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식별♥ (1요한4,1-21)

2015. 1. 19. 오후 5:00:34

글자

 

<요한의 첫째 서간 4장>

<1절-6절 : 영의 식별>

1절..<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사도시대 때부터 거짓 예언자들이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라는 말은 누가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해도 그 말을 그대로 믿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라는 말은 정말 성령을 받은 것인지 신중하게 조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영', 즉 성령과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악령을 잘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다는 말은 자기가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2절-3절..(2)<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 (3)<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적'의 영입니다. 그 영이 오리라고 여러분이 전에 들었는데, 이제 이미 세상에 와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영의 식별 기준'을 하나 말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은 진짜 사람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을 빌렸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단도 있었고, 사람이신 예수님과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전혀 다른 두 분이라고 주장하는 이단도 있었습니다.

그런 이단들 때문에 여기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는 것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백을 하지 않고 다른 믿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곧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영, '그리스도의 적'의 영, 악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적'이란 종말 직전에 나타나 세상을 어지럽게 할 악마, 또는 악마의 하수인을 뜻합니다. 편지의 저자는 당시에 활동하던 거짓 예언자들을 '그리스도의 적'으로 보고 있고, 그리스도의 적이 '이미 세상에 와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1절-3절의 내용은 요한 2서 7절과 많이 비슷합니다. '그 영이 오리라고 여러분이 전에 들었다.' 라는 말은 저자가 전에 신자들을 직접 가르친 일이 있음을 뜻할 수도 있고, 요한 2서 7절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 24,24 ; 마르 13,6 ; 루카 21,8)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4절..<자녀 여러분, 여러분은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거짓 예언자들을 이미 이겼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분께서 세상에 있는 그자보다 더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편지의 저자는 2장 13절에서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다.' 라고 말했었는데, 여기서 다시 이 편지를 받아 읽게 될 신자들이 거짓 예언자들을 이겼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그자'는 악마입니다.

신자들이 악마의 하수인인 거짓 예언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은 악마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시고, 신자들은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승리의 원천은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거짓 예언자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5절..<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세상에 속한 것을 말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그들'은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라는 말은 그들이 악마의 지배를 받는, 또는 악마에게서 비롯된, 또는 악마의 영향을 받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 속한 것'을 말합니다. 즉 하느님을 거스르는 악마의 유혹 같은 말을 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실제로 이단자들의 주장은 단순하고, 쉽고, 세속적이고, 사람들의 비위에 맞아서 사람들이 쉽게 빠져듭니다. 반면에 교회의 가르침은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질 때가 많고, 사람들의 양심을 자극할 때가 많아서 사람들이 불편해 하고 잘 안 들으려고 합니다.

6절..<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진리의 영을 알고 또 사람을 속이는 영을 압니다.>--<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이 말은, 사도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배웠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권한을 예수님에게서 직접 받았음을 뜻합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말을 듣는다.' 라는 말은 어떤 권력에 대한 복종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 삶의 기준으로, 또는 지침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하느님을 사랑하는(아는) 사람이라면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르지만, 하느님을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은 곧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표시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교도권에 대한 말입니다. 교도권이란 올바른 교리를 정하고 해석하고 정리하는 권한, 또 그것을 가르치는 권한입니다. 이 교도권에 복종 하지 않는 것은 곧 이단이라는 증거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진리의 영을 알고 또 사람을 속이는 영을 압니다.>--'진리의 영'은 성령이고, '사람을 속이는 영'은 악령입니다. 이 구절에서 '안다.' 라는 말은 '식별한다.' 라는 뜻입니다. 성령과 악령을 식별하는 기준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복종하느냐의 여부에 있습니다.

5절-6절의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7절-21절 : 사랑과 믿음>

7절..<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이 말은 뒤의 11절에서 말하는 그대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니 여러분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이 구절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말한 것입니다.

이 구절의 뜻은, 사랑이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어떤 힘, 또는 하느님의 사업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자신이 하느님께 속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사랑을 실천하면 참으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온전히 알게 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새번역 성경의 번역은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200주년 성서의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오고 사랑하는 모든 이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고 하느님을 알기 때문입니다.'가 좋은 번역입니다.

8절..<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7절과는 반대로 8절은,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없게 되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수가 없음을 말하는 구절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은 하느님은 사랑의 원천이고, 사랑 자체이신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9절-10절..(9)<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속죄 제물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외아드님'이라는 말은 '유일한 아들,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보내주실 정도로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고,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앞에서 말한 악마의 지배를 받는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인간들의 세상을 뜻합니다.

11절..<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은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서의 '명심하십시오.' 라는 말은 원문에 없는 말입니다.)

12절..<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이 말은 당시에 하느님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하거나 하느님을 볼 수 있다고 한 이단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입니다. 예수님만이 홀로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을 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뵙고,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6-7)."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이 구절과 같은 내용의 말이 앞의 2장 5절에서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게 되고,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완성시키게 됩니다. 즉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룸으로써, 또 하느님의 사랑을 완성시킴으로써 하느님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3절..<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다는 말은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안다.' 라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령을 받았고, 성령의 도움으로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 말을 12절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성령의 도움으로 하느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먼저 '서로 사랑하는'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14절-15절..(14)<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14절은 9절의 내용을 반복한 것인데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아드님마저도 내놓으신 그 사랑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을 뜻합니다. 15절의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이라는 말은 '누구든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죽음을 당하신 것이 곧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고백하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16절..<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아드님 구세주로 오셔서 죽으신 일을 보게 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게 되고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이 말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으로 사시다가 속죄 제물로 죽음을 당한 것은 곧 인간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믿음에서 내린 결론입니다. 즉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묵상해보니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이 말은 8절과 12절을 합해서 반복한 것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른다.' 라는 말은 사랑을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17절..<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사랑이 완성됩니다(12절).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처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본받아서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3,16)' 사랑을 실천하게 되면 우리는 심판 날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랑을 본받아서 우리도 그런 사랑을 실천하면 심판 날에 구원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18절..<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랑을 실천했다면 심판과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웃 사랑을 통해 완성된 하느님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만일에 심판과 처벌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사랑의 실천이 부족하다는 표시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실천은 하지 않고서 심판과 처벌을 두려워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사랑이 부족하지는 않은가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심판과 처벌에 대한 두려움은 죄인의 노예적인 두려움이며 부정적인 공포심이지만, 사랑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는 것은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게 이끄는 촉진제이고, 하느님을 더 사랑하겠다는 긍정적이고 순수한 소망입니다.

19절..<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11절의 반복으로서, 명령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을 하기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응답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20절..<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에 하느님을 알고 있다거나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형제애를 실천하는 일은 무시한 이단자들이 있었습니다. 저자는 그런 자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 사랑의 응답으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이웃 사랑이 없는 신앙은 거짓 신앙입니다. 우리는 형제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20절을 의문문으로 번역했는데, 원문은 의문문이 아닙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무신론자들이나 하느님을 안 믿는 타 종교인들의 이웃 사랑은 어떻게 생각할까? 어떤 때는 그들이 더 많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은 곧 하느님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하느님을 안 믿는다고 해도 진실한 사랑의 실천을 하고 있다면 그들은 그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자기도 모르게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없고,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믿음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보다는 신앙심이 없더라도 순수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하느님께서는 더 좋게 평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무시하거나 사랑의 실천보다 가볍게 생각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 편지 저자의 의도가 아닙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믿음이란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점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자동차에 엔진은 있는데 브레이크가 없다면 움직이지 말아야 하고, 브레이크는 있는데 엔진이 없다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믿음이 하느님을 향한 우리 삶의 엔진이라면, 사랑은 나와 이웃을 보호하는 브레이크입니다.)

21절..<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하느님을 믿는다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이것은 예수님의 계명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하느님을 사랑하라, 동시에 이웃도 사랑하라.' 라고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이웃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가 예수님의 명령(계명)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명령은 예수님께서 말이 아니라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실천하심으로써 모범을 보여주신 명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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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사랑의 반대말은..."

반대말이라는 것은 대등한 위치에서 반대되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반대말은 없습니다.

하느님과 대등한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반대말'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반대말이 될 수 있는 말이 없는 것처럼

사랑의 반대말이 될 수 있는 말은 없는 것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사랑의 반대말은 '없음', 즉 무(無)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존재도,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동안에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을 잃은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곧바로 멸망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반대말은 없습니다.

뭔가를 말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냥 모든 것이 무(無)로 사라질 뿐입니다.

무관심, 미움, 냉정함은 사랑의 하위 개념입니다.

그런 것들이 사랑과 대등한 위치에서 대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사랑의 반대말이 아니라 사랑의 결핍일 뿐입니다.

사랑은 나를 나로 있게 만드는 힘입니다.

사랑은 그를 내 삶 안에 존재하게 하는 힘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그는 내 안에 없고, 나도 내 안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없음'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죽음'입니다.

하느님은 야훼, 즉 존재 자체이신 분입니다.

사랑도 '있음' 그 자체입니다.

동시에 그 사랑은 살아 움직이는 것, 곧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는' 것입니다.

하지 않는 사랑은 죽은 사랑이고 그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살아갑니다.

사랑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힘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랑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없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영의 식별♥ (1요한4,1-21)  박민화님의 성경묵상

 

요한의 첫째서간 4장

 

요한서신중에 가장 핵심장으로써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고백하며 믿음과 영의 식별과 믿음과 사랑을 계시해 주시면서

영의 식별은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며

마태복음7,15~18 에서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고 말씀 하시며,

창세기 2장에서는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를 놔두시고

생명나무열매는 먹게 하시고 선악과 나무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고

야훼하느님께서 말씀 하셨는데

 

 

요한복음15,1

예수님께서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 고 말씀 하시고

나무도 의인화해서 생명나무 참 포도나무는 좋은나무 좋은열매이며

예수 그리스도님의 복음 말씀을 상징하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는 율법의 말씀을 상징하며

선악과나무 나쁜 나무 나쁜 열매는 비진리를 말하며

영의 식별은 입에서 나오는 말씀 즉 말의 열매로 식별이 되며

하느님의 속성인 성령의 열매는 사랑,기쁨,평화,인내,진실,

온유,절제등이며(갈라티아서5,22~23)이며

육의 열매는 갈라티아서5,19 에 시기,질투,싸움,갈라짐등이며

거짓예언자는 말은 하면서 그 말을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 거짓예언자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성경 말씀을 읽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라고 전하면서

자기는 실천하지 못한 사람들이 거짓예언자가 될수 있기 때문에

말씀 봉사자들은 말씀으로 살아 가면서 전해야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될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영이요.생명이다.라고 (요한6,63) 말하였으며

사람들 입에서 나오는

그 말로 영의 사람인지 육의 사람인지를 구별하게 되며 믿음으로 살아갈 때

믿음의 열매인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기쁨이 왔을 때

내 이웃 형제자매들을 좋은점 뿐만 아니라 부족한점도 수용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사람이 영의 사람이며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영의 식별

 

 

믿음과 영의 식별을 나무를 예화로 들어 말씀의 씨를 땅(마음)에

뿌려 나무가 자라 잎(은사)이 나와 나무가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이 열매를 보면 좋은 나무인지 나쁜나무인지 구별할 수 있는 것처럼

나무잎은 성령의 은사인 믿음과 기적과 이상한 언어와 치유은사등을

상징하며 은사에 머물러 있지 말고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로 살아 가는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이고

 

 

불평하고 시기,질투 하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아파하는 사람은

나쁜 나무 나쁜 열매인 육의 열매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위로 식별할 수 있으며

평가 기준은 성경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에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는것이 말씀 순종이며

그리스도인들은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말고

말씀 안에서 성령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성령께서 일할수 있도록 마음에 자리를 마련해야하는 것입니다.

 

 

 

 

1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이단)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2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

 

 

설명:

몸은 헬라어로 싸르크 인데 하늘에 계실 때 호로고스 즉 말씀으로

계신 하느님이 인성을 취하여 성모님 안에 육신의 옷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 호로고스 싸르크 (말씀 육신)이며

예수 그리스도님이 몸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들이고 예수님 몸 안에 신성을 부인하고

인성만 믿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하느님의 영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님 안에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참 하느님이시고 참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영에 속하며

그리스도인들이고 하느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3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적(사탄)’의 영입니다. 그 영이 오리라고 여러분이 전에 들었는데, 이제 이미 세상에 와 있습니다.

4

자녀 여러분, 여러분은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거짓 예언자들을 이미 이겼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분께서 세상에 있는 그자보다 더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5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세상에 속한 것을 말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

 

 

설명: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입을 통하여 흘러 나오는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이고 남을 저주하고 판단하고 시기 질투하며 불평하고

부정적인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6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진리의 영을 알고 또 사람을 속이는 영을 압니다.

 

 

설명:

안다는 것은 기노스코 깨닫는다는 말인데 말씀 안에서 살아갈 때

말씀의 열매인 사랑을 알게 되며 하느님은 사랑이시로구나 라고

깨닫게 되는 것이며 하느님은 아가페 사랑이시며 빛이고

영생이라는 것을 체험하고

깨닫게 되는 것을 보고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믿음

 

 

사랑과 믿음에서 원인은 믿음은 들음으로 들음은 그리스도 말씀으로

오기 때문에 (로마서10,17) 먼저 예수님이 그리스도 하느님이심을

믿고 세례 받아 관계를 맺어 신앙생활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님이 하신 복음 말씀이 우리 안에 이루어질것을 소망하고 살아갈 때 어느 한순간에 아가페 사랑이 오며

이 사랑이 왔을 때 사랑이 충만하면 기쁨이 오고 평화가 오며

참아지며 이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며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사람으로 보이며 행복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어서 오소서. 마라나타 라고 고백하며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라고 고백 합니다.

 

 

 

7

사랑(아가페)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원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설명:

하느님을 본다고 할때 본다는 말은 '데아오마이' 인데

이 말은 신기한 것을 보다. 진리의 말씀을 깨닫다. 본다. 라는 뜻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하신 복음 말씀이 우리들 안에 이루어질것을 소망하고 살아갈 때

결과적으로 아가페 사랑이 오게 되며

이 사랑의 하느님을 우리 안에 계심을 체험하고 느끼고 깨닫게 되며 사랑의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이웃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고 깨닫게 되었을 때

하느님 사랑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을 '데아오마이'

즉 보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데아오마이)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설명:

구약의 하느님은 무서우며 아버지의 사랑에 비유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님께서는 신약의 하느님은

어머니의 사랑 즉 아가페사랑으로 계시해 주시며

 

묵시록에서는 부부 즉 신랑의 사랑으로 계시해 주시며

신약의 사랑은 이 아가페 사랑도 여성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예수님의 사랑은 헤아가페 즉 어머니의 사랑으로 표시가 되며

교회는 모교회이며 어머니와 같은 사랑이 있는 곳이며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돌아 가실 때

요한 사도에게 너희 어머니시다. 라고 교회에 맡기시며

예수님의 어머니에게 요한사도보고 당신의 아들입니다. 라고

말씀 하신것은 신약의 교회는 자비하고 인자하신

어머니의 사랑이 교회라는 것을 계시해 주시며

 

신약의 백성들의 몸이 교회이며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의 하느님이 계신 이웃형제 자매들을 사랑해야 하며

남편은 부인을 부인은 남편을

부모는 자녀들을 자녀들은 부모를 사랑해야 하며

사랑의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여 성가정을 이루게 되면

성가정 축일이 되는 것입니다.

 

 

 

17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설명:

사랑이 충만하면 사랑의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이며

두려움이 없지만 사랑의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 아니하면

죄의 벌로 죽고 심판 받기 때문에 두려움이 오기 때문에

복음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말씀으로 살아갈 때

아가페 사랑이 올수 있으므로 말씀하고 관계를 맺어 살아갈 때

복음 말씀은 기쁜소식이며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19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0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21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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