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간 토요일] 기도 (루카 18,1-8)

지혜서 10ㅡ19장은 이스라엘의 역사, 특히 이집트 탈출에 대해 숙고한다. 이집트에서부터 이스라엘을 인도한 것은 하느님의 전능한 말씀이었다. 만나와 메추라기, 바위에서 나온 물 등 이집트 탈출 과정의 여러 사건은 그분의 말씀에 따라 피조물들이 이스라엘을 보호하였음을 보여 준다.(지혜 18,14-16; 19,6-9)
14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15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땅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 16 그는 당신의 단호한 명령을 날카로운 칼처럼 차고 우뚝 서서, 만물을 죽음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가 땅 위에 서니 하늘까지 닿았습니다. 19,6 당신의 명령에 따라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당신의 자녀들이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7 진영 위는 구름이 덮어 주고,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땅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으며,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8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 9 그들은 풀을 뜯는 말들 같았습니다. 또 어린양들처럼 이리저리 뛰면서, 주님, 자기들을 구해 내신 당신을 찬양하였습니다.

시편 105(104),2-3.36-37.42-43(◎ 5ㄱ 참조)
◎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 그분께 노래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그 모든 기적 이야기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
○ 그분은 그 땅의 모든 맏아들을, 모든 정력의 첫 소생을 치셨네. 이스라엘이 은과 금을 들고 나오게 하셨네. 그 지파들에는 낙오자가 없었네. ◎
○ 당신 종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거룩한 말씀 기억하셨네. 당신 백성을 기쁨 속에, 뽑힌 이들을 환호 속에 이끌어 내셨네. ◎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들어 기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올바른 판단을 내려 주실 것이니, 끊임없이 기도하여 믿음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루카 18,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하느님도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이라도 끈질기게 찾아오는 과부 때문에 결국 재판을 해 주고야 만다는 비유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느님께 꾸준히 기도해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볼 때, 이 기도는 종말에 대비하여 믿음을 잃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기에, 그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였지만, 힘도 돈도 없는 과부가 오로지 재판관이 서둘러 판결을 내려 주기를 간절히 바라듯이,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아버지의 나라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지도 않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기도하지도 않겠지요. 이렇게 믿음이 점점 더 사라지고 나면,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세상에서 주님에 대한 믿음은커녕 관심마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내가 곧 간다.”(묵시 22,20)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우리는 참으로 기다리고 있습니까? 정말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까?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기도는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진실성은 어렵고 우아한 어휘로 바치는 기도의 기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쉽고 단순한 말을 되풀이해서 기도하는 ‘끈질긴 노력’에 있음을 오늘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말씀으로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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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지혜18,14-16; 19,6-9)
지혜서 16-19장에서 저자는 이집트 탈출 사건과 광야에서의 시련을 두서없이 열거한다.
오늘 독서에서는 240 만명이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이렇게 묘사한다."진영 위는 구름이 덮어 주고,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 땅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으며,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19,7-8)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수 있게 해 주신 기적적인 현상들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자애로운 돌보심을 받는 선택된 민족으로서의 자각을 가져야 하고, 이런 구원의 체험을 통해,이스라엘은 지금부터 미구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놀라운 새 세상을 준비해야 한다.
지혜서의 마지막 절은 당신 백성에 대한 주님의 한없는 자애를 기리는 찬송으로 되어 있다. "주님, 당신께서는 모든 일에서 당신 백성을 들어 높이시고,영광스럽게 해 주셨으며, 언제 어디에서나 그들을 도와주시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19,22) 이 찬송에는 이스라엘의 과거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자애가 현재와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우리도 믿음의 여정에서, 항상 과거의 삶에 있어서,하느님의 놀라운 개입으로 나의 삶에 들어 오셔서 구원을 체험케 하신 사랑의 사건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나의 삶속에서 어려운 시련과 어둠과 고통의 현실이 계속될 때, 옛날의 자애로운 하느님의 사랑스런 개입의 사건이 또 다시 재현되라는 희망을 갖고, 기도하고 매달려야 한다.
<기도>송영진 모세 신부
어떤 고을에 불의한 재판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한동안 어떤 과부의 청을 들어주지 않다가 과부가 계속 졸라대니까 귀찮아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줍니다(루카
18,2-5).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하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6-8)"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이야기와 예수님의 말씀은,
루카복음 11장 5절-8절, '끊임없이 간청하여라.'와 비슷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5-8)."
이 두 이야기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려고 하시다가도
너희가
끈질기게 졸라대면 들어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너희는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청할 때에는 온갖 정성을 다
쏟으면서도
하느님께 기도할 때에는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
(또는, "세속의 일에 대해서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면서
영혼 구원을 받는 일은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하느냐?")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라 정의로운 재판관입니다.
또 하느님은 우리가 뭔가를 청할 때에 미적거리시는 분이 아니라 '지체 없이' 그 청을 들어주시는
분입니다(루카 18,8). 그러나 우리가 달라고 청하는
것을 무조건 다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하느님은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청한 것을 청한 그대로 주시는 분이 아니라,
청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고,
우리가 정한 때에
주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청하더라도 '나쁜
것'이라면 안 주실 것이고,
우리가 '좋은 것'을 청하더라도 그 시기가 '나쁜 때' 라면 나중에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할
때 우리가 겪는 어려움입니다. "지금 내가 청하는 것이
정말로 가장 좋은 것인가? 혹시 나쁜 것은 아닌가?"
우리는 거의 항상 '내가' 생각하기에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청하는데,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는 것 자체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이 아닐 수도 있고, 또 우리는 그것을 잘 모른다는 것, 그게 바로 기도의 어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바치신 기도가 좋은 모범이 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예수님의 뜻'은(예수님께서 바라신 것은) '고난의 잔'이 거두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들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께서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버리고 기꺼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난의 잔'이 거두어지기를 청하시면서도
'아버지께서 원하시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원하신
것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었고, 고난의 잔이 거두어지는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가장 좋은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 '때'가 정말로 가장 좋은 때인가?"
우리는 거의 대부분 자신이 기도하고 있는 '지금'
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는 '지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분명히 아브라함은
자기가 아직 젊고 건강할 때 아들을 얻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가 아주 많이 늙어서 아들을 포기하고 있을
때 그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창세 17,16-19). "이렇게 하느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신다면,
우리가 왜 끈질기게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할 필요 없이, 주시는 대로 받기만 하면 그만
아닌가?")
기도는, 안 주시려고 하는 하느님을 설득해서 주시도록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계시고(마태 6,8),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제 때에 주시는 분입니다(마태 6,33).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언제 주실지 잘 모르기 때문에 주실 때까지 낙심하지 말고 끈질기게, 최선을 다해서, 잘 받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뭔가를 달라고 청하는 '청원의 기도'도 사실은 잘 받기 위한 기도인데, 자기가 청하는 '바로 그것만', 또 그것을 '지금' 달라고 고집을 부리면 안 됩니다.)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18,1-8)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8)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는 말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믿음'은 지속적으로 항구하게 하느님께 간구하는 실천적인 믿음을 말한다. 앞의 불의한 재판관 비유에 등장하는 과부에게서 나타났던 것처럼, 이러한 곤경에 처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간구하는 믿음을 말한다.
그리고 '찾아볼 수 있겠느냐'에 해당하는 '아라 휴레세이'(ara heuresei; will he find)에서, '아라'(ara)는 부정적 대답이 기대되는 추론적 질문을 의미하고,'휴레세이'(heuresei)의 원형 '휴리스코'(heurisko)의 본래 뜻은 '만나다', '마주치다', '우연히 발견하다'이다.
따라서 '아라 휴레세이'(ara heuresei)에는 세상에서 밤낮으로 부르짖는 믿음을 발견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뜻이 들어있다.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올 때에 사람들의 마음은 완고하고 사악해져서, 하느님께서 당신이 간택한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조차도 거부하며, 그들의 마음에 의로움보다는 악(惡)이 가득차서 간구조차 하지 않을 것이 예언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하느님의 신실한 약속과 말씀을 의지하면서 믿음을 수호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고 반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루카 복음 17장에 나오는 노아와 롯의 시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그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에서 그것들을 신으로 생각하였다면, 그 주님께서는 얼마나 훌륭하신지 그들은 알아야 한다.> (지혜 13,3)
지금도 그런 곳이 있지만
옛적에는 사람들이 웅장한 자연이 보여주는 아름다움과 힘을
신으로 여기고 섬기곤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아름답고 감탄할만한 아름다운 것들이 많습니다.
옛적에는 사람들이 자연물들을 신으로 섬겼는데
이제 사람과 사람들이 만들어낸 위대한 건축물 등을 섬기는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외에 무엇을 섬기나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신으로 섬기지 않고 그것을 있게 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찬미하고
아름답고 멋진 사람을 보고
그에 흠뻑 빠지지 않고 그를 있게 하신 하느님을 찬송하고
멋지고 화려한 인간의 걸작품들을 보고
그러한 기술과 능력을 우리 인간에게 주신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이
참 신앙인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우상숭배자가 될 뿐입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섬기고 있는지 한번 돌아봅시다.
아름답고 멋지고 감탄할만한 무엇을 보게 되면 그것에 매료되기보다는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하십시오.
"Laudato si, o Sign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