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서 16장 1-22절>부활, 승천하시다

2015. 3. 2. 오후 2:53:30

글자

 

 

<마르코 복음서 16장 1-22절>

<1절-8절 : 부활하시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여인들이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수난, 십자가, 죽음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신자들과 사도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까 그 결과로 무덤이 비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었으니까 그분이 부활하셨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고, 빈 무덤은 2차적인 증거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유대인들도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했습니다. 

1절..<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토요일 저녁, 해가 지면서 안식일이 끝납니다. 그때부터 사고파는 상행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여인들은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즉 토요일 밤에 향료를 샀을 것입니다. 아리마태아 요셉이 서둘러서 장례를 치렀다고는 해도 이미 삼베로 싸서 안장한 시신에 다시 향료를 바를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지극한 존경과 사랑의 표시로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 드리려고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지켜보았고(15,40), 아리마태아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15,47). 여인들은 토요일 밤에 향료를 사서 일요일 이른 아침에 무덤에 갔지만 예수님의 시신에향료를 발라드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목격한 첫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2절..<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주간 첫날'은 안식일 다음 날, 즉 일요일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안식일 다음 날'이라고 번역했는데, 뜻은 같지만 잘못된 번역입니다. 원문에 있는 대로 '주간 첫날'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여인들이 무덤으로 갔다는 것은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던 그들의 심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에 가기 위해 안식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고,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향료를 샀지만, 밤에 무덤으로 가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다가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서둘러 길을 나섭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을 보면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떠오르는 해'는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가는 여인들의 어두운 마음을 비추어 주는 부활의 빛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순간을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떻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부활절을 일요일로 정한 것은 여인들이 빈 무덤을 발견한 날이 일요일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처음 나타나신 날도 일요일이기 때문입니다.) 

3절..<그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하고 서로 말하였다.>--여인들은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을 어떻게 굴려낼까 걱정합니다.  (마태오복음 27장 62절-66절을 보면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무덤 입구에 경비병들을 세우고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을 봉인했습니다.

여인들은 그런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인들이 집에서 출발할 때 왜 미리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미리 생각했다면 도와줄 남자들과 함께 갔을지도 모릅니다.)아마도 몹시 서두르느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하다가 중간에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무덤을 막아놓은 돌은 장정 한 사람의 힘으로도 움직일 수 있는 둥근 돌인데, 여자 혼자힘으로는 어렵더라도, 세 명의 여인이 힘을 합하면 돌을 굴려내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든 3절은, '인간은 앞일을 미리 걱정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 일을 이룩하셨다.' 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여인들의 걱정과는 달리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입니다. 

4절..<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눈을 들어 바라보다.' 라는 말은 당시의 독특한 표현법입니다(루카 6,20 ; 루카21,1 ; 요한 4,35).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해서 보니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습니다. (경비병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라는 말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돌을 굴려냈음을 암시합니다.   '굴려져 있었다.' 라는 수동태 표현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돌을 천사가 굴려냈는지, 예수님께서 굴려냈는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나갈 수 있도록   굴려냈는지, 여인들이 무덤에 들어갈 수 있도록 굴려냈는지, 그런 것은 알 수 없습니다. 또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덤이 열려 있었고, 비어 있었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여기서 '굴려진 돌'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고, 죽음의 세력이 분쇄되었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5절..<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무덤은 동굴 속에 하나의 방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무덤 입구가 열려 있었기 때문에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무덤 입구 오른쪽에 어떤 젊은이가 '하얗고 긴옷'을 입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얗고 긴 겉옷'의 원문은 '흰 스톨레'입니다. '스톨레'는 길고 끌리는 옷입니다.여기서 '하얗다.' 라고 번역한 말은 색깔이 하얗다는 것이 아니라 눈부시게 빛이 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젊은이의 옷이 하얗고 길다는 것은 그가 천상적인 존재(천사)라는 것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오른쪽'은 상서로운 쪽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입구 오른쪽에 모신 것 같습니다.)

무덤에 앉아서 여인들을 맞이한 젊은이는 분명히 천사입니다. 그의 임무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고, 빈 무덤을 증언하고 해석하는 일입니다. 여인들이 겁에 질리고 놀란 것은 무덤에 시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천사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두려움과 놀람은 신적인 존재와 만났을 때 생기는 인간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6절..<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천사는 '놀라지 마라.' 하면서 우선 여인들을 안심시키고 나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합니다. 이 구절에서 천사가 하는 말은, '사람들은 인간 예수의 시체를 보려고 하지만,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셨기 때문에 시체는 없다.' 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이라는 말은, '너희는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의 시신을 찾고 있지만'이라는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라는 말은 '그분께서는 부활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되살아나셨다.' 라는 말은 원문에는 수동태로 '일으켜졌다(되살려졌다).'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수동태로 표현한 것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되살리셨다는(부활시키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라는 말은 '되살아나셨기 때문에 그분의 시신은 무덤에 없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실 때 시신을 이용할 수도 있고, 이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하느님께서 그분의 시신을 '영적이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시신을 이용하신 것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와 부활하신 예수가 같은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어떻든 '부활'은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힘으로 하시는 새로운 창조입니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시신이 없다는 것을(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라는 말입니다.그러나 무덤에 시신이 없다는 사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무덤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비어 있게 된 것이고, 따라서 빈 무덤은 부활을 믿는 사람에게만 증거로서의 가치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빈 무덤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7절..<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것을 증언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천사가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리라고 여인들에게 말한 것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리는 임무를 맡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라는 말은 앞의 14장 28절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14,28)."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라는 말은 갈릴래아로 가서 예수님을 만나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는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먼저 갈릴래아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마태 28,16 ; 요한 21,1), 나중에 예루살렘과 그 주변에서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루카 24,36 ; 요한 20,19).

    베드로의 이름이 특별히 언급된 것은 그가 예수님의 용서를 받았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수난 때에 도망쳤던 제자들도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함께 모여야 합니다. 갈릴래아로 가라는 명령은 도망쳤던 제자들이 아직은 갈릴래아까지 가지 않은 것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일부 제자들은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갈릴래아로 모이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갈릴래아가 복음의 고향이고, 출발 지점이며, 예수님의 활동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활동을 하신 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예수님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상에서 활동한 예수님과 십자가에 매달렸던 예수님,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완전히 같은 분으로 볼 경우에만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낼 때에는 그런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갈릴래아로 가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은 이스라엘을 떠나서 이방인에게로 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에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셨고(루카 24, 49 ; 사도 1,4), 예루살렘에서부터 복음 선포를 시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루카 24,47).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떠나게 되는 것은 좀 더 세월이 흐른 뒤입니다. 

8절..<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여인들은 우선 두렵고 놀라서 무덤에서 나와서 달아납니다. 이것은 5절에서처럼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인간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여인들은 초자연적인 사건을 체험하고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로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려'  있고,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침묵이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여인들이 사도들에게 가서 말을 전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마태 28,8 ; 루카 24,9 ; 요한 20,2).

사도들이 아니라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은 사도들은 모두 도망쳤지만 여인들은 도망치지 않고 십자가 곁에 끝까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부활의 첫 증인이라는 점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여자들을 무시해서 법정의 증인으로 채택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부활을 조작하려고 했다면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첫 증인으로 내세웠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16장 8절로 마르코복음이 끝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16장 9절부터는 대부분의 중요한 필사본에 없고, 초대교회의 주요 교부들이 그 부분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9절-20절은 세월이 흐른 후에(2세기쯤에) 누군가가 부활의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서 다른 복음서를 참조해서 덧붙인 것으로 봅니다. 21절과 22절도 2세기쯤에 어떤 사람이 복음서의 결론을 만들어서 덧붙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9절 이하의 부분도 성령의 인도로 기록된 성경으로 인정하고 본문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21절과 22절에 절 번호를 붙였는데, 새번역 성경과 200주년 성서는 절 번호 없이 그냥 본문에 포함시켰습니다. 그 두 구절은 그만큼 중요도가 떨어지는 구절입니다.)

 

<9절-11절 :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9절..<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9절과 10절은 요한복음 20장 1절, 11절-18절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리고 루카복음 8장 2절을 덧붙였습니다. ('주간 첫날'을 공동번역 성서는 '일요일'로 번역했는데, 원문에 있는 대로 '주간 첫날'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 교회는 요한복음의 기록에 따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은 마리아막달레나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셨다는 것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정신적, 신체적으로 중병을 앓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것으로 해석됩니다. (실제로 일곱 마귀에 들렸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마리아 막달레나가 좋지 않은 과거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할 근거는 없습니다. 

10절..<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은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어딘가에 모여 있었던 것 같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라는 말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단순히 빈 무덤의 첫 목격자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첫 번째로 선포하고 증언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의 슬픔은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고, 예수님의 모든 활동이 성과 없이 다 끝나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예수님에게 걸었던 기대와 희망이 허망하게 무너졌다고 절망했기 때문입니다. 

11절..<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않았다.>--이 구절은 루카복음 24장 11절을 재구성해서 옮겨 적은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즉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나에게 나타나셨다.' 라고 말했을 때, 제자들이 그 말을 믿지 못한 것은 '부활' 자체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직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언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슬픔이 너무 컸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입니다.

 

<12절-13절 :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12절..<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12절과 13절은 루카복음 24장 13절-35절을 요약한 것입니다. '시골'은 '엠마오'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다른 모습이셨다는 뜻입니다. 루카복음 24장 15절-16절을 보면 예수님은 평범한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단순히 외모가 달라서가 아니라 수난 전의 예수님의 모습과 부활하신 후의 예수님의 모습은 차원이 달랐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즉 '눈으로' 알아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실 때였습니다(루카 24,30-31). 

13절..<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두 사람은 사도들에게로 돌아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했습니다(루카 24,35). 루카복음에서는 사도들이 두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내용이 없는데, 여기서는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적어도 사도들 중 일부는 두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14절-18절 :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사명을 부여하신 이야기는 루카복음 24장 36절-49절과 요한복음 20장 19절-23절과 사도행전 1장 4절-8절을 재구성해서 옮겨 적은것입니다. 

14절..<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때문이다.>--'열한 제자' 라는 말은 배반자 유다를 뺀 나머지 사도들을 가리킵니다.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던 제자들이 어딘가에서 한 자리에 모였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을 보면, 그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어떤 집에 함께 숨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갔던 여인들이 놀라운 소식을 전하고, 엠마오로 떠났던 두 사람이 되돌아 와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가서 빈 무덤을 확인했습니다(요한 20,3-10). 사도들은 당황하고 놀라고 얼떨떨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크게 술렁거리는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너무나도 생생하고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식탁에 앉아 있을 때' 라는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먹을 것이 있느냐고 물으신 것을(루카 24,41) 근거로 해서 재구성한 말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 모두에게 나타나셔서 믿지 못하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4절-29절에 토마스가 부활을 믿지 못하다가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야 믿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사실 토마스만 예수님을 직접 만나야만 믿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그런 태도를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증언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이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태도를 꾸짖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꾸중은 사도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것입니다. 직접 보고 확인해야만 믿겠다고 하는 태도는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선포된 말씀과 증언을 듣는 것만으로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 오늘날의 우리들의 믿음은 우리 눈으로 직접 예수님을 보고, 우리 귀로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갖게 된 믿음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전한 예수님의 말씀과 그들의 증언을 듣고 갖게 된 믿음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는 사도들과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쳐서 증명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증언을 믿을 수 있습니다. 

15절..<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이 구절은 마태오복음 28장 19절과 루카복음 24장 47절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십니다. '온 세상'은 글자 그대로 온 세상입니다. 활동 범위의 제한이 없습니다. 사도들은 '모든 곳'으로 가야 합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뜻인데, '모든 사람'  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피조물'이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모든 사람'이라고 번역했는데, 원문대로 '모든 피조물'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복음', 즉 기쁜 소식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선포'는 공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은밀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셨지만, 그들을 다시 사도로 부르시고 임무를  맡기셨고, 사도들은 불신앙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고 새롭게 변화됩니다. 

16절..<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이 구절은 마태오복음 28장 19절과 요한복음 3장 18절과 로마서 6장 3절-11절 등을 참고해서 요약한 구절로 생각됩니다. 복음 선포에 대한 반응은 믿음 아니면 불신입니다. 믿음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것을 뜻하는 세례를 받게 되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종말에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믿음을 갖지 않는 사람은 종말에 단죄를 받을 것이고,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17절-18절..(17)<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17절과 18절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행했던 기적들을 옮겨 적으면서 그 기적들은 예수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표징들'이라고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믿는 이들'은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을 뜻합니다. '표징들'은 '기적들'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표징들이 따른다는 말은 앞의 16절에서 말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보증의 표시로서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은 사도행전 16장 16절-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는 것은 성령 강림 때 사도들이 여러 가지 외국어를 말한 것(사도 2,1-13)을 가리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기이한 언어' 라고 번역했는데, '새로운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손으로 뱀을 집어 들어도 해를 입지 않는 것은 사도행전 28장 3절-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다는 말은 신약성경 밖의 전승에서 따온 것이거나 뱀을 집어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말을 확대한 것입니다.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낫는 것은 사도행전에 자주 나오는 기적입니다.

여기서도 기적보다 믿음이 먼저라는 원칙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약속은 오늘날에도 지켜지고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옛날과  달리 요즘에는 그런 일들이 줄어든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예수님께서 약속을 안 지켜서가 아니라, 과학이니, 상식이니 하면서 갈수록 믿음은 약해지고 의심은 커지는 인간들 쪽의  문제입니다.

 

<19절-20절 : 승천하시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은 루카복음 24장 50절-53절과 사도행전 1장 9절-11절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 

19절..<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주 예수님'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이라는 말은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라는 새로운 사명을 맡기신 다음이라는 뜻입니다.

  '승천'하셨다는 말은 하느님이 계신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뜻인데, 원문에는 '하늘로 맞아 들여지시어' 라고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승천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라는 말은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 오르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것은 사람의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14장 62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제 실현되었다고 믿는 신앙고백입니다. 

20절..<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이 구절은 사도들의 활동을 요약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 당시 그들에게 알려져 있던 세계의 끝까지 가서 선교활동을 했고, 예수님께서는 늘 그들과 함께 일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라는 말은 마태오복음 28장 20절,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는 말을 가리킵니다.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라는 말은 앞의 16절-18절의 약속이 지켜졌음을 나타냅니다.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라는 말은 공동번역 성서의 번역처럼 사도들이 행한 기적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참된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곁을 떠나셨지만, 이제는 오히려 더 가깝게 교회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짧은 끝맺음>

 공동번역 성서는 이 부분을 21절과 22절이라고 절 번호를 붙였는데, 새번역 성경에는 절 번호가 없습니다. 이 차이는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 구절들은 2세기경에 어떤 사람이 덧붙인 것입니다. 

(21절-22절)..<그 여자들은 자기들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베드로와 그 동료들에게 간추려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도 친히 그들을 통하여 동쪽에서 서쪽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구원을 선포하는 거룩한 불멸의 말씀이 두루 퍼져 나가게 하셨다. 아멘.>--'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사도들을 뜻합니다. '동쪽에서 서쪽에 이르기까지'는 온 세계를 뜻합니다. 이것은 시편 113편 3절에서 온 표현입니다. '영원한 구원을 선포하는 거룩한 불멸의 말씀'이라는 말은 '복음'을 가리키는 그리스식 표현입니다.

복음이란, 영원한 구원을 전해주는 말씀이고, 거룩하고, 썩지 않는(불멸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맨 끝에 붙은 '아멘'은 마르코복음서가 전례 때에 사용되었음을(낭독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복음서 낭독이 끝나면 공동체가 '아멘'이라고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덧붙인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덧붙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이 두 구절을 삭제하지 않고 성경 본문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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