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간 월요일]예리코 소경치유 (루카 18,35-43)

마카베오기는 기원전 2세기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은 외세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특히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는 그리스 문화와 종교를 강요하며 유다교를 박해했다. 유다인들 가운데에도 이민족의 풍습을 따라가는 이들이 있었으나, 율법을 어기기보다는 왕명으로 사형당하기를 선택한 이들도 많았다.(마카베상 1,10-15.41-43.54-57.62-64)
그 무렵 10 죄의 뿌리가 나왔는데, 그가 안티오코스 임금의 아들로서 로마에 인질로 잡혀갔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이다. 그는 그리스 왕국 백삼십칠년에 임금이 되었다. 11 그 무렵에 이스라엘에서 변절자들이 생겨 많은 이들을 이러한 말로 꾀었다. “자,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 그들을 멀리하고 지내는 동안에 우리는 재난만 숱하게 당했을 뿐이오.” 12 이 말이 마음에 들어, 13 백성 가운데 몇 사람이 임금에게 기꺼이 나아가자, 그는 그들에게 이민족들의 규정을 따라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14 그리하여 그들은 이민족들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15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저버렸다. 이렇게 그들은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중하였다. 41 임금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42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 이민족들은 모두 임금의 말을 받아들였다. 43 이스라엘에서도 많은 이들이 임금의 종교를 좋아하여, 우상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안식일을 더럽혔다. 54 백사십오년 키슬레우 달 열닷샛날, 안티오코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 이어서 사람들이 주변의 유다 성읍들에 제단을 세우고, 55 집 대문이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 56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태워 버렸다. 57 계약의 책을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왕명에 따라 사형에 처하였다. 62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63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64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

시편 119(118),53.61.134.150.155.158(◎ 88 참조)
◎ 주님, 저를 살려 주소서. 당신 법을 지키리이다.
○ 악인들 때문에 분노가 치미나이다. 그들은 당신 가르침을 저버렸나이다. ◎
○ 죄인들의 올가미가 저를 휘감아도, 저는 당신 가르침을 잊지 않았나이다. ◎
○ 사람들의 억압에서 저를 구하소서. 저는 당신 규정을 지키리이다. ◎
○ 당신 가르침을 멀리하는 저들, 사악한 박해자들이 다가왔나이다. ◎
○ 악인들은 당신 법령을 따르지 않았기에, 저들에게는 구원이 멀리 있나이다. ◎
○ 당신 말씀을 지키지 않는 저들, 그 배신자들 보며 저는 역겨워하나이다. ◎

예수님께서는 예리코 근처에서 소경을 고쳐 주신다. 다시 볼 수 있기를 청하는 소경에게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신다.(루카 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한 주간 동안 마카베오기를 묵상하고 다음 주에는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다니엘서를 묵상합니다. 이 책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역사 지식이 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두 주간을 위한 터 닦기 작업을 하겠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대왕’이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 지중해 연안에 대한 전격적인 정복을 끝낸 다음, 그리스 문화라는 공통된 문화에 기반을 둔 대제국을 구상하였습니다. 이를 추진하려고 그는 자신이 정복한 모든 나라에 그리스 사상을 강요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헬레니즘화’로 알려진 과정이었습니다. 그가 갑작스럽게 죽자, 그의 부하 장군들이 정복한 지역을 차지하려고 오랜 기간 전쟁을 벌였는데, 그 결과 대제국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이 가운데 셀레우코스 왕조가 팔레스티나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외세의 통치는 언제나 한 민족의 문화와 종교를 위협하기 마련이지요. 이때 유다인들에게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이 왕조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였습니다. 그는 그리스 문화를 강요하려고 율법을 금지하고, 율법서를 갖고 있거나 할례나 안식일 등 율법을 지키는 이들을 사형에 처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제우스 신에게 봉헌하여 거기에 그 신상을 세우고, 제단 위에서 부정한 동물인 돼지까지 희생 제물로 바치면서 철저하게 성전을 더럽히고 모독하였습니다.
이때 이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두 가지로 전개됩니다. 마카베오 집안은 무력 항쟁으로 성전을 되찾고 독립을 추구하는 능동적 저항을 했습니다. 또 다른 저항은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순교를 당하며, 그 피로써 하느님께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주간에 묵상하게 될 다니엘서는 묵시 문학 특유의 역사 이해를 바탕으로 이러한 수동적 저항을 자세하게 전해 줍니다.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이것이 이 시대의 신앙인의 결연한 다짐이었습니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기회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제1독서 (1마카1,10-15.41-43.54-57.62-64)
"안티오쿠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 이어서 사람들이 주변의 유다 성읍들에 제단을 세우고, 집 대문이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태워 버렸다. 계약의 책을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왕명에 따라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1마카 1,54~57.62~63)
마카베오 상권은 '왕조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 마카베오 상권은 B.C. 2세기 3세대에 걸친 유다 왕조의 역사를 이야기 형태로 전한다. 이 가문은 마카베오(유다의 별명인 '망치'에서 유래함) 가문 또는 하스몬 가문이라 불린다. 한 가문에만 초점을 모으는 것은 그 가문의 후손들에게 이스라엘에서 종교적, 군사적, 정치적 권위를 주장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일 수 있다.
마카베오서의 구조에서 책의 목적이 드러난다. 마카베오 상권은 셀류코스 왕조의 통치자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 의해 야기된 위기와 마따디아에 의해 시작된 저항을 묘사한 뒤에(1,1-2,70) 유다 마카베오(3,1-9,22), 그의 형제들인 요나단(9,23-12,53)과 시몬(13,1-16,24)의 반란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하느님이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사용하시어 셀류코스 왕조의 억압을 제거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고, 유다의 대사제가 이 가문에서 나오게 된 경위를 설명한다.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하느님의 고유한 왕조를 대표한다.
마카베오 상권의 전망은 5,61-62에서 밝혀지는데, 여기서 요셉과 아자리야는 군사적인 용맹을 떨치려고 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유다와 그의 형제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람들의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사제 마따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들(요한,시몬,유다,엘르아잘,요나단) 그리고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이다. 이 책은 유다와 요나단과 시몬을 이스라엘에 '구원'을 가져다 준 인물로 제시하는데, 이때의 구원은 적대적인 정치적, 군사적 힘에서 해방되는 것으로서 이 세상의 역사에서 이해된 구원을 가리킨다.
세 형제는 군사, 종교, 정치 문제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요나단은 빈틈 없는 정치가이다. 시몬은 새로 세운 유다 행정부를 강화하고 조직화한다. 이 책의 설화 문체는 성서의 역사서들인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모방하여 이스라엘의 과거 영웅들과 마카베오 왕조 사이의 지속성을 제안한다.
이 계획에서 중요한 요소는 '성서적인 재창조', 곧 마카베오 왕조의 행위들이 성서의 초기 영웅들의 말과 행위와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의도적인 노력이다. 주축이 되는 메시지는 마카베오 왕조가 이스라엘의 과거의 위대한 유산을 승계한다는 것이다.
마카베오 상권의 주요 본문은 칠십인역 그리스어 성서의 본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마카베오 상권이 본디 히브리어로 작성되었으나 나중에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셈족화된 그리스어로 작성되었을 수도 있다. 현재의 본문은 '성서 그리스어'로 씌어 있으며 그리스어 성서의 초기 역사서들의 그리스어 본문과 매우 유사하다. 이 책은 B.C.134년부터 104년까지 유다의 대사제였던 요한 히르카누스의 공적을 요약하는 말로 끝난다. 이 책은 요한 히로카누스 재위 당시나 그 직후, 곧 기원전 1세기 초에 작성되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여러 개의 '공적' 문서들(8,23-32;10,18-20,10,25-45;11,30-37;11,57-59; 12,5-23; 13,36-40 참조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문헌들의 진정성 문제가 논의되고 있지만 최근 학계의 동향은 기본적으로 진정한 문헌이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시, 담론, 기도는 저자가 자유롭게 작성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성서의 예들을 본보기로 사용하고는 있지만). 어떤 학자들은 마카베오 상권 1-7장과 마카베오 하권 3-15장에서 저자들이 공통되는 원천을 사용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카베오 상,하권의 복잡한 전승을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가 그 원천이 된 본문을 되찾는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마카베오 상권의 제1부는 1장 1절 -2장 70절까지 이며, 위기와 저항을 다루고 있다. 위기(1,1-64)의 발단은 시리아의 임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율법을 준수하고 성전에서 예배하며 할례를 실천하는 유다인들의 생활 방식을 없애려고 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B.C.336-323) 부터 안티오쿠스 4세(B.C.175-164)에 이르는 헬레니즘 역사에 대한 묘사는 오만("그는 마음이 우울하고 오만해졌다")과 죄악("그들은 세상을 악으로 가득 채웠다")의 주제를 부각시킨다.
안티오쿠스는 무엇보다도 악인이지만, 1장 11-15절에서는 그의 계획에 동조한 유다인들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자,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1,11). 그의 계획은 율법 대신 이민족들의 규정을 따르게 하고, 경기장을 세우며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전통적인 유다 종교)를 저버리는 것이다.
위기는 1장 16-40절에서 커진다. B.C.169년 안티오쿠스는 이집트를 쳐부수고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성전을 약탈한다. 그 결과 "야곱의 온 집안은 수치로 뒤덮였다"(1,28). 그런 다음 안티오쿠스는 167년에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약탈하기 위하여 '조공 징수관'을 파견하고 항거하는 유다인들을 25년 이상 괴롭히게 될 군사 요새, 곧 성채를 쌓는다. 그 성채는 "성소를 위협하는 복병이 되고 이스라엘을 늘 괴롭히는 흉악한 원수가 되었다"(11,36).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고 성전 근처에 성채를 쌓은 안티오쿠스는 1장 41-50절에서 성전 예배와 희생 제사를 바치지 못하게 하고 안식일과 유다의 축제들을 지키지 못하게 하며, 남자 아이들을 할례 받지 못하게 하고 정결법을 지키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1장 51-61절에 따르면 안티오쿠스는 이 칙령을 내린 뒤에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가져오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우고, 유다 전역에 분향 제단들을 세우며, 율법서를 찢어 불태워버리고 제 아이들에게 할례를 베푼 여인들을 사형에 처한다. 안티오쿠스의 칙령을 묵묵히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과 자기네 종교 전통을 충실히 지키기 위하여 기꺼이 죽기로 작정한 이들이 있었다(1,62-63). 위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1,64).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어떤 눈먼 거지가 예수님께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루카 18,41).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고쳐 주시자(루카
18,42),볼 수 있게 된 그는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루카 18,43).
마르코복음에는 그의 이름이 '바르티매오'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마르 10,46), 루카복음에는 그냥 '어떤 눈먼 이' 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루카복음서 저자는 '누가' 눈을
떴느냐보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서 '무엇을' 하셨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눈먼 이를 고쳐 주셨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를 마르코복음 8장에 있는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치시다.'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벳사이다에서 어떤 눈먼 이를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8,26).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말라는 말씀은, "과거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향해서 나아가라.", 또는 "세속적인 삶을 버리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신앙생활을 하여라."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눈을 고치는 것보다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리코에서 만난 바르티매오에게는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의 눈만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도 구원하셨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구원의 시작'일 뿐이지 '구원의 완성'은 아닙니다.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은, 즉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이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명시적으로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에는 "나를 따라라." 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제 눈을 고쳤으니 직업을 새로 얻고 돈을 많이 벌어서 편하게 먹고 살아라." 라는 뜻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가거라."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라."로 해석되는데, 이 말씀에도 역시 "나를 따라라." 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복음 말씀에는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그를 불러서 데리고 가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가 응답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의 눈을 고쳐 주신
일은 순한 치유가 아니라 그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인생을 주신 일인데, 누구든지 그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여기서 '눈이 먼'상태는, 예수님도 모르고 구원의 진리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구걸'은,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면서 살고 있는 세속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재벌 그룹 회장이라고 해도 눈먼 거지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을 고쳐 주시는 분, 즉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바르티매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는 눈을 고치는 것 이상의 더 큰 것을 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는 "내가 눈을 고쳐서 볼 수 있게 된다면 정말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고 있었던 새로운 인생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인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눈을 고친 다음에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섰을 것입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바르티매오에게 왜 예수님을 따라가느냐고 물었다면, 아마도 그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는데...나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메시아라고 믿고 있습니다."(이 말은, 요한복음 6장 68절-69절에 있는 베드로 사도의 말을 조금 변형한 것인데, 예수님을 따라가는 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어떤 병에 걸렸을 때, 그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병이 나은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선(善)이고, 열심히 일하면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가난에서 벗어나서 부자가 된 다음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 어떤 소원이 있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고, 또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다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 다음의 일까지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간절하게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즉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루카 9,25),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허무한 일이 될 것입니다(코헬 1,14).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남들보다 더 좋은 차를 타고 간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18,35-43)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41ㄴ)
마르코 복음의 병행 구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자 바르티매오는 겉옷조차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다(마르10,50).
즉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외침에 응답해 주시자 너무도 기뻐한 나머지, 밤에는 이불이 되고 낮에는 거지 행세를 할 수 있는 유니폼이며 생계 수단인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께로 달려 갔던 것이다. 그렇게 달려 온 바르티매오에게 예수님께서는 소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물으신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자기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인식하고 있는지 알고 싶으셨다. 이에 대하 바르티매오는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태20,33; 마르10,51)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소원을 구체적으로 고백했다.
희랍어에서 '보다'는 뜻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동사가 '블레포'(blepo)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접두사 '아나'(ana)가 붙은 '아나폴레포'(anablepo)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바르티매오가 보기를 간절히 원했다(I want to see)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데, 여기서의 용례는 단순히 '보다'는 뜻보다는 '다시 보다' (see again)는 뜻을 지닌다(사도9,12.17; 22,13).
이것으로 보아 그는 전에는 소경이 아니었지만 소경이 되었고, 따라서 눈을 뜨고자 하는 욕구가 다른 사람보다 더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원문에는 '해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동사 '텔로'(thelo; want, desire)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 '텔로'(thelo)가 접속사 '히나'(hina)앞에 있어야 완전한 문장이 된다.
그러나 소경이 이렇게 '텔로'(thelo)를 생략하고 짧게 말한 것은, 자신의 소원을 말하는 것이 너무나 급했고 절박했기 때문이다.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루카 18,39)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은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결정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랜 기간 습득한 신앙에 관한 지식들에 사로잡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잘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미사할 때는 미사포를 꼭 써야하고, 기도할 때 자세는 어떻게 해야하고
영성체할 때 오른손이 위로 가야하는지 왼손이 위로 가야하는지
심지어는 미사예물은 얼마를 해야하고 고백성사는 얼마나 자주 보아야 하는지
나름대로 배워익힌 지식대로 소위 신참들에게 전수를 합니다.
또 이렇게 하면 된다. 안된다.
이건 틀렸다 저건 아니다 등
부정적인 판단도 스스럼없이 하기도 합니다.
오늘 예리고의 어떤 소경이
예수님을 간절히 찾으며 큰소리를 내며 소란을 피우자
앞서가던 이들이 잠자코 있으라 꾸짖습니다.
어딜 감히 예수님 앞에서 소리치며 시끄럽게 구느냐고 나무라는 것이지요.
"앞서가던 이들!"
그들이 바로 신앙생활을 먼저 한 사람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와야 할텐데 가로막고 있네요.
우리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나는 그렇지 않은지 한번 겸허하게 돌아봅시다.
가끔씩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바람 불면 고개를 숙입니다. 비가 오면 우산을 펼칩니다.’ 아마도 저의 성향이 불의 앞에서 당당하게 정의를 외치는 편이 못되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인류의 문명과 역사는 도전이 있을 때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의지가 있었기에 발전했을 것입니다. 제게 주어지는 일들이 있으면 당황하지 않고, 미루지 않는 편입니다. 시간을 내고, 계획을 세우고, 할 수 있는 방법과 길을 찾는 편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곳일까요? 어릴 때는 많은 곳에서 들었고, 볼 수 있었습니다.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불’이라는 구호입니다. 한마디로 잘 사는 나라입니다. 배고프지 않고, 자기 집을 가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이제는 거리에서 그런 구호를 보지는 못하지만 아직도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중산층의 기준은 부채 없이 30평 정도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월급여가 500정도 되고, 2000cc 정도의 자동차를 운전하며, 은행 잔고는 1억 정도 되고, 1년에 한번 정도 해외여행 가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중산층의 또 다른 기준은 자신의 정체성을 잘 알고, 책을 자주 읽으며, 불의한 일에 나서고, 한 가지 정도의 악기는 다루고, 이웃을 도울 줄 아는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과연 우리들의 기준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예전에 엘리베이터의 게시판에서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더욱 푸르다.’ 모든 것이 푸르른 여름에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시련의 때, 고난의 때에는 유독 그 푸르름이 돋보이는 나무가 있는 것처럼 주변을 보면 그렇게 자신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서 흘러가는 삶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줄 아는 용기와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흘러가는 삶은 살아지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눈을 뜬소경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자비를 청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아무리 좋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살아도 결국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경은 주님께 간절하게 외칩니다. ‘주님 보게 해 주십시오.’ 주님은 소경의 간절함을 보시고, 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 하는 것들은 ‘빠르고 편하고, 쉬운 길만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느리고,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굳이 당신의 힘과 능력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세우신 질서와 법에 따라야 한다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선택과 결정을 전적으로 본인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의 질서입니다.
조재형가브리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