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간 금요일] 성전 정화 (루카 19,45-48)

마타티아스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형제들은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 때에 이방인들이 모독했던 성전을 되찾아 다시 하느님께 봉헌한다. 기원전 164년 12월, 키슬레우 달 25일의 일이다. 이스라엘은 해마다 그 날짜에 여드레 동안 제단 봉헌 축일을 지내기로 결정한다.(1마카 4,36-37.52-59)
그 무렵 36 유다와 그 형제들은 “이제 우리 적을 무찔렀으니 올라가서 성소를 정화하고 봉헌합시다.” 하고 말하였다. 37 그래서 온 군대가 모여 시온 산으로 올라갔다.
52 그들은 백사십팔년 아홉째 달, 곧 키슬레우 달 스무닷샛날 아침 일찍 일어나, 53 새로 만든 번제 제단 위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쳤다.
54 이민족들이 제단을 더럽혔던 바로 그때 그날, 그들은 노래를 하고 수금과 비파와 자바라를 연주하며 그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이다.
55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들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늘을 찬양하였다. 56 그들은 여드레 동안 제단 봉헌을 경축하였는데, 기쁜 마음으로 번제물을 바치고 친교 제물과 감사 제물을 드렸다. 57 또 성전 앞면을 금관과 방패로 장식하고 대문을 새로 만들었으며, 방에도 모두 문을 달았다.
58 백성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민족들이 남긴 치욕의 흔적이 사라졌다.
59 유다와 그의 형제들과 이스라엘 온 회중은 해마다 그때가 돌아오면, 키슬레우 달 스무닷샛날부터 여드레 동안 제단 봉헌 축일로 기쁘고 즐겁게 지내기로 결정하였다.

1역대 29,10ㄴㄷ.11ㄱㄴㄷ.11ㄹ-12ㄱ.12ㄴㄷㄹㅁ(◎ 13ㄴ)
◎ 주님, 당신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 주님, 저희 조상 이스라엘의 하느님, 영원에서 영원까지 찬미받으소서. ◎
○ 주님, 위대함과 권능과 영화가, 영예와 위엄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
○ 주님, 나라도 당신의 것이옵니다. 당신은 온 세상의 으뜸, 그 위에 드높이 계시나이다. 부귀와 영광이 당신에게서 나오나이다. ◎
○ 당신은 만물을 다스리시나이다. 권능과 권세가 당신께 있으니, 당신 손을 통하여 모든 이가 힘과 영예를 얻나이다. ◎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신다.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9,45-48)
그때에 45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47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48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제1독서 (1마카4,36-37.52-59)
유다와 그 형제들은 "이제 우리 적을 무찔렀으니 올라가서 성소를 정화하고 봉헌합시다." 하고 말하였다.(36) 그래서 온 군대가 모여 시온 산으로 올라갔다.(37) 그들은 백사십팔년 아홉째 달, 곧 카슬레우 달 스무닷샛날 아침 일찍 일어나,(52) 새로 만든 번제 제단 위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쳤다.(53) 이민족들이 제단을 더럽혔던 바로 그때 그날, 그들은 노래를 하고 수금과 비파와 자바라를 연주하며 그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이다.(54)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들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늘을 찬양하였다."(55)
마카베오 상권의 제2부인 마카베오 상권 3장 1절~9장 22절은 유다의 공적을 다루고 있는데, 오늘 독서가 들어있는 마카베오 상권 3장 1절~4장 61절은 유다의 초기 승리들을 다룬다. 덕분에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아 새로 봉헌하게 된다. 유다를 소개하고 그의 공적을 기리는 시를 인용한 뒤에(1마카3,1~9), 저자는 아폴로니우스(사마리아 통치자)와 벳 호론에서 세론과 싸워 이긴 놀라운 승리를 기술한다(1마카3,10~26).
유다는 자기가 승리하는 것을 하느님의 능력으로 돌린다. "전쟁의 승리는 군대의 크기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힘에 달려 있다."(1마카3,19)
안티오쿠스 4세는 돈을 모아 오기 위해 페르시아로 가면서(1마카3,27~31) 리시아스에게 예루살렘에 군대를 보내어 거기에 남아 있는 자들을 없애버리라는 임무를 맡긴다(1마카3,32-27). 그러나 유다는 엠마오에서 리시아스의 장수들인 고르기아스와 니카노르를 무찌르고
(1마카3,38-4,25), 이어서 벳 추르에서 리시아스 마저 퇴각하게 만든다(1마카4,26-35).
이 전투에서 유다의 군인들에게 표어가 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상태이다. "성소는 짓밟히고 성채는 외국인들에게 점령되어 이민족들의 거처가 되었다"(1마카3,45; 3,50ㄴ-53).
게다가 유다는 율법에 따라 행동하며 성서의 인물들의 본보기를 따른다. 마카베오 상권 3장 56절을 보면 유다는 신명기 20장 5~8절에서 명하는 대로 전투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낸다.
마카베오 상권 4장 9절에서 유다는 얼마 되지 않는 자기 군사들에게 "파라오가 군대를 이끌고 뒤쫓아 왔을 때, 우리 조상들이 홍해에서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상기하여라." 라고 말한다.
그들은 엠마오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서 하늘을 향하여 찬미가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양한다. "그분은 선하시며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1마카4,24).
유다는 리시아스와 싸우기 전에 하느님을 찬미하며 하느님께서 다윗의 손으로 거인 골리앗의 공격을 물리치시고 요나탄의 손에 필리스티아인들의 진영을 넘기셨던 사실을 상기한다(1마카4,30; 1사무14장,17장참조). 유다는 전형적으로 성서적인 전사이다. 그는 승리를 위해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능력에 기댄 사람이다.
유다의 초기 경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고 새로 봉헌한 일이다(1마카4,36~61). 유다와 그의 병사들은 시온 산으로 올라가면서 성전이 형편없이 황폐해진 것을 발견한다(1마카4,36~40).
유다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성채 안에 있는 자들을 공격하게 한 뒤에 흠이 없는 사제들을 뽑아 성전 예배를 복구하고, 더러워진 번제 제단의 돌들을 제거하고 제단을 다시 쌓으며 거룩한 기물들을 새로 만들게 한다(1마카4,41~51). 그런 다음 기원전 164년 키스레우 달 스무닷샛날(12월 14일), 아침 일찍 일어나 새로 만든 번제 제단 위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친다(1마카4,52~53).
곧 이민족들이 성전을 더렵혔던 바로 그날,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회중과 함께 여드레 동안 제단 봉헌을 경축하는 새 하누카('봉헌'을 뜻함) 축일을 지낸다. 그 결과 "백성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민족들이 남긴 치욕의 흔적이 사라졌다"(1마카4,58).
유다의 지도력의 첫 단계는 예루살렘 성전과 주변 지역을 통제하고 성채 벳 추르(예루살렘 남쪽 약 29km지점에 있음)의 수비를 강화한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이민족에 의하여 더럽혀진 제단을 정화하여 다시 봉헌하는 유다 마카베오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하느님의 집이며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된다면, 성전이 돈벌이를 위한 자리가 되고 세력 다툼의 장소가 된다면, 그 성전에는 이미 이민족의 우상이 세워진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성전은 이미 더럽혀진 셈이지요. 그런 곳에서는 하느님이 아닌 오직 이권과 권력, 야합과 권모술수, 심지어는 폭력까지 난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하여 성당에 나가고 신앙생활을 하는지요? 어떤 식으로든 성당이 어린이들 삶의 일부가 되도록 도와주려는 의도에서, 성당에서는 그들과 놀아 줍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성당을 찾아올 계기를 마련해 주려고 이런저런 행사들을 기획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성전이 어떠한 곳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성전은 우선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기도하는 곳이어야 하고, 그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삶을 실천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유다 마카베오와 예수님처럼 성전을 과감하게 정화하고, 기도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그들에게 바른 소리를 하려면 커다란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에는 정의가 기준이 되어야 하며, 그 정의는 사랑에 토대를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연약한 사랑이 아니라 정의에 입각한 사랑입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5-48)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최고의회를 구성하는 의원들인데,
그들은 당시의 지배 계층이었고, '기득권층'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음을(요한 11,53) 나타냅니다.
그들은 '합법적인 살인'을
원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을 죽여도 살인죄가 되지 않는 방법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살인이 합법이
되는, 그런 법은 없고,
그래서 '합법적인 살인'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독재 국가에서는 살인이 합법이 되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독재자가 자기 마음대로 악법을 만들고, 그 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들.
(그래서 악법은 법이 될 수
없습니다.
악법은 살인 도구일 뿐입니다.)
온 백성이 그분 곁을 떠나지
않아서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찾지 못했다는 말은,
예수님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분을 쉽게 죽일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온 백성'이라는 말은 진짜로 '온 백성'은 아니고,
'많은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지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예수님을
죽인다면,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고,
폭동이 일어나면 로마 군대가 개입할 것이고,
그러면 지배 계층 사람들은 기득권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방도' 라는
말은,
예수님을 죽일 방법과 기득권을 잃지 않는 방법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고,
지금 이 상황은 기득권층이 손익 계산을 하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를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손해를 적게 보고 가장 큰 이익을 얻느냐를
따지는 상황.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을 죽일 수 없었다면,
그렇다면 예수님을 죽일 때에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인데,
예수님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수난 때에는 어디로 갔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6장 66절,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라는 말이 하나의 답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활동 초기에는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 수가 점점 줄어들다가,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하신 뒤에는 거의 다 떠나버렸습니다.
지배 계층 사람들도 그런 변화를 주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열두 사도 안에서 배반자가 나옴으로써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복음서 내용의 순서와 실제 사건들의 시간
순서에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성전 정화 사건이 예수님의 활동 초기에 있었던 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월 20일의 복음 말씀을
보면,
기득권층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쫓아내셨고,
또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일들이 그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그게 왜 그렇게 큰 위협이
되었을까?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장사를 못하게 한 일은,
사제들의(기득권층의) 돈줄을 막은 일도 되고, 권한을 침해하는
일도 됩니다.
또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로 변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제들은 강도들이다." 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유대교를,
또 유대교라는 종교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의 모든 질서를,
즉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질서와 사회질서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말씀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면 그렇게 토대부터 뒤흔들 필요가 있습니다.)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 자체도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권한을 침해하는 일이었지만,
그 가르침의 내용도 그들에게는 아주 위험한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분명히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한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큰 증오심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는
예수님 재판 때에 사제들이 한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여러분의 임금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오?' 하고 물으니,
수석 사제들이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 하고 대답하였다(요한 19,15)."
원래 유대인들은
야훼 하느님만을 유일한 통치자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다.' 라는 말은 자기들의 신앙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증오심에 눈이 멀어서 자기들의 근본까지 부정해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사제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으니...
기득권에 대한 집착, 옳은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한 증오심과 적대감,
또 증오심과 적대감에 사로잡혀서 선과 악을 헤아리지 않는 모습,
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하려고 하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눈물을 흘리고 계실
것입니다(루카 19,41).
회개하지 않고 멸망을 향해서 가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안타까워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루카 19,46)
로마를 방문중에 있습니다.
크고 아름다운 대성당들은 관광객들로 넘쳐 납니다.
더이상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구경하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몇몇 소수의 성당들은 그야말로 여전히
기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성당 뿐만 아니라 예배당들도 그렇고 사찰들도 그런 것 같습니다.
거룩한 곳이 거룩한 곳이 되기 위해서는
그곳이 기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어야 합니다.
나의 교회, 나의 성당, 나의 절은 어떤 곳인가요?
어느 곳을 가든지
그곳을 기도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오늘 나의 집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 성전이 되게 하고
내가 가는 곳곳이 하느님을 모시고 가는 장소가 되게 함으로써
성전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성령의 살아있는 궁전인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가는 곳이
참으로 성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