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1주간 화요일]초대받은 이 (루카14,15-24)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신자들은 서로서로 지체가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서로 다른 은사를 모두를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로마 12,5-16ㄴ)
형제 여러분, 5 우리는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6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 7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8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9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10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11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12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13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14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15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16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시편 131(130),1.2.3
◎ 주님, 제 영혼을 당신의 평화로 지켜 주소서.
○ 주님, 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나이다. 제 눈은 높지도 않사옵니다. 감히 거창한 것을 따르지도, 분에 넘치는 것을 찾지도 않나이다.
○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다독이고 달랬나이다. 제 영혼은 마치 젖 뗀 아기, 어미 품에 안긴 아기 같사옵니다.
○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잔치에 비유하신다. 초대받은 이들이 불응하자, 주인은 다른 이들을 잔치에 데려오게 한다. 하느님 나라도 이와 마찬가지다. 초대받은 이들이 거절하므로 초대받지 않은 이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들어가게 된다.(루카14,15-24)
그때에 15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17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18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19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20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22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23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제1독서 (로마12,5-16ㄴ)
"형제 여러분, 우리는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5)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6)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7)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8)
로마서 12장 5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몸인 교회 안에서 서로 간에 각각 지체로서의 역할을 해야 함을 알게 한다. 여기서 '지체'로 번역된 '멜레'(melle; members)는 복수형인데, 여러 기능을 가진 각기 다른 몸의 여러 지체들을 나타낸다(마태5,29; 에페4,25; 로마6,13.19; 12,4.12.18; 1코린6,15; 12,12.18.20.22.25.26.27).
사도 바오로가 여기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가 실제와 기능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교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성령께로부터 받아서 봉사하는 은사는 교회 전체와의 '코이노니아'(koinonia)관계, 즉 친교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그분과의 관계 의식과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체가 된 성도들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체들인 성도들의 주인이시다(1코린12,27; 콜로1,18; 에페1,22.23).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언제든지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그분의 명령 아래 두지 않으면 안된다(갈라2,20). 누구든지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한다면, 자신의 중심에 그분이 계셔야 한다(마태16,24).
또한 우리는 함께 지체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에 대한 책임도 가지고 있기에 언제든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몸의 한 부분이 이상이 생기거나 병에 걸리면, 그것은 몸 전체에 영향을 주어 다른 지체들도 그 고통을 공유하게 마련이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체는 서로 유기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생각을 버리고 각자가 자기 몫을 다해야 한다.
'나'라는 존재가 분명히 하나의 독립된 개체이기는 하지만, 교회라는 거룩한 공동체 속의 개체이며, 교회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2장 5절에서 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임을 밝혔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각 지체라는 것은 즉 그 기능과 역할이 서로 다르다는 뜻이 된다.
사도 바오로는 이제 로마서 12장 6-8절에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언급하며, 동시에 각 지체에게 부여된 다양한 은사들을 소개한다.
로마서 12장 6절의 '저마다 ~서로 다른'으로 번역된 '디아포라'(diapora)는 '다양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디아페로'(diapero)에서 나온 형용사로서 '다른','여러 가지의'등을 의미한다. 이 형용사는 우리 성도가 하느님께로부터 은혜로 받은 은사의 다양성을 나타낸다.
이 은사들은 각자의 열심에 따라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리고 모든 은사가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고 또한 공동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도록 주어진 것이기에 아무도 그 은사를 가지고 교만이나 허영, 특권 의식을 가질 수가 없다. '은사'라고 번역된 '카리스마'(charisma)의 뜻은 '거저 받은 선물', '부여된 은총', '특은'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단어를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각 그리스도인들 안에서,한 은혜가 다양하게 드러나는 것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 단어는 점차 교회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봉사와 섬김을 위한 특별하고도 영적인 의미가 부여된 말로 발전되었다.
로마서 12장 6절에 나오는 '은사'라고 번역된 '카리스마타'(charismata; charisma의 복수; gifts)는 우리 개인의 취향이나 선호도, 기대치 같은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으며(1코린12,11), 그것을 주시는 하느님의 의지만이 작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은사'는 성령께서 구원이 보장된 성도들에게 임의로 나누어 주시는 영적 선물인 것이다.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6) '예언'으로 번역된 '프로페테이안'(propeteian)의 원형 '프로페테이아'(propeteia)는 주로 신약에서 '예언 활동', '예언의 말씀' 등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으나 여기서는 '예언하는 은사'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예언하는 은사'란 성령이 감도하심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을 말하는데, 사도 바오로는 이 은사를 가진 이들에게 '믿음에 맞게' 예언하라고 권한다. '믿음에 맞게'라고 번역된 '카타 텐 아날로기안 테스 페르테오스'(kata ten anallogian tes pisteos; according to the proportion of faith)에서 '맞게', '분수'로 번역된 '아날로기안'(anallogian; proportion)는 '유사한', '닮은' 등을 뜻하는 '아날로고스'(anallogos)에서 나온 단어이다.
신약에서는 여기에서만 나오는데, 보통 '바른 관계', '균형', '조화', '어울림'등을 뜻하며, 때로는 수학적 의미로 사용되어 완전히 하나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 '예언'이란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특별히 부여한 은사를 가리킨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각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정도는 믿음의 성장에 준하기 때문에, 각 사람의 믿음의 성숙도 만큼만 보여 주시고 깨달아 알게 하시므로, 알지도 못하는 것을 말하려 하거나 받지도 않은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예언을 한다는 명목하에 과장을 한다거나 부풀리는 것, 그리고 각색하는 것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 하느님을 기만하고 거짓말 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7) 여기서 '봉사면'으로 번역된 '디아코니안'(diakonian)의 원형 '디아코니아'(diakonia; ministry,serving)는 '섬기는 일', '준비하는 일', '구조', '원조', '기증', '부제직'을 뜻한다.
신약에서는 사도행전과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① 식탁에서의 봉사(루카10,40; 사도6,1), ② 사랑의 봉사(1코린16,15), ③ 헌금 모금을 통한 봉사(사도11,29; 2코린8,4; 9,1.22), ④ 말씀의 선포와 전교(사도20,24; 2티모4,11), ⑤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의 모든 봉사(에페4,12),⑥ 천사의 봉사(히브1,14), ⑦ 사도로서의 직무(로마11,13; 사도1,17) 등이다.
이처럼 이 단어는 다양한 용례로 사용되었지만, 초대 교회에서는 부제 직분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여러 은사들을 열거하면서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는 섬기는 일을 비교적 상위에 둔 것은 의미있는 일로 보인다. 이러한 섬김의 직책이나 섬김의 모범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6장 1-6절, 요한복음 13장 1-17절, 마르코 복음 10장 43-45절을 참조하면 된다.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7) '가르치는 사람'에 해당하는 '호 디다스콘'(ho didaskon)을 뉘앙스를 살려 다시 번역하면 '계속해서 가르치는 자'이다. 즉 이것은 '가르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디다스코'(didasko)에 관사를 가진 현재분사이며, 희랍어에서 현재 분사형은 계속의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이 단어는 교회 안에서의 '교사' 즉 '디다스칼로스'(didaskallos)의 직책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교사의 직무는 신앙의 원리들을 잘 해설해 주는 것이며, 세상 속에서 영적 전투를 제대로 수행하도록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것이다(사도13,1; 2티모4,1-5; 1티모5,17참조).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8) '권면하는 사람'에 해당하는 '호 파라칼론'(ho parakallon)을 뉘앙스를 살려 다시 번역하면 '계속해서 권면하는 자', '계속해서 격려하는 자'가 된다. 이것은 '곁으로 부르다', '소환하다', '호소하다', '권면하다', '위로하다' 등의 뜻을 가진 '파라칼레오'(parakalleo)에 관사를 가진 현재분사이다.
이것은 신앙이 약한 자를 격려하여 힘을 북돋워주는 은사이다.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은 격려하거나 위로하는 자로서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하며, 입법자나 재판관이 되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한다.
권면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상대방을 단죄하여 두려움에 떨게 하거나 낙담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은사를 잘못 쓰는 것이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 상처가 많은 사람들,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 목표가 없는 사람들, 허무한 것에 굴복한 사람들, 기쁨이나 평화를 알지 못하거나 잃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일을 잘 수행하려면 먼저 그리스도의 마음과 관용을 가져야 한다.
'나누어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8) '나누어주는 사람'으로 번역된 는 '호 메타디두스'(ho metadidus) '한 부분을 주다', '나눠가지다'라는 뜻을 가진 '메타디도미'(metadidomi)에 관사를 가진 현재분사이다.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 번역하면, '계속해서 한 부분을 주는 자'인데, '구제하는 자'라는 뜻이다.
'구제'란 자신이 가진 것 중에 한 부분을 주는 것,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이것이 필요한 사람들과 조건없이 나누어 가지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이 은사를 가진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순수함'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순수한 마음으로'라고 번역된 '하플로테티'(haplloteti)의 원형 '하플로테스'(hapllotes)는 일반적으로 순진, 순박, 고결, 순수성, 일편단심, 관용, 관대함 등의 의미를 지닌다.
신약에서 통상 '순수성', '일편단심'의 의미로 사용되지만(2코린11,3; 에페6,5; 콜로3,22), 여기서와 코린토 후서 8장 2절, 9장 11절, 13절에서는 '관용'이나 '관대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나누어주는 사람', '구제하는 사람'이 개인적인 명예나 이익을 추구하거나 아까워하는 마음, 인색한 마음에 이끌린다면, 그것은 본질에서 벗어난 잘못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이것을 잘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 주었다(사도2,44.45; 4,32.34.35).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8) '지도하는 사람'으로 번역된 '호 프로이스타메노스'(ho proistamenos)는 '~앞에'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프로'(pro)와 '서다'(마태2,9), '세우다'(마태4,5)라는 뜻이 있는 동사 '히스테미'(histemi)의 합성어로서 '앞장서다', '지향하다'등을 뜻하는 '프로이스테미'(proistemi)의 현재 분사 중간태에 관사가 붙은 형태이다.
신약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서간들에게서만 나오는데, 다른 사람들을 바르게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할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열성', '열심', '진실', '부지런함', '열정'으로 번역되는 '스푸데'(spude)라고 말한다. 이 단어는 단순히 행동으로 나타나는 부지런함만을 가리키지 않고, 그 마음이 진실되며 열정적이라는 의미까지 포함된다. 누구든지 인생과 신앙의 안내자가 되어 다스리거나 다른 이들의 길을 안내하도록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열심이 있어야 하고, 진실해야 하며, 부지런해야 한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8) '자비를 베푸는 사람'으로 번역된 '호 엘레온'(ho eleon)은 '불쌍히 여기다','자비를 베풀다'라는 뜻을 가진 '엘레에오'(elleeo)에 관사를 가진 현재분사이며, '계속해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엘레에오'는 '동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랑에 가득한 온유함이라는 의미이다.
사도 바오로는 특별히 이러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즐거움으로'으로 번역된 '힐라로테티'(hillaroteti)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거나 자비를 베풀고자 할 때에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뽐내거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하는 자발적 태도여야 하며, 친절을 베풀 때에도 즐겁고 기꺼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또한 상대방이 모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뜻도 있으며,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자비로우심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하느님께서 주신 각자만의 고유한 은사가 있음을 명심하고, 이것을 발견하여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힘써야 하며, 자기 자신의 명예나 이익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
<오늘의 묵상>
“하느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겉으로는 부러워하면서도, 그 초대에 응답하려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할 경우가 생기기에, 머뭇거리면서 핑계를 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약점이겠지요.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하고 초대를 거절하는 첫째 사람의 경우는 사업을 비롯한 세상일에 골몰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하고 거절하는 다른 사람의 경우는 컴퓨터와 스마트폰 등 새로운 것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 아닐까요.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면서 거절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가정을 꾸리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소중한 일 가운데 하나이지만, 이것이 하느님의 초대에 방해가 된다면 과감하게 뿌리쳐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하느님 나라의 잔치보다는 다른 무엇을 앞세우기에 우리의 부러움은 그저 희망 사항에 가까운 사치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하고 명합니다. 팔레스티나에서 의인으로 자처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막상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시자,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을 거부하였지만, 세리와 죄인들과 소외된 이들은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남자, 주인은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하고 다시 명합니다. ‘큰길과 울타리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들이 참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행복을 위해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초대에 응할 수 있으신가요? 아니면, 내가 가진 밭과 소가 나의 발목을 붙잡고 나를 뒷걸음질하게 만들지는 않는지요?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14,15-24)
그때에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분께,"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15)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 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차게 하여라.' (23)
루카 복음 14장 15-24절에는 하느님 나라의 초대를 받은 사람의 자격에 대한 교훈이 주어진다. 이러한 교훈이 주어지게 된 계기는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어떤 한 사람이 예수님의 교훈을 듣고 있다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된 사람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지금 하느님의 나라에서 먹게 될 사람의 행복을 찬양한 이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당시의 유대주의적 관념을 자신의 말 속에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주의적 선민 의식 가운데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메시야가 출현하여 유대인 중심으로 건설된 왕국으로 이해하였고, 또한 하느님의 나라가 건설되면 죽었던 의인들이 부활하여 그 나라에서 영광과 축복을 누리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지금 이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은 희망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 가서 그 영광을 누릴 것이라는 자신감 속에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에 대한 이 유대인의 왜곡된 가치관을 무너뜨리시며,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신다.
루카 복음 14장 15절 이후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대답은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그릇된 확신과 교만한 마음을 가진 유대인은 하느님 나라의 그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 영광의 자리가 채워지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큰 길과 울타리 쪽으로' 여기서 '길'에 해당하는 '호두스'(hodus; highways; roads)는 성 안에 있는 골목이나 거리라기보다는 성밖에 멀리 뻗어 있는 도로를 가리키며, '울타리'에 해당하는 '프라그무스'(phragmus; hedges; country lanes)는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를 가리킨다.
따라서 루카 복음 14장 21절의 '고을의 한 길과 골목'에서 '성밖'으로 그 주인의 초청 범위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구원의 대상이 유대인들에게서 온 이방인에게로 확대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21절의 '한길과 골목'이 유대 지역을 가리킨다면, 23절의 '큰 길과 울타리'는 온 이방인들의 땅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루카 복음 14장 21절과 마찬가지로 '나가'에 해당하는 '엑셀테'(ekselthe; go out)라는 명령이 주어지며, 이어서 '어떻게 해서라도 들어오게 하여'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이 중에 두번째 명령에서는 '강제하다'는 뜻의 '아낭카조'(anangkazo; compel them) 동사가 사용되었고, 여기에 '들어오다'는 뜻의 '에이세르코마이'(eiserchomai)의 부정사인 '에이셀테인'(eeiselthein; to come in)이 추가되었다.
둘다 '강제로 권하여 데려오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아낭카조'(anangkazo) 동사는 강제성의 정도가 더욱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강조해 주는 표현이다. 여기서 쓰인 '아낭카조' 동사는 폭력을 동원한 강제가 아니라, 설득이나 간청을 통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필연성'의 의미를 내포한다.
<남의 잔치가 아니라 나의 잔치> 송영진 모세 신부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루카 14,16)."
'어떤 사람'은 하느님이고, '큰 잔치'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입니다. '초대'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인데,예수님의 복음 선포가 바로 그 '초대'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우리가 그 초대에 응해야 하는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잔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간은 언제일까? 인류 전체로 보면 종말의 날이 그때이고, 각 개인으로 보면 죽어서 하느님 앞으로 가는 때가 그때입니다.
지금 루카복음에서는 '큰 잔치' 라고만 표현되어 있을 뿐이고 어떤 잔치인지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오복음에서는 '혼인 잔치'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22,2)."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예수님의 혼인 잔치입니다.
1) 그 혼인 잔치에서
신랑은 예수님이고, 신부는 우리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2코린 11,2)."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라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신앙생활은 약혼 기간이고, 혼인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하게 됩니다.
복음서의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는 손님을 초대한 것으로, 즉 우리가 손님으로서 잔치에 참석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예수님이 신랑이고 우리가 신부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그 잔치의 손님이 아니라,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잔치의 주인입니다. (손님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그냥 표현일 뿐이고,진짜로 우리가 손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고 주인공입니다. 남의 잔치가 아니라 나의 잔치입니다. 그러니 잔치에 참석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비유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잔치 참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잔치가 자기들이 주인공이 되는 잔치이고, 자기들을 위한 잔치라는 것을 모르거나 안 믿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몰라서 그런 것이 무슨 죄냐고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을 모르고 있는 것도, 또 알려고 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2)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위해서 베푼 잔치'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루카 15,23-24). 그
잔치의 주인공은 작은아들입니다. 주인공으로서 작은아들이 그 잔치에 참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작은아들 자신은 그런 잔치를
예상하지 못했고, 그저 아버지가 자기를 아들로 받아주기만을 희망했을 텐데, 아버지는 그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은총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그 비유에서
큰아들은? 큰아들은 아버지의 상속자이고 작은아들의 형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잔치의 주인입니다. 그러니 큰아들도 당연히 그
잔치에 참석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큰아들을 타이르는 말은, "너도 나와 함께 잔치의 주인이다." 라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루카
15,31-32).
그런데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의 태도를 보면, 그는 그 잔치를 '남의 잔치'라고만 생각하고
있습니다(루카 15,30).
3) 혼인 잔치이든지 회개한 아들을 위한 잔치이든지 간에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우리를 위한, 우리의 잔치이고, 우리 자신의 기쁨과 행복의 잔치입니다. 그래서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기쁨과 행복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비유 속에서 잔치 참석을 거부한 사람들은 세속의 하찮은 즐거움 때문에 참 기쁨과 참 행복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영원한 것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기쁨과 행복을 버리면, 남는 것은 슬픔과 불행뿐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 상태는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안'이 아니면 '밖'입니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즉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신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하느님의 집을 남의 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이고, 내가 들어가서 살아야 할 집입니다.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루카 14,22)
제4회 성심인애축제가 많은 분들의 관심과 도움으로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잘 끝났습니다.
함께 마음모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멋지게 준비된 프로그램에
자리가 차지않고 많이 비게 될 때
참으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더군요.
오늘 복음을 대하면서
하느님의 마음도 그러하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늘나라의 잔치에 초대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여러가지 이유와 핑게로 오지 않았습니다.
빈 자리가 너무 많아
이 좋은 자리에 이런저런 사람 더 불러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러왔지만 그래도 빈자리가 많았으니...
하느님은 진노하신 게 아니라 안타까워 하신 것이겠지요.
네, 하느님께서는
자주 우리에게 초대장을 보내십니다.
그냥 무료초대권입니다.
무료초대권이지만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여러분이 너무 귀하기 때문에 발급되는 무료쿠폰입니다.
아무에게나 발급되는 싸구려 초대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초대를 무시하면
그 귀한 초대권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그 초대에 응한 사람은
상상치도 못하는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도 그분은 여러분을 초대하십니다.
그 초대에 적극 응하십시오. 아니 제발 응하십시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이것저것 재보고 따지고 핑게대면서
다시 못올 큰 축복을 발로 차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오늘 그 축복을 누리는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