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30.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그물을 버리고 (마태 4,18-22)

2015. 11. 30. 오전 5: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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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1주간 월요일] 그물을 버리고 (마태 4,18-22)

 <11.30.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베드로 사도의 동생이다. 갈릴래아의 벳사이다에서 태어난 그는 형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였다(마태 4,18 참조). 안드레아 사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이끌었다(요한 1,40-42 참조). 그는 그리스 북부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제1독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없다면 사람들은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없고, 듣지 못한다면 믿음에 이를 수 없다. 많은 이가 믿음을 고백하여 구원을 얻으려면 먼저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로마서 10,9-18)
형제 여러분,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복음

안드레아는 형 베드로와 함께 어부로 일하다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그들은 이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복음을 선포해서 많은 이를 구원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마태오 4,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제1독서 (로마10,9-18)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9-10)

로마서 10장 9절과 10절은 믿음의 의로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을 거듭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입술의 고백 마음의 믿음이다. 

'고백하고'로 번역된 '호몰로게세스'(homollogeses)의 원형 '호몰레게오'(homollogeo; confess)'함께', '동시에'란 뜻을 지닌 '호무'(homu)'말함' 이란 뜻이 있는 '로고스'(log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문자적으로는 '함께 말하다', '동시에 말하다'라는 뜻이 있고, 실제로는 주로 법정 서약약속 혹은 고백 행위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 이러한 고백은 공개적 성격을 갖는다.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서원하다'라는 뜻의 '나다르'(nadar),'맹세하다' 라는 뜻의 '샤바'(shaba)등의 역어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는 '호몰레게오'(homollogeo)'공개적으로 고백 또는 진술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즉 9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공적으로 고백하고 진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고백이 가지는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는, '주님'으로 번역된 '퀴리오스'(kyrios)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퀴리오스'(kyrios)일반적 경칭으로 영어의 'Sir'이나 독일어의 'Herr' 의 의미가 있다. 로마 황제의 일반적 호칭이었다. 즉 황제를 신으로 여기고 숭배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③ 그리스 신들의 이름 앞에 붙여, 인간과 다른 영역에 있는 신을 나타낸다. 히브리 성경의 그리스어 70인역(LXX)에서 하느님의 명칭인 야훼의 역어로 사용되어 유일신을 지칭하게 되었다.

따라서 누가 예수님을 '퀴리오스'(kyrios)라고 공적으로 진술한다면, 그는 예수님을 황제, 더 나아가 신적 존재 혹은 유일신 야훼와 동일시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자신의 삶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그분께 드리는 것이 된다.  

즉 이러한 칭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그 주권(主權)을 인정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유일한 구세주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을 주님을 고백하는 것은 믿음의 시금석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Dominus)로 시인할 때, 우리는 그분의 신성(神聖)과 존귀하심, 그리고 믿는 자 자신이 그분께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 성도들 사이에 이것은 신앙 고백의 신조(credo)로 사용되었고, 세례의식에서 고백의 문구로 사용되었다. 

구원받을 수 있는 또 한 가지의 조건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공개적 진술과 함께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써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원'을 얻는 데에 두 가지 모두 필수이지만, 굳이 논리적 순서를 따진다면 '믿음'이 '고백'에 우선한다.  여기서 '믿으면'으로 번역된 '피스튜세스'(pisteuses)'피스튜오'(pisteuo)의 부정 과거 가정법이다. 특히 여기서 과거의 일회적 행위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시제인 부정 과거형을 사용하여 그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결정적 믿음임을 보여준다. 

이 믿음은 앞에 나온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는 신앙 고백의 근거가 된다. 사도 바오로는 여기에서 요구되는 믿음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단정짓는데, 이 부활에는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 모두를 믿는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심으로써, 영원한 구원을 보증해 주셨다는 확고한 확신 아래에서이루어지는 마음의 서약이기도 하다.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0)  로마서 10장 10절은 로마서의 주제인 믿음으로 의로움(구원)에 이르는 원리 가장 간결하고 명확하게 보여주는 구절이고 가장 많이 알려진 구절이다. 9절의 말씀이 순서가 바뀌어 서술되고 있고 9절 내용의 반복이다. 

인간 구원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의로움'을 회복하고 내면에서부터 변화되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며, 거기에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일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마음으로'로 번역된 '카르디아'(kardia; heart)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흔히 '마음'으로 번역하는 이 단어는 고전 그리스어 문헌에서 인간 전체의 지적, 영적 중심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리스어 구약 성경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히브리어 '레브'(leb) '레바브'(lebab)의 역어로 나온다.  구약 성경에서도 이러한 단어는 인간의 영적, 지적 생활의 자리, 인간의 내적 본성이며, 책임의 자리를 나타낸다. 

따라서 마음에서 나온 것 틀림없이 그 사람 자신의 내면 전체의 인간적 속성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카르디아'(kardia) 하느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자리이며, 그곳에서 맨 처음에 하느님께 순종할 것인지,거부할 것인지의 문제가 결정된다. 그것은 불신앙의 자리도 되고, 신앙의 자리도 되는 것이다.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 믿음은 감상적 충동이나 추상적 사상으로만 인정받을 수 있을 뿐이지 진정한 의미의 믿음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믿음'과 '믿음의 고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10절에서 그 결과로 제시하고 있는 '의로움'과 '구원'은 동일한 의미이다. 

또한 여기서 '믿어'에 해당하는 '피스튜에타이'(pisteuetai)'고백하여'에 해당하는 '호몰로게이타이'(homollogeitai)가  모두  현재 수동태 3인칭 단수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3인칭 단수형은 믿고 고백하는 주체가 각 개인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현재형이란 사실은 이러한 믿음과 고백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또한 수동태로 되어 있다는 것은 믿음과 고백의 주체가 개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일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개인적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지기보다는 신적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은총의 차원을 드러내고 있다.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18-20)." 


마태오복음만 보면,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보시자마자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고, 어부들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분이 부르시자마자 즉시 그분을 따라간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요한복음을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안드레아는 원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요한 1,35.40). 그는 세례자 요한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고,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았고, 예수님과 함께 묵었습니다(요한 1,36-39). 그리고 자기 형 시몬에게 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라고 증언했고,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요한 1,41-42). 


그래서 예수님께서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전에 이미 어부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는 있었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는 어부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어부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즉시 따라나설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불러 주시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원했던 일이었으니 따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또 원했던 일이었으니 바로 응답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라는 말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의 그들의 마음가짐을 나타냅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기쁜 마음으로'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불러 주셔서 기뻐했을 것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물을 버리다." 라는 말은 실제로 그물을 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직업을 버렸다." 라는 뜻이고, 이것은 "인생을 버렸다.", 즉 "인생을 완전히 바꾸었다." 라는 뜻입니다. 하고 있던 일에 대한 미련이나 아쉬움 같은 것은 전혀 없이, 새로 하게 되는 일에 대한 희망과 기쁨만 있었다는 것.

 

어부들이 새로 하게 된 일은 '사람을 낚는 일'입니다. (그들의 직업이 어부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낚는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말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물'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물 속에 있는 사람들을 낚아서 물 밖으로 꺼내는 것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물고기의 경우에는, 물 속에 있는 물고기를 낚아서 물 밖으로 꺼내는 것은 그 물고기를 죽이는 것이지만, 사람의 경우에는 반대가 됩니다.) 어부들은 사도가 되기 전에는 물고기를 '죽이는' 일을 하면서 살았지만, 사도가 된 다음에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하면서 살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는 사도가 된 다음에도 직업을 아주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 바오로가 그들을 찾아갔는데, 마침 생업이 같아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생업이었다(사도 18,2-3)."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먹고살기 위해서 일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교활동에 필요한 활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바오로 사도는 사실상 직업을 버린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사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는(일반 신자들에게는) 직업을 버리는 것이 요구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을 먼저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태 6,33).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 하느님을 찾는가? 아니면, 하느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돈을 버는가? 직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것은 모든 신앙인에게 해당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먹고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과 신앙생활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복잡할까? 


원하는 것이 많으면 인생도 복잡해집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이것도 무시할 수 없고, 저것도 신경 써야 하고, 이 사람도 챙겨야 하고, 저 사람도 만나야 하고...그러나 원하는 것이 단순하면 인생 자체가 단순해집니다. 희망하는 것, 그것 하나만 생각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희망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 하나만 희망하면 됩니다.


'낙타와 바늘구멍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의 경우에, 그는 영원한 생명도 원했고, 부유함도 원했고, 십계명을 잘 지키는 것도 원했고, 자기 재산을 지키는 것도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자에게 하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라는 말씀은, 당신의 제자가 되라고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슬퍼했습니다(마태 19,22).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모두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슬퍼한 것입니다. 과연 그는 최종적으로 무엇을 얻게 되었을까?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마태 16,26).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등, 첫 제자들의 직업이 어부였다는 사실이 눈길을 끕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그물질하는 어부들을 보시고 당신 제자로 삼으셨는데, 아마도 어부들이라면 제자로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파악하고 실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어부는 물고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물을 치고, 물고기를 잡습니다. 뭍으로 돌아오면 다시 그물을 손질하여 다음번 고기잡이를 준비합니다. 이렇게 물고기를 잡아 본 이들이기에 “사람 낚는 어부”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으려고 힘써 배를 젓고 그물을 치듯, 사도들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하려고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했습니다. 백 명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 가운데 몇 명이 그 복음을 받아들였을까요? 빈 그물을 거두는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음날 어부들이 푸른 바다로 다시 나가서 그물을 던지듯이 사도들도 다시 나갔을 것입니다. 이처럼 어부의 경험이 그들에게 많은 용기를 주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절대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생업인 그물질을 포기한 채 그분을 따랐을 뿐 아니라, 여러 상황에서 여러 사람을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께 인도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게 하였고, 그때마다 예수님께서 적절하게 당신 뜻을 계시하시도록 기회를 마련해 드렸는데, 오늘 우리가 다짐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넓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으려 애쓰는 어부들처럼, 사람 낚는 어부였던 사도들을 본받아 다른 이들과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한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따름으로서 얻게 되리라 반영억라파엘 신부


축일을 맞이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사도의 삶을 잘 살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른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꺼이 따름으로써 큰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온전히 따르려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고 마침내 버림으로써 주님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익숙해진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안주하지 않고 도전할 때 새로운 것을 얻게 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단지 마음과 행동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이사 43,18). 도전할 때 새 일을 만날 수 있고 또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시몬 베드로와 형제지간입니다. 특별히 요한과 길을 걷다가 예수님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하며 형에게 말하고, 예수님께 자신의 형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소개하였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요한6,8-9)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간 사람도 안드레아입니다. 그는 혼자만 메시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삶의 쇄신과 회개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안드레아는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를 얻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삶의 자리에서 우리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며 “따라 오너라” 하십니다. 따르고 안 따르고는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에게는 새 삶이 열려있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그물이나 배, 아니면 가족? 일지라도 단호하게 버리고 주님 안에 머물면 그 모든 것이 주님의 것으로 넘치도록 채워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따라야겠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따름으로써 더 좋은 것,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일상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끊임없이 대립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에 따라서 주님의 제자가 되기도 하고 세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버릴 것은 확실히 버릴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청합니다.


그리고 안드레아가 형에게 자기가 만난 주님을 알렸듯이 주님의 체험을 전해야 합니다.“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무엇보다도 행실로써 전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름으로서 믿음을 견고케 할 수 있듯이 믿음이 약한 이들이 우리를 보고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큰 나무는 잘 부러지지 않고 큰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으며 깊은 샘물은 마르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답니다. 예수님이 크신 분 이셨듯이 우리 모두가 큰 사람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11/30)|오늘의 말씀과 묵상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마태 4,18)

우리는 베드로 사도를
으뜸 사도로 존경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동생 안드레아에게는
그러한 존경을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안드레아는 형 베드로보다
더 구도적인 사람이고
적극적인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 예수님을 형에게 소개함으로써
오늘의 베드로 사도를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안드레아야말로
구도자이고 선교사이고
겸덕을 갖춘 참 사도요 제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수도자인 저는 베드로 사도보다
안드레아 사도가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올해는
좋은 것을 더 열심히 추구하고
그렇게 찾은 보화를
가까운 이웃들에게
소개시켜주고 나누어주면서
남이 나보다 더 잘 되는 것을
지켜보며 흐뭇해하는
안드레아 사도같은 멋진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성 안드레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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