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간 수요일] 미나의 비유 (루카 19,11ㄴ-28)

율법에 순종하려고 임금의 명을 거스른 일곱 아들이 모두 순교하는 장면에서, 어머니는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자기 아들들의 죽음을 견뎌 낸다. 어머니는 무로부터 만물을 만드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존재하게 하셨으니, 죽은 뒤에도 다시 살려 주실 것이라고 독려한다.(2마카 7,1.20-31)
그 무렵 1 어떤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채찍과 가죽끈으로 고초를 당하며,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임금에게서 받은 일이 있었다.
20 특별히 그 어머니는 오래 기억될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는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견디어 냈다. 21 그는 조상들의 언어로 아들 하나하나를 격려하였다. 고결한 정신으로 가득 찬 그는 여자다운 생각을 남자다운 용기로 북돋우며 그들에게 말하였다.
22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23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24 안티오코스는 자기가 무시당하였다고 생각하며, 그 여자의 말투가 자기를 비난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스러워하였다. 막내아들은 아직 살아 있었다. 임금은 그에게 조상들의 관습에서 돌아서기만 하면 부자로 만들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며 벗으로 삼고 관직까지 주겠다고 하면서, 말로 타이를 뿐만 아니라 약속하며 맹세까지 하였다.
25 그러나 그 젊은이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그 어머니를 가까이 불러 소년에게 충고하여 목숨을 구하게 하라고 강권하였다.
26 임금이 줄기차게 강권하자 어머니는 아들을 설득해 보겠다고 하였다. 27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에게 몸을 기울이고 그 잔인한 폭군을 비웃으며 조상들의 언어로 이렇게 말하였다.
“아들아, 나를 불쌍히 여겨 다오. 나는 아홉 달 동안 너를 배 속에 품고 다녔고 너에게 세 해 동안 젖을 먹였으며, 네가 이 나이에 이르도록 기르고 키우고 보살펴 왔다.
28 얘야, 너에게 당부한다.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보아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미 있는 것에서 그것들을 만들지 않으셨음을 깨달아라. 사람들이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
29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
30 어머니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젊은이가 말하였다. “당신들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오? 나는 임금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소. 모세를 통하여 우리 조상들에게 주어진 법에만 순종할 뿐이오. 31 히브리인들을 거슬러 온갖 불행을 꾸며 낸 당신은 결코 하느님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오.”

시편 17(16),1.5-6.8과 15(◎ 15ㄴ 참조)
◎ 주님, 저는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
○ 주님, 의로운 사연을 들어 주소서. 제 부르짖음을 귀여겨들으소서. 거짓 없는 입술로 드리는, 제 기도에 귀 기울이소서. ◎
○ 계명의 길 꿋꿋이 걷고, 당신의 길에서 제 발걸음 비틀거리지 않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
○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리이다. ◎

예수님께서는 종들에게 한 미나씩을 맡기고 떠난 귀족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비유는 예루살렘이 예수님을 거부할 것이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예루살렘이 파괴될 것임을 예고한다.(루카 19,11ㄴ-28)
그때에 11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13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14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15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16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7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18 그다음에 둘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들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주인은 그에게도 일렀다.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
20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21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22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3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24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5 ─ 그러자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 ─
2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27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28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마카베오기는 무로부터의 창조와 죽은 이들의 부활이라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을 다루는데, 이 두 가지 내용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마카베오 시대의 삶을 위한 믿음의 증언이었습니다. 오늘 독서의 어머니는, 일곱 아들의 순교라는 극한 상황에서 그 믿음을 고백합니다.
일곱 아들과 세 딸을 하루에 잃어버리고 나서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 1,21) 하고 고백한 욥이 떠오릅니다. 일곱 아들을 순교로 잃어버리는 어머니는 한 걸음 더 나아간 믿음을 고백합니다.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물론이고, 자기가 낳은 아들들까지도 하느님께서 무로부터 창조하셨음을 강조합니다.
비록 자기가 아들들을 낳고 길렀지만, 어머니가 아들들을 만든 것이 아니라, 전혀 없던 이들을 하느님께서 존재하게 하셨으니, 지금 그들이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은혜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모두 죽임을 당한다 해도, 어머니는 아들들을 잃는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아들들이 하느님의 법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면, 그들을 있게 하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을 다시 주실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없던 우리를 있게 하신 하느님이시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죽음도 그분의 것입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길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에게 미나를 맡겼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신뢰하시어 우리가 재량껏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면서 하루 24시간, 인생, 자유 의지라는 보화를 주셨습니다. 그분의 신임과 신뢰는 하나의 시험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주님께서 주신 이 보화를 잘 관리하고 있는지요?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제1독서 (2마카7,1.20-31)
"너희가 어떻게 내 배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준 것도 내가 아니다. (22)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 (29)
마카베오서 하권 7장은 어떤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를 전한다. 일곱 아들은 각기 임금 앞에 불려가 고문을 당하며 왜 자신이 고통을 달게 받는지 설명한다. 어머니는 두 시점에서 개입한다(2마카7,20-23; 26-29)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들들의 뒤를 이어 죽는다(2마카7,41).
어머니와 아들들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유다인의 정체성을 명확히 구분해 주는 실천 사항들, 곧 할례, 안식일 준수 그리고 음식에 관한 법 때문에 고문을 당하고 죽는다. 순교자들이 엄청난 고통 한가운데서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보존한 동기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다.
둘째 아들은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시키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2마카7,9)라고 말한다. 셋째 아들은 자기 혀를 내밀고 손을 내뻗으며 "이 지체들은 하늘에서 받았지만, 그분의 법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것들까지도 하찮게 여기오. 그러나 그분에게서 다시 받으리라고 희망하오."(2마카7,11)라고 말한다.
넷째 아들은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한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2마카7,14)라고 지적한다. 끝으로 어머니는 일곱째 아들에게 조언하며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꼐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2마카7,29)하고 말한다.
마카베오 하권 7장 30-38절에서 일곱째 아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화해하시기 전에 그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이 고난을 받게 하신다고 말한다(2마카7,33). 그는 순교자들의 고난으로 "온 민족에게 정당하게 내렸던 전능하신 분의 분노가 끝나기를" 간청한다고 말한다(2마카7,38). 이 말은 마카베오 하권 제4부(2마카10,10-15,39)에서 길게 전개되는 속죄 제물의 사고를 도입하는 것이다.
마카베오 하권의 설화 구조에서 고난을 통해 배우는 가르침과 순교자들의 죽음이 갖는 속죄의 가치로 인해 하느님께서 유다 마카베오 때 이스라엘을 쇄신하시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정화하실 수 있게 된다.
<미나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루카 19,12)."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승천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왕권을 받아 오려고'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왕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처음에 세상에 오실 때에는 '착한 목자'로 오셨지만, 재림하실 때에는 '심판관'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왕권 없이 세상에 오셨다가 왕권을 받으려고 승천하신 것은 아닙니다.)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짧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귀족'이라는 말에는 특별한 뜻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루카 19,13)." '종 열 사람'은 신앙인들을
뜻합니다. 그들에게 나누어 준 돈은 '은총'을 뜻합니다. ('한 미나'는 '백 데나리온'입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돈의 액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벌이를 하여라.' 라는 말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라는
지시입니다. '내가 올 때까지'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인데, 우리 입장에서는 '지상에서 사는 동안'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또는 재림과 심판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덕을 쌓을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루카 19,14)." '그 나라 백성'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뜻합니다.'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미움 받을 일을 하신 적이 없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유대교 율법을
안 지키면서 종교 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미워한 것이라고 변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변명일 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전통과 관습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느님의 뜻'을 거부했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또는 그리스도교가 너무 낯설다는 이유로, 또는 자기들의 문화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는 여러 가지 세속적인 이유로, 예수님과 그리스도교를 미워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정말로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미워하기도 합니다.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라는 말은, 식민지 백성들이 로마 황제에게 하는 말인데, 아무나 임금으로 임명하지 말고 자기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임금으로 임명해 달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 지금까지도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진짜 구세주가 아직 안 왔다고 믿기 때문에 지금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의 경우라면,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는 거부하고, 자기들의 비위나 맞춰 주는 거짓 메시아를 따르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의 돈벌이 결과를 알아보는 것은(루카 19,15-26) 재림하신 예수님께서 신앙인들의 신앙생활을 심판하시는 것을 나타내고, 주인이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사람들이 처형당하는 것은(루카 19,27) 예수님을 끝까지 안 믿고 거부한 사람들이 심판을 받고 멸망당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재림하신 예수님은 신앙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돈벌이를 하지 않아서 벌을
받게 되는(루카 19,24) 세 번째 종의 죄목은 '아무것도 안 한 죄'입니다.
그런데 그가 받는 벌이 처음에 받은 한 미나를
빼앗기는 것으로 그치기 때문에 아주 가벼운 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벌은 사실은 안 믿는 사람들과 함께 처형당하는
중벌입니다.
한 미나를 빼앗긴다는 것은 은총을 빼앗긴다는 뜻이고, 은총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은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은 상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것도 안 한 신앙인들'은 최후의 심판 때 '안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되는 그 벌을 똑같이 받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재림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1테살 4,16-17)"
주님의 재림 전에 죽은 사람들은 부활해서 주님을 맞이할 것이고, 재림 때까지 안 죽은 사람들은 살아 있는 채로 주님을 맞이하게 될 텐데,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고, 아무것도 안 한 사람들은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라는 말은,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을 받게 될 사람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흔히 "죽어야만 부활한다." 라는 말을 하는데, 실제로는 우리가 반드시 죽어야만 부활과 영생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겪지 않고,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죽음을 각오해야 할 때도 많고, 죽는 것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겪을 때도 많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실제로 죽는 것이 아니더라도 "죽어야만 부활한다." 라는 말이 진리가 됩니다.)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19,11ㄴ-28)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가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11ㄴ~13)
사실 루카 복음 19장 11절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비유 하나를 말씀하신 것으로 나온다. 당시 예수님의 일행은 예루살렘 입성을 바로 앞두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제자들 및 청중들이 예수님과 자캐오와의 대화를 듣고 있는 현장에서 미나의 비유가 주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가정에 구원을 선포하시면서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루카19,10),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 및 청중들이 이제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자신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로서, 자신들에게 현세적 부귀영화와 로마로부터 정치적 해방과 자유를 찾아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아 주시려고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비유는 마태오 복음 25장 14~30절의 탈렌트의 비유와 비슷하다.
그러나 화폐의 단위 사용, 등장 인물의 숫자의 차이가 있고, 루카 복음사가만이 사람들이 귀족이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보고를 첨가하고 있으며, 또한 비유가 주어진 시기가 마태오 복음은 예루살렘 입성 후이지만, 루카 복음은 입성 직전이라는 것이 두드러진 차이이다.
또한 탈렌트의 비유가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소명과 은사에는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에 대해 충성을 다하면 동일한 상급인 구원이 주어질 것임을 강조한 반면에, 미나의 비유는 최종적으로 실현된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기회를 선용한다면, 그 선용한 결과에 따라 상급도 차등있게 주어질 것이라는 가르침을 준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비유는 예수님께서 각기 다른 시기에 주신 다른 비유인 것이다.
이 비유에서 '귀족'에 해당하는 '안트로포스 유게네스'(anthropos eugenes; a men of noble birth)에서 '유게네스'(eugenes)는 '좋은'(good)을 의미하는 접두어 '유'(eu)와 '출생', '태생'을 의미하는 명사 '게노스'(genos)의 합성어로서 '태생이 좋은'(well-born), '고귀한 혈통'(of noble raw)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어떤 특정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예수님 자신을 상징하는 가상 인물이다. 귀족이 먼 고장으로 떠나가 왕권을 받아 올 때까지는 아직 임금이 아니다. 여기서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느님께 가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음, 즉 그의 부재(不在)를 의미한다. 귀족이 가는 목적은 왕권을 받아 다시 오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오려고'에 해당하는 '휘포스트렙사이'(hypostrepsai; to return)는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다'는 의미를 지닌 '휘포스트레포'(hypostrepho)의 부정사로서, 영광과 존귀와 위엄의 본래 지위를 받아 가지고 다시 되돌아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난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이 용어는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서 재림하실 것을 암시하는 것이며, 다시 오실 때에는 심판관과 통치자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오실 것이다(마태24,30).
한편 루카 복음 19장 13절의 '종'에 해당하는 '둘로스'(dulos; servant)는 '둘루스 헤아우투'(dulus heautu; his servants)에서 나온 말로서, 귀족이 부른 종들이 자기 휘하에서 자신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종들임을 나타낸다. 원래 '둘로스'(dulos)는 아무런 결정권이 없는 '노예'를 가리키며, 여기서 '자기자신의'(heautu; his)가 첨부된 것은 오직 주인만을 위해서 살아야 됨을 보여 준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또는 모든 하느님 나라의 백성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그리스도의 종들로서 복음과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의 탈렌트의 비유에서 주인이 재능에 따라 차등을 두어 종들에게 탈렌트를 분배한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귀족이 열 종들에게 각각 한 미나씩 균등하게 배분해 주었다.
또한, 두 복음서에서 각각 다른 화폐 단위를 사용하고 있다. '탈렌트'는 '미나'(mina)의 화폐 단위보다 더 높다. '탈렌트'는 6,000 데나리온의 가치이고, '미나'는 100데나리온의 가치이므로, '미나'는 '탈렌트'의 60분의 1정도이다.
여기서 귀족은 종들에게 그것을 주면서 '벌이를 하여라'고 말한다. '벌이를 하여라'에 해당하는 '프라그마튜사스테'(pragmateusasthe; occupy; put the money to work)의 원형 '프라그마튜오마이'(pragmateuomai)는 '사업하다'라는 뜻으로서 상업적 거래를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단어이다. 귀족은 한 미나를 종들에게 주며, 먼 고장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 그때까지 이 돈을 활용해서 사업을 하여 이윤을 남기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장사, 사업이란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서 귀족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 암시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상당한 시간이 있을 것에 대한 암시로 이해한다.
마태오 복음의 '탈렌트의 비유'는 차등있게 탈렌트가 주어진 것을 통해 사람에 따라 소명과 은사의 차이가 있음을 나타낸 반면에, 루카 복음의 '미나의 비유'는 동일하게 한 미나씩을 줌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백성들에게 동일한 기회를 주신 것을 나타낸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백성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그 재능과 시간을 잘 활용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이윤을 최대한도로 남기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루카 19,15)
여러분 올해 경제사정이 좀 나아졌습니까?
작년보다 좀더 부자가 되었나요?
아니면 더 가난하게 되었나요?
좀더 사정이 나아졌기를 희망해 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좌절하지도 마십시오.
올해 좀 많이 벌었다 해도 내년은 돈 쓸 일이 더 많이 생길 수 있고
올해 좀 못해도 내년에는 좀더 나아지겠지요?
전례력으로 한해를 마무리해 가고 있는 요즘
우리의 신앙생활의 경제에 대해 생각해 보라시네요.
어떠세요?
작년보다 더 멋진 하느님의 아들딸로 사셨나요?
기도생활과 이웃을 위한 삶에 더 큰 진보가 있었나요?
별로 그렇지 못하다구요?
저런 그게 경제사정이 더 나빠진 것보다 더 큰 문제라고 하시네요.
얼마남지 않은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세상재물의 득실보다 영적재물의 득실을 더 따져 보도록 합시다.
아직 별 성과가 없다면
남은 기간이라도 최선을 다해 영적성장을 도모해 봅시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으로 한해를 잘 살았다고 주님께서 칭찬하실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좀더 힘을 냅시다.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구요. 알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