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서 9장 1절-50절
1절..<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학자들은 이 구절을 앞의 8장 38절과 연결되어 있는 말씀이 아니고 앞뒤 대목과 관계없이 독립되어 있는 말씀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 하셨다.' 라는 말은 앞의 구절과 연결하기 위한 연결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엄숙하게 선언할 때 사용하는 관용어입니다. 여기서 '진실로' 라는 말의 원문 단어는 '아멘'입니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이라는 말은 종말에 하느님의 다스림이(통치권이) 온전하게 실현되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시대 때에 사도들과 신자들은 종말이 임박했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기대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종말은 그때에도, 지금까지도, 아직도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가운데에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2절-9절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제자들이 본 것이 바로 1절의 예수님 말씀이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이나 종말이 아니라 이방인들 사이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성장, 발전해가는 모습, 또 낡은 질서가 무너지고, 예루살렘이 무너진 그 폐허 위에 다시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도 있습니다.그렇게 해석한다면 예수님 말씀대로 제자들 중에 일부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다스림이 실현되는 것을 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절-10절 :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예수님께서는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두려워하기만 하는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2절..<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여기서 '엿새 뒤에'는 8장 31절에서 수난과 부활을 처음 예고하신 때부터 계산해서 '엿새 뒤'였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탈출기 24장 15절-16절을 보면,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올라가서 엿새 동안 기다렸고, 이렛날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엿새 뒤'는 바로 그 내용과 관련된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엿새'는 하느님의 계시를 기다리는 데 필요한 시간이고, 이렛날은 하느님의 계시가 내리는 날을 상징할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들이었고, 늘 중요한 사건의 목격자였고, 증인이었습니다(5,37). 여기서 말하는 '높은 산'이 정확하게 어느 산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대체로 나자렛 동남쪽에 있는 높이 562m의 '타보르산'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시는 것을 제자들이 직접 목격했음을 나타냅니다. 어떻게 변모하셨는지는 3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3절..<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예수님의 옷이 하얗게 빛났다는 말은 사실상 예수님의 모습 전체가 하얗게 빛났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라는 말은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 즉 하느님만이 보여주실 수 있는,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났다는 뜻입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눈부시게' 라는 말이 더 있는데, 그것은 뜻을 살리기 위해서 번역자가 보충한 말입니다.) 여기서 '하얗다.' 라는 말은 흰색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눈부심'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흰 옷'은 하늘나라의 옷을 상징합니다.) 탈출기 34장 29절-35절을 보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난 모세도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느님의 영광을 받아서 빛이 난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빛을 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동안 감추고 계셨던 하느님으로서의 광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4절..<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눈 것도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일의 일부입니다. 구약성경에 모세는 모압 땅에서 죽어서 그곳에 묻힌 것으로 되어 있고(신명 34,5-6),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2열왕 2,11).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모두 죽지 않고 승천해서 하늘에서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이고, 엘리야는 예언자들의 대표자입니다. 두 사람은 구약시대를 대표하는 천상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메시아의 선구자로 생각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구약과 신약이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율법과 예언이 그리스도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즉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고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카복음에는 두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대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9,31). 그러나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대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화 내용보다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사실 자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5절..<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베드로가 갑자기 나서서 초막을 짓겠다고 제안합니다. '초막'은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 광야를 떠돌면서 지냈던 시절의 생활을 회상하기 위해 초막절 축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나뭇가지와 풀로 엮은 초막을 가리킵니다. 지금 베드로가 만들겠다는 초막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한 것입니다. 즉 자신은 그 옆에서 노숙을 해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지낼 수만 있다면 자신은 노숙을 해도 상관없다는,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에서 하는 말입니다.(여기서 새번역 성경은 '스승님'이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 성서는 '선생님'이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에는 '랍비'로 되어 있습니다. '스승님'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선생님'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6절..<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베드로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는 것은 마르코가 해석으로 덧붙인 말입니다. 즉 베드로의 말은 예수님의 영광, 천상의 행복만 생각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는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상태에 머물러 있기만을 바랐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는 것은 무서워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천상적인 일을 접하는 인간들의 반응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감동, 전율, 경외심 등이 섞인 두려움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종교적인 두려움, 또는 감동에 사로잡혀서 자기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불쑥 그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7절..<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구름'이 그들을 덮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직접 나타나셨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제자들입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소개(확인)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유일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메시아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명심해서 듣고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8절..<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갑작스럽게 변모가 끝나고, 제자들은 현실로 돌아옵니다. 제자들이 황홀한 상태에서 벗어나서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즉 모세도 엘리야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십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마음 깊이 새겼고, 늘 회상했고, 신자들에게도 알려주었습니다(2베드 1,16-18). (예수님께서는 수난 예고를 듣고 낙담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길이 십자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서 그 길을 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끝에는 부활이 있고, 승리가 있고,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냥 주저앉아 포기하고,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사는 동안 십자가를 만나더라도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말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9절..<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올바로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겪고 난 다음 이 될 것입니다.그리고 그때 가서야 비로소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즉 부활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고난, 죽음, 부활로 이어진 길을 걸었고, 그 길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분입니다. 만일에 영광스러운 변모를 미리 발설하면 제자들이 수난의 괴로움을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고, 일반 군중도 메시아에 관해 그릇된 생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10절..<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제자들은 예수님의 침묵 명령을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부활을 믿긴 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부활은 세상 끝 날에 이루어지는 부활이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활이 그들이 생각한대로 세상 끝 날의 부활이라면 그때에는 예수님의 변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멀지 않은 시일에 이루어질 죽음과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직접 물어볼 용기는 없어서 자기들끼리 서로 물어보고 있습니다.
<11절-13절 : 엘리야의 재림>
11절..<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유대인들은 종말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화해시키고, 열두 지파를 재건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엘리야가 오지 않았고, 열두 지파의 재건도 실현되지 않았으니 예수님이 종말의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는 유대인들의 그런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또 변모 때에 잠깐 모습을 나타낸 엘리야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것들을 생각해볼 때에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그리고 엘리야가 미리 와서 그런 일들을 한다면 메시아가 고난당하거나 죽을 일은 없지 않겠느냐는 것도 제자들의 질문 속에 들어 있습니다.
12절..<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라는 말은 말라키서 3장 23절-24절의 내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엘리야에 관한 유대인들의 생각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에서 나온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메시아의 고난도 예언되어 있습니다(시편 22편, 이사야 53장 등). 그런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백성들을 화해시키고 열두 지파를 재건한다면,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해(회개)하고,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고 있다면, 메시아를 죽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 즉 메시아가 고난과 멸시를 당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따라서 엘리야에 관한 예언과 메시아에 관한 예언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예언이 같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무슨 까닭인지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13절..<사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사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너희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대로 엘리야는 이미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제멋대로 다루었다.' 라는 말은 박해하고 죽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입니다(마태 17,13).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으로 왔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화해와 재건을 하려고 했지만 그 일을 하기도 전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로서의 일을 해내지 못한 것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종말의 선구자이며 메시아의 선구자로 온 요한(엘리야)이 죽음을 당했으니 이제 메시아이신 예수님도 죽음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말라키서의 예언이 틀렸거나 빗나간 것인가? 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라키서의 예언은 이미 세례자 요한에게서 실현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엘리야로서의 사명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거부했기 때문에), 그 사명이 완성되지 못하고 좌절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들은 지금도 말라키서의 예언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아직도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고, 세례자 요한을 다시 온 엘리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예언은 글자 그대로 '무조건' 이루어지는 자동 프로그램이 아니라 인간들의 응답과 노력이 합해져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해진 운명대로 어쩔 수 없이 죽음의 길을 가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 능동적으로 가신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 미리 아신다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고, 운명을 바꿀 기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정해진 운명은 없습니다.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그 운명을 만들어갈 때 늘 하느님을 향해서, 하느님 방향으로 만들어가고, 그 방향으로 난 길을 걸어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이 십자가뿐인 길이라고 해도.
<14절-29절 : 어떤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내쫓으시다>
14절..<그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보니, 그 제자들이 군중에게 둘러싸여 율법 학자들과 논쟁하고 있었다.>--예수님과 세 제자가 산에서 내려와 다른 제자들에게 갔을 때, 제자들은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그것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큰 군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원문대로 하면 공동번역 성서가 맞습니다. '큰 군중', 또는 '많은 군중'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논쟁의 내용(원인)은 뒤의 18절에 나오는 대로 제자들이 악령을 쫓아내지 못한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 계셨기 때문에 앓는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는 예수님 대신 제자들에게 아들을 고쳐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 아들을 고치지 못하자,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적대적이었던 율법학자들에게는 예수님을 헐뜯고 비난할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율법학자들 사이에 예수님의 능력에 관해서, 또는 사도들의 능력에 관해서 논쟁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15절..<마침 군중이 모두 예수님을 보고는 몹시 놀라며 달려와 인사하였다.>--모여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거나,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병 고치는 기적을 행하시기를 기대하고, 또 사도들과 율법학자들의 논쟁을 끝낼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는 몹시 놀라며 달려와' 인사를 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기쁘고 반갑게 맞이했다는 뜻입니다.
16절-18절..(16)<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저들과 무슨 논쟁을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7)<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 "스승님, 벙어리 영이 들린 제 아들을 스승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18)<어디에서건 그 영이 아이를 사로잡기만 하면 거꾸러뜨립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 그래서 스승님의 제자들에게 저 영을 쫓아내 달라고 하였지만, 그들은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무슨 논쟁을 하느냐?' 라고 예수님이 물으셔도 제자들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악령을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할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을 대신해서 아이의 아버지가 대답을 합니다. 그는 자기의 아들이 '벙어리 영이 들린' 상태라고 하면서 또 다른 증세를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묘사되어 있는 증세는 '간질병'의 증세와 거의 같은 것입니다. 그 당시엔 일반적으로 병을 죄에 대한 벌이나 악마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간질병은 특히 더 악령에 의한 병으로 생각했습니다. 벙어리 영이 들렸다는 것은 악령이 들려서 말을 못한 다는 뜻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아들을 고쳐달라고 요청하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부탁했는데 제자들은 이 병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여기서 새번역 성경이 '스승님'이라고 번역한 말은 원문대로 '선생님'으로 바꿔야 합니다.
19절..<그러자 예수님께서,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하고 그들에게 이르셨다.>--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세대'에 대해 탄식을 하시는데, 예수님의 탄식과 꾸중은 제자들과 율법학자들과 군중 모두를 향한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많은 마귀들을 쫓아내고 많은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었던' 사람들입니다(6,13). 그랬던 제자들이 간질병에 걸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 것은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믿음이 모자라서였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를 포함해서 모여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의 상태가 아주 심각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정도 중병은 기적으로도 고칠 수 없을 것이라고 미리 단정적으로 생각했거나, 또는 의심을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율법학자들은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시비를 걸어왔을 것입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언제까지나 지상에 머물러 계실 수는 없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문제를 전부 다 직접 해결해 주실 수는 없는 일이고, 언젠가는 제자들과 신자들이 믿음과 기도를 통해 스스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의 믿음은 너무 더디게 자라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믿으려고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 없는 세대'에 대해 슬픔과 노여움을 느끼셨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 위해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20절..<그래서 사람들이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 영은 예수님을 보자 곧바로 아이를 뒤흔들어 댔다. 아이는 땅에 쓰러져 거품을 흘리며 뒹굴었다.>--악령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예수님에게 저항하려고 합니다. 악령의 저항은 아이의 발작으로 나타납니다. 악령은 예수님께 직접 저항하지는 못하고 자기가 사로잡은 아이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21절-22절..(21)<예수님께서 그 아버지에게,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대답하였다. "어릴 적부터입니다.> (22)<저 영이 자주 아이를 죽이려고 불 속으로도, 물속으로도 내던졌습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예수님과 아이 아버지의 대화에서 아이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드러납 니다. 아이는 어려서부터 간질병을 앓았고, 물이나 불 가까이에서 발작을 일으켜 죽을 뻔한 일도 많았습니다. (악령이 아이를 죽이려고 불과 물속으로 던졌다고 표현한 것은 그렇게 보였다는 뜻입니다. 아이 아버지가 악령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아이의 아버지는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라고 간청하면서도 '하실 수 있으면'이라는 조건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이미 제자들이 실패한 것을 보았음을 나타내고, 그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아이의 병이 너무 심각해서 다른 병자들을 많이 고쳤던 예수님이라도 이 아이의 병은 고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23절..<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고 말씀하시자,>--갑자기 이야기의 중심이 병든 아이에게서 아버지에게로 옮겨집니다. 여기서 병든 아이 당사자의 믿음이 아니라 아이 아버지의 믿음이 문제가 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믿음이 내 병을 고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 아버지의 태도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는 불가능이란 없기 때문에 그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믿음이란 전능하신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 즉 하느님을 무조건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병든 아이를 고쳐줄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병든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그가 믿음을 제대로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라는 말씀은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버리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또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 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24절..<아이 아버지가 곧바로,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외쳤다.>--아이 아버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자신에게 참된 믿음이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동시에 그는 예수님만이 자기의 부족한 신앙을 도와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곧바로' 외쳤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한 깨달음과 그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곧바로' 라는 말이 없는데, 잘못된 번역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라는 말은 아이 아버지가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것을 인정하면서 자신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하는 말입니다. 이 말을 다시 정리하면, '저는 믿습니다.' 라는 말은 '믿겠습니다.' 라는 뜻이고, 믿음이 부족하긴 하지만 믿으려고 노력할 테니까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으로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의 번역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성경 원문에는 그런 가정법의 표현이 전혀 없고, '저의 불신앙을 도와주십시오.'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아이 아버지는 아들의 병에 대해서보다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것에 대해서 더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 다시 이야기의 중심이 아이 아버지에게서 아이에게로 옮겨지고, 예수님께서 아이를 고쳐주시는데, 아이 아버지가 믿음을 갖게 되었거나, 적어도 믿으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믿음이란 '믿으려는 노력'에서 시작되고, 많은 경우에 '믿음'과 '믿으려는 노력'을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신앙과 불신앙을 함께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신앙 속에 불신앙이 숨어 있고, 불신앙 속에도 신앙이 숨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신앙만'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브라함 이후 모든 위대한 신앙인들은 믿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하느님 쪽에 서서 믿으려고 애써 노력하는 것', 그것이 곧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5절..<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떼를 지어 달려드는 것을 보시고 더러운 영을 꾸짖으며 말씀하셨다.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아마도 예수님께서 아이 아버지와 대화를 하는 동안에 예수님과 아이와 아이 아버지는 병자를 고치는 다른 이야기에서처럼 사람들과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새로운 기대, 또는 호기심 등의 이유로 예수님 주변에 모여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모여들자 더 이상의 논쟁이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바로 악령을 추방하십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보면 악령의 정체는 '말 못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 악령'이고, 간질병 발작 등의 다른 증세는 악령에 의한 부수적인 것이며, 아이는 장애자가 아니라 악령 때문에 일시적으로 청각과 언어 능력을 잃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라는 말은 예수님 자신의 권위와 능력으로 악령에게 명령한다는 뜻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이 말을 '들어라.' 라고 번역했는데 적절하지 않은 번역입니다.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은 악령이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반복해서 아이를 괴롭혔음을 나타냅니다. 또 예수님이 악령을 일시적으로 쫓아낸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쫓아낸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26절..<그러자 그 영이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마구 뒤흔들어 놓고 나가니, 아이는 죽은 것처럼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아이가 죽었구나." 하였다.>--악령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저항을 하고나서 마지못해 떠납니다. 예수님에 대한 악령의 저항은 아이를 한 번 더 괴롭히는 것이었고, 아이는 탈진해서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악령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능력에는 관심이 없고,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도 없고, 믿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군중은 예수님이 악령을 쫓아냈다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고, 예수님이 아이를 죽게 했다는 생각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27절..<그러나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났다.>--예수님께서는 죽은 것처럼 보이는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이 장면은 5장 41절에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아이는 야이로의 딸처럼 '일어났다.'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죽음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세력을 지배하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28절..<그 뒤에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분께 따로,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군중의 반응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놀라기는 했겠지만 여전히 '믿음 없는 세대'로 남아 흩어졌을 것입니다. 완전히 회복된 아이와 아이 아버지의 반응은 굳이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이야기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로 넘어갑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들어간 집이 어디에 있는 누구의 집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예수님과 제자들만 남게 된 상황이라는 것만 나타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자기들은 그 영을 쫓아내지 못했는지, 즉 자신들의 무능력함에 대해 조심스럽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모든 신앙인의 의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 의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기도'입니다.)
29절..<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그러한 것'이라는 말은 '그런 부류' 라는 말인데 '그런 악마들의 종류'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악령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악령에게 사로잡히는 모습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그런 것들을 나가게 할 수 없다고 대답하십니다. '기도'는 다른 사람을 돕는 어떤 마술적인 수단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도는 '하느님을 향한(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고, '하느님의 전능하신 힘을 기대하고 요청하는 겸손한 청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이 병자를 고치거나 죽은 사람을 살리거나 악마를 쫓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권능을 갖고 계셨으면서도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악령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자기들이 받은 권한에 너무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병자를 고치고 악마를 쫓아낸 적이 있었던 사도들이지만 그 권한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고, 자신들은 하느님의 연장(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든, 아니면 다른 어떤 능력을 행사하든 간에 필요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 기도, 겸손입니다. 만일에 그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고 착각하게 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병원에 가지 않고도 기도로만 병을 고칠 수 있느냐, 없느냐? 간질병이 악령에 의한 것이냐? 등, 성경 내용을 두고 의학(과학)적으로 접근해서 논쟁을 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일입니다. 현대의학은 많은 질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밝혀냈고, 앞으로도 더욱 발전하겠지만, 그것을 두고 잘난 체 할 것은 없고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병에 걸렸다면 우선 먼저 병원에 가서 치료하고 약을 먹는 것이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러나 항상 인간의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환자를 살리는 것은 의사가 아니라 의사의 손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2천 년 전에 비해서 의학이 많이 발달한 지금은 단순히 병을 고치기 위한 목적으로만 기도하는 일이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병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까지 줄어든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병자 치료에 있어서 의사들의 역할은 더욱 커지고 교회의 역할은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역할(비중)까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병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고, 또 그 병자들을 치료하는 의사, 간호사, 약사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사람의 힘으로는(의학의 힘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린 병자를 위해서라면 더욱더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적은 옛날에만 있었던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기적은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30절-32절 :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30절..<그들이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그곳을 떠나' 라는 말에서 '그곳'은 앞의 28절에서 말한 '집'일 것입니다.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다.' 라는 말은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8장 27절 이후에는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뒤의 33절에 카파르나움의 집이 언급되고 있긴 한데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의 집에 머무신 것은 그곳에서 활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지나가다가 잠깐 머무신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라는 말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는 길을 불필요하게 방해받지 않기를 바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그냥 지나쳐 가신 것은 갈릴래아를 등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입니다.
31절..<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예수님께서 당신의 여행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 것은 제자들에게만 따로 가르침을 주고 싶어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에 제자들에게만 따로, 좀 더 많은 가르침을 주고 싶어 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알려주십니다. 두 번째 예고는 첫 번째보다 덜 자세하지만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 라는 새로운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미래의 고난을 나타내는 성서적 표현입니다. 다윗은 죄를 짓고 나서 사람의 손에 넘겨지기보다는 하느님의 손에 맡겨지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크시니, 사람 손에 당하는 것보다 주님 손에 당하는 것이 낫겠소(2사무 24,14)." 집회서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인간의 손에 내맡기지 말고 주님의 손에 자신을 내맡기자. 정녕 그분의 위엄이 크신 것처럼 그분의 자비도 크시다(집회 2,18)."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지만 인간은 용서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의 손에 넘겨져서 그들 손에 죽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운명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라는 말은 이미 앞의 8장 31절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32절..<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광스럽게 등장할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지금은 두 번째로 듣는 말씀인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깊이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질문했다가는 베드로처럼 꾸중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해서 묻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수난 예고 말씀을 듣는 제자들의 심정은 몹시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제자들의 뒤따름은 능동적인 추종과 순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아직은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위대한 순교자로 거듭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성령강림을 겪은 후의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에 걸친 수난 예고에서 수난, 죽음, 부활을 동시에 예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수난 예고이면서 동시에 '부활 예고' 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수난과 죽음만 생각하고 부활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입니다.시험에 합격했을 때의 영광은 전혀 실감나지 않는데 그 전에 해야 할 시험공부는 바로 눈 앞의 현실이기 때문에 그것만 걱정하고 있는 심리 같은 것. 수술을 하고 건강을 되찾았을 때의 기쁨은 실감나지 않고 알 수 없는 막연한 미래처럼 느껴질 뿐인데, 우선 당장 받아야 할 수술은 겁이 나고 두려워지는 심리 같은 것. 제자들에게는 부활은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막연한 미래의 일이고, 수난과 죽음은 생생한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막연한 미래의 영광보다는 현실의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앞에 놓여 있는 현실의 고통과 멀게 느껴지는 미래의 행복 사이에서 계속 갈등하면서 결단을 해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만일에 고통이 두려워서 피해버린다면, 고통도 없겠지만 행복도 없습니다. 후회만 남게 될 것입니다.)
<33절-37절 : 가장 큰사람>
33절-34절..(33)<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예수님과 제자들은 카파르나움을 지나게 되자 잠시 머무르게 되는데, 그들이 머문 집은 아마도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길에서 서로 다투는 것을 보셨고, 제자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 그분을 따라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인간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고, 서열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사도단 안에서의 서열을 두고 다투었을 수도 있고, 또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서열을 두고 다투었을 수도 있습니다.) '큰사람'이라는 말은 '높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다툰 이유를 묻자 제자들은 당황해서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들 스스로도 그런 문제로 다툰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것입니다.
35절..<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자리에 앉으셔서' 라는 말은 스승으로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셨음을 뜻합니다. '열두 제자를 불러'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특별한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 하느님 나라 백성의 대표인 열두 명을 가까이 불렀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라는 가르침은 세상의 실제 상황과는 정반대인 새로운 '법'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힘으로 다스리지만, 하느님은 자비로운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분이고,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을 섬김의 자세로 행하신 분입니다. 이제 교회의 으뜸이 될 베드로와 교회의 기둥이 될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 새로운 법에 따라 사람들을 섬기는 자세로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첫째'는 가장 높은 사람, '꼴찌'는 가장 낮은 사람, '종'은 종처럼 섬기는 사람을 뜻합니다.
36절-37절..(36)<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예수님께서는 어떤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에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더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 어린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린이를 제자들 '가운데에' 세우신 것은 당신의 가르침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공동번역 성서는 '앞에' 라고 번역했는데, 잘못된 번역입니다. '가운데에' 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어린이를 껴안으신 것은 축복과 애정의 표시입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보호받아야 할 작고 보잘것없는 이'의 상징입니다. '누구든지' 라는 말은 지금 이 가르침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 또는 미천한 사람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내 이름으로' 라는 말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라는 뜻입니다. '받아들이다.' 라는 말은 여기서는 '섬기다.'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실상 예수님을 보내신 분, 즉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힘없고 보잘것없고 천대받는 사람들의 친구이셨고, 그런 이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시는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것, 모든 이를 섬기는 자세에 대한 시청각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8절-41절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지지하는 사람이다>이 대목은 아마도 다른 때, 다른 곳에서 하신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앞의 37절의 '예수님 이름으로 어떤 사람이든 받아들여야 한다.' 라는 말씀과 비슷한 표현이 들어 있어서 편집 과정에서 지금의 위치에 놓인 것으로 추정합니다.
38절..<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 활동하던 당시나 또는 초대교회 때에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도 않고, 공동체에 속하지도 않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위대한 기적가로 생각했고, 예수님의 이름에 힘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은(또는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것을 자기들의 특권으로 생각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은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특히 요한은 다혈질적인 성격이어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는데 그는 자기가 한 일이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를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스승님'이라고 번역한 말은 원문대로 하면 '선생님'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스승님의 이름으로' 라는 말은 원문에는 '당신의 이름으로'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냈다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에 의지해서 마귀를 쫓아냈다는 뜻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해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마귀가 그 사람에게 복종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복종한 것입니다.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라는 말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다, 또는 교회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신자가 아니었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라는 말은 공동번역 성서처럼 '막았습니다.' 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우리말에서 막아 보려고 하는 것과 막는 것은 다릅니다. 막아 보려고 했다는 것은 막으려고 했지만 막지 못했다는 뜻으로도 되는데 원문에는 그런 뜻이 없습니다.
39절-40절..(39)<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예수님께서는 요한을 꾸짖지는 않으셨지만, 그런 일을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이 말씀은 행위 속에 숨어 있는 의향을 더 생각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낸 '그 어떤 사람'은 어찌 되었든 간에 예수님의 권위와 힘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사도들과 같은 신앙은 없더라도 예수님을 통해 행사되는 하느님의 능력은 믿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킨다면, 즉 마귀가 쫓겨나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의 믿음은 더욱 커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그가 신앙을 갖거나 공동체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적어도 예수님을 나쁘게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교회의 적대자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예수님을 나쁘게 말한다면 자기가 한 일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라는 말은 분명한 적대자가 아닌 모든 사람은 동조자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넓은 분이시고 개방적인 교회관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우리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이다.', 즉 '우리를 지지하지 않으면 모두 우리의 적이다.' 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에 일부 종 파에서 타 종교에 대해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우리' 라는 복수 일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하나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동시에 사도들과 모든 신앙인들은 예수님처럼 개방적인 교회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례를 받아야만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속 좁은 태도이고,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기는 짓입니다.)
41절..<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엄숙하게 선언할 때의 관용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의 40절에서는 '우리' 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여기서는 '너희' 라고 표현하십니다. 이것은 '너희', 즉 사도들과 교회에 주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즉 당신의 열린 마음을 본받고 실천하라고 사도들과 교회에게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말인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는 신앙인을 뜻합니다. 여기서 '물 한 잔'은 사소한 도움을 뜻합니다.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은 최후의 심판 때에 틀림없이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아니면서도 사도들을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특히 선교활동을 할 때 그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또 종교박해 때에 신자가 아니면서도 박해를 받고 있는 신자들을 도와준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그 도움이 '물 한 잔'처럼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선의에서 나온 자비라면 최후의 심판 때에 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42절-48절 :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라>
42절..<"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넓은 뜻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죄짓게 하다.' 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의 그리스어 단어는 원래는 '걸려 넘어지게 하다.' 라는 단어인데 보통 '죄짓게 하다.' 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한다는 말은 죄를 짓도록 유혹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나라도' 라는 말은 '한 사람이라도' 라는 뜻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이 말을 '누구에게든지 단 한 번이라도' 라고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유혹해서 죄짓게 하는 죄'에 대한 벌은 바다에 던져질 만큼 중대한 죄라고 하십니다. 이 구절은 일차적으로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이간질하지 말라는 경고 말씀인데, 넓게 생각하면 다른 사람의 믿음을 흔들고, 죄를 짓게 하고, 배교하도록 만드는 모든 언행에 대한 경고입니다. (유혹뿐만 아니라 무심코 하는 말 한마디라도.) (교회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 새로 신자가 된 사람들에게 흔히 하는 말, '그건 해도 괜찮아.' 라는 말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그 '괜찮아.' 라는 한마디 말 때문에 더 큰 죄를 지을 수도 있고, 믿음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율법에 집착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너무 융통성만 강조하다가 원칙 자체를 훼손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벌이 너무나도 무서워서 차라리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남을 죄짓게 하는 죄는 큰 죄이고, 그 죄에 대한 벌도 무섭다는 것입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서 사형시키는 방법은 로마제국의 사형 방법 중 하나였는데, 유대인들은 십자가형보다도 더 싫어했다고 전해집니다. 그것은 시체를 땅에 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정상적인 장례식을 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43절..<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이 구절은 죄를 짓게 만드는 자기 내부의 유혹에 대한 경고 말씀입니다. 여기서 손과 발과 눈은 자기 내부에서 오는 모든 유혹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손(발, 눈)이 죄짓게 한다는 말은 성적인 욕망이나 육체적인 본능과 충동 때문에 죄를 짓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내부에서 오는 모든 유혹, 충동, 욕망 등을 다 가리키고, 그런 것들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을 모두 뜻합니다. '그것을 잘라 버려라.' 라는 말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절대로 죄를 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가르침은 신체를 경시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두 손(두 발,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간다는 말은 참아야 할 것을 참지 못하고 즐기고 싶은 쾌락을 다 즐긴 다음에 지옥에 간다는 뜻입니다. '불구자로(절름발이로, 외눈박이로)' 생명에 들어간다는 말은 내부에서 오는 유혹과 욕망과 충동을 참고 극복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생명'은 '하늘나라에서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잃기 때문에 죄를 피하기 위해 그만큼 큰 노력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지옥'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가야 하는 곳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은 하느님의 영원한 형벌을 상징합니다.
(44절..일부 필사본에는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라는 44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요 필사본에는 없기 때문에 성경 본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45절..<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45절은 43절과 같은 뜻입니다.
(46절..일부 필사본에는 44절처럼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라는 46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도 역시 대부분의 주요 필사본에는 없기 때문에 성경 본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47절..<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47절은 43절, 45절과 같은 뜻입니다. 표현만 조금 바꾸어서 같은 가르침을 세 번이나 반복한 것은 그만큼 중요하고 엄격한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호하고 철저하게 유혹과 죄를 물리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한 것입니다.
48절..<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이 구절은 지옥이 어떤 곳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저주와 형벌'에 관한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서 '지옥'으로 번역되어 있는 말은 그리스어로 '게헨나'인데, 이 말은 원래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벤 힌놈 골짜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기원전 622년 유다 왕 요시아가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그곳에서 '몰렉'이라는 이름의 신에게 어린이들을 제물로 불살라 바쳤는데, 요시아 왕이 그런 짓을 못하게 금지시켰습니다(2열왕 23,10).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우상 신에게 제물로 바친 일 때문에 그곳은 '저주받은 골짜기'가 되었고, 나중에는 종말에 죄인들이 갈 곳(지옥)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지옥 불'에 대한 표현도 거기에서 생겼습니다.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라는 말은 이사야서 66장 24절에서 온 표현인데, 악인들이 받을 영원한 벌을 상징합니다.
<49절-50절 : 소금>
49절..<"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이 구절은 앞의 구절들과는 연결되지 않는, 독립되어 있는 말씀인데, 무슨 뜻인지 해석하기가 몹시 어려운 구절입니다. 불과 소금을 상징으로 본다면, 불은 불순물을 태우고, 소금은 부패를 막기 때문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라는 말은 '종말에 앞서 모두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정도의 뜻으로 해석됩니다.
50절..<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여기서 '소금'은 제자들이 가져야 할 신앙, 사명감, 희생, 봉사정신 등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소금이 짠맛을 잃는다는 것은 제자들이 가져야 할 신앙이나 정신을 잃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라는 말은 제자들이 그런 것들을 잃게 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라는 구절에 들어 있는 '소금'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것으로 봅니다. 앞의 34절에서 제자들끼리 누가 더 높으냐? 라고 다툰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 특히 사랑의 계명을 잘 실천하여 화목하게(평화롭게) 지내라는 충고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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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손이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손도, 발도, 눈도 아닙니다.
우리를 죄짓게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고 생각입니다.
죄짓게 하는 그 마음이라는 것을 잘라버릴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많은 종교들이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지만,
모범답안은 많고 정답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에도 행동 지침은 셀 수도 없이 많이 나오지만,
어떻게 해야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지, 그 방법은 잘 안 보입니다.
마음이 몸을 지배하고, 마음이 몸을 죄짓게 한다면,
반대로 몸을 다스려서 마음도 다스릴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봅니다.
죄짓게 하는 상황을 피하고, 죄짓는 행동을 피하고,
죄가 되는 말을 하지 않고, 듣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죄짓게 하는 모든 즐거움을 피하려고 노력하면,
결국엔 마음도 다스릴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 산다면 인생이 참으로 재미없게 될 것입니다.
눈을 즐겁게 하고 손을 즐겁게 하고 발을 즐겁게 하는 것들을 다 피하면
정말 삭막하고 무미건조한 생활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세속이 주는 즐거움 대신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을 더 찾아야 합니다.
아주 쉬운 예로,
세속의 유행가 대신에 성가를 더 자주 부르고,
세속의 소설책 대신에 성경을 더 자주 읽고,
세속의 흥겨운 잔치 자리 대신에 미사참례를 더 자주 하고,
쓸데없는 공상 대신에 기도와 묵상을 더 자주 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은 즐겁지도 않고
재미없고 힘들기만 하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짓고 나서 후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는
재미없게 살면서도 보람과 기쁨을 느끼는 것이 더 행복한 법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