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간 수요일]나병 환자 열 사람 (루카 17,11-19)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마르티노 주교는 316년 무렵 헝가리 판노니아의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그는 군인으로 근무하던 중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신비 체험을 하였다. 곧, 추위에 떨고 있는 거리의 한 걸인에게 자신의 외투 절반을 잘라 주었는데, 그날 밤 꿈속에 그 외투 차림의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곧바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그는 나중에 사제가 되었으며, 370년 무렵에는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어 착한 목자의 모범을 보이며 복음 전파에 전념하였다. 프랑스 교회의 초석을 놓은 마르티노 주교는 프랑스 교회의 수호성인 가운데 한 분으로 존경받고 있다.

지혜서는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지혜를 찾으라고 권고한다. 통치권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미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지만 권력자들은 엄하게 심판하신다.(지혜 6,1-11)
1 임금들아, 들어라. 그리고 깨달아라. 세상 끝까지 통치하는 자들아, 배워라. 2 많은 백성을 다스리고 수많은 민족을 자랑하는 자들아, 귀를 기울여라.3 너희의 권력은 주님께서 주셨고, 통치권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주셨다. 그분께서 너희가 하는 일들을 점검하시고, 너희의 계획들을 검열하신다. 4 너희가 그분 나라의 신하들이면서도 올바르게 다스리지 않고, 법을 지키지 않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5 그분께서는 지체 없이 무서운 모습으로 너희에게 들이닥치실 것이다. 정녕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엄격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6 미천한 이들은 자비로 용서를 받지만, 권력자들은 엄하게 재판을 받을 것이다. 7 만물의 주님께서는 누구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으시고, 누가 위대하다고 하여 어려워하지도 않으신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 8 그러나 세력가들은 엄정하게 심리하신다.9 그러니 군주들아,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듣고,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10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것을 익힌 이들은 변호를 받을 것이다. 11 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 일어나소서, 하느님, 세상을 심판하소서.
○ 힘없는 이와 고아의 권리를 찾아 주고, 가난한 이, 불쌍한 이에게 정의를 베풀어라. 힘없는 이와 불쌍한 이를 도와주고, 악인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어라. ◎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 그러나 너희는 사람들처럼 죽으리라. 세상의 권력자들처럼 쓰러지리라.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자비를 청한다. 그들 열 사람이 모두 치유를 받았지만, 돌아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 것은 한 사람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루카 17,11-19)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요즈음 많은 이가 정치에 어떤 희망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냉소적인 것이 현실인데,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정치인들은 주로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며, 지혜서 6장도 예외가 아닙니다.
“임금들아, 들어라.” 하고 시작하는 오늘 말씀을 여러 나라 임금들이 읽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지혜서는 구약 성경의 전통을 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책입니다. 게다가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오백 년이 더 지난 뒤에 쓴 책이므로, 이 책의 실제 독자는 이방 임금들이 아니라 장차 이스라엘 사회를 이끌어갈 젊은이들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가르침은 우리에게도 커다란 경종을 울립니다. “세상 끝까지 통치하는 자들”의 권력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통치자들을 “그분 나라의 신하들”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들의 절대 권력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왕권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다스리시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구약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백성을 통치하는 도구 노릇을 하는 것이기에, 그 책임이 막중하며 이에 대한 심판도 엄격하게 적용될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다스리고 처신하느냐에 따라,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정의가 백성에게 실현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서는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1,1)는 말씀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정의는 주님께서 부여하신 세상의 질서이며 사회의 규범입니다. 그러나 지혜서는 추상적인 정의보다는 의인들과 악인들의 생활 태도를 비교함으로써 정의를 간접적으로 강조하고 있는데,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지혜를 추구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오늘날 “세상 끝까지 통치하는 자들”이, 자기들의 책임이 얼마나 엄중하고 두려운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백성들을 만나면 좋겠습니다.
연중32주간 수요일제1독서 (지혜6,1-11)
"미천한 이들은 자비로 용서를 받지만, 권력자들은 엄하게 재판을 받을 것이다. 만물의 주님께서는 누구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으시고, 누가 위대하다고 하여 어려워하지도 않으신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 그러나 세력가들은 엄정하게 심리하신다. 그러니 군주들아,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듣고,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6-9)
지혜서 6-9장은 전체 지혜서의 2부에 해당되며, "지혜"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 그리고 지혜서 6장 1-11절은 시작 권면으로서 세상 임금들에게 주는 말씀이다. 이 책이 세상의 임금들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지혜1,1-15참조) 제1부 '정의와 불멸성'(지혜1-5장)에 관한 가르침을 마무리하고, 이어지는 "지혜"에 관한 제2부 가르침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불법과 악행에 휩쓸리지 않기 위하여 주의를 기울일 것을 임금들에게 호소한 뒤에 (지혜6,1-2; 5,23참조), 저자는 그들에게 권력을 주시는 하느님께서 엄격한 심판을 요구할 것임을 상기시킨다(지혜6,3-8). 통치자들은 자기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 통치자들을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들을 엄정하게 심리하신다. 하느님께서 통치자들을 엄하게 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지혜서 6장 9-11절에서 그들이 지혜를 배우도록 초대하신다.
항상 그렇듯이 지혜서에서 가르치는 지혜는 올바른 삶과 거룩함과 연결되어 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것을 익힌 이들은 변호를 받을 것이다." (지혜6,10).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지혜의 본성에 관한 본격적인 가르침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병자 열 사람과 마주치는 일이 생기는데,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을 바로 알아본 것 같습니다. 그들이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집니다(루카 17,14). 즉 병이 낫게
됩니다. 그들의 병이 나은 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해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병자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병자들의 말은, 병을 고쳐 달라는 뜻입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병을 고쳐 줄 테니 사제들에게 가서 병의 치유를 확인받아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병자들 입장에서는 믿음을 시험하는(믿음의 시련이 되는) 말씀입니다. 사제들에게 가는 것은 병을 고친 다음에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병이 나병이었기 때문에 병을 고친 뒤에는 사제들의 공적 확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즉시 고쳐 주시지도 않았고, '언제' 고쳐 주실 것인지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병자들은 병이 낫기 전인데도 예수님의 말씀만 믿어야 하고, 사제들에게 가서 병의 치유를 확인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 상황 자체가 시련이고 시험입니다.
이 상황에 연결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열 명 모두 예수님께 병의 치유를 청했고, 치유의 은총을 이미 받았다고 믿었고, 믿었기 때문에 사제들에게 갔고, 가는 동안에 병이 나았습니다. 여기까지는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믿은 대로 치유의 은총을 받은 병자들의 이야기입니다.그 다음부터 특별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5-19)"
다른 '아홉'은 사제들에게 갔을 것이고, 병이 나은 것을 공적으로 확인받았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각자 자신의 가정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신 일을 취소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 뒤에 어떻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나중에라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을 잊어버렸을 수도 있고...어떻든 이야기 속에서는 그들은 몸만 건강해지고 진정한 구원은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사제에게 가는 것을 중단하고 예수님께 되돌아왔습니다. 되돌아온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은 그냥 가버린 사람들은 유대인들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의 믿음이 병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기를 바라는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그냥 가버린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고, 간청했고, 바라던 대로 병이 나았지만, 거기에서 멈추었습니다. 예수님께 몰려와서 병을 고쳤던 수많은 병자들이 다 그랬습니다. 병이 나은 다음에는 거의 대부분 미련 없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그들 가운데 몇 명만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는 예언자, 또는 랍비였을 뿐입니다. 메시아로 믿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께서 주시는 구원은 받지 못했습니다.
되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인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그가 하느님을 '큰 소리로' 찬양했다는 것은 그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으니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하느님께 경배 드리는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하느님과 같으신 분, 또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믿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라는 말씀은, 몸의 건강을 되찾은 것에만 만족하고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 그들이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물론 그들도 병이 나은 것을 감사드리면서 하느님을 찬양했겠지만, 하느님께 진정한 영광을 드리게 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음으로써 메시아만이 주실 수 있는 구원을 받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지금 나의 믿음은, 몸의 건강만(현세적인 복만) 바라는 믿음인가? 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믿음인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몸이 아플 때 안 아프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건강을 되찾은 다음에는?
연중32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17,11-1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5~16)
여기서 '병이 나은'에 해당하는 '이아테'(iathe; he was healed)의 원형 '이아오마이'(iaomai)는 '치료하다', '회복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4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이아오마이'(iaomai)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행한 치유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는데, 특히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이루어질 치유의 역사를 보여 주는 단어로서, 구약 예언의 성취를 보여 주는 동사이다(이사35,3~6; 61,1). 이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든 치유의 본질이 기적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세 있는 말씀으로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여신 치유자 예수님께 있음을 암시한다.
열사람의 나병 환자들은 눈으로 아무런 증거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믿음으로 순종하며 사제들에게 검증받기 위해(레위14,2) 가던 도중에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루카 복음 17장 15절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에게 나타난 변화를 보았다고 말한다.
루카 복음사가는 단순히 가시적으로 나타난 치유 기적을 이 한 사람만이 경험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의 나병 환자만이 자신의 치유자가 바로 예수님임을 깨닫고 감사하려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 사람의 나병 환자가 자신에게 일어난 치유 기적의 배후에 하느님께서 계셨고, 그분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깨달았기에,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을 하며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 돌아왔던 것이다.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다. 사마리아인은 B.C.722년 북부 이스라엘의 아시리아에 의해 함락된 이후에 그들과 혼혈이 되어 혈통의 순수함이 변질되고, 아시리아의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야훼 유일신 신앙마저 변질시켜 혼합 종교를 섬기던 장본인이었다. 그래서 혈통의 순수함과 야훼 유일힌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들과 같이 여겨져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꼐 은혜를 입고 돌아와 무한 감사를 표시한 반면에, 선민으로서 다른 민족에 비해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을 더 많이 받았던 유대인으로 여겨지는 나머지 아홉은 오히려 자신의 몸이 깨끗해진 사실에만 기뻐할 뿐, 최소한의 어떤 감사도 표시하지 않았다.
루카 복음사가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에 더 합당한 삶을 산다는 모습을 통해서, 선민이라는 특권 의식과 이름만을 소중히 여기며 교만하게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엎드려'에 해당하는 '에페센 에피 프로소폰'(episen epi prosopon;he threw himself; he fell down his face)은 직역하면 '그는 얼굴을 떨어뜨렸다'이다.
어떤 사람의 발 앞에 자신의 얼굴을 떨어뜨려 땅에 대는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극도의 존경과 경배의 표시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을 치유한 예수님께 최고의 존경을 드렸던 것이다. 그리고 '감사를 드렸다'로 번역한 '유카리스톤'(euchariston; thanked; gave thanks)의 원형 '유카리스테오'(eucharisteo)는 성경에서 주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에 대한 감사와 성찬례 축복 기도를 가리키는 용례로 쓰였다.
예수님께 대한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 행위에 이 용어가 쓰인 것은, 그가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치유에 대해 하느님께 돌리는 것과 같은 감사의 표현을 했음을 나타낸다. 다시말해서, 그는 자신의 치유를 통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인식하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예수님께 감사를 표시한 것이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루카 17,17-18)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감사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당연한 것인 양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감사할 줄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닐까요?
조금만 불편하거나 방해를 받아도 화를 내고 불쾌해 하면서도
정말 감사할 일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오늘 예수님께로부터
치유받은 열명의 나환자 중에 감사드린 사람은 하나밖에 없고
아홉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고 하지요.
아마도 우리 중에 열 중 하나만
제대로 감사하며 산다고 보면 될 듯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감사하면서 사세요?
오늘은 내가 감사해야 할 것 열 가지를 한번 생각하고 나눠보세요.
그리고 '감사합니다'를 백 번만 되네어 봅시다.
참으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참으로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