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3주간 목요일]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 (루카 19,41-44)

이방 종교를 강요하는 이들이 모데인에서 왕명에 따라 제물을 바치려 했을 때, 마타티아스는 아들들과 함께 이를 저지한다. 이어서 그는 율법에 대한 열정이 뜨거운 이들을 모아 봉기를 시작한다.(1마카 2,15-29)
그 무렵 15 배교를 강요하는 임금의 관리들이 모데인에서도 제물을 바치게 하려고 그 성읍으로 갔다. 16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이 그 관리들 편에 가담하였지만 마타티아스와 그 아들들은 한데 뭉쳤다.
17 그러자 임금의 관리들이 마타티아스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이 성읍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존경을 받는 큰사람이며 아들들과 형제들에게도 지지를 받고 있소. 18 모든 민족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처럼, 당신도 앞장서서 왕명을 따르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 아들들은 임금님의 벗이 될 뿐만 아니라, 은과 금과 많은 선물로 부귀를 누릴 것이오.”
19 그러나 마타티아스는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임금의 왕국에 사는 모든 민족들이 그에게 복종하여, 저마다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20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21 우리가 율법과 규정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소. 22 우리는 임금의 말을 따르지도 않고 우리의 종교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겠소.”
23 그가 이 말을 마쳤을 때, 어떤 유다 남자가 나오더니,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왕명에 따라 모데인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24 그것을 본 마타티아스는 열정이 타오르고 심장이 떨리고 의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달려가 제단 위에서 그자를 쳐 죽였다.
25 그때에 그는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도 죽이고 제단도 헐어 버렸다. 26 이렇게 그는 전에 피느하스가 살루의 아들 지므리에게 한 것처럼, 율법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27 그러고 나서 마타티아스는 그 성읍에서 “율법에 대한 열정이 뜨겁고 계약을 지지하는 이는 모두 나를 따라나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28 그리고 그와 그의 아들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성읍에 남겨 둔 채 산으로 달아났다.
29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시편 50(49),1-2.5-6.14-15(◎ 23ㄴ)
◎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하느님, 주 하느님이 말씀하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온 땅을 부르시네. 더없이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느님은 찬란히 빛나시네. ◎
○ “내 앞에 모여라, 나에게 충실한 자들아, 제사로 나와 계약을 맺은 자들아!” 하늘이 그분의 의로움을 알리네. 하느님, 그분이 심판자이시네. ◎
○ 하느님에게 찬양 제물을 바치고, 지극히 높은 분에게 너의 서원을 채워라. 불행한 날에 나를 불러라. 나는 너를 구해 주고 너는 나를 공경하리라. ◎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에 이르시어, 도성을 바라보시며 우신다. 예루살렘이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여 멸망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루카 19,41-44)
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제1독서 (1마카2,15-29)
마카베오기 상권은 1-2장이 입문이라고 이미 밝혔다. 입문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 후계자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에피파네스라는 신성모독적 별칭을 가진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1장)와 이에 항거하는 마타티아스 사제와 그의 다섯 아들(요한,시몬,유다,엘아자르,요나탄)의 반란을 소개한다.
배교를 강요하는 임금의 관리들이, 성읍과 집안에서 존경받는 신분인 마타티아스의 배교 행위가 파급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 왕명을 따라 모데인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임금의 벗이 될 뿐 아니라 은과 금과 많은 선물로 부귀를 누리게 될 거라고 유혹한다(17-18절).
이에 대해 마타티아스는, 임금의 왕국에서 모두가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자신과 아들들과 형제들은 한데 뭉쳐서 이스라엘 조상들의 계약에 충실하고, 결코 율법과 규정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말한다(19-21절).
"우리는 임금의 말을 따르지도 않고, 우리의 종교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겠소."(22절) 말하자면, 야훼 유일신 신앙을 따라 정도를 걷겠다고 의지를 드러낸다. 이교도의 것을 섞어서 절뚝거리는, 양다리 걸치는 혼합 종교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어떤 남자가 나와서 배교 행위로 이교도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려는 일을 보게 된다. 마타티아스는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열정이 타오르고,심장이 떨리고, 의분이 치밀어 올라 그를 쳐 죽이고, 이교도의 제단에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도 죽이고,제단도 헐어 버린다(25절).
마치 전에 피느하스가 살루의 아들 지므리에게 한 것처럼, 율법에 대한 열정을 드러낸 것이다(민수25,1-18). "피느하스가 일어서서 법대로 다스리자 재앙이 멈추었으니 이것이 그에게 세세에 영원히 의로움으로 셈해졌다.'(시편106,30-31) 그러고 나서 마타티아스는 그 성읍에서 말한다. "율법에 대한 열정이 뜨겁고,계약을 지지하는 이는, 모두 나를 따라 나서시오."(27절)
예레 34장 18절에 나오지만, 유다인들은 A와 B가 계약(berit:베릿)을 맺을때(karat: 맺다-직역하면,자르다), 송아지를 한 마리 가져다가 반을 자르고(죽이고), 그 잘라진 틈으로 A와 B가 지나간다. 계약을 어기면, 그 송아지처럼,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계약이란 피(생명)로 맺는 것이다. 물질적인 상행위로서의 contract 이 아니라 covenant 이다. 상호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피(생명/인격)를 나누는 교환 행위를 말한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이런 계약을 맺었다. 계약을 맺는 장면을 아무도 보지 못했으나, 피가 오고 간 것이다.
그리고 그 계약의 산물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는 십계명이고 율법인 것이다. 우리가 계명과 율법을 어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피(생명/목숨/인격)를 뿌려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계약의 당사자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몸도 마음도 갈라서서는 안된다. 다른 생각을 해서도 안되고, 다른 짓을 해서도 안된다.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몸도 마음도 갈라서서는 안된다. 충성해야 한다.
신약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뿌려 맺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도 마찬가지다. 구약의 백성이 계약의 산물인 계명을 어겼을 경우, 육신도 죽고, 영혼도 구원받지 못했다. 그렇게 되면, 계명을 어긴 육을 가진 인간들이 모두 영육간에 죽어야 했기에, 구원받을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없는 예수님이 아담으로부터 인류의 종말에 이르기 까지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셨다. 그로 말미암아 죄지은 인간들이 더 이상 육신이 죽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동시에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죽고, 영혼 생명의 단절, 즉 은총이 끊어지지만, 다시 회복되는 길이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속 성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고백성사를 통해 주어지고, 성체성사로 다시 일치와 성화의 길이 열리게 된다. 그래서 복음이다. 무상의 선물이다. 옛 계약(구약)과 새로운 계약(신약)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선물인 성체안의 예수님을 모시기에 합당하고 순결하고 거룩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성전에서 말씀과 성체로 오시는 주님을 모실 때와 성전 밖에서의 삶이 일치하는가? 가정과 사회와 직장에서 어떻게 죄와 죄의 기회를 단호히 끊고 거부하며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마타티아스의 율법에 대한 열정, 계약을 지지하고 충성하는 모습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혹시 어떤 도시를 보고 울어 본 일이 있으신지요?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유배 이전 구약 예언자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기원전 587년 바빌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수십 년 전부터, 예언자들은 거듭 멸망을 경고했습니다. 하느님을 잊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면서 회개를 호소하였지만, 예루살렘은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멸망의 그림자가 다시 드리워지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은 기원후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서 함락되고 성전도 다시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루카 19,43은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예루살렘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여기서 말하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 멸망을 향해 가는 도시를 바라보며 예수님께서는 우십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도 예언자에게 귀를 기울일 줄 모르고 평화의 길을 찾지 못하는 도시들은 멸망을 향해 치닫게 될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그러한 도시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혹시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시기까지 하신다는 점을 생각해 보셨는지요……!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19,41-4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41~42)
루카 복음 19장 41~44절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사 중에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군중들이 예루살렘에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메시야 왕국이 세워질 것을 기대하며 흥분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가까운 장래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을 바라보고 우시며 애가를 부르신다.
루카 복음 19장 41절에는 '에클라우센 에프 아우텐'(eklausen ep auten;and wept over it)이 나온다. '~에 대하여'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에피'(epi)의 축약형인 '에프'(ep)와 '예루살렘 도시'를 가리키는 여성형 지시 대명사 '아우텐'(auten)이 기록되어 있는데, 직역하면 '그를 위하여 우셨다'이다. 즉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 재앙을 정확히 내다보시고 이에 대해 슬퍼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시며'에 해당하는 '에클라우센'(eklausen)의 원형 '클라이오'(klaio)는 '울다', '곡하다', '애곡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감정을 삭이며 소리 죽여 우는 내적 슬픔이 아니라 자신의 슬픈 감정을 밖으로 표출시키는 격렬한 비통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괴로움을 영혼의 부르짖음 같은 통곡으로 표현하셨다.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이것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핍박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멸망하게 될 운명에 처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악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메시아적 슬픔으로도 볼 수 있다.
한편, 루카 복음 17장 42절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란 무엇인가를 알아 보아야 한다. 여기서 '평화'로 번역된 '에이레넨'(eirenen)의 원형 '에이레네'(eirene)는 히브리어 '샬롬'(shalom)과 같은 뜻의 희랍어로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로부터 생기는 '구원'과 '충만한 은총' 및 '진정한 기쁨'을 의미한다.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에 해당하는 '타 프로스 에이레넨'(ta pros eirenen; hat would bring you peace)에서, 전치사 '프로스'(pros)가 '~에 속한'(belong)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문자적으로 '평화에 속해 있는 것들'로 번역이 가능하다.
이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수많은 말씀과 행적을 통해 당신 자신에게만 진정한 구원과 평화가 있음을 보여 주신 것들을 말한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진정한 구원과 충만한 은총을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끝으로 42절의 '감추어져 있다'에 해당하는 '에크뤼베'(ekrybe; it is hidden)는 부정과거 수동태인에, 과거 어느 시점에 감추어져 지금과는 관계없는 것이 아니라, 과거 어느 시점에 감추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효력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진리를 계속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단어가 수동태로 쓰였는데, 하느님께서 죄악으로 말미암아 완고해진 그들의 지성을 어둡게 해서 예수님께 관한 일을 깨닫지 못하게 하셨음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시다.>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루카 19,41-43)"
예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운명과 예언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에 운명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다면, 그리고 아무도 운명을 피할 수 없다면, 믿음과 회개와 여러 가지 많은 노력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회개하고, 믿음과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은, 그렇게 하면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고 믿으니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해져 있는 운명 같은 것이 없다면, 그러면 '예언'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정해져 있지 않은 미래의 일을 어떻게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인가?
좋은 예가 '요나의 예언'입니다.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시키신 대로 니네베로 가서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라고 외쳤습니다(요나 3,4).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고 단식했습니다(요나 3,5-9). 그 모습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셨고, 니네베에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요나 3,10). 요나가 "니네베는 멸망한다." 라고 예언했는데도, 니네베라는 도시에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요나의 예언은 거짓 예언이 된 것일까? 아마도 그래서 요나가 화를 냈던 것 같습니다(요나 4,1-2). 자기의 예언은 거짓 예언이 되어버렸고, 자기는 거짓 예언자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해서 화가 났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요나를 타이르시는 말씀을 보면(요나 4,11), 원래 하느님의 뜻은 '니네베의 멸망'이 아니었고, '니네베의 회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요나에게 '회개'를 선포하게 하시지 왜 '멸망'을 선포하게 하셨을까? 어쩌면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시키신 선포는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였을 것입니다.(요나가 회개를 빼버리고 멸망만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것.) 아니면, 멸망 선포는 니네베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충격요법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멸망 예언'도 같습니다. 멸망이 확정되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해도' 멸망하게 된다는 예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다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니네베 사람들과는 달리 거의 대부분 회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고 멸망을 당하게 될 사람들이 안타까워서 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 가운데에도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멸망했지만 주민들이 백 퍼센트 전멸당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오늘'이라는 말은 '오늘이라도'(지금이라도)로 해석됩니다. 지금이라도 회개하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평화'는 '구원'을 뜻합니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알았더라면'은 '믿고 실천했더라면'입니다.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라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는 "모르고 있다." 라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거부하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심판과 멸망의 때'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예수님의 말씀을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복음 말씀의 '예루살렘'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라는 경고는 오늘도 유효합니다. 언제라도, 또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한 마리 양을 잃은 목자의 심정을 나타냅니다(루카 15,4).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심정이기도 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집을 떠나버렸을 때, 아마도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단 하루도 편하게 먹거나 잘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비유 속의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애타는 심정을 생각하고 회개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배가 고파서 회개했습니다(루카 15,14-19).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편안할 때에는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다가 어떤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되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는 모습. 그러나 진짜로 지혜로운 사람은 편안할 때에 더 회개합니다.
아마도 분명히, 심판과 멸망이 닥치게 되면 누구라도 회개하려고 서둘 텐데, 그때는 회개하기에는 너무 늦은 때이고, 다들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회개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언젠가 심판의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루카 19,41-42)
여러분은 눈물이 많은 편이신가요?
많이 우시나요? 왜 우시나요?
언제 그렇게 슬프고 비통하세요?
누가 내 마음을 몰라줘서 속상해서 우시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서 슬퍼하며 우시고
알 수 없는 병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도 우시겠지요.
하는 일이 잘 되지 않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도 우시겠지요.
그 슬픔과 눈물에
주님께서 함께 위로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서에 의하면 세 번 정도 우시네요.
오빠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슬픔에
함께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시고
오늘 회개할 줄 모르고 여전히 악행과 멸망의 길을 걷고있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비통하게 우시고
겟세마니에서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의 뜻에 자신과 사랑하는 제자들을 맡기며
절절한 기도 안에서 피땀흘리며 우십니다.
오늘 특별히
회개하지 않고 악행과 멸망의 길을 걷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로 애통해 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우리나라의 정치권력자들과
아무나 닥치는 대로 죽이면서도 그것이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여기는
IS 같은 종교정치 권력의 회개를 위해 함께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면 어떨까요?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의 죽음과 고통을 함께 슬퍼하고,
멸망과 죽음으로 가는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의 회개를 위해 가슴아파하며,
아버지의 뜻을 찾기 위해 밤새 기도하며 애원하며 울부짖는
그런 눈물을 흘리는 그리스도인이 더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모두 웃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