게 예언되어 있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고'  '눈물'에 해당하는 '띠므아'(dimah)슬픔과 애도의 문맥에 사용되는 것으로서 성도들이 세상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무수한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음을 함축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 되면, 주 하느님께서는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키기 위해서 흘렸던 성도들의 모든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이다. 

이것은 주 하느님의 위로가 넘칠 것을 의미하는데, 그의 위로가 세상에서 흘렸던 모든 눈물과 당했던 모든 고통을 다 잊어버리고도 남음이 있는 넘치는 것임을 암시한다.

온 천하를 주관하시는 주 하느님께서는 자비가 풍성하여 어머니가 바깥에서 다쳐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자녀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듯이, 세상에서 상처받고 고난당한 자녀들의 얼굴을 어루만지시며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러한 예언은 묵시록 7장 17절, 21장 4절에서도 다시 한 번 찾아볼 수 있다.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본문은 주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결코 단죄를 당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되는  축복을 받을 것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주님을 믿지 않고 교만하여 범죄한 대가로 인해 주님의 심판대 앞에 나설 때  단죄를 당해 그 수치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구속성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씻음을 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은 하느님 대전에 설 때에 세상에서 연약하여 지었던 죄로 인해  결코 단죄를 당하거나 수치를 입지 않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과 관계된 진리를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당신 백성'에 해당하는 '암모'(ammo)구약 시대에 오직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에게만 한정하여 주로 사용하던 명사 '암'(am)에 3인칭 소유격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단어는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을 가진 자들만을 한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백성을 포함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로마8,14~17).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문은 이사야 25장 6~8절의 예언이 이사야 예언자 자신이 지어낸  허탈한 희망의 말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께로부터 비롯된 계시의 말씀임을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예언이 신적 권위를 지녔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문은 이유의 의미를 지닌 접속사 '키'(ki; 왜냐하면)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계시로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위의 예언들이 반드시 성취되고야 만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기다림을 완성하신다. 그분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에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를 나누어 그들의 굶주림을 풀어 주신다.(마태오 15,29-37)
그때에 29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30 그러자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31 그리하여 말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고 불구자들이 온전해지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눈먼 이들이 보게 되자, 군중이 이를 보고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3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33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4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36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들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3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


오늘의 묵상

 구약 성경에서 새로운 임금이 등극할 때처럼, 메시아가 오시면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하고 선포하면서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고 잔치를 베풀 것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백성을 가엾이 여기셨을 뿐 아니라, 빵 일곱 개로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고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당신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우리는 결코 이 기적을 일으킬 수 없다고 생각하시겠죠. 그러나 이 기적의 출발점은 “저 군중이 가엾구나.”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 자비였습니다.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우는 이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며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합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노력만 한다면 우리도 이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굶주린 이에게 음식을 주는 것보다는 그를 진정으로 가엾게 여기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더 힘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의 고통을 가엾이 여기고 그의 부족함을 참아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기적이 아닐까요?





<최종 목적지> 송영진 모세 신부

 

12월 2일의 복음 말씀은 마태오복음 15장 29절-31절,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15장 32절-37절, '사천 명을 먹이시다.'입니다. 이 내용은,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신 분이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착한 목자가 아픈 양들을 치료해 주고, 배고픈 양들을 풀밭으로 데리고 가는 것처럼 예수님은 아픈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제1독서 말씀에도 비슷한 말이 나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이사 25,8)." 우리가 아파서 울든지 배가 고파서 울든지 간에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 즉 아픔과 배고픔을 없애 주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수치' 라는 말을 '보잘것없는 처지에 놓여 있어서 천대 받고 멸시 당하고 모욕당하는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상태'로 해석할 수 있는데, 주님은 그런 상태 속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착한 목자' 라는 말에서 시편 23편이 바로 연상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 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시편 23,1-3)." 이 시편은, "주님은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나를 살리시는) 착한 목자이신 분" 이라고 찬양하는 시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9-10)."


만일에 어떤 사람이 병자들을 고쳐 주면서 병자들에게 거액의 치료비를 내라고 요구한다면, 또 빵을 주면서 빵 값을 내라고 요구한다면, 그러면 그 사람은 착한 목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자비와 사랑으로 아픈 사람들을 고쳐 주셨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사랑과 자비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그 사랑과 자비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거래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뭔가를 바치면 주님께서도 받은 만큼 뭔가를 주시겠지."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장사꾼의 거래입니다.


'회개'는 이미 받은 사랑과 자비에 대한 응답입니다.
용서받기 위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았으니까 회개합니다. 벌을 안 받으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받았으니까 회개합니다. 용서는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고, 회개는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보속'은 우리의 사랑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 넣는 일입니다.


대림 시기를 맞아서 더 잘 회개하고 보속하기 위해서, 우리는 '착한 목자'에 관한 말씀을 다시 잘 묵상해야 합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 10,14)." 여기서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라는 말씀은, "내 양들이라면 나를 알아야 한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안다는 것인데, 단순히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잘 알고 계시는 주님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을 얼마나 잘 따르고 있는가?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병을 고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처지를 잘 알고 계셨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병을 고친 다음에 어디로 갔을까? 예수님의 수난 때에는 어디에 있었을까 


또 예수님께서 주신 '기적의 빵'을 먹은 수천 명의 군중은 어디로 갔을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배고픈 사정을 먼저 아시고(마태 15,32)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는데, 배고픔에서 해방된 그들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면서 살았을까? 그들에게 '빵의 기적'은 그냥 한 끼 식사였을 뿐인가?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병자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도 아니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빵을 주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치유 기적과 빵의 기적은, 우선 당장 사람들이 아프고 배가 고프니까 하신 일, 즉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이고, 사람들이 지치지 않고 하느님 나라까지 잘 갈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들은 예수님 활동의 목적지가 아니라 중간 경유지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쪽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는 관심이 없었고 몸의 치료만을 원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병을 고친 다음에는 더 바라는 것이 없으니 떠나버렸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고, 그래도 몇 명은 예수님 곁에 남았습니다.)
빵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빵'을 믿고 희망한 소수의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남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신의 배부름만' 추구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떠나버렸습니다(요한 6,66-69).

우리는 신앙생활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건강도 아니고, 배불리 먹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끝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마태 15,32)

지난 해 우리는 봉헌생활의 해를 보냈고
새해에는 '자비의 해'를 보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을 화두로 삼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비로운 사람인가요?
너그러운 사람인가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덮어주고 잘 용서해 주나요?
어렵고 힘든 이웃을 보면 측은지심이 발동하나요?

아니면 좀 깐깐하고
잘 따지고
용서하지 못하고
이웃을 무시하곤 하진 않나요?

대림시기는 무엇보다 
측은지심을 갖고

다시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할까 봐요.

오늘 우리 눈에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이 눈에 띄면 그를 외면하지 말고
측은지심을 갖고 작은 힘이라도 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의 작은 측은지심이 기적을 가져다 줍니다.
측은지심의 마음이 없으면 하늘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늘이 감동하는 것은 우리의 측은지심임을 생각하며
남에게 큰 힘이 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우리지만
마음만큼은 불쌍한 이들과 함께하는 따뜻하고 흐뭇한 성탄을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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