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서 10장 1절-52절>
<1절-12절 : 혼인과 이혼>
그 당시 바리사이파는 일부다처제를 묵인했고, 이혼과 재혼을 쉽게 허락했습니다. 조선시대의 칠거지악과 비슷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때, 신명기 24장 1절대로 남편은 이혼장을 만들어 아내에게 건네주고, 그 순간부터 아내는 쫓겨나게 됩니다. 이혼장에 사유를 쓸 필요는 없었고, 남편 아무개가 아내 아무개를 소박하니 다른 남자가 데려가도 무방하다는 내용을 적은 다음에 남편과 두 증인이 서명하고 장소와 날짜를 기록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혼 불가를 선언하셨습니다(마태 5,32).
1절..<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다시 그들을 가르치셨다.>--'그곳을 떠나'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완전히 떠나셨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는 중입니다. '유다 지방과 요르단 건너편으로 가셨다.' 라는 말은 요르단 강 건너편의 길을 걸어서 유다 지방을 향해 가셨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 길은 갈릴래아에서 유다 지역으로 갈 때 사마리아 지역을 가로지르지 않고 돌아서 가는 길입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2절..<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라는 말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라는 뜻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이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마태 5,31-32)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이혼에 관한 질문을 해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남편은 아내를 버릴 수 없다.' 라고 대답하면 모세의 규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모세 율법을 어겼다는 죄로 고발할 수 있습니다. 또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도 세례자 요한과 같은 운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이혼과 재혼을 비난했다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남편은 아내를 버려도 된다.' 라고 대답하면 그동안 가르쳐온 것과는 반대로 대답한 것이 되고 예수님의 권위가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3절-4절..(3)<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 전에 먼저 바리사이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도록 하십니다.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라는 질문은 '너희는 모세의 규정을 어떻게 지키고 있느냐?' 라는 뜻입니다. 즉 모세의 규정에 대해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의 입장을 물으신 것입니다.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일에 대한 규정은 신명기 24장 1절-4절에 있습니다. 신명기 24장 1절에서 이혼 사유로 말하고 있는 '추한 것'이라는 말은 '불륜'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그 말을 아주 넓게 확대 해석해서 온갖 사소한 일도 이혼 사유가 되는 것으로 남용했고, 예수님 시대에는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이 규정을 악용하는 일이 흔히 있었습니다.
5절..<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여기서 '완고한 마음'이란 하느님께 계속 불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의 명령에 대해 무감각해진 인간의 마음을 뜻합니다. 모세가 이혼 규정을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혼을 찬성해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즉 부부의 도리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고 혼인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잠정적으로 그런 법을 만들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의 이혼 규정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계명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음을 나타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하면, 유대인들이 혼인에 관한 하느님의 뜻과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했다면 그런 규정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이혼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6절-8절..(6)<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라는 구절은 창세기 1장 27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을'이라고 번역한 말을 공동번역 성서는 '사람을'이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에는 '그들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라는 구절은 창세기 2장 2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창세기를 인용하신 것은 혼인이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도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이고, 남자와 여자가 결합해서 한 몸이 되게 한 것도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니 사람이 그 일을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이혼불가와 일부일처제를 동시에 선언하신 것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로 결합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부부의 결합은 아무도 깰 수 없는 공동체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그 공동체를 깰 수 없습니다. 여기서 둘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몸의 결합(성적인 결합)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결합, 인격의 결합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두 인격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인격입니다.
9절..<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이 구절은 이혼은 안 된다는 결정적인 선언입니다. 부부의 인연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일을 인간이 풀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정한 이혼장의 규정은 아무 가 치가 없습니다.(그러면 신명기에 나오는 성경의 말씀과 창세기에 나오는 성경의 말씀이 서로 충돌하고 대립되는 것인가? 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과 성경의 말씀이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하느님의 계명과 2차적으로 만들어진 해석이 대립되는 것이고, 이 경우 원래의 계명이 회복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모세의 이혼장 규정은 예수님에 의해서 완전히 폐기되었고, 원래의 하느님의 창조질서로 회복되었습니다.)
10절-12절..(10)<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여기서 '집'이 어디에 있는 누구의 집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집에 들어갔다는 것은 사람들과 떨어져서 예수님과 제자들만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해 다시 묻는 것은 제자들도 일반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버리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제자들을 위해 보충설명을 해주십니다. 이혼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이혼 후 재혼하는 것은 간음(간통)죄가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 당시에 여자가 이혼당하고 혼자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이혼당한 여자는 재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남자들은 이혼 후 거의 대부분 재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혼은 곧 간음죄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11절의 '남자가 아내를 버리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 사회에서 흔히 있었던 일이고, 12절의 '아내가 남편을 버리는 것'은 그리스, 로마 사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여자들에게도 이혼할 권리가 있었는데, 그런 점에서는 남녀가 평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풍습이 유대인들 사회에도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혼 후 재혼을 간음죄로 규정하신 것은 이혼 금지일 뿐만 아니라 일부다처제(또는 이중혼인)도 금지하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풀이해서, 이혼하면 안 되지만 부득이하게 이혼했다면 재혼하지 말라(1코린 7,10-11),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신자와 비신자가 부부가 되었을 때, 신자 쪽에는 이혼의 권리가 없지만, 비신자 쪽에서 헤어지기를 원한다면 헤어져도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코린 7,15). 사실 이것은 박해시대의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인데, 오늘날에도 우리 교회는 '바오로 특전'이라고하여 실제 상황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혼 금지 선언은 일방적으로 아내를 버리는 남편들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시는 예언자적인 가르침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혼할 수 있을까? 를 궁리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둘이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너무 이혼율이 높고, 이혼 때문에 신자들 중에도 조당에 걸린 사람이 많은데, 계속 이런 추세로 간다면 우리 교회에도 심각한 위기가 올 것입니다. 천주교회의 이혼 금지 규정을 완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일부 있지만, 이미 분명하게 선언된 예수님의 이혼 금지 규정을 교회가 마음대로 바꿀 권한은 없습니다.)
<13절-16절 :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
13절..<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이스라엘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율법학자가 제자나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 동작은 지금의 안수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쓰다듬어' 달라고 한 것은 안수를 해달라고 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누군가가 자기 자녀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안수로 축복해주시기를 청했는데, 어디서 누가 청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내용을 앞의 12절과 연결된 것으로 본다면,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은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중단시키지 말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행 도중에 쉬시는 중이었다면 스승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앞의 6장 56절에서처럼 자꾸만 예수님을 만지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에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막으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14절..<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여기서 '언짢아하시며' 라고 번역한 말은 원문대로 번역하면 공동번역 성서처럼 '화를 내시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화를 내시면서 제자들의 태도를 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어린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셨고, 가까이 오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꾸짖은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어린이들이 예수님에게 오는 것을 막은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라는 말에서 '어린이'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또 당시에 어린이들이 그런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힘이 있고 잘난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렇게 못난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 5장 3절-12절의 행복 선언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등이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15절..<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엄숙하게 선언할 때의 관용어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라는 말에서 '어린이'는 앞의 14절의 설명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말은 연약한 어린이가 부모에게서 받아먹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공덕을 쌓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은총이며 선물이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인간의 선행이나 공덕보다 위에 있고, 앞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인간이 노력해서 획득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느님께로 돌아서서(회개), 하 느님만 의지(신앙)하는 것입니다.공동번역 성서는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라고 번역했는데, '순진한 마음'이라는 말은 원문에 없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어린이는 순진무구한 어린이가 아니라, 아직 미성숙하고, 무능력한 상태에 있는 아이를 뜻합니다. 그래서 '어린이와 같이' 라는 말은 보호자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어린이처럼 하느님만 의지하고, 믿고, 순종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공동번역 성서의 번역은 너무 좁은 뜻으로 의역한 것입니다.
16절..<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어린 이들을 끌어안으신 것은 사랑의 표시입니다.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는 것은 축복을 위한 안수를 하셨다는 뜻입니다.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은 소망을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하나하나 안으시고 축복해주시는 동안 어린이들과 그 부모들은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17절-27절 :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17절..<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당시의 유대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부활 신앙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실만으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뭔가 특별한 실천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하고, 특별히 더 실천해야 할 율법이 무엇인지 토론을 벌이곤 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어떤 사람'도 그런 문제에 대해 예수님의 답변을 듣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가시는데' 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부자였고(22절), 권력가였고(루카 18,18), 젊었습니다(마태 19,20). 그 사람이 달려왔다는 것은 예수님을 꼭 만나보고 싶어 했음을 나타냅니다. 무릎을 꿇은 것은 예수님에 대한 큰 존경을 나타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른 것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원문대로 하면 '선생님'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새번역 성경은 너무 '스승님'이라는 호칭을 남발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하신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유명한 랍비에게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구세주인지)를 모르고, 믿음도 없는 사람이 예수님에게 이런 호칭을 쓰는 것은 아첨에 가까운 과장된 호칭입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이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특별히 더 실천해야 할 율법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18절..<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라는 말은 '나는 선하지 않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어떤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 인간에 대한 개인숭배를 엄하게 금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라는 말은 '하느님만 선하고, 인간은 악하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선의 근원은 하느님이시고, 그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본받고, 닮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예수님의 답변에는 당신 자신의 뜻이 아니라, 오직 선하신 하느님의 뜻만을 따르려는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또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질문은 하느님에게서만 답을 얻을 수 있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있고, 예수님이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셨다는 것을 믿고 있다는 것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사실상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19절..<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이 십계명에 드러나 있다고 보셨고, 그것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십계명의 후반부, 즉 이웃사랑에 관한 계명만 인용하시는데, 하느님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의도로 십계명의 전반부를 생략하신 것 같습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등은 십계명에서 금하는 것이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도 십계명에 들어 있는데, '횡령해서는 안 된다.' 라는 것은 십계명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레위기 19장 13절, 신명기 24장 14절-15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당한 임금을 제 때에 지불하지 않아서 가난한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지 말라는 율법입니다. 이 규정은 십계명에 들어 있지 않지만 당시의 부자들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는 일들이 흔히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덧붙여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가난한 노동자에게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어떻든 19절의 예수님 말씀은 특별히 더 실천해야 할 율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십계명만 잘 지켜도 된다는 답변입니다.
20절..<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여기서도 '스승님'이라는 말은 '선생님'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 사람은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지켜 왔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의 대답은 사실일 것입니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라 자기 양심에 비추어볼 때, 성실하게 율법을 지켜왔다는 의식에서 나온 대답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십계명과 율법을 성실하게 지키는 것 이상의 뭔가를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21절..<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여기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을 공동번역 성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 하시며' 라고 번역했는데,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를 눈여겨보시고, 그를 사랑하시며'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그를 주의 깊게 살펴보시면서 사랑스럽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 사람 자신이 말한 대로 그가 성실하게 십계명과 율법을 실천했음을 예수님께서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을 지키고 율법을 실천하는 일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사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고 있는 일들입니다. 믿음은 없지만 신자들보다 더 착하게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정말 착하게 살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는 일인데(신자라면 더욱 당연히 해야 하고), 그런 기본적인 일의 실천을 생색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말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면 그 이상의 뭔가를 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1)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2) 나를 따라 오라, 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은 그 사람이 말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선행과 적선을 하면 하늘에 보화가 쌓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평소에도 적선을 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을 모두' 적선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여기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요구는 사실상 두 가지 요구가 합해진 것입니다. 즉 재산을 모두 포기하라는 요구와 그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는 요구가 합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부족한 것 하나는 재산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고, 그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실천하라고 요구하신 것은 세 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스럽게 보셨다는 것은 십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한 그의 지향과 의도를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신 것은 그 실천이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십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려면 부족한 것 하나를 채워 넣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계명을 추가한 것이 아니라 십계명 실천에 있어서 그 사람에게 부족한 것을 보충한 것입니다.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누구에게나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요구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미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하려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 사람에게만' 요구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 재산을 모두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실제로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열두 사도들뿐이었습니다. 열두 사도가 아닌 다른 제자들은 대부분 자기 재산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사도들 수준의 요구를 하신 것은 아마도 그를 제자로 삼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또 그 자신이 바라고 있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재산에 대한 애착을 끊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재산에 대한 애착을 끊는 일은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요구는 그 사람에게만 하신 말씀이지만, 재산에 대한 애착을 버리라는 요구는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됩니다.)
22절..<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유대인들은 재산이 많다는 것, 또는 부자라는 것을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재산을 포기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가 슬퍼하면서 떠났다는 것은 예수님의 요구를 거부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실제로 재산이 많았음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재산에 대한 애착이 많았음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냥 떠나긴 했지만 그가 구원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그가 예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죄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재산'이라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얼마나 큰 장애가 되는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재산이 많다는 '사실'이 아니라, 마음이 재산에 얽매여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기 재산을 조금 덜어내서 가난한 사람에게 줄 수는 있었지만 모든 재산을 다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부자라는 사실에 만족과 기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갈망하면서도 재산을 모두 포기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숙제입니다. (우리나라 103위 성인들 중에 성직자는 열 명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평신도입니다. 그 중에는 가정이 있었던 사람도 많았고 부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하느님을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뺀 그 나머지는 하나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적과 수단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느님일 뿐입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성당에 다니고,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성당에 다니고, 기타 등등... 뭔가 세속적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수단을 목적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목적 달성에 방해가 된다면, 또는 목적을 이룬 후에는 수단은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수단에 집착하면서 목적을 잊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23절..<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셨다는 것은 지금 하시려는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라는 말은 '재물에 더 마음이 가 있는 사람, 또는 재물을 더 중시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사실 재산이 많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또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재물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재산 자체가 아니라 재산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래서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라는 말은 가난한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쉽다는 뜻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더 많은 재산을 갖기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봉헌금을 바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불우이웃돕기 성금도 내고, 수재민 돕기 성금도 내고, 가끔은 헌혈도 하고, 어떻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이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면, 자칫 잘못하면 바리사이의 위선과 같은 자기 혼자만의 만족감으로 그칠 수도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한 데서 오는 기쁨(부자가 되었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 또는 풍족함에서 오는 생활의 여유), 그 재산으로 가난한 이웃을 돕고 있다는 자기만족, 자아도취, 가지고 있는 돈으로 가끔씩, 적당히(죄가 되지 않을 만큼만) 세속적인 쾌락을 즐기는 즐거움, 이 모든 것들이 사실상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에서는 큰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세속이 마음속에서 더 크게 자리를 잡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차를 가지고 있어도, 똑바로 앞을 보지 않는다면 길에서 벗어나거나 사고를 낼 것입니다.
24절..<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말씀에 제자들이 놀라는 것은 그들도 다른 유대인들처럼 재물이 많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이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과 반대여서 놀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는 제자들에게 거듭, 그리고 좀 더 확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부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누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간에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즉 자력구원은 불가능하고 오직 타력구원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설명이 27절에 나옵니다.여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얘들아' 라고 부르신 것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 말은 '아들들아' 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특별히 제자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마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라는 그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이 대견하셨던 것 같습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얘들아' 라는 말이 없는데, 잘못된 번역입니다. 마음대로 생략해도 되는 말이 아닙니다.)
25절..<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낙타'는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가장 큰 동물이었습니다. '바늘귀'는 가장 작은 구멍을 뜻합니다. 그래서 25절의 말씀은, 가장 큰 동물인 낙타가 가장 작은 구멍인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어렵다.'가 아니라 '불가능하다.'입니다.앞의 23절에서는 '참으로 어렵다.' 라고 하셨는데, 여기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표현만 좀 더 강하게 바뀐 것이고 같은 뜻으로 생각됩니다.
26절..<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아마도 제자들은 부자는 아예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고 알아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놀라게 됩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깜짝' 놀랐다고 번역했습니다.) 아직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이 깜짝 놀라는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직접 질문하지도 못하고 자기들끼리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고 있습니다.
27절..<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여기서 '바라보며' 라는 말은 '눈여겨보시며' 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똑바로 보시며' 라고 번역했습니다.)이 말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이 단호하고 분명한 선언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시는 그런 시선으로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어떤 깨달음을 주시려고 한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이라는 말은 사람이 자기의 힘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간에.)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의 구원은 자력구원이 아니라 타력구원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며 선물이라는 말은 이미 앞의 15절에서도 나왔던 말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하느님은 낙타를 바늘구멍으로 지나가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세속과 세속의 재물에서 벗어나기란 참으로 어렵지만 하느님의 은총이 있다면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만, 자신의 선행과 공덕으로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자만심입니다. 우리는 먼저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계명 실천, 이웃사랑 실천, 선행 실천을 해야 합니다. 결국 신앙생활이란 시작도 하느님이고 끝도 하느님입니다. 자기 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의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28절-31절 : 따름과 보상>
28절..<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앞에서 떠나간 부자와는 달리 자기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그의 말은 약간의 자랑이 들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새번역 성경은 '스승님'이라고 번역한 말을 공동번역 성서는 '주님'이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에는 '당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29절-30절..(29)<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베드로가 예수님께 보상을 요구하지는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보상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그 이상으로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절대로 현세적인 보상을 약속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보상도 종말의 보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엄숙하게 선언한다는 뜻의 관용어입니다. '누구든지' 라는 말은 아무도 이 구절의 축복 선언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단, 조건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말은 공동번역 성서의 번역처럼 '예수님을 위해서, 또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을 가리킵니다.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에 물들어서 예수님과 상관없이 속세를 버리는 경우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또 하느님과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혼자 득도하기 위해서 속세를 버린 것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자녀, 토지를 버린 사람은 나중에 그것을 백배나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후에 신앙공동체(교회) 안에서 새로운, 영적인 가족이 생긴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단순히 종말의 풍성한 보상에 대한 비유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이라는 말은, 종말에 받을 보상이 약속되었든, 현세의 신앙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보상을 받든 간에 예수님을 따르는 현세에서의 삶은 여전히 박해와 시련, 십자가가 함께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은 '내세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마태오복음 5장 3절-12절의 '참 행 복' 선언과 같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31절..<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장차 하느님 나라가 오면(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지금의 부자들과 모든 것을 버린 제자들의 처지가 뒤바뀌게 될 것입니다. 좀 더 넓게 생각하면 단순히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모든 사람의 현세에서의 위치가 내세에서는 역전될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루카 16,25). 그래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지금의 세상에서 잘나고, 잘 살고, 힘 있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이면서 동시에 힘없고, 못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많을 것이다.' 라는 말에는 그렇게 위치가 역전되는 상황에서 제외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째와 꼴찌가 뒤바뀌는 일이 100%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29절-30절의 말씀은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는 고독한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대리만족을 얻기 위해 찾는 피신처가 아닙니다. 교회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없이, 십자가의 참 뜻도 모르는 채로 다른 신자들을 형제, 자매라고 부르면서 현세적인 위안이나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또 교회는 내세에서의 보상만 생각하고 현세에서의 고통을 무조건 참기만 하는 현실도피처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불의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받게 되는 박해는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의 부정부패, 불의, 약자의 권리 박탈을 외면하고 오로지 내세의 행복만 추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또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이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아니면 아예 없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웃사랑 실천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서 포기한 모든 것을 내세에서 보상해 달라고 하느님께 요구할 권리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선물로서 기대하고 희망할 수 있을 뿐입니다.)
<32절-34절 : 수난과 부활을 세 번째로 예고하시다>
32절..<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서서 가고 계셨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또 뒤따르는 이들은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고 가시며, 당신께 닥칠 일들을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예수님과 제자들은 지금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올라가다'라는 표현은 예루살렘이 지형적으로 높은 지대에 있기 때문에 사용되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서서 가고 계셨다.' 라는 말은, 여기서는 특별히 십자가 수난을 향해 가는 예수님의 단호한 의지와 결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당시에 랍비가 앞서 가고 학생들이 뒤를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지만 여기서는 예수님의 의지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또 뒤따르는 이들은 두려워하였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제자들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열두 제자들과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해서 죽이려고 하는 유대 지도자들(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사제들)의 음모를 알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려는 각오가 아직 안 되어 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그것을 본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다.' 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 것을 본 제자들이 어리둥절했다는 것처럼 번역한 것이어서 잘못된 번역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어리둥절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두려워한 것입니다. 또 '어리둥절하였다.' 라는 번역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놀랐다.'가 올바른 번역입니다. 여기서 놀랐다는 말은 두려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열두 제자 외에도 다른 제자들이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몇 명의 여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15,41).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는 순례 여행자들도 우연히 합류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열두 제자를 따로 불러내어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동참하고, 증언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께 닥칠 일들'은 예루살렘에서 겪게 될 수난과 죽음을 가리킵니다.
33절..<"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라는 말은 '나는(우리는) 지금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겪게 될 일을 순서대로 이야기하십니다. 체포되고, 재판받고, 사형선고를 받고, 이방인(로마인)의 손에 넘겨질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고난 받는 메시아이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유대 최고의회를 가리킵니다. '넘겨질 것이다.' 라는 말은 체포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라는 말은 최고의회가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한 다음에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길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이라는 말은 '이방인'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로마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34절..<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나서 죽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로마 군인들은 사형수들을 다루는 관습대로 예수님을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그 다음에 십자가에 매달아서 죽일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십자가가 따로 언급되지는 않았는데, 첫 번째, 두 번째 수난 예고에서도 십자가형을 당할 것이라는 언급은 없었습니다. 십자가형은 노예나 식민지 백성을 처형할 때 사용하는 일반적인 사형 방법이었기 때문에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음의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 부활 자체입니다. '침을 뱉는 것'은 단순한 모욕이 아니라 처형하기 전의 고문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채찍질'도 십자가형의 앞 순서로 늘 시행하던 고문입니다. 세 번째 수난 예고에도 앞의 두 예고처럼 부활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당하겠지만 사흘 만에(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사실상 한 사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제자들의 반응이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고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가 그것을 나타냅니다. 수난 예고를 들은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 첫 번째 수난 예고 때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고, 두 번째 예고에서는 누가 높은지 제자들끼리 서로 다투었고, 이제 세 번째 예고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높은 자리를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계속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십자가와 부활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닫게 됩니다.
<35절-45절 : 출세와 섬김>
35절..<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여기서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원문대로 하면, '선생님, 저희가 당신께'입니다.제자들은 아직도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청하는 것은 사실상 모든 제자들의 소망이기도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소원을 말하기도 전에 '청하는 대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소원이 크고 간절했음을 나타냅니다.
36절-37절..(36)<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37)<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물으시자 그들은 자기들을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지금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영광과 권력'을 누릴 수 있는 높은 자리, 즉 예수님의 최측근의 두 자리입니다. 37절에서 '스승님'으로 번역되어 있는 말은 모두 원문에는 '당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광을 받으실 때'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왕국을 세우실 때를 가리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께서 종말에 영광스럽게 재림하셔서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제자들은 자기들이 살아 있는 동안 예수님께서 메시아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기대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38절..<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의 청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 그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게 하신 질문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사실의 설명에 더 가깝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잔과 세례'가 기다리고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잔과 세례'는 죽음을 나타냅니다. '잔'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께서 개인이나 민족에게 마시도록 주는 것으로,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운명을 상징합니다. 여기서는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분노의 포도주로 채워진 잔(예레 25,15)은 파멸과 불행을 뜻하며, 악인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후에 이 상징은 순교자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도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잔'의 비유로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나타내고, 악한 자들 대신에 받게 될 하느님의 심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세례'는 수난, 박해, 재난, 인간을 위협하는 홍수 등을 나타내는 구약성경 구절들에서 나온 것으로 예수님이 고통과 박해를 받게 될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은 예수님을 뒤따르고 예수님의 영광에 동참하려면 예수님과 함께 고통과 박해와 죽음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39절..<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야고보와 요한의 '할 수 있습니다.' 라는 대답이 정말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대답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그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 또 자기들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정도의 대답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희생'의 정도나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은 그들이 받게 될 박해와 순교를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야고보는 사도들 중 맨 처음으로 헤로데 아그리빠 1세에 의해 서기 44년경에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사도 12,2). 요한의 순교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전해지는 사료가 없지만 요한도 예수님을 위해서 많은 박해와 고난을 겪었습니다.
40절..<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두 사람이 나중에 순교를 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고통과 박해, 순교가 영광의 자리를 얻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긴 하지만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할 일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실망시키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람들의 모든 운명을 결정하는 것도 하느님의 일이고, 두 사도가 소망했던 특권을 줄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는 것도 하느님만이 하시는 일이지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고통과 박해를 겪고 죽음을 당한 순교자들에게 하느님께서는 틀림없이 영광의 자리를 주실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일은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정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5,19)." 그러나 아버지의 권한은 사실상 아들의 권한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요한 5,22)."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이 미리 '예정'되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일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권한이고, 하느님의 계획, 또는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쪽에서 보면 모든 것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사람 쪽에서 보면 누구에게나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처음부터 멸망하도록 정해져 있는 사람도 없고, 처음부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정해져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지금 각자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41절..<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예수님과 야고보와 요한의 대화를 다른 열 제자도 모두 들었습니다. 그들이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또는 화를 냈다)'. 라는 말은 그들의 생각이나 그들의 소망도 야고보와 요한과 같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42절-44절..(42)<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43)<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44)<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앞의 9장 33절-37절에서 제자들이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 하고 다툰 일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섬기는 종이 되라고 가르치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여기서 다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라는 말은 특별한 가르침을 주셨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공동번역 - 이방인들의 통치자) 라는 말은 여기서는 '세속의 통치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세속의 통치자들과 고관들은 흔히 '백성 위에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지만', 즉 압제와 폭정을 일삼고, 인권을 짓밟지만, 제자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교회 안에도 계급이 있고, 직분이 있지만, 그것은 봉사직이고 종노릇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와 '첫째가 되려는 이'는 교회 안에서 높은 직책을 맡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과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은 교회의 직책은 세속과는 달리 봉사직이고 섬기는 직책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야고보와 요한이 높은 자리를 청했다고 화를 낼 필요도 없고, 그 전에 먼저 서로 높은 자리를 욕심낼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45절..<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 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제자들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일생은 봉사하는(섬기는) 삶이었습니다. 여기서 '많은 이들'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 즉 온 인류를 뜻합니다.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섬김과 봉사가 '죽음'으로까지 이어졌음을 나타냅니다. '몸값'은 노예나 전쟁포로를 석방하기 위해 지불하는 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죄로부터, 또 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즉 예수님의 목숨이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한 몸값으로 대신 지불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서 53장의 '주님의 종'의 죽음에서 온 표현인데,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죽음이었습니다.
<46절-52절 :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고치시다>
46절..<그들은 예리코에 들어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예리코는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24Km 떨어진 도시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제 거의 예루살렘 근처까지 온 것입니다. 여기서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열두 제자와 그 밖의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여자들 외에도 예루살렘을 순례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과 함께 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예리코에 잠깐 들렀다가 떠나실 때에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와 마주치게 됩니다. '바르티매오' 라는 이름은 '티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마르코는 아람어를 모르는 독자를 위해 이름의 뜻을 설명해 놓았습니다. 또 바르티매오가 마르코와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적은 것 같습니다. (아람어는 예수님과 제자들, 일반 민중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언어입니다. 이스라엘의 공식 언어는 히브리어였고, 당시 국제 공용어는 그리스어였습니다. 로마제국의 공용어는 라틴어였습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의술로는 여러 가지 눈병들을 거의 치료할 수 없었고, 앞을 못 보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거지가 되어 구걸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47절..<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예수' 라는 이름은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고 출신지 이름을 붙여서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칭호인데, 바르티매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는 말은 뒤의 51절을 보면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청하는 말입니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칩니다. 그가 베풀어 달라고 외치는 '자비'는 그저 몇 푼의 돈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고,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48절..<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가 부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믿고 있는 제자들은 공공연하게 그런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사람들은 바르티매오에게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고 조용히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습니다. 그는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더욱 큰 소리로 외칩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것이 그에게는 신앙의 시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소망과 믿음은 그 시험을 극복했습니다.
49절..<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바르티매오의 간절한 소망과 믿음이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게 하십니다. 이제 군중은 태도를 바꾸어서 '그분께서(예수님께서) 너를 부르신다.' 라고 예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전달자가 됩니다. 사람들이 바르티매오에게 '용기를 내어 일어서라.' 라고 격려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없었던 믿음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고, 이제 곧 일어나게 될 치유의 기적을 그들의 입을 빌어 암시하는 것입니다.
50절..<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당시 거지들은 보통 구걸할 때 겉옷을 앞에 펼쳐 놓고 거기에 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입고 있었던 것 같고, 예수님이 부르신다는 말을 듣자 겉옷을 벗어던지고 예수님께 갑니다. 이것은 그가 그만큼 흥분했다는 뜻인데, 자기의 낡은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소망을 나타낸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51절..<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셨겠지만 그의 믿음을 좀 더 강화시키고 그에게 직접 소원을 말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질문하십니다. 그러자 눈먼 이는 시력 회복을 청합니다. 여기서 '스승님'이라고 번역한 말의 원문 단어는 히브리어 '랍비'가 아니라, 아람어 '랍부니'입니다. 이 말은 '랍비'보다 더 큰 존경심을 나타내는 호칭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선생님'이라고 번역했는데 적절하지 않은 번역입니다.)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말의 원문은 공동번역 성서처럼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새번역 성경처럼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즉 그의 시각장애가 선천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후천적인 시각장애, 즉 시력이 있었는데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선천적인 시각장애보다 더 절실할 것입니다.
52절..<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가거라.' 라는 말은 '이제부터 새로운 삶을 살아라.' 라는 뜻일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은 5장 34절에서 하혈증을 앓던 여인에게도 하신 말씀인데, 여기서는 더욱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혈증을 앓던 여인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일이 먼저 있었지만, 바르티매오의 경우에는 모든 것이 믿음에 달려 있고, 예수님의 말씀이 치유의 동작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한마디 말씀으로 바르티매오는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베푼 자비와 기적은 시력회복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는 시력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을 통해서 예수님과 더욱 가까이 결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믿고 제자가 되었다는 것만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각오로 뒤따라 나섰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따라가고 있지만,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의 죽음의 길에 합류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그의 눈을 뜨게 했고, 구원을 얻게 했고, 예수님을 따르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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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오른쪽과 왼쪽" - '영광과 권력'
명예와 영광과 권력을 싫어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바로 그것 때문에, 그 세속의 영광, 명예 때문에 체세포 복제를 성공시켰다는 거짓 논문을 발표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선거철만 되면 정치꾼들이 수없이 늘어납니다. 그것을 내가 얻지 못한다면 남도 얻지 못하게 헐뜯고 비방하고 음모를 꾸미는 일들이 생깁니다.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 등으로 끝없이 권력을 지키려다가 쫓겨났습니다. 박정희는 삼선개헌과 유신독재로 그것을 지키려다가 총에 맞았습니다. 전두환은 4.13조치로 어떻게 좀 해보려다가 6월 항쟁을 맞았습니다. 그들이 남긴 교훈은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헤로데는 연설을 잘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연설을 들은 군중이 "저것은 신의 목소리이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천벌을 받아 죽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사도 12,21-23).
존경과 대우를 받고 싶어서 신학교에 가고 수도원에 입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은 존경과 대우가 아니라 끝없어 보이는 고행입니다.
주교가 되고 추기경이 되고 교황이 되면 영광스럽고 명예로울까요? 위로 올라갈수록 내려가야 할 깊이는 더욱 깊어지고, 그것은 점점 더 무거운 십자가로 변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명예, 영광, 권력은 허망한 것이고, 쫏겨나거나 총에 맞을 일만 늘어날 뿐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