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서 11장>1절-33절
<1절-11절 :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제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타니아에 숙소를 정해 놓으시고, 낮 동안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활동하시다가 날이 저물면 베타니아로 가십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활동 기록은 현장 취재기사일 수는 없고, 마르코가 여러 전승을 모아서 편집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가고,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1절-11절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록인데,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순례자가 아니라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1절..<그들이 예루살렘 곧 올리브 산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이 구절은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올리브 산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에 이르렀을 때' 라고 바꿔야 합니다. 예리코쪽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게 되면 베타니아 마을과 올리브 산을 거치게 되는데,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3Km정도 떨어진 마을이고, 벳파게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올리브 산의 기슭에 있었던 마을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예수님의 여행 순서는 베타니아, 벳파게, 올리브 산, 예루살렘의 순서인데 성경에 반대로 기록된 것은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타니아에 숙소를 정하시고, 이제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위해 두 제자를 보내어 준비를 시킵니다. 심부름꾼을 두 사람 보내는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른 것입니다. 두 제자는 아마도 베드로와 요한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루카복음 22장 8절에서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보낸 두 제자가 베드로와 요한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절..<말씀하셨다. "너희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 '너희 맞은 쪽 동네'는 '벳파게'입니다. 지금 베타니아에 계신 예수님께서 벳파게로 두 제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곳에 들어가면 어린 나귀 한 마리를 보게 될 것이다.' 라고 마치 예언을 하듯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서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 놓으신 것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제자들에게 지시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라는 표현은 즈카르야서 9장 9절과 창세기 49장 11절에서 온 표현입니다. 즈카르야서 9장 9절은 메시아의 행차를 예언한 것이고, 창세기 49장 11절은 메시아의 출현을 예언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실현시키려고 하시는데, 이것은 예루살렘 입성을 하는 데 있어서도 하느님의 뜻만을 따르셨음을 나타냅니다.
고대 세계에서 종교적으로 짐승을 사용할 때 항상 중요한 것은 그 짐승의 순결이었습니다. 여기서 선택된 새끼 나귀(어린 나귀)는 아직 사람을 태워본 일이 없는 순결한 나귀였기 때문에 메시아를 태우기에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께서 '겸손한 메시아'이시기 때문에 말을 타지 않고, 구약성경의 예언을 따라 새끼 나귀를 타셨다고 해석합니다. 여기서 '어린 나귀'는 겸손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반대로 '말'은 전쟁과 교만을 상징합니다.)
3절..<누가 너희에게 '왜 그러는 거요?' 하거든, '주님께서 필요하셔서 그러는데 곧 이리로 돌려보내신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예수님께서는 나귀의 주인이 나귀를 왜 끌고 가느냐고 묻는 것에 대해 대답할 말까지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모든 일에 대해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존칭입니다. 즉 예수님은 메시아이시고 만물의 주님(주인님)이시기 때문에 새끼 나귀 정도는 쉽게 징발할 수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곧 돌려보낸다고 예고하게 함으로써 남의 소유물을 부당하게 갈취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십니다.
4절..<그들이 가서 보니, 과연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바깥 길 쪽으로 난 문 곁에 매여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것을 푸는데,>--어린 나귀가 바깥 길 쪽으로 난 문 곁에 매여 있었다고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이것은 두 제자가 어린 나귀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아주 쉽게 찾았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나귀를 묶은 끈을 풀고 있습니다.
5절..<거기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이, "왜 그 어린 나귀를 푸는 거요?" 하고 물었다.>--역시 예수님 말씀대로 나귀 주인으로 생각되는 사람과 그 곁에 있던 사람들이 나귀를 끌고 가는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 여기서 '왜 그 어린 나귀를 푸는 거요?' 라는 말은, 왜 남의 나귀를 끌고 가느냐고 묻는 뜻과 왜 탈 수도 없는 어린 나귀를 끌고 가느냐고 묻는 뜻이 모두 들어 있는 말입니다.
6절..<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말하였더니 그들이 막지 않았다.>--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미리 일러주신 대로 대답하고, 나귀 주인은 나귀를 끌고 가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나귀 주인이 예수님을 위해 미리 나귀를 준비한 것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고, 어떤 청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만큼 예수님께 호감이나 존경심을 품고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7절..<제자들은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시자,>--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였기 때문에 나귀 등에는 안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안장 대신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고, 예수님께서 그 위에 올라앉으십니다.
8절..<많은 이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들에서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이나 잎이 많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아놓는 것은 원래 왕의 즉위식 때 왕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 하던 일이었습니다(2열왕 9,13). 지금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예수님을 왕이신 메시아로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왕의 즉위식 때 겉옷을 펴놓는 것은 왕좌에 이르는 계단이나 짧은 길에서 하던 일이고, 나뭇가지를 깔아놓는 것은 야외의 넓은 지역에서 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예수님의 행렬은 실제로 왕좌에 오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구분 없이 그냥 깔아놓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은 예수님의 거동을 보고 곧 메시아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몹시 흥분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되어서 왕이나 개선장군에게 하는 존경의 표현을 예수님께 바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행렬을 함께 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마중 나온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갈릴래아에서부터 온 사람들과, 과월절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서는 올리브 산에서 야영하던 일부 순례자들이었을 것입니다(루카 19,37). (예루살렘 시민들이 예수님을 마중 나와서 환영하는 행렬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9절..<그리고 앞서 가는 이들과 뒤따라가는 이들이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앞서 가는 이들과 뒤따라가는 이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가운데에 모시고 사람들이 앞뒤에서 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호산나' 라는 말은 원래는 '야훼여, 구원을 주소서(시편 118,25).' 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단순히 '만세!' 정도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메시아의 입성을 기뻐하는 환호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라는 말은 시편 118편 26절에 나오는 인사말인데, 순례 축제 때 사제가 성전 입구에 서 있다가 순례자가 오면 환영의 인사로 하던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즉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는 것을 나타내는 환호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0절..<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라는 말은 다윗의 왕정이 다시 수립되는 것을 기리는 찬송입니다. 즉 메시아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은 전혀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었는데도 군중은 예수님에게서 정치적인 해방과 독립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다윗의 나라는 세속의 정치적인 성격이 전혀 없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당시의 군중의 생각과 예수님의 가르침 사이에는 그만큼 거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만세!' 라는 말이 중간에 들어 있는데, 이 말은 원문에는 없는 말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라는 말은 하늘의 천사들도 함께 호산나를 외치라는 촉구로 해석할 수도 있고, 또는 '하느님, 구원하소서.' 라고 하느님을 향해 간청하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11절..<이윽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것을 둘러보신 다음,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타니아로 나가셨다.>--예루살렘 입성 후에 예수님 뒤를 따르며 환호하던 군중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군중이 그냥 흩어지지는 않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다시 열두 제자하고만 있게 됩니다.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서는 예루살렘 입성 후 바로 '성전 정화'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마르코 복음에서는 별다른 이야기 없이 끝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승의 차이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날의 성전 정화를 미리 준비하시려는 것처럼 성전을 모두 둘러보시고, 날이 저물자 베타니아로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숙소를 베타니아에 정하신 것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는 안전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안에서 머물지 않고 마치 출퇴근하시듯이 베타니아와 예루살렘을 왔다 갔다 하신 것은 예루살렘이 메시아를 거부하고, 죽이는 도시임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의 행렬이나 환호는 소규모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열두 제자와 예수님을 따라왔던 사람들과 일부 순례자들의 행렬이었을 뿐이고, 예루살렘 시민들과 순례자들이 모두 모인 대규모 행렬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시민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고, 당국에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또 나중에 예수님을 재판할 때에도 예루살렘 입성 행렬은 전혀 거론되지도 않았습니다. 그
래서 실제로 예수님의 입성 행렬은 의외로 소박한(초라한), 아주 작은 소규모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성도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열렬하게 고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예수님의 입성이 어마어마한 대규모 행차였던 것처럼 꾸며졌고, 또 예루살렘 시민들이 모두 예수님을 환영한 것으로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널리 알려진 예수님 영화나 드라마들도 그렇고, 오늘날 성지주일 전례도 그렇게 되어 있는데, 성경 기록과는 다르게 과장되게 꾸민 것입니다.
어떻든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1)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겸손한 임금님이시라는 것. 2)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징발할 권리가 있는 '주님'이시라는 것. 3) 이스라엘 왕의 즉위식 때 사람들이 자기 겉옷을 깔았듯이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 4) 예수님은 시편에 예언된 대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는 것. 5) 예수님은 다윗의 나라, 즉 메시아 왕국을 세우려고 오신 분이라는 것 등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2절-14절 :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또 이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실제 있었던 일처럼 기록한(각색한) 것일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려는 목적으로 실제로 행하신 일일 수도 있습니다.
12절..<이튿날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왜 예수님께서 시장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자들도 배가 고팠는지, 아닌지,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의 숙소에서 제대로 식사를 못하셨던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배고픔을 느꼈다.' 라는 것을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유대인들, 즉 '믿음 없는 세대'에 대한 안타까움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목마르다.' 라고 하셨던 것과 비슷한 뜻이 될 것입니다.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이 16강에 진출한 후 히딩크 감독이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라고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13절..<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익기 전 사오십 일 동안 잎사귀를 달고 있고, 맏물 무화과는 5월 말경, 늦게 나오는 것은 8월 중순경에 열린다고 합니다.
따라서 지금은 확실히 무화과 철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과 순례자들은 과월절 축제 때문에 예루살렘에 와 있는데, 과월절 축제는 3월-4월 중에 열립니다.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셨다는 것은 멀리서 보기에는 잎이 무성하고 열매도 많이 달렸을 것처럼 보였다는 뜻인데, 이 말은 이스라엘이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이라는 말은 그래도 이스라엘이 뭔가 잘하고 있는 부분은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실망스럽기만 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라는 말은 성경 말씀도 잘 알고 있고, 율법도 잘 알고 있지만 제대로 실천하는 것은 없는(열매가 없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이 이 이야기를 해석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무화과 철이 아니기 때문에, 열매가 없는 것은 무화과나무의 잘못이 아닙니다. 일부 학자들은 무화과 철인데도 열매가 없었다고 해야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된다고 생각해서 이 구절은 후대의 누군가가 잘못 덧붙인 구절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이 구절을 빼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근거는 없습니다. (마태오복음 21장 18절-22절에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있는데, 마태오복음에는 무화과 철이 아니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어색하고 이야기 전개가 부자연스럽다고 해서 그런 구절을 마음대로 빼버리면 하느님 말씀을 인간들이 자기 입맛에 맞게 조작하고 변질시키는 일이 됩니다.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대로 해석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입니다.
어떻든 이 구절이 없다고 해도 무화과 철이 아닌 것은 분명하니까 이 구절을 뺀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서 마르코가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는 구절을 적어 넣은 것은 열매가 없는 것은 무화과나무의 잘못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상징적으로)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4절..<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르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향해서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다.' 라고 저주하십니다. 즉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무화과나무로서의 존재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라고 저주하시는데, 뒤의 20절-21절을 보면 그 무화과나무는 예수님의 저주로 뿌리째 말라서 죽게 됩니다. 열매를 맺을 철이 아니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을 상징으로 본다면 그 뜻은 분명합니다.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는 믿음 없는 이스라엘이고, 예수님의 저주를 받아 말라버린 나무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버림받은 이스라엘을 뜻하며, 이스라엘은 더 이상 선택받은 백성이 되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무화과나무 입장에서는 열매 맺을 철이 아니라고 변명하거나 항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에는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생활에 따로 정해진 날이나 시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을 중단해도 좋은 휴가나 방학이나 휴식 시간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주일미사 시간에만 신자인 것이 아니라, 일 년 내내 365일 24시간 신자로 살아야 합니다. 기도 시간으로 정해져 있는 시간에만 기도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입으로 외우는 기도만 기도인 것은 아닙니다.
또 성당에서만 신자인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신앙인으로 살아야 하고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참된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이용해서 상징적인 행동으로 가르친 교훈은 당시의 이스라엘뿐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심각하고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주일에만 신앙생활을 하고, 성당에서만 신자로 행동하면서 그 나머지 시간과 다른 장소에서는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라는 것입니다.
또 이 이야기를 예수님의 부르심과 연결해서 생각한다면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 날과 시간은 예수님께서 정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고기를 잡고 있다가 하던 일을 멈추고 즉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하던 일을 멈춘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부르심'을 받으면 즉시 응답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라고 항의하거나 나중에 다시 불러 달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또 종말의 시간은 인간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종말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닥치게 될지 모르니까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 라는 말은 지금의 이 내용을 20절-25절의 내용과 연결시키기 위한 구절입니다. (이 이야기의 내용과 거의 비슷한 말씀이 구약성경 미카서 7장 1절-2절에 있습니다. "아, 슬프다! 나는 여름 과일을 수확한 뒤에 남은 것을 모으는 사람처럼, 포도를 딴 뒤에 지스러기를 모으는 사람처럼 되었건만, 먹을 포도송이도 없고, 내가 그토록 바랐던 햇무화과도 없구나. 경건한 이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사람들 가운데 올곧은 이는 하나도 없구나.")
<15절-19절 : 성전을 정화하시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신 것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참된 성전의 의미를 가르치기 위해서 미리 의도한 예언적이고 상징적인 행동으로 생각됩니다. 성전은 17절에서 말하는 대로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15절..<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셨다.>--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 저주 후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십니다. 아마도 11절에서 성전을 둘러보실 때 상인들을 쫓아내시려고 미리 계획하셨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곳'은 '이방인의 광장'이라고 불리는 바깥마당인데,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이방인들은 그곳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작은 뜰이나 마당이 아니라 아주 넓은, 광장이었습니다. 넓이가 475mX300m이니까 종합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광장입니다. 그 광장에서 상인들은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 때에 필요한 제물용 품목들을 팔았는데, 소, 양, 비둘기, 소금, 기름, 포도주 등이었습니다.
'환전상들'은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이 가지고 온 그리스나 로마 화폐를 이스라엘 돈으로 바꾸어주고 수수료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남자는 누구나 20세 이상이 되면 일 년에 한 번씩 성전세를 내야 했는데(탈출 30, 11-16), 이스라엘 은화 반 세겔이었습니다. 요즘의 금액으로 환산하기는 어렵고, 그냥 은화 한 닢으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성전세는 반드시 이스라엘 돈으로만 내야 했기 때문에 환전상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비둘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바치는 봉헌물이었습니다(레위 5,7). 사실 환전을 하는 일이나 제물용 품목을 파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거래는 거룩한 성전에서가 아니라 성전 밖의 다른 곳에서 했어야 하는 일입니다.
16절..<또한 아무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지 못하게 하셨다.>--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성전 마당을 가로질러 다니는 것도 못하게 하셨는데, 당시 사람들은 올리브 산에서 예루살렘 서쪽으로 가기 위해 성전을 지름길로 이용하곤 했습니다. 성전을 돌아서 가는 길과 계단이 있었지만 그것이 귀찮아서 성전을 가로질러 다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행동을 못하게 하신 것은 성전을 세속의 길거리처럼 이용하는 일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된 '물건'은 성전에서 바치는 제사에 필요한 도구를 뜻하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물건을 나르기 위해서 성전 마당을 가로질러 다니는 것을 못하게 하셨다는 것은 구약의 희생 제사를 폐지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17절..<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당시에 성전의 이방인 광장에서 장사를 하려면 성전 당국(사제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제들은 장사를 허락하는 대가로 상당히 큰 액수의 돈을 상인들에게서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상인들은 엄청나게 비싼 값을 매겨서 물품을 팔았습니다. 당시의 어떤 랍비가 은화 한 닢으로 살 수 있는 비둘기가 금화 한 닢에 팔리고 있다고 한탄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사제들이나 상인들이 모두 한통속이 되어 강도질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대교에 대해 비판하신 말씀 중에서 가장 강한 비판입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는 말은 이사야서 56장7절에서 인용한 구절입니다. '강도들의 소굴'이라는 말은 예레미야서 7장 11절에서 인용한 말입니다.
여기서 '나의 집'은 일차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이지만, 넓은 뜻으로는 교회 전체를 뜻합니다. 그래서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는 말은 일차적으로는 성전이란 온 인류가 모여서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만, 넓은 뜻으로는 하느님의 교회는 온 인류가 모여서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단순히 성전의 세속화와 부정부패를 숙청하고 개혁하신 일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하느님 예배, 도덕적 회개, 하느님 말씀의 실천을 가르치신 일이고, 하느님의 성전, 또는 교회는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온 인류가 모여서 기도하는 새로운 성전, 새로운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 일입니다.
18절..<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군중이 모두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그분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앞의 3장 6절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하고 헤로데 당원들과 모의를 했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지금 여기서는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상인들을 쫓아내신 일은 사제들에게는 금전적인 손해를 입는 일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기득권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예수님을 죽일 생각을 하게 되고, 아마도 율법학자들에게 협조를 요청했을 것입니다. 사제들은 사두가이파였고, 율법학자들은 대부분 바리사이파였습니다.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는 평소에는 서로에게 적대적이었는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일에 대해서는 협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군중이 모두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탄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군중의 감탄은 신앙심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순례자들을 상대로 바가지를 씌워서 부당이득을 취하는 상인들과 상인들을 보호하는 사제들의 부정부패를 예수님이 행동으로 비판하신 것에 대해 통쾌함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사제들은 성전의 경비병을 시켜서 예수님을 체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중이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찬성하고,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만일에 예수님을 체포한다면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폭동이 일어난다면 총독 빌라도가 군대를 끌고 와서 진압하려고 할 것이고 어떤 결과가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단순한 체포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체포는 뒤로 미룹니다. 그래서 군중은 일시적이긴 하지만 예수님을 보호해 준 방패 역할을 한 셈이 되었습니다.
성경 본문의 문장을 보면, '군중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두려워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문맥의 흐름상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지만', 군중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했다.' 라고 읽고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19절..<날이 저물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 밖으로 나갔다.>--날이 저물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시 베타니아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과 장소 변경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와 성전을 버리셨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에는 더 이상 참된 믿음과 참된 예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상인들을 쫓아내실 때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 그런 소동이 일어나는 동안 성전 경비병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또 상인들 쪽에서는 아무런 저항이 없었는지, 우리는 당시 상황에 대해서 세부적인 것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그 광장의 많은 상인들을 혼자서 모두 쫓아내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실제로는 광장의 한 부분에서만 이루어진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을 가르치기에는 충분했을 것이고, 파급효과도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의 장사꾼들을 모두 쫓아내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전이란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참된 예배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를 가르치기 위한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20절-25절 :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의 교훈>
20절-21절..(20)<이른 아침에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보았다.> (21)<베드로가 문득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스승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셋째 날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다가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전날 베타니아로 돌아갈 때에는 왜 무화과나무를 보지 못했을까? 어두워서 보지 못했는지, 다른 길로 갔기 때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마태오복음에는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저주를 받자마자 '즉시 말라 버렸다(마태 21,19).' 라고 되어 있는데, 뜻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어떻든 다음 구절에서 믿음과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시기 때문에 이 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렸다는 것은 여기서는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이야기가 앞의 12절-14절과 하나로 이어지는 이야기라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유나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설명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대목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이 배경에 있긴 하지만 전혀 다른 주제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는 믿음과 기도가 이야기의 주제로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전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대로 나무가 말라버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말을 계기로 삼아서 믿음과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새번역 성경은 '스승님'이라고 번역하고, 공동번역 성서는 '선생님'이라고 번역한 말은 원문에는 '랍비'로 되어 있습니다. '랍비'는 스승님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선생님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22절-23절..(22)<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믿어라.> (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은 올리브 산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내려가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그리고 멀리 사해가 보이는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23절에서 말하는 '이 산'은 올리브 산일 것이고, '저 바다'는 사해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을 믿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느님을 믿어라, 라는 말은 하느님의 지혜와 권능과 자비와 사랑과 섭리 등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지금 하시려는 말씀을 엄숙하게 강조하는 관용어입니다. '믿음'이란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도 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고,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됩니다.
앞의 9장 23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산더러 바다에 빠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라는 말은 예수님 특유의 과장법입니다.
그런데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라는 말은 인간의 정신력이나 염력 같은 것을 뜻하는 말은 아닙니다. 의심하지 않고 믿는 일이 하느님과 관련되지 않는다면 여기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말하는 대로' 라는 말은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여기서는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를 뜻합니다. 그런데 기도란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이어야 합니다.
24절..<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24절은 23절의 말씀을 반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도 지금 하시는 말씀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그 뜻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느님께서는 아무 기도나 다 들어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무엇이든'이라는 말에 집착해서 믿음과 기도의 힘을 남용하거나 악용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까지 하느님께 미루거나, 자기에게만 이익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해가 되는 일, 또는 자기 자신에게도 해가 되는 일에 대한 기도는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그런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리가 없습니다.
믿음과 기도는 공동체 모두의 선과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올바르게 기도했다면, 아직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받은 줄로 믿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25절..<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이 구절은 올바른 기도에 대한 보충설명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기도 자세를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는 지성소를 향해서, 다른 곳에서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서서' 기도를 했습니다. 특별한 경우에는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서 기도할 때도 있었습니다.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라는 말은 미움이나 분노 때문에 기도가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사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서나 복수를 하기 위해서 기도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것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우리에게는 용서의 의무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라는 말은, 하느님과 나의 관계는 언제나 다른 사람과 나의 관계를 포함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웃이나 형제와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다면 우리의 기도는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기복신앙'은 이웃이나 공동체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이 오직 자신의 소원성취만을 바라는 태도입니다. 그런 태도로 기도를 하는 것은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섬기는 잡신처럼 하느님을 격하시키는 불경죄를 짓는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참된 믿음과 미신을 오락가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는 미신적인 믿음에서 참된 믿음으로 돌아서는 것도 포함합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태도로 기도하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 사건을 계기로 참된 믿음의 힘과 기도에 대해서, 또 올바른 기도 태도에 대해서까지 가르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당시의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이면서 동시에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26절..일부 필사본에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이다.' 라는 26절이 있는데 대부분의 주요 필사본에는 없습니다. 이 구절은 후대의 어떤 필사자가 성경을 옮겨 적을 때, 25절의 내용만 보고 마태오복음 6장 15절을 잘못 덧붙인 것으로 생각되는 구절입니다. 그래서 26절은 성경 본문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27절-33절 :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시는 동안은 줄곧 논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논쟁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것부터 시작됩니다.
27절..<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시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의 상인들을 쫓아내신 후에도 여전히 상행위가 계속되었는지, 아니면 시장이 폐쇄되고 상거래가 중단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군중이 찬성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성전 당국이 침묵을 지켰고, 이제 예수님의 권한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것을 보면, 시장이 폐쇄되었거나 상거래가 상당히 위축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소풍 온 사람처럼 한가롭게 산책을 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성전 뜰을 거닐면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을 가르치던 중간에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이스라엘 최고의회의 의원들을 뜻합니다. 의원들이 모두 오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대표들이 왔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국의 대표자들이 공적인 자격으로 온 것입니다.
28절..<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여기서 '이런 일'이라는 말은 현재의 상황에서는 '성전정화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복음서 전체의 흐름에서 볼 때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 기적, 모든 가르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가? 누가 권한을 주었는가? 라는 질문은, 스승이 누구냐? 라는 질문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인된 랍비 자격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질문은, '권한을 직접 하느님에게서 받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증명할 무슨 증거가 있는가?' 라는 뜻입니다. 지금 의회 의원들이 노리는 것은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로 폭로하고,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을 하시든지 간에 예수님의 대답에서 고발할 구실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29절-30절..(29)<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30)<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질문에 반문으로 대답하는 것은 당시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던 논쟁 방식이었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시고 대답 대신 반문을 하십니다. 만일에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느님에게서 권한을 받아서 한 일이라고 인정한다면, 요한의 사명도 하늘에서 온 것으로 인정해야 하고, 예수님의 사명도 하늘에서 온 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제자와 군중에게 메시아로 소개했기 때문입니다(요한 1,29-34).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에 대해 질문하신 것은, 불리한 질문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의회 의원들이 예수님의 권한에 대해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하늘'이라는 말은 하느님을 뜻합니다.
31절-32절..(31)<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32)<'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의 반문은 최고의회 의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기회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지 않고 무엇이 더 유리한지 전술적인 판단을 하려고 합니다. 당시의 많은 유대 백성들은 세례자 요한을 참예언자로 인정하고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그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그를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
러나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요한을 인정하지 않았고 세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의회 의원들은 어느 쪽으로도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의 권한은 하늘에서 온 것이다.' 라고 대답한다면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은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불신앙을 드러내는 것이 되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요한을 존경하고 있는 군중이 분노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33절..<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앞의 2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질문에 먼저 의원들이 답변을 하면 예수님도 대답하겠다고 하셨고, 그것에 대해서 의원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질문에 모르겠다고 대답했으니 예수님도 대답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모르겠다는 의원들의 대답은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패배를 인정한 것이고, 백성의 지도자라는 신분에 스스로 먹칠을 한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세례자 요한의 사명과 비교한 것은 당신의 권한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알린 것입니다.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어도 믿지 못하지만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많은 가르침과 기적들을 통해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충분히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예수님을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고의회 의원들 같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믿으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끝내 믿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상황입니다. 지금도 아무리 놀라운 일을 보여주어도, 아무리 하느님 말씀을 들려주어도, 끝끝내 마음을 닫아버리고 믿음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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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약속에 대한 믿음"
어린아이가 뭔가를 사 달라고 엄마에게 떼를 쓰고 조릅니다. 엄마는 며칠 후에 사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엄마의 약속을 믿는 아이는 그 약속만으로도 갖고 싶어 하던 것을 이미 가진 것처럼 행복해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아이는 그 약속이 지켜질 때까지 계속 초조해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러다가 무슨 사정이 있어서 약속의 이행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더욱 믿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지금 당장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기도한대로 되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약속 때문에 소망이 이루어진 사람처럼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는 사람은 소망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불행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믿음을 갖고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가 이루어져야만 믿음을 갖게 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의 기도가 과연 기도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약속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희망을 가질 수 있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내가 정한 시간, 내가 정한 방법대로 내 희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무조건 일방적으로 하느님께 강요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노예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종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