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서 12장 1절-44절> 가장 큰 계명
<1절-12절 :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앞의 11장 33절에서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라고 하시면서 답변을 하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는 12장 1절-12절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 실질적인 답변을 하십니다.
1절..<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여기서 '그들'은 앞의 11장 27절에서 등장했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 즉 최고의회 의원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뜻합니다. 울타리와 포도즙을 짜는 확과 탑은 포도밭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탑은 포도밭을 지키기 위한 망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오늘날과 같은 포도밭은 없었고, 과일나무들과 곡식을 함께 심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포도밭은 그 규모가 대단히 큰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에 토지 주인이 외국에 거주하면서 자기 소유의 토지, 즉 농장이나 과수원을 소작인들에게 맡기고 소작료를 받는 일은 흔히 있던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세상 어디에나, 그리고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으로 믿고 있는데 이 이야기처럼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실제로 멀리 떠나 계신다는 뜻은 아니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맡기시고 아담으로 하여금 동식물의 이름을 붙이고 관리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분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이 세상을 잘 관리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소작인들은 수확의 일정한 양을 토지 주인에게 소작료로 납부했는데, 당시의 소작료는 대개의 경우 수확의 절반이었다고 합니다.
2절-5절..(2)<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종 하나를 보내어,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3)<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를 붙잡아 매질하고서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4)<주인이 그들에게 다시 다른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였다.> (5)<그리고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그 종을 죽여 버렸다. 그 뒤에 또 많은 종을 보냈지만 더러는 매질하고 더러는 죽여 버렸다.>--포도밭에서 첫 소출을 거둘 때에 주인은 소작료를 받아오라고 종들을 보냅니다.
여기서 종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내는 것을 거부하면서 종들을 학대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첫째 종은 매질을 당하고 빈손으로 돌아왔고, 두 번째 종은 머리를 맞고 상처를 입고 모욕을 당합니다. 세 번째 종은 살해당하고, 그 뒤에 보낸 더 많은 종들도 같은 일을 당하게 됩니다. 소작인들의 악행이 점점 더 심해집니다.
실제로 예언자들은 거의 대부분 온갖 고초와 박해를 겪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소작인들이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고 종들을 폭행하고 죽이는데도 계속해서 다른 종들을 다시 보내는 주인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끝없는 인내와 관용을 베풀고, 마침내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내십니다.
예레미야서 7장 25절-26절에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
6절..<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사랑하는 아들'은 예수님을 뜻합니다. 아들은 종들과는 달리 전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 속의 상황만 생각한다면 주인이 아들을 보내는 것은 소작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심판하고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개시키고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라는 주인의 독백은 아들의 말을 듣고 소작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은 이미 앞의 1장 11절과 9장 7절에서 나왔었습니다.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주실 만큼 이 세상을 사랑하셨다.' 라는 것을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
" 여기서 '마지막으로' 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것이 구원을 받기 위한 마지막 기회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7절..<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소작인들은 주인의 기대와는 달리 아들을 죽이고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소작료 납부를 거부했을 뿐인데, 이제는 아예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아들이 상속자이니까 죽여 버리고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는 말은,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 주인이 죽은 것으로 추측하고 아들만 죽이면 포도밭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당시 갈릴래아 지역의 토지 주인들은 부유한 외국인들이었고, 소작인들은 갈릴래아의 가난한 농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작인들은 대부분 착취를 당했습니다.
그 당시 갈릴래아에 기반을 둔 열혈당의 주도로 일종의 독립운동 비슷하게 소작료 납부 거부운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이이야기처럼 주인과 소작인들 사이에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실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빌려왔을 뿐이고, 하느님께서는 끝없는 인내를 보이시는데, 유대인들은 갈수록 악랄해지는 모습을 묘사하는 비유입니다. 또 이야기 속에 나오는 소작인들은 주인에게서 착취를 당한 것도 아닙니다.)
만일에 이 이야기가 실제 상황이라면, 소작인들이 주인에게 맞서 싸우고, 주인의 아들과 종들을 죽이면서 자기들이 바라던 대로 포도밭을 차지하는 일이 실제로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공산주의 혁명 같은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는 달리 경찰력을 동원해서 이런 일을 해결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죽이고, 예수님까지도 죽인 것에 대해서 그들이 하느님과 맞서 싸워서 이 세상을 차지하려고 혁명을 일으킨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 번 죄를 짓게 된 인간들이 회개하지는 않고 점점 더 죄가 커지게 되는 모습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스스로 멸망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예수님은 그런 상황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의인들이 겪는 박해와 죽음에 대해 지혜서 2장 18절-20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8절..<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소작인들은 아들을 죽이고 시체를 포도밭 밖으로 던짐으로써 살인죄에 시체모독죄를 더합니다.
마태오복음 21장 39절과 루카복음 20장 15절에는 아들을 포도밭 밖으로 던진 다음에 죽인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의 순서와는 상관없이 세 복음서 모두 '포도밭 밖으로'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 밖에서 처형된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9절..<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이야기의 시점이 과거에서 미래로 바뀝니다.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엄한 벌을 내리고 질서를 바로잡을 것입니다. 주인이 소작인들에게 내릴 벌은 '없애 버리는' 것, 즉 죽음입니다.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선택과 특권을 취소하고 '다른 이들', 즉 이방인들을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으로 삼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심판은 종말의 심판이 아니고,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포도밭은 예루살렘, 또는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소작인들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유대인들, 또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가리키고, 소작료는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고 덕행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께 드려야 할 영광입니다. 종들은 예언자들과 세례자 요한이고,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다른 이들, 즉 새로운 소작인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입니다. 이처럼 비유의 뜻이 분명하긴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유대인들이나 유대 지도자들을 향한 경고로만 알아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새로운 소작인이 된 우리들 역시 성실하게 살지 못하고 앞의 소작인들처럼 행동한다면 또 다시 같은 심판과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주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소작료를 얼마나 잘 드리고 있는지, 즉 성실한 신앙생활, 선행, 이웃사랑 실천 등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를 우리도 반성해야 합니다.)
10절-11절..(10)<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11)<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한 예언으로 시편 118편 22절-23절을 인용하십니다.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라는 질문은,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인용된 구절의 뜻은, 유대인들과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집 짓는 일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돌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죽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사람의 눈에는 놀랍기만 하다는 것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집을 지을 때 시공자 이름이나 공사 날짜 등을 새겨서 일정한 곳에 앉히는 돌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새로운 성전, 새로운 교회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뜻합니다.
12절..<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최고의회 의원들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의 뜻을 알아들었지만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군중의 반응이 두려워서 그냥 떠납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이 비유의 뜻을 알아들었다고 해도 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한 이유는 두 가지였을 것입니다.
첫째는 이야기 속의 소작인들이 자기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아듣고 모욕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고, 둘째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한 것을 신성모독으로 생각했기 때문일것입니다.)최고의회 의원들이 군중을 두려워한 것은 앞의 11장 18절에서 말한 것처럼 아직은 예수님이 군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중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을 체포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의원들은 일단 예수님을 그대로 두고 떠나지만 예수님을 체포하고 죽이려는 생각을 단념한 것은 아닙니다. 잠시 뒤로 미루었을 뿐입니다.
<13절-17절 :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체포할 구실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또 다시 사람들을 보내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민감한 문제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13절..<그 뒤에 그들은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여기서 '그 뒤에' 라고 번역한 말은 원문에는 '그리고'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최고의회 의원들입니다.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트집 잡아서, 또는 말로써 함정에 빠뜨려서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최고의회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고 되어 있는데, 앞의 3장 6절에서도 바리사이들이 헤로데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지금 등장하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은 최고의회의 심부름꾼으로 온 것이지만, 평소 적대적이었던 두 당파가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는 마음이 맞았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종교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들이 합세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14절..<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여기서 '스승님'은 '선생님'으로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온 사람들이 처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찬사로 말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진실한 분이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고, 사람을 신분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는 분'으로 표현한 것은 최고의 찬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회주의자들이었고, 위선자들이었기 때문에 이 말은 진심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한 아첨일 뿐이고, 예수님을 방심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틀린 말은 아니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로마 황제에게 내는 세금에 관한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세금은 인두세(주민세)로서 어린이와 노인을 제외하고 누구나 내야만 했습니다. 유대 백성들에게 있어서 주민세는 로마에 대한 복종의 표시가 되는 것이어서 치욕과 증오를 느끼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세금은 반드시 로마 화폐로만 내야 했고, 이 세금은 황실 재정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갈릴래아 출신의 유다라는 사람이 하느님만이 유일한 통치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납세거부 운동을 했고, 무력을 사용한 독립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때 그가 만든 당이 '열혈당'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들 중에서 시몬이 열혈당 출신입니다.
어떻든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을 몹시 혐오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세금을 냈고, 바리사이들도 속으로는 고민하면서도 세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하고, 바쳐야 한다고 대답하면 민족의 배반자로 낙인찍히게 되고,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하지 않고,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하면 정치적인 반역자로 몰리게 되는 상황입니다. 글자 그대로 진퇴양난입니다.
15절..<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꿰뚫어 보시고, 왜 나를 시험하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대답을 하게 하십니다. 그들에게 돈을 가져오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황제의 돈을 사용하고 있음을 입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세금은 내기 싫어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로마 화폐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 황제를 군주로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데나리온은 로마 은화이고, 데나리온 한 닢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액수입니다.
16절..<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그들이 가져온 데나리온 은화는 어디 다른 데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것을 예수님께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은화의 앞면과 뒷면에 새겨져 있는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자기들 입으로 그것이 황제의 것이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황제의 돈을 자기들이 사용하고 있음을 스스로 밝히게 된 것입니다. 당시 사용되던 은화의 앞면에는 월계관을 쓴 황제의 흉상이 새겨져 있었고, '황제 티베리우스, 신적인 아우구스투스의 존엄한 아들'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뒷면에는 '최고의 사제' 라는 문구와 황제의 어머니 리비아의 초상과 올리브나무 가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즉 그 은화는 황제의 권력의 상징이었고, 그 돈이 사용되는 지역은 황제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돈을 사용한다는 것은 로마 황제의 권위와 지배를 인정한다는 뜻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은화에 새겨진 황제의 흉상과 황태후의 초상, 그리고 거기에 새겨진 문구들을 우상숭배라고 하여 혐오했고, 그 돈으로 세금을 내는 것도 싫어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별 의식 없이 사용했습니다. (어쩌면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는 신앙이고, 신념이고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그런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17절..<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로마 황제의 화폐를 사용하는 것은 황제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이고, 황제의 지배를 인정한다면 세금을 징수할 권리도 인정하는 것이 되고, 그러니 세금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만들고 지배하는 것 자체를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에게 복종하고 있고, 황제의 돈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뿐입니다. 로마 황제의 권위와 지배를 인정하는 것이 곧 하느님의 주권과 지배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 황제에게는 그가 만든 은화만 돌려주면 그만이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 세상 모든 사람이 전부 다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세속의 권력은 제한적이고 상대적이지만 하느님의 권력은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 권력은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하느님의 명령을 폐지하거나 하느님 공경을 금지시킬 수 없습니다. 또 자신을 신격화해서도 안 됩니다. 국가 권력은 하느님이 정한 한계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권한을 행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실제 현실에서 세속의 법과 하느님의 법이 충돌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속의 법이나 권력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세속의 법이 하느님의 법 안에 있는 것이라면(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면) 그 법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정치와 종교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니까 서로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해석하는 것은 독재자들이 자주 사용하던 방식입니다. 그러나 정치권력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을 때에만 정당성을 갖게 되고 국민에게 복종을 요구할 권리를 갖게 됩니다. 하느님이 아닌 어떤 것도, 돈이든 권력이든, 하느님과 대등한 위치에 있을 수 없고, 사람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님께 매우 감탄했다는 말은 예수님의 답변에 놀랐다는 뜻일 뿐이고, 감동을 받았다거나 공감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답변에 놀라고,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여전히 예수님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고 다음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18절-27절 : 부활 논쟁>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물러나자 이번에는 사두가이들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까다로운 문제를 내놓은 것은 예수님을 궁지에 빠뜨리려는 목적과, 또 자기들과 적대적인 바리사이들을 공격하려는 목적을 동시에 이루려는 것이었습니다.
18절..<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기원전 152년에 요나단이 왕과 대사제를 겸직하게 되자 이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평신도들이 주축이 되어서 바리사이파를 만들었고, 일부 사제들이 에쎄네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제들과 예루살렘의 유지들은 요나단 왕에게 동조하여 사두가이파를 만들었습니다. 사두가이파라는 이름은 솔로몬 시대의 대사제 '사독'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두가이파는 하나의 종파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집단이기도 했습니다.
사두가이파는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고, 죽은 이들의 부활을 부인했고, 천사의 존재도 부인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았고 내세도 부정했습니다. 또 그들 대부분은 고위직에 있었고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현존 질서를 지지하는 기득권층이었습니다.
19절..<"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여기서 '스승님'은 '선생님'으로 바꿔야 합니다.
형이 아들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규정은 신명기 25장 5절-10절에 있는데, 이 규정은 원래 재산의 상속을 보장해주려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예수님 시대에는 이 규정이 거의 시행되지 않았고, 구약시대 때에도 그냥 권고사항이었을 뿐 강제규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두가이들의 질문은 실제로 있었던 일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일부러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를 만들어서 불합리한 결론을 끌어내고, 그래서 그것을 자기들의 주장에 이용하려는 의도로 하는 질문입니다.
20절-23절..(20)<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일곱 형제가 한 여자와 차례로 결혼했다가 모두 다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차례로 죽는 일이 현실적으로는 있을 것 같지 않은 일이지만, 비슷한 이야기가 토비트서 3장 8절에 있습니다. 물론 토비트서의 여주인공 사라와 결혼한 일곱 명의 신랑이 형제간이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두가이들이 그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이 질문을 바리사이들에게 했다면, 바리사이들은 첫 번째 남편에게 그 여자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대답했을 것이고, 그러면 사두가이들은 그 대답을 물고 늘어지면서 또 다른 논쟁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사두가이들은 예수님께 질문하면서 그런 논쟁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24절..<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문제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이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이상한 문제를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도 모른다는 말은 26절에 인용되어 있는 탈출기 3장 6절을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능력도 모른다는 말은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25절..<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바리사이들은 내세에서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 등 어느 정도는 현세의 생활이 새로운 형태로 계속된다고 생각했고, 사두가이들은 부활 자체를 부정하면서 그런 생각을 비웃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세계는 이승의 연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창조되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라고 가르치십니다. 부활한 사람들의 삶은 지상에서의 삶과 전혀 다르고(장가들고 시집가는 일도 없고), 물질적인 조건과 지상적인 조건에 매이지 않는(천사들과 같은) 영적인 삶이 될 것입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4)." 자녀 출산이 결혼 목적의 전부는 아니지만, 부활한 사람들은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에 종족보존(자녀출산)이 필요 없고, 천사들처럼 영적인 삶을 살기 때문에 육체적인 성관계도 없게 될 것입니다.
결혼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일곱 남편 중에 누가 남편의 권리를 갖게 되는가? 라는 문제는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사두가이파는 천사의 존재도 부인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은 부활에 대한 가르침과 아울러 천사의 존재에 대한 가르침도 포함하는 이중적인 가르침입니다.
26절..<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사두가이들이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탈출기를 인용해서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을, 즉 부활을 증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탈출기 3장 6절은 원래는 부활에 대한 말씀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이 누구인지 밝히시면서, 죽은 조상들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을 재해석하시고 인용하십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섬긴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을 죽음 속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 능력으로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죽은 자들의 이름을 당신 자신에게 사용한 적이 없다는 것과 하느님의 약속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죽음에 의해서도 해소될 수 없다는 믿음을 근거로 해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라는 말씀은 이들 조상들이 이미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고, 장차 부활해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해석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의 책'은 모세오경을 가리킵니다. '떨기나무 대목'이라는 말은 탈출기에서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는 부분의 이름입니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장절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탈출기를 열 한 개의 항목으로 나누고 항목마다 이름을 붙였습니다.
27절..<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하느님은 죽음과 무에서 생명을 일으킬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만일 인간들의 삶이 죽음으로 끝난다면 인간의 죽음은 인간들을 하느님에게서 갈라놓는 일이 되기 때문에(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에)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이라는 믿음과 어긋나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은 죽음에 대해서도 지배력을 갖고 계시고, 죽음은 하느님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또 하느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시고, 그 하느님을 믿는 우리도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만 복을 내려주는 신도 아니고, 무속 신앙의 잡신이나 사이비 종교의 우상 같은 그런 신도 아니고, 죽으면 우리와의 관계가 끊어지는 그런 신도 아니고, 우리가 살아 있을 때에나 죽은 후에도 늘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는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항상 하느님 앞에서 살아 있고(영혼불멸), 언젠가는 부활해서 하느님과 함께 지극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신앙을 비웃고 반박하기 위해서 이상한 문제를 만들어 와서 질문했던 사두가이들의 생각과 태도는 아주 크게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런 신을 섬기는 종교는 종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28절-34절 : 가장 큰 계명>
28절..<율법 학자 한 사람이 이렇게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과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실 때, 율법학자 한 사람이 그 토론을 듣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바리사이파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다가왔다는 말은, 예수님의 답변에 놀랐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 22장 35절을 보면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했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시험하려고 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것은 같은 내용인데 전승 과정에서 생긴 차이일 수도 있고, 다른 곳에서 다른 율법학자가 같은 질문을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율법학자의 질문은 예수님을 시험하거나 논쟁을 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학문적인(교리적인) 토론을 위한 질문입니다. 그 당시 율법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은 율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자주 토론을 했었는데, 이제 그 질문을 예수님께 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율법 조항은 613개였는데, 그중에 365개 조항은 금지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248개 조항은 적극적인 실천 명령이었습니다. (365는 1년의 날수입니다. 248은 인간의 신체기관 수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맞춘 수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은 613개 조항 중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 조항인지, 또는 가장 첫 번째 계명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자주 토론을 했습니다.
29절-30절..(29)<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첫째가는 계명을 신명기 6장 4절-5절로 대답하십니다. 신명기 6장 4절-5절은 유대교에서 '셰마' 라고 부르는 신앙고백문의 첫 부분인데, 모든 이스라엘 남자는 아침과 저녁에 이 신앙고백문을 낭송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구를 양피지에 적어서 작은 갑에 넣어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 구절은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라는 유일신 사상을 강조하고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내용을 담은 계명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라는 말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정신을 다하고' 라는 말은 신명기에는 없는데, 마르코가 덧붙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정신'은 '이해력'을 나타냅니다. '힘을 다하여' 라는 말에서 '힘'은 '영혼의 전체적인 힘'을 나타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힘과 능력을 가지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일에 대한 최고의 표현입니다.
31절..<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율법학자는 첫째가는 계명에 대해서만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둘째가는 계명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둘째가는 계명은 레위기 19장 18절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은 동족인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온 인류, 모든 사람으로 확대했습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이웃은 곧 자기 자신이니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고,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 무슨 이유가 없는 것처럼 이웃에 대해서도 무조건, 이유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라는 말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첫째, 둘째라고 구분한다고 해도 두 가지 사랑이 똑같이 가장 큰 계명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두 사랑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나타낸 말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는 이웃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 사랑을 실천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고,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2절-33절..(32)<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여기서 '스승님'은 '선생님'으로 바꿔야 합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면서 결론을 내립니다. 그는 하느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면서, 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제물보다 더 가치가 있고 중요하다고 덧붙인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신을 제대로 알아듣고 이해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번제'는 황소, 숫양, 숫염소, 숫비둘기 등을 잡아서 가죽만 빼고 나머지는 전부 태우는 제사인데 적어도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오후에 지냈습니다. '희생제(친교제)'는 암수 구별 없이, 소, 양, 염소를 잡아서 기름기는 태우고, 가슴과 오른쪽 다리는 사제가 차지하며, 나머지는 제물 봉헌자가 가족, 친지와 함께 나누어 먹는 제사인데 하느님과 친교하는 뜻으로 바쳤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제물보다 훨씬 더 낫다는 말은 성전 제사의 완전 폐지를 뜻하는 말은 아니지만, 그 가치를 큰 폭으로 격하시킨 것입니다.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느님께 바치는 모든 전례와 제사보다 훨씬 더 앞서고 중요하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당시의 유대교를 비판하는 말이지만, 오늘날의 천주교회도 많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34절..<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예수님께서는 그 율법학자를 칭찬하십니다. 그가 '슬기롭게' 대답했다는 것은 총명하고 분별력 있게 대답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라고 칭찬하신 말은 '너는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고 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율법학자에 대해 그런 판단을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는 권위가 있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 중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칭찬하신 것은 다른 율법학자들을 비판하고, 공격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뒤에는'이라는 말은 '첫째가는 계명에 대한 토론'(12,28-34)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앞의 11장 27절-33절의 '권한에 대한 질문', 12장 13절-17절의 '세금에 대한 논쟁', 12장 18절-27절의 '부활에 대한 논쟁' 등을 모두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논쟁과 토론 뒤에는 아무도 감히 예수님께 질문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라는 말은 바리사이나 헤로데 당원이나 사두가이나 율법학자들이 모두 예수님에게 압도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질문도 없게 되었고, 논쟁도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시게 됩니다.
<35절-37절 : 다윗의 자손이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35절..<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논쟁은 끝이 나고, 이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일반 백성들을 가르치시면서,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스스로 답변을 제시하십니다.
'어찌하여... 말하느냐?' 라는 말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 라는 뜻입니다. 즉 뒤의 3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을 지목하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율법학자들은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특별히 지목하신 것으로 생각되고, 실제로는 모든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메시아'로 번역되어 있는 말은 원문에는 '그리스도'로 되어 있습니다. 뜻은 같지만 원문의 '그리스도'를 일부러 '메시아'로 번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말로 '구세주' 라고 번역하든지, 아니면 그냥 '그리스도' 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구세주를 나타낼 때 사용하던 호칭 중에서 대표적인 호칭인데, 다윗 왕실의 후손 중에서 이스라엘을 재건할 왕, 즉 이스라엘의 구세주가 태어날 것이라는 믿음에서 생긴 호칭입니다.
'다윗의 자손' 외에도 '임마누엘, 평화의 왕, 사람의 아들, 메시아, 그리스도' 등의 호칭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구세주를 '다윗의 자손'으로 표현하면서 다윗 왕실의 후손 중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이 태어나서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또 온 세계의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가 되는 왕국을 건설해주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36절..<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예수님께서는 시편 110편 1절을 구세주에 관한 예언으로 해석하고 인용하십니다.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라는 말은 '다윗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쓴 시편에 이런 말이 있다.' 라는 뜻입니다.
당시에는 시편 전부를 다윗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썼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 라는 말은 '야훼 하느님께서' 라는 뜻입니다.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라는 말은 '내 구세주께 말씀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라는 말은 야훼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당신의 오른쪽 자리로 높여 주셨다는 뜻입니다. '너의 원수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박해하고 배척한 자들입니다.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라는 말은 적대자들을 발아래 굴복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는 적대자들을 굴복시키고 세상의 통치권을 장악할 것이며 하느님의 오른쪽 자리로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다윗이 예언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 자신이 예언한 구세주는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지상적인 왕이 아니라 초월적인 뜻을 가진 왕이며 그 왕국은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영원한 하느님의 왕국이라는 것입니다.
37절..<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여기서 '메시아를, 메시아가' 라고 번역한 말은 원문에는 '그를, 그가'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공동번역 성서처럼 '그리스도를, 그리스도가'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다윗 스스로 그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라는 말은, '다윗 자신이 그리스도를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신 분, 즉 하느님의 아들로 높여 불렀는데' 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라는 말은 '구세주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다윗이 '주님'이라고 불렀던 분이기 때문에, '다윗보다 더 높은, 초월적인 존재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세주를 다윗의 자손이라는 인간적인 혈통으로만 한정지어서 생각할 수 있느냐?', 또는 '구세주를 어떻게 지상적인 왕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겠느냐?'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질문만 하시고 대답은 청중이 각자 생각하도록 하십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리스도는 다윗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고, 다윗이 주님이라고 부른 분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두 가지 특성을 모두 갖고 계신 분이다.'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다윗의 주님'이라는 신성(神性)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혈통과 인성(人性)을 모두 갖고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다면 나자렛 예수가 바로 그분인가?'에 대해서는 각자 생각하도록 숙제로 남기셨습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라는 번역은 많이 어색합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꺼이 경청하였다, 귀를 기울였다, 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35절-37절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로마서 1장 3절-4절,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구절은 바로 이 대목을 해설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이승에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부활한 후에는 예수님 이 오히려 다윗의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는 당신 자신이 곧 다윗의 주님, 그리스도라고 직접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뒤의 14장 62절에서는 대사제가 '당신이 메시아요?' 라고 묻는 말에 '그렇다.' 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리스도는 단순히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하기 위한, 이스라엘만을 위한 구세주가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구세주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만일에 이스라엘 왕국만을 재건하는 구세주라면 왕실의 후손들이나 귀족들 같은 기득권층에게는 반가운 일이겠지만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다지 반가울 것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구세주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면 누구든지 희망을 갖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만일에 광복절이 조선 왕실과 왕권이 회복된 날이었다면,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날이 기쁜 날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백성이 광복절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날이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날이면서 동시에 참으로 왕정 지배에서 벗어나서 민주국가가 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38절-40절 :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38절..<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여기서 예수님께서 비판하시는 율법학자들은 거짓 신앙인의 표본이고, 다음 대목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는 참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라는 말은, 율법학자들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라는 말은 율법학자들의 겉치레와 허영심을 비판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축일에 두루마기처럼 긴 예복을 입었는데, 율법학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긴 예복을 입었습니다.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라는 말은 율법학자들의 교만을 비판하는 말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장터 같은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가도 율법학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면 일손을 멈추고 '랍비(선생님)', 또는 압바(아버지)' 라고 부르면서 공손하게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그렇게 인사 받는 것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39절..<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이 구절은 율법학자들의 우월감과 교만과 자만심을 비판하는 말입니다. 회당에서 일반인은 성경보관소를 향해 앉았고, 율법학자들은 그 보관소를 등지고 사람들을 향해서 앉았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이라는 구절을 38절에 붙여서 번역했는데, 원문에는 39절로 되어 있습니다. 왜 공동번역 성서가 이 구절을 38절로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 율법학자들이 잔칫집에 가면 사람들은 그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여겨서 그들을 윗자리에 모셨습니다. 잔치 때에는 가장이나 잔치 주인의 옆자리가 가장 명예로운 윗자리였습니다. 율법학자들 사이에서 식탁의 서열은 예수님 시대 때에는 명성에 따라 정해졌고, 나중에는 나이에 따라 정해졌습니다.
명성에 따라(유명한 정도에 따라) 서열이 정해진다면,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면 자존심이 많이 상할 것입니다. 어떻든 율법학자들은 자기들이 회당에서나 잔치 때에 높은 자리, 윗자리에 앉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그것을 즐겼습니다.
40절..<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여기서 말하고 있는 '과부'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불우이웃'입니다. 당시 과부들은 대체로 가난하고 불쌍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 지식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법률문제에 관한 상담자 역할을 했는데, 그 대가로 많은 돈을 받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행동이라고 비판하십니다. 이것은 그들의 '탐욕'에 대한 비판입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라는 말은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을 비판하신 말씀이 아니라 '남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길게 기도하는 '위선'을 비판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느님과 가깝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길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기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척 하는 것이고, 겉으로만 열심한 척 하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학자들 중에도 실제로 경건하고 겸손하고 착한 사람도 있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율법학자들은 교만과 탐욕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라고 경고하십니다. 이 경고는 그런 자들은 모두 종말의 심판 때에 남들보다 더 엄한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하느님을 모독하고 사람들을 속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엄한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41절-44절 : 가난한 과부의 헌금>
41절-42절..(41)<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앞에서 비판한 율법학자들과는 정반대로 가난한 과부가 진실한 신앙인의 모범으로 제시됩니다. 과월절이 되면 다른 때보다 헌금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여자들은 성전 경내 '여인들의 구역'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곳에는 나팔 모양을 한 헌금함 13개가 있었습니다. 헌금함들은 헌금 목적대로 구분되었는데, 그중 열세 번째 헌금함은 특별한 지향 없이 자발적으로 내는 헌금을 넣는 헌금함이었습니다.
전후 상황을 볼 때, 아마도 과부의 헌금도 바로 이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돈은 하느님께 바치는 번제물을 마련하는 비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헌금함에 직접 돈을 넣은 것은 아니고, 사제에게 돈의 액수와 헌금 목적을 말하면서 돈을 내면, 사제는 지정한 헌금함에 그 돈을 넣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 액수와 목적을 들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일부러 세심하게 관찰하신 것 같지는 않고, '헌금함 맞은쪽'에 있는 계단에 앉아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이 보인 것 같습니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헌금할 때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동전 두 닢을 내는 것이 보였고, 그것을 계기로 제자들에게 새로운 교훈을 가르치십니다. '렙톤'은 그리스의 동전 중에서 가장 액수가 작은 동전입니다. '콰드란스'는 로마의 동전 중에서 가장 액수가 작은 동전입니다. 마르코는 렙톤 두 닢은 콰드란스 한 닢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렙톤 한 닢의 액수는 데나리온의 128분의 1입니다.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됩니다. 그 과부에게 렙톤 두 개는 하루치 생활비입니다(44절). 그는 렙톤 두 개 중에서 한 개만 내고 한 개는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는데,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바쳤습니다.
43절-44절..(43)<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당신의 말씀을 더욱 엄숙하게 강조하게 위해서 사용하신 관용어입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라는 말은, 겉으로 보이는 액수는 작지만 그 가난한 과부가 바친 헌금의 가치는 다른 사람들이 바친 헌금의 가치보다 더 크다는 뜻입니다.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큰돈을 헌금한다고 생각하면서(그것도 공개적으로 하면서) 아마도 자부심과 우월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큰돈을 헌금했다고 해도 그들의 풍족함은 여전히 유지됩니다.
즉 헌금을 했다고 해서 그들의 풍족함이 전혀 줄어들지도 않고, 그들은 여전히 부자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모두 다' 헌금했습니다. 여기서 '생활비'는 하루치 식비를 뜻합니다. 생활비를 모두 다 헌금했기 때문에 그 과부는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더 궁핍해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생활비 자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이유는 있는 것을 '전부 다' 바쳤다는 사실보다는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헌신과 사랑'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 과부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위해서 자기 자신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모든 것을, 즉 자기 자신을 바친 것입니다. 또 그 과부가 식사도 하지 않고 굶으면서 그날의 식비를 모두 바쳤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다음 날의 식비를 바쳤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과부가 그날만 살고 다음 날부터 굶어죽으려고 작정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과부가 다음 날의 끼니를 걱정하지도 않고 모두 바칠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이고,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모두 맡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마태 6,34)." 라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한 대표적인 모범사례가 될 것입니다. 그 과부가 보여준 하느님에 대한 믿음, 사랑, 헌신은 액수로 환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과부는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믿음'을 보여주었고,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바치는 헌신과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앞의 30절에서 나왔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제대로 실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하느님께 얼마나 바쳤는지 보다 자기 것으로 얼마나 남겨 놓았는지를 반성하라는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부자들은 하느님께 바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남겨 놓은 것이 훨씬 더 많았고, 가난한 과부는 자기 것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고,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바쳤습니다. 그래서 그 가난한 과부가 가장 많이 바친 것입니다.) (사랑이란 가난한 과부가 보여준 것처럼 '자기의 모든 것을 주면서, 자기 것은 남겨 놓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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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사랑에 대한 반성"
성경이라는 책은 맨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라는 '말씀'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 우리에게 베풀어주시고, 우리를 보살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 그 자체를 기록한 책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사랑을 말씀이 아니라, 행동으로, 복음으로, 기적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사랑을 말로만 하고 있습니다. 연인들을 보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랑한다고 서로 반복해서 말을 해줘야 진짜 사랑인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자주 하는 것은 그만큼 사랑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믿지 못하니까 불안하고, 불안하니까 자꾸 되풀이해서 확인해야 하고......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고, 삶입니다.
하느님께서는(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반복해서 고백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행동으로, 삶으로, 사랑을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또, 성경에서는 "사랑이란 무엇이다." 라고 정의를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사랑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라고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바오로 사도가 쓴 코린토 전서 13장의 사랑의 찬가도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말한 것이 아니고, '사랑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말한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사랑이란, "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바칠 정도로, '그냥'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이웃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냥 사랑하면 됩니다.
남녀 간의(부부 간의) 사랑이 늘 힘들고, 어떤 경우에는 상처만 남고, 결국 헤어지고 마는 것은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은 너무 많이 하면서도 어떻게 할 것인지는 덜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냥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란 무엇이다.' 라고 정의를 내리는 대신에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랑이란 무엇인지, 사랑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친구나 형제 간의 사랑, 애인이나 부부 간의 사랑, 그 무엇이든 근본은 모두 같다고 생각합니다.
"너를 위해서 내가 죽는(죽어주는) 것."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