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서 14장 1절-72절> 예수님의 수난사

2015. 3. 16. 오전 9:3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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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서 14장]   예수님의 수난사

 이제부터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수난의 길은 고통스럽고 고독한 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버렸고,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의 증오가 예수님에게 쏟아집니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감정을 억제하고 객관적으로 예수님의 최후를 전하고 있습니다.

 

<1절-2절 :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다>

1절..<파스카와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일까 궁리하고 있었다.>--파스카, 즉 과월절은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탈출 12장). 시기는 니산달(3월-4월) 14일-15일입니다. 무교절, 즉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축제도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축제인데 과월절에 이어서 니산달 15일부터 21일까지 지냈습니다.

원래는 서로 다른 축제인데, 사실상 같은 축제로 간주되었습니다. 과월절은 '어린 양'을 먹는 축제이고, 무교절은 과월절 다음 날부터 7일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축제입니다. 누룩을 넣은 빵은 과월절 전날까지 집에서 모두 없애야 했습니다.

'이틀 전'이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의 성주간 전례대로 하면 성주간 수요일입니다. 그런데 사고방식의 차이인지, 시간 계산법의 차이인지, 하여간에 여기서 '이틀 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하루 전'입니다.여기서 말하고 있는 '수석 사제들'은 현직 대사제, 전직 대사제, 중견 사제들을 모두 합해서 가리키는 말입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대사제들'로 되어 있는데, '수석 사제들'이 더 적절한 번역입니다.)

원래 대사제는 한 명이고 종신직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대사제를 파직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전직 대사제는 한나스였고, 현직 대사제는 카야파였는데 두 사람 모두 대사제라고 불렀습니다.  대사제는 18,000여 명의 사제들과 레위인들의 우두머리였고, 최고의회의 의장이었습니다. 사제들은 사두가이파에 속했고, 율법학자들은 대부분 바리사이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두 파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속임수를 써서 예수를 붙잡아 죽일까 궁리하고 있었다.' 라는 말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 모르게 예수님을 체포해서 죽일까 궁리하고 있었다.' 라는 뜻입니다.

 당시의 유대교 규정에는, 순례 축제 기간에는 어떤 범인이라도 공개적으로 체포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속임수를 써서 몰래 잡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은 그 음모의 불법성과 부당함을 그들 자신도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2절..<그러면서 "백성이 소동을 일으킬지 모르니 축제 기간에는 안 된다." 하고 말하였다.>--당시에 대축제 때가 되면 많은 군중이 모이게 되고,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군중심리가 합해져서 소요사태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백성의 소동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들의 음모를 백성들이 막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폭동이 일어나면 로마 총독이 군대를 파견해서 진압하게 될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자기들의 정치적인 기득권을 잃게 되지 않을까, 라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군중이 모이는 축제 기간은 피하기로 했는데, 실제로 일의 진행 과정을 보면 예수님은 다음날, 즉 과월절에 체포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수난 과정에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3절-9절 :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

 이야기가 갑자기 바뀌어 베타니아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데, 아마도 유다가 배반하기로 결심한 것이 그곳에서의 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3절..<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마침 식탁에 앉아 계시는데, 어떤 여자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예리코 방향으로 3Km쯤 떨어진 마을로서 올리브 산 동쪽 기슭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 후에 베타니아에 숙소를 정하셨습니다(11,11-12). 그 숙소가 라자로와 마르타 남매의 집일 수도 있고, 여기서 말하는 시몬의 집일 수도 있습니다.

'나병 환자 시몬'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나병 외에도 온갖 피부병을 모두 나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시몬은 과거에 나병이나 어떤 피부병을 앓다가 예수님에 의해 치유된 사람일 것입니다.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마침 식탁에 앉아 계시는데'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의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절을 보면 라자로도손님으로 와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이 라자로와 마르타의 친척집이라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당시에 남자들의 식사 자리에 시중드는 사람이 아닌 여자는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떤 여자가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여기서는 '어떤 여자' 라고 했는데, 요한복음 12장 3절에는 라자로와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로 되어 있습니다.

'나르드 향유'는 인도의 히말라야 산맥에서 자라는 나르드 나무의 뿌리나 잎사귀에서 뽑은 향유로서 값이 비쌌습니다. '순'(순수한) 나르드 향유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에 불량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도산이 아닌 다른 지역의 나르드 향유는 값이 쌌고 품질이 떨어졌습니다. '옥합'은 목이 긴 병으로 되어 있었을 것이고, 마리아는 그 옥합의 목을 깨뜨렸을 것입니다.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린 것은 향유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붓겠다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식사 전에 손님에게 발을 씻을 물과 씻은 뒤에 바를 기름을 주거나또는 종을 시켜서 손님의 발을 씻어주고 기름을 발라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식사 도중에 여자가 들어와서 향유를 손님의 머리에 붓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입니다. 그 여자가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은 예수님에 대한 큰 존경과 사랑을 표시한 것입니다.

4절..<몇 사람이 불쾌해하며 저희끼리 말하였다. "왜 저렇게 향유를 허투루 쓰는가?>--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향유의 향기만으로도 그것이 얼마나 값비싼 향유인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여자의 행동을 낭비라고 생각하면서 불쾌해합니다. 그만큼 향유가 비싼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비난은 직접적으로는 여자를 향한 것이지만, 간접적으로는 그런 행동을 허락하신 예수님을 향한 것입니다

5절..<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러면서 그 여자를 나무랐다.>--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래서 삼백 데나리온은 대단히 큰 액수입니다. 그 돈이면 사람들의 말처럼 확실히 많은수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말하는 '자선'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가 없이 돈을 주는 것을 뜻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자선을 높이 평가했고, 유대인들은 대체로 자선을 잘했습니다. 특히 과월절 기간에는 자선이 더욱 강조되었고, 사람들은 자선을 많이 실행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이 더욱더 불쾌해하면서 그 여자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6절..<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가만 두어라. 왜 괴롭히느냐?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 여자를 괴롭히지 말고 가만 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옹호하시는 것은 그 여자가 예수님에게 '좋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좋은 일'이라는 말은 '선행'을 뜻합니다. 유대교에서 말하는 '자선'은 살아 있는 가난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고, '선행'은 살아 있는 사람, 죽은 사람,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모두에게 하는 좋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가 한 일이 '자선'은 아니지만, '선행'이라고 하십니다.

7절..<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으니, 너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에게 잘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으니, 너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에게 잘해 줄 수 있다.' 라는 말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평소에 꾸준히 해야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원하기만 하면'이라는 말은 '하려고 하기만 하면'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생각하면, '너희는 평소에 가난한 이들을 잘 돕고 있는가? 이 여자를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라는 뜻이 들어 있기도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자선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니고, 미루었다가 나중에 해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자선은 평소에 꾸준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은 특별한 상황, 즉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예외적인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라는 말은, 지금은 특별한 상황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는 것을 나타냅니다.

즉 여자의 행동은 일종의 예언자적 행동입니다. (그 여자가 그런 뜻을 알고 했든지 모르고 했든지 간에 그 일에 하느님의 뜻이 작용하고 있고 예수님께서 그 뜻을 알아보신 것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여자의 행동이 뜻하는 것을 알아본다면 그것을 낭비라고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 예수님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8절..<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바른 것이다.>--뒤의 15장 46절을 보면 예수님의 시신을 급하게 안장하느라고 시신에 기름을 바르는 장례 절차를 갖추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자의 행동은 당신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는 장례 의식을 앞당겨서 행한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라는 말은 여자의 행동에는 단순히 시신에 향유를 바르는 의식을 앞당겨서 행한 것 이상의 뜻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 여자(마리아)에게는 예수의 죽음을 막을 힘도 없었고,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있는 예수님께 뭔가를 해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 해 드릴 수 있는 일은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는 것뿐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부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구하기도 어려운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준비했고, 남자들만의 식사 자리였지만 망설이지 않고 들어갔고, 식사 중인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예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서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배반하기로 결심하는 유다와 아주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9절..<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엄숙하게 강조하실 때 사용하시는 관용어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등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선포되는 곳,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전해지는 곳이면 온 세상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장례 절차를 앞당겨 행한 그 여자의 행동도 함께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은 '기억하여라.' 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해서도 안 되지만, 그 여자가 예수님께 드렸던 존경과 사랑의 모범을 따라서 예수님께 드리는 공경과 예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존경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불우이웃 돕기, 자선사업, 복지사업 등도 중요하지만, 미사전례, 공적인 기도, 신심행사 등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10절-11절 :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다> 

10절과 11절은 1절-2절에 연결되는 구절들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안팎으로진행되고 있습니다. 

10절..<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수석 사제들에게 팔아넘기려고 그들을 찾아갔다.>--'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이라는 말은 배반자 유다가 사도 중의 한 명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람이 왜 예수님을 배반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2장 6절에 유다가 '도둑'이었다는 말이 나오지만, 그가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일에 유다가 처음부터 돈을 밝히는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면 예수님께서 그를 제자로 삼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유다는 중간에 변절했을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이유는 오늘날까지 수수께끼입니다.

우리는 유다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만 생각하고, 하느님 나라 대신 세속적인 왕국을 건설해주기를 기대하고 부귀영화를 꿈꾸다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다가오자 실망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이스카리옷'이라는 말은 '가리옷 사람'이라는 뜻 외에도 '거짓말쟁이, 배반자, 자객' 등의 뜻이 들어 있는 말입니다. 여기서 '팔아넘기려고' 라고 번역한 말은 원문대로 번역하면  '넘기려고'입니다. ('팔다.' 라는 뜻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적들의 손에 '넘겨 준' 일이 유다의 배반입니다. 유다는 사제들이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도록 그들을 안내하겠다고 제안했을 것입니다. '넘겨주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을 나타내는 신학적인 용어입니다. 유다는 '넘겨준 자'로 불리기도 합니다. 유다가 수석 사제들을 찾아갔다는 것은 이제 그가 사도단을 이탈했음을 나타냅니다. 즉 수석 사제들을 찾아간 일 자체가 공동체를 배반한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11절..<그들은 그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그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앞의 1절에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잡아 죽일까' 하고 궁리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하나가 자기 발로 찾아와서 예수님을 '넘겨주겠다.' 고 하자 그들은 자기들의 음모가 잘 진행된다고 생각하면서 기뻐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습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 계실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라서 사람들 모르게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마태오복음 26장 15절에는 유다가 먼저 어떤 대가를 요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제들이 먼저 돈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학자들은 마르코복음을 마태오가 고쳐 쓴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유다에게 주기로 한 돈은 '은화 서른 닢'입니다(마태 26,16).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라는 말은 사람들 모르게 은밀하게 예수님을 체포하게 할 수 있는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는 뜻입니다. (유다가 직접 예수님을 붙잡아 넘길 기회를 노린 것은 아닙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체포되고 재판받는 과정에서 계속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판 때에 유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습니다. (유다는 전적으로 자기 의지대로, 자유롭게 행동을 했고, 배반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배반은 더욱 수수께끼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이 하느님의 계획 속에 있었고, 하느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죄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나 유다 자신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결심하고, 실행한 것은 유다  자신의 자유의지로 결정하고 행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 모든 일이 하느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인간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선행으로 하느님의 상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면, 악행 때문에 벌을 받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선한 쪽으로 갈 것인지, 악한 쪽으로 갈 것인지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선행의 공로가 우리 것이라면 악행의 책임도 우리 것입니다. 자신의 행동의 책임을 하느님이나 마귀 탓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지을 자유를 주셨지만 죄를 지으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또 마귀는 우리가 죄를 짓도록 유혹하긴 하지만 그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짓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12절-16절 :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다>

12절..<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은 성주간 목요일입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밤에 최후의 만찬을 하셨고, 체포되었습니다. 안식일은 주간의 마지막 날, 즉 토요일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전날, 즉 금요일 오후에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고, 안식일 다음날, 즉 주간의 첫날(일요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요일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날짜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과월절은 니산달(3월-4월) 14일-15일로 정해져 있고(탈출 12,18), 무교절은 니산달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그해의 과월절과 안식일이 겹쳐졌다고 말하고 있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금요일은 안식일 전날이면서 동시에 과월절 준비일이었다고 말합니다(요한 19,31).

따라서 요한복음에서는 목요일의 최후의 만찬은 과월절 만찬이 아니라 그냥 이별의 만찬이 됩니다. 그러나 마르코복음에서는 목요일 밤이 무교절 첫날이었고, 최후의 만찬은 곧 과월절 만찬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요한복음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니산달은 양력 3월-4월에 해당하는데, 니산달 15일은 춘분이 지난 후에 보름달이 뜨는 날입니다. 이렇게 양력과 음력을 섞어서 사용했기 때문에 당시의 과월절도 그렇고, 오늘날의 예수님의 부활절도 해마다 날짜가 크게 바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 30년, 또는 서기 33년 봄, 과월절 무렵의 어느 금요일에 사형 당했습니다. 요일은 분명하지만 정확한 연도나 날짜는 알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니산달 14일 오후 3시경에 성전에서 파스카 양을 잡고, 해가 진 다음, 즉 니산달 15일이 되면 예루살렘 시내에서 과월절 만찬을 먹었습니다.

마르코는 로마식(현대식) 시간 계산법대로 '무교절 첫날'이라고 했지만, 유대식 시간 계산법대로 하면 '무교절 전날'입니다. 과월절(파스카)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많은 일들을 해야 했습니다. 적당한 크기의 방을 마련하고, 양을 잡고, 누룩 없는 빵을 준비하고, 식탁과 그릇 등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특정 지파에 분배되지 않고 이스라엘의 공동소유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순례자들에게 과월절 장소를 빌려줄 때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매우 관대해서 그런 전통을 잘 따랐고, 침대와 방석에 대해서도 임대료를 받지 않았습니다. 방을 빌리는 순례자들은 임대료는 내지 않았지만, 제물로 바쳤던 짐승의 가죽을 방의 주인에게 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마치 하인들이 주인에게 묻듯이 예수님께 과월절(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려야 하는지 질문하고, 예수님께서는 두 명의 제자를 보내십니다. 그래서 11장의 예루살렘 입성 때 나귀를 빌렸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스승님'으로 번역한 말은 원문에는 '당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에 있는 '관습이 있었는데' 라는 말은 원문에는 없는 말입니다.

13절..<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루카복음에서는 '제자 두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루카 22,8). '도성'은 예루살렘입니다.당시에 물을 길어 나르는 것은 여자들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물동이를 메고 가면 눈에 잘 뜨였을 것이고 제자들은 그 남자를 쉽게 만났을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물동이를 메고 가던 남자는 마르코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빌린 집의 주인은 마르코의 아버지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시내에서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를 따라가라고 하시는데, 아마도 그 남자와 제자들이 만나게 될 시간과 장소가 미리 약속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왜 처음부터 준비된 집을 가르쳐주지 않고, 이렇게 중간에서 접선을 하면서 첩보영화 같은 상황이 진행될까? 그것은 아마도 만찬 장소를 미리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즉 만찬 전에 체포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아마도 배반자 유다는 만찬이 시작될 때까지 그 장소를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14절..<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지금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시하시는 것은 방을 빌리라는 것이 아니라 파스카 음식을 먹기 위해서 미리 예약한(준비한) 방을 미리 가서 보고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즉 그 방은 예수님께서 이미 빌리신 것입니다. 여기서 '스승님'으로 번역한 말은 원문에는 '선생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떻든 집의 주인에게 '선생님께서... 물으십니다.' 하고 말하라는 지시는 그 집의 주인도 예수님의 제자였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나 그 집의 주인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시켜 방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면 집주인에게 '부탁'하는 모습이 아니라, 마치 '명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선생'으로 자처하시고, '내 제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고, ('내가 제자들과'가 아니라 '내 제자들과'로 번역해야 합니다.) '내 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집주인이 예수님의 열렬한 제자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새끼 나귀를 징발할 때처럼 주님으로서 전권을 행사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15절-16절..(15)<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 (16)<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집주인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미리 준비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들은 준비되어 있는 방에 음식을 차리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새끼 나귀를 징발할 때와 거의 비슷한 상황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도시 가옥은 보통 이층에 가장 큰 방이 있었고, 거기에서 식사를 하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했고, 그곳에서 손님을 접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원래 자리가(방석이) 깔려 있었습니다.

제자는 모든 것이 예수님 말씀대로라는 것을 확인하고, 과월절 음식을 준비합니다.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보낼 마지막 시간들을 매우 신중하게 준비하셨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7절-21절 : 제자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다>

17절..<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셨다.>--'저녁 때가 되자' 라는 말은 유대식 시간 계산법대로 하면 니산달 14일에서 15일로 날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과월절 만찬을 먹을 시간이 된 것입니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베타니아를 떠나 최후의 만찬을 하실 장소로 가십니다.

 18절..<그들이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해가 지면서 과월절 저녁이 시작되었습니다. 과월절 축제는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회상하는 식사의 형태로 진행되는데, 가장은 가족에게 어린 양과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로 식사를 하는 의미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과월절 만찬에 반드시 있어야 할 어린 양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과월절 만찬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 부분은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어떻든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엄숙하게 강조하실 때 사용하는 관용어인데, 여기서는 제자의 배반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 유다를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또는 '열둘 가운데 하나(20절)'로 지칭하면서 사도들 가운데에 배반자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강조하십니다. 이것은 그 배반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 라는 말은 시편 41편 10절,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듭니다.' 라는 구절에서 온 표현인데, 식사 공동체, 즉 가족과 같이 친밀한 공동체를 배반하는 배반자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팔아넘길 것이다.' 라는 말은 원문대로 하면 '넘길 것이다.'입니다. 넘긴다는 말은 배반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시는 것은 그가 이제라도 뉘우치고 마음을 바꿀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그의 배반 계획을   예수님이 알고 있다는 것만 말씀하십니다. 

19절..<그러자 그들은 근심하며 차례로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놀라고 당황하고 동요하면서 '저는 아니겠지요?' 라고 묻고 있습니다. '저는 아니겠지요?' 라는 말은 '나는 그럴 리가 없다.' 라는 뜻이 아니라, '혹시 그게 저입니까?'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아직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제자들 모두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 즉 스스로 자신들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20절..<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로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는 사람이다.>--'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 라는 말은 앞의 18절의 '너희 가운데 한 사람'과 같은 뜻이고, 제자이면서도 스승을 배반했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는 사람'이라는 말은 앞의 18절의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 라는 말과 같은 뜻이고, 가족처럼 친밀한 사람인데도 배반을 했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은 채소와 빵 등을 대접에 담긴 소스에 적셔 먹었습니다. 그래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는 사람'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식사 습관에서 온 표현으로 '나와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가 열두 사도 안에 있음을 분명히 밝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유다에게 거듭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떻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고통은 다른 고통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21절..<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대로 죽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뜻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라는 말은 배반자가 불행하게(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고이면서 동시에 그의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말입니다. 여기서도 '팔아넘기는'이라는 말은 원문대로 하면 '넘기는'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넘기는 그 사람!'이라는 말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배반하는 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인데, 이 말은 예수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탄식입니다. 유다도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유다에 대한 저주도 아니고,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아니고, 유다의 파멸을 예고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은 유다가 그런 선택을 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이 말에는 유다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배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정해진 길을 가셨을 것이라는 뜻이고, 유다의 배반과 그것 때문에 당하게 될 불행한 운명은 그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당하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반자의 죄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운명으로 작용하고, 그 운명을 아무도 변경할 수 없고 거부할 수 없다면, 그냥 정해진 대로 되어갈 뿐이라면, 우리 인간은 운명 앞에서 자유의지가 없는 한낱 로봇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의지로 십자가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유다는 배반을 선택하고 실행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배반의 책임은 전적으로 유다에게 있습니다. 하느님도 예수님도 유다에게 배반자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운명은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예정된 미래의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미래를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예측하고 짐작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예언은 무엇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우리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운명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에 따른 결과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수없이 나오는 멸망의 예언들과 그 예언대로 이루어진 일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고 올바르게 살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미리 경고한 것들이 현실화된 것뿐입니다. 즉 회개하면 피할 수 있었던 일인데,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한 일들입니다.)

 

<22절-26절 : 성찬례를 제정하시다>

최후의 만찬이 끝날 무렵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십니다. 

22절..<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유대인들의 식사 때에 가장은 빵에 대한 축복의 기도를(찬미를) 하고 빵을 떼어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의 관습대로 축복의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십니다.

빵을 쪼개는 것은(떼어내는 것은) 나누어주기 위한 것이고, 이 빵을 받아먹는 것은 주인이 했던 축복기도에 동참하는 것이고, 하나의 빵을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것은 공동체적 친교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서 '찬미' 라고 번역한 말은 '축복'이나  '찬양'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셨다는 말은 축복기도를 하셨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받아라.' 라는 말은 '받아먹어라.'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몸'이라는 말은 육신만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전부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는 내 몸이다.' 라는 말은 '이것은 나다.' 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주신 것은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체를 받아먹는 것은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성체를 예수님의 몸으로 알아들었고 믿어왔습니다. 빵이라는 겉모습의 형상은 그대로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인해 빵의 본질이 예수님의 몸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 성체성사의 교리입니다. 그래서 성체는 예수님의 몸을 나타내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몸이고, 예수님 자신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23절..<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유대인들은 회식 때 주식사가 끝나면 다시 하느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드리고 나서 후식으로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원래는 참석자들의 개인용 잔이 준비되는 것이 원칙인데, 여기서는 하나의 잔을 돌려가며 마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로 새롭게 맺어지는 하느님과의 계약에 참여하는 공동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24절..<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많은 사람'은 온 인류를 뜻합니다. '위하여' 라는 말은 '희생'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는 단순히 계약을 맺기 위해서가 아니고, 인류를 위한 희생으로 흘리신 피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내 계약의 피다.' 라는 말에서 '피'는 혈액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내 피' 라는 말은 '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신 것은 피를 흘리고 죽게 될 당신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주신 것입니다.  '계약의 피' 라는 말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을 때 제물로 바친 수송아지의 피를 가리킵니다(탈출 24,8).

(계약을 맺을 때 피를 사용하는 것은, 만일에 계약을 어긴다면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곧잘 우상숭배에 빠져서 계약을 깨뜨린 때가 많았습니다. 계약대로라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의 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이 새로운 계약이 '신약'입니다. 그런데 신약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계약입니다. 

25절..<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당신의 말씀을 엄숙하게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된 후에 열릴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뜻합니다. 이 말은 그날이 반드시 온다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새 포도주' 라는 말은 지상에서는 한 번도 맛보지 않은 포도주라는 뜻인데, 이 말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상징합니다.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은 포도주인데, 여기서는 파스카 음식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라는 말은, '포도주를 다시 마실  틈이 없다.' 는 뜻이고, 이 말은 당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25절의 뜻을 다시 정리하면, 죽음이 임박해 있어서 또다시 포도주를 마실 틈도 없지만, 머지않아서 하느님 나라 잔치가 열릴 것이고, 새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26절..<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이제 최후의 만찬이 끝나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겟세마니로 갑니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님과 열한 명의 제자들입니다. 유다는 그 전에 떠났을 것입니다.  (루카복음 22장 21절을 보면, 유다는 성찬례가 끝난 뒤에도 최후의 만찬 장소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13장 30절을 보면 유다는 최후의 만찬이 끝나고 예수님께서 고별 담화를 하시기 전에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간에 유다가 언제 떠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성체성사 제정 때 그 자리에 있었고, 성체를 받아먹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즉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보증 받았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하고, 성체성사의 은총이 자동적으로 발휘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성체를 주시는 예수님과 받아먹는 우리가 온 몸과 마음으로 일치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받아먹은 성체는, 또는 믿음도 없이 받아먹는 성체는 무의미합니다.) 여기서 찬미가를 불렀다는 것은 과월절 만찬이 끝난 뒤에 부르는 시편 115편-118편을   노래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이제 과월절 만찬이(최후의 만찬이) 완전히 끝났음을 나타냅니다.  '올리브 산으로 갔다.' 라는 말은 올리브 산에 있는 겟세마니 동산으로 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때에도 자주 겟세마니에서 기도를 하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겟세마니 동산은 올리브 산 서쪽 비탈에 있습니다.

 

<27절-31절 :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다> 

27절..<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체포될 때 제자들이 모두 달아난 일(50절)을 미리 예언한 것입니다.

여기에 인용되어 있는 구절은 즈카르야서 13장 7절입니다.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라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너희는 모두 걸려 넘어질 것이다.'입니다. '걸려 넘어진다.' 라는 말은 원래 '배교하다, 배신하다.' 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여기서는 유다의 배반과 같은 배반이 아니라 제자들이 예수님 수난 때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흩어져 버린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체포될 때 제자들은 겁에 질려서 예수님을 버려둔 채 도망쳤습니다. '목자를 치리니' 라는 말은 예수님이 체포된 일을 가리키고, '양들이 흩어지리라.' 라는 말은 제자들이 달아나는 일을 가리킵니다. (공동번역 성서의 '칼을 들어' 라는 말은 원문에 없는 말입니다.) 

28절..<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이 구절은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십자가가 예수님의 마지막이 아니듯이 제자들의 흩어짐도 마지막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도망친 것은 신앙이나 사랑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용기가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27절이 수난 예고라면, 28절은 부활 예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새로운 시작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다음에도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는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처음에 일을 시작했던 곳, 갈릴래아가 다시 시작하는 곳도 될 것입니다. 

29절..<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제자들이 모두 걸려 넘어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베드로는 자기만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베드로가 두 번이나 '주님'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으로 번역했는데, 원문에 없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의 힘을 믿고, 자신의 힘에 의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자기는 다르다고 말하는 태도는 이미 사도단이 해체되기 시작했음을 암시합니다. 어떻든 베드로는 이 순간에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는 다혈질적인 성격이었고, 실제로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의 장담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30절..<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당신의 말씀을 엄숙하게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오늘 이 밤'이라는 말은 하루의 시작을 저녁부터로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시간 계산방식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닭이 울기 전에'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닭이 한 번 우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마태 26,34 ; 루카 22,34 ; 요한 13,38).

그런데 마르코복음에는 '두 번 울기 전에'로 되어 있습니다. 한 번이든 두 번이든 모두 새벽의 이른 시각을 나타내지만, 첫 번째 닭 울음소리는 베드로에 대한 경고, 두 번째 닭 울음소리는 베드로의 뒤늦은 심경변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세 번이나' 라는 말은 실제로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한 것을 예언한 말이지만 이 말에는 '철저하게'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셋'은 뭔가를 더욱 강조할 때 사용하는 숫자입니다. '모른다고 하다.' 라는 말은 '관계를 끊는다.' 라는 뜻입니다. 즉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라고 하면, '나는 저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라는 뜻이 됩니다. 이 말은 유대교에서 어떤 사람을 파문하고 추방할 때 사용하던 표현입니다. 

31절..<그러자 베드로가 더욱 힘주어 장담하였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결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이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베드로는 자신만은 예외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시자 아마도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과장된 모습으로(힘주어) 장담하면서 충성을 맹세하고 예수님과 함께 죽더라도 결코 모른다고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의 말이 자만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는 모두 부끄럽게 되었지만, 베드로와 제자들의 장담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이상 아무런 말씀이 없으십니다.

여기서 '스승님'(공동번역 성서는 '주님')으로 번역한 말은 원문에는 '당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웅변보다 더 큰 울림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순교는 은총이고, 우리는 그저 겸손하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라는 가르침을 침묵을 통해 주십니다. 

(복음사가들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사도들은 교회에서 극진한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와 사도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숨김없이 기록했다는 것은 그만큼 복음서의 기록이 성실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위대한 사도이며 나중에 정말로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베드로조차도 예수님의 수난 때에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일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수없이 넘어지고 주저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처럼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또 그렇게 다시일어설 수 있습니다.)

 

<32절-42절 :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다> 

32절..<그들은 겟세마니라는 곳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하고 말씀하신 다음,>--'겟세마니'는 올리브 산의 기슭에 있는 동산입니다. '겟세마니' 라는 말은 '기름틀'이라는 뜻인데, 거기에 올리브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곳에 올리브기름을 짜는 기름집을 차렸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누군가의 소유였을 가능성이 크고, 예수님은 자주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장소는 배반자 유다도 잘 알고 있던 곳이었습니다(요한 18,2). 예수님께서는 혼자 기도하신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측근 제자 세 명을 데려가시고 다른 제자들은 뒤에 남아서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33절..<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그분께서는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증인으로 선택되었던 최측근 제자들입니다. 이번에도 세 제자는 곧 일어나게 될 일들의 증인으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았고, 예수님의 기도를 들었을 것입니다.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 라는 말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 2,1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7-8)." 

34절..<그래서 그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라는 말은, 마음이 괴롭고 불안해서, 죽는 것이 더 나을 정도라는 뜻입니다. 요나서에도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요나 4,8)."

학자들은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라는 말은 시편 42편과 43편의 내용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편 42편과 43편은 하느님께서 곁에 함께 계셔 주기를 갈망하며 바치는 탄원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이 '고난 받는 의인'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죽는 것을 무서워하고 괴로워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 죽음을 받아  들이는 이의 고난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 라는 말은,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망을 보라는 뜻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스승을 돕기 위해서, 또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내적인 깨어 있음'입니다. 지금은 시험(시련)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35절..<그런 다음 앞으로 조금 나아가 땅에 엎드리시어, 하실 수만 있으면 그 시간이 당신을 비켜 가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시며,>--'앞으로 조금 나아가'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 제자에게서 떨어져서 '혼자' 기도하셨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지금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을 것이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도의 거리였을 것입니다.

'땅에 엎드리시어'는 예수님의 겸손함과 간절한 심정을 나타냅니다. 마태오복음 26장 39절에는 '얼굴을 땅에 대고'로 되어 있고, 루카복음 22장 41절에는 '무릎을 꿇고'로 되어 있는데, 표현은 다르지만 나타내는 뜻은 모두 같습니다.

 '하실 수만 있으면'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하실 의향이 있으시면'이라는 뜻입니다.이 말은 사실상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하느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표현입니다. '그 시간'은 수난과 죽음의 시간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수난의 시간'이라고 번역했는데, '수난의' 라는 말은 원문에 없습니다.) '그 시간이 당신을 비켜 가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시며' 라는 말은 수난과 죽음을 겪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36절..<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여기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르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아람어로 '아빠'(abba)는 우리말 '아빠'와 음과 뜻이 같습니다.

이 호칭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아버지, 나의 아버지!'로 번역했는데, 원문대로 '아빠, 아버지' 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라는 말은,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뜻합니다. '잔'은 큰 불행, 즉 죽음을 뜻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잔'이라는 말은  개인이나 민족들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하느님의 분노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이 당해야 할 하느님의 분노를 대신 떠맡았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라는 말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피하게 해 달라는 청원인데,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구하실 수 있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라는 말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이 기도는 '제가 저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라고 명령어로 표현되어 있지만, 이 표현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누구의 명령을 받는 분도 아니고 허락을 받아서 일을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이 표현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하실 때 그대로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인간으로서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공포와 불안 같은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고, 그것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시지만, 이 기도는 결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저항이나 거부의 표현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셨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만나는 분은 2천 년 전의 인간 예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의 대상으로 믿고 섬기는 주님은 그리스도입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사 전례 때에는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지금 우리는 수난 이야기에서는 인간 예수를 만나고 있지만, 그 예수님이 죽음을 거쳐 부활하신 다음에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 인간이면서 하느님이신 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37절..<그러고 나서 돌아와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예수님께서 기도를 얼마나 오래 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처음부터 잠들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기도를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차츰 잠에 빠졌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왜 그렇게 피곤했는지, 얼마나 피곤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그들이 피곤해하고 잠에 빠지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유혹입니다. 즉 '피곤과 잠'도 유혹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 중에서 베드로에게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29절과 31절에서 베드로가 장담했던 말 때문일 것입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신 것은 그가 인간적으로 예수님과 가까운 사이임을 나타냅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주로 사도단의 으뜸이라는 위치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시간'은 최소한의 시간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도 있다고 장담했지만 '한 시간', 그 짧은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라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와 연결됩니다. 즉 기도를 하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38절..<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하시고,>--여기서 '유혹'이라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나게 되는일(50절),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일(66절-72절)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하는 것은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이제 곧 유혹과 시험이 닥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깨어 기도해야만 유혹과 시험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라는 말은 마음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만, 그 각오를 실천하려는 의지가 약하다는 뜻입니다. 몸이 마음을 따르게 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게 되면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39절-40절..(39)<다시 가셔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40)<그리고 다시 와 보시니 그들은 여전히 눈이 무겁게 내리 감겨 자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분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랐다.>--39절과 40절은 앞의 35절-38절의 내용을 요약해서 반복한 것입니다. (앞의 상황이 반복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나약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눈이 무겁게 내리 감겨 자고 있었다.' 라는 말은 육체적으로 몹시 피곤한 상태라는 뜻이기도 하고, 영적으로도 눈이 멀어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과월절 준비, 최후의 만찬, 배반에 대한 예고, 예수님의 여러 가지 가르침 등으로 그날 하루 피곤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피곤함을 극복해야만 할 때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랐다.' 라는 말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또 이 말에는 제자들이 아직도 상황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41절..<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되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예수님께서는 같은 기도를 세 번 하셨고, 그동안 제자들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라는 말은 꾸짖는 말씀이면서 동시에 탄식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6,31).' 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는데, 지금의 상황에서는 잠을 자고 싶은 것도, 쉬고 싶은 것도 모두 물리쳐야 할 유혹입니다.  (성목요일 전례에 철야 성체조배 순서가 있는데, 길게 할 필요도 없고, 그저 '한 시간' 동안 예수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도록 권고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한 시간 정도는 깨어 있을 수 있다는 것, 또, 깨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되었다.' 라는 말은 요즘 젊은이들 말투로 '됐거든...' 정도의 뜻입니다. '다 끝났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그만하면 넉넉하다.' 라고 번역했는데, 잘못된 번역입니다.) '시간이 되어' 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시간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시간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자유의지로 받아들이신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이고, '죄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넘어간다.' 라는 말은 죽게 된다는 뜻입니다. 

42절..<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이제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를 데리고 다른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십니다. 보름달이 떠서 밝은데도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은 '등불과 횃불'을 들고 있었고(요한 18,3), 그래서 배반자와 그일행의 모습을 멀리서도 잘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일어나 가자.' 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일어나라, 저쪽으로 가자.'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예수님께서 지금 가야 할 수난의 길을 뒤따르라는 부르심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지금은 제자들에게 뒤를 따르라고 요구해도 그들에게 그것을 기대할 상황이 아닙니다. '보라' 라는 말은 뭔가를 엄숙하게 선포할 때의 관용어인데,

 여기서는 예수님이 죄인들 손에 넘어가는 때가 바로 '지금' 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를 팔아넘길 자' 라는 말은 '나를 넘겨 줄 자'로 바꾸는 것이 적절합니다. '넘기다.' 라는 말은 배반자가 스승을 배신하고 죄인들의 손에 넘긴다는 뜻입니다. '가까이 왔다.' 라는 말은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그들이 다가왔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가오는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수동적인 복종이 아니라 당신의 자유의지로, 또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순종입니다.

 

<43절-50절 : 잡히시다> 

43절..<그러자 곧,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다가왔다. 그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도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그러자 곧,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던 말씀을 다 마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에게 더 하시려고 했던 말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유다를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 라고 표현한 것은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배반을 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즉 그의 배은망덕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배반자의 이름을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이제 배반자의 정체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최고의회 구성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보낸 무리는 최고의회가 공적으로 파견한 무리입니다. 그들이 밤에 행동한 것은 급하게 서둘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지지자들, 특히 갈릴래아에서 온 순례자들의 폭동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칼'은 정규 군인들의 무기이고, '몽둥이'는 일상적인 무기입니다. 칼을 휴대한 사람들은 최고의회 소속의 성전 경비병들이었을 것이고, 몽둥이를 들고 있는 사람들은 종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무장을 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저항할 것에 대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체포를 로마 당국에 통보했다 하더라도, 이 일은 로마 군대가 아니라 유대 당국이 독자적으로 실행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만일에 로마 군대가 개입했다면 예수님은 대사제 관저가 아니라 총독 관저로 끌려갔을 것입니다.

당시 최고의회는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을 독자적인 경찰력으로 체포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식민지  에서의 민법상의 문제나 일부 형법상의 문제를 식민지 국가의 자치에 맡겼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절을 보면 로마 군대도 함께 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 체포를 지원하는 일만 한 것으로 보입니다.) 

44절..<그분을 팔아넘길 자는,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붙잡아 잘 끌고 가시오." 하고 그들에게 미리 신호를 일러두었다.>--유다는 만찬의 방에서 나가자 곧바로 사제들에게 갔을 것입니다. 그는 만찬이 끝난 뒤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어디로 갈지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곳으로 자기가 안내를 하겠다고 했을 것입니다. 사제들은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정규 군인들과 성전 관리들과 종들을 급히 서둘러서 소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잘 모르거나, 직접 본 일이 없거나, 본 적이 있더라도 밤에 예수님을 알아보기는 어려운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을 지목할 방법을 정해야만 했고, 결국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라고 '그들에게 미리 신호를' 일러두게 됩니다. '그분을 팔아넘길 자' 라는 말은 '그분을 넘길 자'로 바꾸는 것이 적절합니다. '넘길 자' 라는 말은 '배반자' 라는 뜻입니다. '그를 붙잡아 잘 끌고 가시오.' 라는 말은 유다의 소심함, 초조함, 불안함 등의 심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45절-46절..(45)<그가 와서는 곧바로 예수님께 다가가 "스승님!" 하고 나서 입을 맞추었다.> (46)<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당시에 스승과 제자가 입맞춤으로 인사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정과 신뢰의 표시인 입맞춤이 비열한 배신의 신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스승님'으로 번역되어 있는 말은 원문에는 '랍비'로 되어 있습니다. 유다가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지목하자 군인들이 즉시 달려들어 예수님을 체포합니다. 요한복음 18장에는 군인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해서 접근도 못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마르코는 세부적인 일은 생략하고 체포 사실만 간단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47절..<그때 곁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당시 갈릴래아 순례자들은 흔히 호신용으로 칼을 휴대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칼이 있었습니다(루카 22,38).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될 때까지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뭔가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곁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막연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요한 18,10). 베드로의 칼에 귀가 잘린 '대사제의 종'의 이름은 '말코스'입니다(요한 18,10).

  여기서 '대사제의 종'은 지위를 나타내는 명칭이고, 아마도 대사제의 직속 부하로서 경비병들의 지휘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대사제가 예수님을 체포하라고 파견한 군대를 지휘했던 사람일 것입니다. 당시에는 귀를 자르는 것은 수치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루카복음 22장 5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으시면서 귀가 잘린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이것은 수난에 앞서 행하신 마지막 기적입니다. 

48절-49절..(48)<예수님께서 나서시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49)<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리된 것이다.">--전체 수난 이야기 중에서 여기서만 예수님께서 자신을 변호하십니다.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라는 말은, 나는 강도가 아니기 때문에 나를 잡기 위해서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올 필요는 없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예수님께 가해지는 모욕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지만'이라는 말은 '내가 공공연하게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쳤지만, 이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라는 말은 사실상 '너희는 나를 붙잡지 못했다.'입니다. 그때 최고의회는 군중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붙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붙잡지 못했다는 뜻이 예수님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은 밤의 어둠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붙잡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리된 것이다.' 라는 말은, 지금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게 된 것은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계획 속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체포했다고 기고만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그들은 하느님께서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50절..<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예수님이 체포되자 제자들이 모두 달아납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함께 행동했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처벌을 받게 될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베드로도 도망쳤지만, 그는 시  간이 좀 지난 후에 대사제의 관저로 가게 됩니다.

(요한복음 18장 15절에는 베드로 외에 또 한 명의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공관복음에서는 그 제자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확실한 상황을 알 수 없습니다. 하여간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혼자서 그분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51절-52절 : 알몸으로 달아난 젊은이>

51절-52절..(51)<어떤 젊은이가 알몸에 아마포만 두른 채 그분을 따라갔다. 사람들이 그를 붙잡자,> (52)<그는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이 이야기는 제자들이 도망친 장면을 마무리 짓고, 제자들이 그만큼 정신없이 도망쳤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마르코' 라고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마포'는 잠옷이었거나, 잘 때 덮는 홑이불이었을 것입니다. '알몸에 아마포만 두른 채' 라는 말은 잠을 자다 말고 잠옷 차림으로 (또는 홑이불만 두른 채로) 나왔음을 나타냅니다. 

'그분을 따라갔다.' 라는 말은 그 젊은이가 열두 사도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제자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는 사도들이 다 도망친 후에도 겁도 없이 예수님 뒤를 따라가다가 붙잡힙니다. '사람들이 그를 붙잡자 그는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 라는 말은, 그만큼 당시의 상황이 험악하고 급박했음을 나타냅니다.

 

<53절-64절 : 최고 의회에서 신문을 받으시다> 

53절..<그들은 예수님을 대사제에게 끌고 갔다. 그러자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이 모두 모여 왔다.>--체포된 예수님은 대사제에게로 끌려갔고, 대사제는 최고의회를 소집합니다. 당시 대사제는 '카야파'였습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마르코복음에는 대사제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르코는 현직 대사제의 이름보다 대사제라는 직책과 최고의회라는 공식기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생각됩니다. 최고의회는 사제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로 구성되었고, 정원은 70명이었습니다. 대사제는 71번째 의원으로서 최고의회의 의장이었습니다.

당시에 대사제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두가이파에 속하는 대사제 집안에서 뽑혔습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이 '모두' 모였다고 되어 있는데, 밤에 긴급히 소집되었기 때문에 모두 모였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54절..<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뒤따라 대사제의 저택 안뜰까지 들어가, 시종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베드로는 도망가는 것을 멈추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당시 고위층의 저택의 안뜰은 직사각형으로 건물에 둘러싸여 외부와 격리되어 있었지만 바깥뜰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시종들'은 예수님을 체포했던 경비병들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안뜰까지 들어가서, 불을 쬐고 있는 시종들 속으로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갑니다. 예루살렘의 봄날의 밤은 기온이 낮고 싸늘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불을 피워놓고 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간 것을 진정한 '뒤따름'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멀찍이'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입니다. 진정한 뒤따름이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려는 각오를 하고서 따르는 것입니다. 

55절-56절..(55)<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그분에 대한 증언을 찾았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56)<사실 많은 사람이 그분께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였지만, 그 증언들이 서로 들어맞지 않았던 것이다.>--요한복음 11장 53절을 보면,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체포하기도 전에 이미 죽이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재판은 예수님이 유죄냐? 무죄냐? 를 가리기 위한 재판이 아니라 사형시킬 명분을 찾기 위한 재판입니다.

최고의회는 그래도 형식적인 절차는 따르려고 증인들을 내세워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증언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원하는 증언을 얻지 못합니다. 증언들이 서로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무 급하게 거짓 증언을 조작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최고의회는 많은 사람을 거짓 증인으로 동원했으면서도 그들을 충분히 준비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다니엘서 13장을 보면 수산나를 죽이려고 했던 두 명의 거짓 증인들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아서 거짓 증언이라고 밝혀지는 내용이 있는데, 지금의 상황이 그것과 비슷합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은 증인이 될 수 없고, 증인들의 증언을 검토해야 합니다. 증인은 적어도 두 명 이상이어야 했고, 한 사람씩 따로 나와서 시기와 장소, 상황 등을 자세히 증언해야 합니다. 증인들의 진술이 모두 완전히 일치할 때 비로소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57절-59절..(57)<더러는 나서서 이렇게 거짓 증언을 하기도 하였다.> (58)<"우리는 저자가,   '나는 사람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는 다른 성전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59)<그러나 그들의 증언도 서로 들어맞지 않았다.>--다시 몇 사람의 증인이 나와서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증언하는데, 그들의 증언도 일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증언 자체가 거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증인들의 말처럼 성전을 허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또 '사람 손으로 지은'이라는 말이나 '손으로 짓지 않는'이라는 말도 예수님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 예언하신 말씀이었는데, 유대인들은 그 말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각자 자기가 이해한 대로 증언했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이 서로 들어맞지 않게 됩니다. 어떻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많은 거짓 증인들이 동원되고 있는 상황은 시편 27편 12절과 같은 상황입니다. "거짓 증인들이 저를 거슬러 일어나 폭력을 내뿜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증거와 증언을 조작하려던 최고의회의 시도는 결국 실패했습니다. 

60절..<그러자 대사제가 한가운데로 나서서 예수님께,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소? 이자들이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어찌 된 일이오?" 하고 물었다.>--최고의회가 곤경에 처하자 대사제가 직접 나섭니다. 지금 최고의회 의원들은 대사제를 중심으로 해서 죄수인 예수님을 향해서 반원형으로 앉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반원의 가운데에서대사제를 향해서 서 있었을 것입니다.

 대사제가 한가운데로 나섰다는 것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예수님 앞으로 갔다는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사람들이 계속 불리한 증언을 하고 있는데도 왜 대답을(변론을) 하지 않는가? 라고 질문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유도심문으로서 예수님의 답변에서 뭔가 꼬투리를 잡으려는 속셈으로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이사야서 53장 7절을 연상시킵니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61절..<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무신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대사제는 다시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 하고 물었다.>--예수님께서는 대사제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십니다. 그러자 대사제가 이번에는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대사제의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너는 하느님의 아들인가?', '너는 그리스도인가?' 대사제의 질문을 성경 원문대로 번역하면 '너는 찬양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인가?'입니다. '찬양받으실 분'은 하느님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그대가 과연 찬양을 받으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라고 번역했는데, '과연'이라는 말과 '하느님의' 라는 말은 원문에 없습니다. 원문대로 '하느님'을 빼야 합니다. 당시에는 하느님을 직접 언급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또 새번역 성경은 '메시아'로 번역했는데, 원문대로 '그리스도' 라고 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유대교에서는 하느님과 가까운 이들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예를 들면, 천사, 이스라엘 백성, 임금, 의인 등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따라서 지금 대사제의 질문은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 그리스도인가?' 라는 뜻입니다. 또 대사제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정치적인 구세주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12,35-37)와는 다릅니다. 

62절..<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침내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그렇다.' 라고 대답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 라는 말은 대사제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와 같은 뜻의 말은 아닙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시편 110편 1절과 다니엘서 7장 13절을 인용해서 말씀을 하시는데, 이 말의 뜻은, '너희는 내가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볼 것이며, 또 나중에 재림하는 것도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전능하신 분'은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바로 그 하느님, 즉 야훼 하느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오른쪽에 앉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뜻합니다(13,26).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선언하는 말이기도 하고, 지금은 죄수의 모습으로 재판을 받고 있지만 하느님 나라의 법정에서는 심판관이 되어서 너희들을 심판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볼 것이다.' 라는 말은 단순히 목격한다는 뜻이 아니라,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13,26).

 (새번역 성경의 번역을 보면, 대사제는 예수님에게 존댓말을 사용하고, 예수님은 대사제에게 말을 놓은 것으로 번역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새번역 성경 번역자는 예수님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다 말을 놓은 것으로, 예수님께서 전혀 존댓말을 사용할 줄 모르는 모습으로, 전혀 겸손하지 않은 모습으로 번역했는데,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번역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높여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되게 하는 번역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를 보면, 대사제도 예수님에게 말을 놓고, 예수님도 대사제에게 말을 놓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대사제는 예수님을 '그대' 라고 조금 높여 부른 것으로 번역했는데, 예수님은 최고의회 의원들을 '너희' 라고 낮춰 부릅니다. 이것도 옳은 번역은 아닙니다. 200주년 성서는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하신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그게 훨씬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63절..<그러자 대사제가 자기 옷을 찢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이 더 필요합니까?>--대사제는 62절의 예수님 답변을 자신이 그리스도이며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신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제대로 알아듣긴 했습니다.)

그러나 대사제와 최고의회 의원들 눈에는 예수님이 한낱 평범한 사람으로만 보였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답변을 신성모독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거짓 증언으로는 실패했던 사형선고가 예수님의 답변으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사제가 자기 옷을 찢은 것은 그가 흥분했다는 뜻이 아니라, 신성모독의 말을 들었을 때의 의례적인 행동입니다. (원래 옷을 찢는 것은 슬픔과 고통의 표현입니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재판 때 어떤 사람의 신성모독이 입증되면 재판관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을 찢어야 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이 더 필요합니까?' 라는 말은 신성모독 발언을 들었으니 더 이상의 재판은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64절..<여러분도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단죄하였다.>--대사제는 62절의 예수님 답변을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규정했고, 최고의회 의원들은 그 발언은 사형을 받아야 할 발언이라고 단죄하고 있습니다. (원문에는 '하느님을'이라는 말이 없고 그냥'모독하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율법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사람은 사형시켜야 한다고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레위 24,16). 사도시대 때에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믿고 섬기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종교재판의 경우에 최고의회에 사형선고권이 있었지만 사형집행권은 로마 총독에게만 있었기 때문에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게 됩니다. 그러나 좀 더 확실하게 사형을 집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죄목을 신성모독이 아니라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자처했다는 것으로, 즉 정치적인 반역죄로 고소하게 됩니다(15,2).

당시 규정에 의하면, 중요한 재판은 밤에 행할 수 없고, 안식일이나 축제일에는 재판을 할 수 없고, 사형 판결은 재판 당일이 아니라 그 다음날에 내릴 수 있고, 하느님의 이름을 말하는 것만 사형에 해당하는 신성모독으로 간주한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재판은 절차상으로나 그 내용으로나 불법적인 재판입니다.

 

<65절 : 예수님을 조롱하다>

65절..<어떤 자들은 예수님께 침을 뱉고 그분의 얼굴을 가린 다음, 주먹으로 치면서 "알아  맞혀 보아라." 하며 놀려 대기 시작하였다. 시종들도 예수님의 뺨을 때렸다.>--재판이 끝나자 예수님에 대한 모욕과 조롱이 이어집니다. '어떤 자들'은 최고의회 의원들을 가리킵니다. '침을 뱉는 것'은 극심한 경멸과 모욕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가린 다음에 주먹으로 치면서 누가 때렸는지 맞추어 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라고 비웃고   놀리는 것입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이 최소한의 품위도 없이 비열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시종(경비원)들도 흉내를 내면서 예수님의 뺨을 때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증오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그들의 천박함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욕을 아무런 저항 없이 침묵 속에서   견뎌내고 있습니다.

 

<66절-72절 :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라고 선언하는 동안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연결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가는 메시아와 십자가로부터 도망치는 제자의 나약함을 대조시킨 것입니다. 또 이것은 예수님을 뒤따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66절-67절..(66)<베드로가 안뜰 아래쪽에 있는데 대사제의 하녀 하나가 와서,> 67)<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를 보고 그를 찬찬히 살피면서 말하였다. "당신도 저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지요?">--예수님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베드로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불을 쬐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안뜰 아래쪽'에 있었다는 것은 최고의회 의원들과 예수님은 '뜰 위쪽'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대사제의 하녀 하나가 베드로를 알아봅니다. 그 여자가 베드로를 찬찬히 살핀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베드로가 맞는지 확인한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라는 말은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이기 때문에 생긴 표현이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를 '나자렛 당파' 라고 불렀던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나자렛 당파의 두목이라는 것입니다. '함께 있던 사람'은 한 패거리라는 뜻입니다. 사형수와 한패라는 말은 곧 공범이라는 말이고, 이것은 베드로의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한 고발이 될 수 있었습니다.

68절..<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겠소." 하고 부인하였다. 그가 바깥뜰로 나가자 닭이 울었다.>--베드로의 말은 겉으로는 그 여자의 말을 알아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는 말인데, 사실은 '나는 네가 말하는 사람을 알지도 못하고, 그 사람과 한패라는 말을 이해하지도 못한다(한패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부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워진 베드로는 그 여자를 피해서 바깥뜰로 나갔고, 닭이 첫 번째로 울고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닭이 울었다.' 라는 말이 없는데, 이것은 필사본의 차이입니다. 어떤 필사본에는 이 말이 있고, 어떤 필사본에는 없습니다. (첫 번째 닭 울음소리는 '경고'로 해석할 수 있고, 두 번째 닭 울음소리는 '참회'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69절-70절..(69)<그 하녀가 베드로를 보면서 곁에 서 있는 이들에게 다시, "이 사람은 그들과 한패예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70)<그러나 베드로는 또 부인하였다. 그런데 조금 뒤에 곁에 서 있던 이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당신은 갈릴래아 사람이니 그들과 한패임에 틀림없소." 하고 말하였다.>--

그 여자는 다시 주변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그들, 즉 나자렛 당파와 한패라고 이야기하고, 베드로는 두 번째로 부인합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가 갈릴래아 사람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예수님과 한패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26장 73절을 보면, 사람들은 베드로의 말씨 때문에 그가 갈릴래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베드로가 갈릴래아 사투리를 쓰고 있으니 갈릴래아 사람이라는 것이고, 갈릴래아 사람이라면 예수님과 한패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대부분 갈릴래아 사람들이었다는 것과 당시에 예수님의 활동이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운동'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71절..<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라는 말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기 시작하며'입니다. 이 말은 자기의 말이 거짓말이라면 천벌을 받아도 좋다고 자기 자신을 '저주'했고,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면서 '맹세'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세 번째로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강력하게 선언합니다. '알지 못한다.' 라는 말은 보통 어떤 사람과 관계를 끊을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유대교에서 어떤 사람을 파문하고 추방할 때 사용하던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일부러 피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그의 선언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완전하게 행해진 것입니다. 

72절..<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하였다.>--두 번째 닭 울음소리는 모든 일이 예수님이 예언한 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기억해내게 됩니다. 베드로가 죄책감을 느끼게 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울음은 '수치심과 후회'의 울음입니다. 

여기서 '울기 시작하였다.' 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을 공동번역 성서는 '땅에 쓰러져 슬피 울었다.' 라고 번역했고, 200주년 성서는 '달려 나가며 울었다.' 라고 번역했는데, 세 가지 번역이 모두 가능합니다. 닭 울음소리를 듣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울기 시작한 것은 그의 참회의 시작일 뿐입니다. 그의 참회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에나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에나 예수님의 시신을 안장할 때에 베드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그의 나약함 때문입니다. 믿음을 잃어서가 아니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참회하게 된 것과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받아들인 것은 주님의 은총과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의 잘못을 보지 않고 그의 참회만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이야기의 유일한 증인은 베드로 자신입니다.그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모두 이야기했고, 마르코는 그것을 성실하게 기록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 절대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던 베드로였음을 생각하면, 또 나중에 그가 용감하게 순교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복음서가 얼마나 성실하게 기록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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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일치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인데도 하고 싶지 않거나, 

능력이 닿지 않아서 할 수 없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기도 하고, 

하고 싶어도 할 능력이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할 수는 있는데 하고 싶지도 않고, 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습니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곧 하고 싶었던 일이고, 

내 능력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일은 정말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아니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또 무엇입니까? 

신앙인으로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며,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또 무엇입니까? 

신앙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할 수 없는 일은 또 무엇입니까?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때가 많습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현실 여건이 따르지 않는 때가 많습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하느님에게서 너무 멀리 멀어져 있는 때가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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