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서 15장 1-47절> 십자가에 못박히고 돌아가시다.

2015. 3. 7. 오후 7:3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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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서 15장 1-47절>

<1절-5절 : 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으시다>

1절..<아침이 되자 수석 사제들은 곧바로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 곧 온 최고 의회와 의논한끝에,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겼다.>--최고의회는 예수님을 목요일밤에 밤새도록 재판했습니다. 금요일 아침이 되자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기기로 결의합니다. (아침에 회의를 새로 소집한 것은 아닙니다.) 

'수석 사제들, 원로들, 율법학자들'은 최고의회의 의원들입니다.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갔다는 것은 예수님을 중죄인으로, 또 위험한 죄수로 취급했음을 나타냅니다. 빌라도는 서기 26-36년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의 총독이었습니다.

그는 뇌물을 좋아하고, 난폭하며, 강탈을 일삼고, 사람들을 학대하고, 무례하고, 죄수를 재판도 없이 처형했고, 잔인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또 유대 관습과 전통을 무시하고, 유대인들을 멸시했는데, 유대인들도 그를 미워했습니다. 빌라도는 서기 36년에 해임되었는데, 자살했거나, 황제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원래 총독 관저는 카이사리아에 있었습니다. 지금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와 있는 것은 과월절 축제 때문입니다. 당시 축제 기간 중에 폭동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빌라도는 항상 유대인들의 폭동을 두려워했고,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진압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했던 유대인들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폭동 선동죄로 고소했습니다. (2절에서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냐?' 라고 묻는 것은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자칭 유대인들의 임금이라고 하면서 반역을 했다는 죄로 고소했음을 나타냅니다.)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자 빌라도의 재판이 바로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해가 뜰 무렵에 재판을 시작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2절..<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자, 그분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최고의회는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로 예수님에게 사

형선고를 내렸으면서도 빌라도에게 고소할 때에는 유대인들의 임금이라고 자칭했다는 죄목으로 바꾸었습니다. 종교적인 죄목을 정치적인 죄목으로 바꾼 것입니다. 종교적인 죄목으로는 사형집행을 요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자기가 왕이라고 자칭하거나, 메시아라고 자칭하면서 로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자주 등장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자처했다는 것은 곧 로마제국의 통치권을 부정하고 반역을 했다는 뜻입니다.

지금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냐?' 라고 묻는 것은 '고소인들의 말대로 네가 유대인들의 왕으로 자칭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 사실이냐?' 라는 뜻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라는 예수님의 답변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답변입니다.

이 말을 '그것은 너의 말일 뿐이다.' 라고 생각하면,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지만) 정치적인 의미의 왕은 아니다.' 라는 뜻이 되고, '그것은 너의 말인가?' 라는 반문으로 생각하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뜻이 됩니다.

(로마 총독은 식민지 죄수에게 존댓말을 사용하고, 죄수는 총독에게 말을 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예수님을 높여드리는 일이 아닙니다. 만일에 그리스어에 존댓말과 해라체가 있었다면 총독은 죄수에게 말을 놓았을 것이고, 죄수는 억지로라도 총독에게 존댓말을 사용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뒤의 30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죄수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3절..<그러자 수석 사제들이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고소하였다.>--여기서는 수석 사제들이예수님을 여러 가지로 고소했다는 말만 하고 그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있지 않은데 루카복음 23장 2절을 보면, 예수님이 백성들을 선동하고, 황제에게 세금내지 못하게 막고, 자신을 메시아 곧 임금이라고 말했다고 고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근거 없는 고소에 대해 반박할 가치가 없어서도 아니고, 그 고소를 무시해서도 아니고, '고난 받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고소를 반박하지 않고 감수하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서 적극적으로 고난을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4절..<빌라도가 다시 예수님께,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소? 보시오, 저들이 당신을 갖가지로 고소하고 있지 않소?" 하고 물었으나,>--빌라도는 예수님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사람들이 이렇게 여러 가지 죄목으로 고소하고 있는데도 왜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는가?' 라고 묻습니다. 

5절..<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상하게 여겼다.>--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도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덮어씌운 죄목들은 모두 사형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유죄가 인정된다면 죽게 되는 상황인데도 이렇게 전혀 반박하지 않는 것은 다른 죄수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만일에 유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살려달라고 애걸하는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고, 살기를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침묵을 지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는 예수님의 침묵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상하게 여겼다.' 라는 말은 빌라도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신비감을 느꼈다는 뜻으로 해석 됩니다.

 

<6절-15절 : 사형 선고를 받으시다>

6절..<빌라도는 축제 때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풀어 주곤 하였다.>--여기서 '축제'는 과월절을 가리킵니다. 빌라도는 과월절이 되면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특별사면으로 석방했고, 그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를 석방할 것인지는 백성들이 선택했습니다. (실제로 그런 관례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7절..<마침 바라빠라고 하는 사람이 반란 때에 살인을 저지른 반란군들과 함께 감옥에 있었다.>--'바라빠' 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바라빠는 로마제국을 상대로 독립투쟁을 한 열혈당원들의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반란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폭동과 살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든 유대인들은 지금 감옥에 있는 바라빠를 풀어달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바라빠가 독립투사였으니 바라빠의 석방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8절..<그래서 군중은 올라가 자기들에게 해 오던 대로 해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군중은 올라가' 라는 말은 군중이 빌라도에게 갔다는 뜻입니다. 당시 빌라도가 임시 총독관저로 사용했던 곳은 헤로데 궁전이었는데, 그곳은 예루살렘 서쪽 지역의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중이 그곳으로 올라갔다는 표현이 사용되어 있습니다.

'자기들에게 해 오던 대로' 라는 말은 '관례대로' 라는 뜻입니다. 관례대로 해 달라고 요청

했다는 말은 과월절이 되었으니 죄수 하나를 풀어달라고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9절-10절..(9)<빌라도가 그들에게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10)<그는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

이다.>--빌라도가 군중에게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냐?' 하고 묻는 말에는 유대인들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체포하고 재판하는 일들이 빌라도 모르게 진행되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일은 분명히 군인들을 통해서 빌라도에게 바로 보고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도 최고의회의 재판 과정이나 재판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왕, 또는 반란군 두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반역 행위가 있었다면 최고의회보다 빌라도가 먼저 로마군대를 보내서 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인데도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

음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기하여' 라는 말은 '미워하여'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

수님 사건이 유대교 내부 문제라는 것을 빌라도가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빌라도가 군중에게, 너희들의 왕을 풀어 주기를 바라는가? 라고 묻는 것은 그 말의 내용이나 태도가 모두 유대인들을 조롱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그는 자기의 권한으로 예수님을 얼마든지 석방할 수 있었고, 당연히 석방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을 떠보는 것은 그의 교활함을 나타냅니다. 뭔가 따로 노리는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11절..<그러나 수석 사제들은 군중을 부추겨 그분이 아니라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여기서는 군중이 누구를 풀어 달라고 할지 정하지도 않고서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관례대로 죄수 하나를 풀어 달라고 요구한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아마도 실제로는 처음부터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요구하기로 정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타당합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 27장 17절을 보면

바라빠의 이름도 '예수'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빌라도는 군중이 풀어 달라고 하는 예수

가 바라빠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나자렛 예수의 석방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이 군중을 부추겨서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청하게 했다는 것은 바라빠의 석방을 확실하게 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형을 확실하게 확정짓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혹시라도 예수님이 석방될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군중을 선동해서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요구하게 합니다.

(공동번역 성서의 '차라리' 라는 말은 삭제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바라빠와 예수님 중에서 바라빠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빌라도가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 것입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선택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의 내용에서 강조점은 군중이 예수님 대신 바라빠를 선택했다는 점

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의 사형을 강력하게 요구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바라빠를 선택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12절..<빌라도가 다시 그들에게, "그러면 여러분이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

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여기서 빌라도의 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이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자칭했다는 죄목으로 고소했습니다. 만일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이라고 불렀다면 빌라도에게 고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최고의회 의원들과는 구분되는 일반 군중입니다. 그래서 지금 12절의 빌라도의 질문은, 최고의회와는 달리 일반 군중은 예수님에게 호의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빌라도가 한 말은 예수님 석방을 목적으로 군중과 협상을 하기 위해서 질문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빌라도의 말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자칭한 죄목으로 여러분이 고소한 이 사람은 어떻게 할까?' 라는 뜻으로 유대인들의 의견을 물어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뜻이라면, 그건 물어보나마나 한 질문이기 때문에, 그의 질문은 단순히 유대인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 한 말이 될 뿐입니다. 

13절..<그러자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거듭 소리 질렀다.>--여기서 '거듭'이

라는 말은 '다시' 라고 바꿔야 합니다. 그들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앞의 11절에서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소리를 질렀음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서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는 것입니다.군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른 것은 아마도 11절에서처럼 수석 사제들이 부추겨서 그랬을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 외에도 바리사이들의 선동이 있었을 것이고, 군중심리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이 구절은 유대인들의 군중이 단순히 예수님의 유죄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형을 주장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유대인들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4절..<빌라도가 그들에게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하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빌라도가 군중에게 예수가 무슨 나쁜 짓을 했느냐고 묻습니다. 즉 예수의 죄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중은 그 질문에 답변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만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죄목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습니다. 군중심리, 선동, 무질서, 증오만이 가득합니다.

여기서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라는 말은 폭동에 가까운 소동과 아우성을 뜻합니다. 빌라도는 폭동을 진압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총독입니다. 그래서 그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유대인들을 강제로 해산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군중의 압력에 굴복합니다. 그는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거나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군대를 동원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그가 군중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평소에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을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애를 쓴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를 변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책임을 강조하기 위한것입니다. 마르코복음만 놓고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하기 위해 애를 쓰는 장면은 별로 없습니다. 조금 각도를 달리 해서 보면, 오히려 빌라도가 군중을 선동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하여간에 최고의회,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 헤로데 당원들, 그리고 일반 유대인 군중, 빌라도,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살해한 공범입니다.) 

15절..<그리하여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여기서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라는 말은 예수님이 유죄냐, 무죄냐에 상관없이 군중이 원하는 대로 사형 선고를 내리고 재판을 끝냈다는 뜻입니다.

군중이 원하는 것은 바라빠의 석방과 예수님의 십자가형입니다. 빌라도는 권한을 갖고 있는 총독이면서도 자기의 권한을 전혀 행사하지 못하고 군중의 요구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그가 지금 가장 크게 관심을 갖고 있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 아니라, 군중을 만족시키는 일, 즉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는 일입니다.원래 '채찍질'은 경범죄를 지은 노예나 식민지 백성에게 가한 형벌이었고, 십자가형은 대역죄인에게 내린 극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죄수를 십자가형에 처할 때 우선 채찍질로 기운을 빼서 빨리 죽게 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채찍질은 죄수의 옷을 벗기고 시행했습니다. 채찍은 긴 가죽 끈으로 되어 있었고, 끝에 납덩이나 뼈 조각, 쇠 조각 등이 달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채찍질을 할 때마다 살점이 뜯겨졌습니다. 유대법에는 채찍질은 40번을 넘지 못하게 되어 있었지만, 로마법에는 채찍질 회수에 제한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라는 말은 십자가형을 집행할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형을 처음 만든 것은 페르샤인들이라고 전해집니다.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형은 '맹수의 밥이 되는 형'과 함께 가장 치욕스러운 처형방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십자가형은 주로 노예들과 식민지 백성들에게 행해졌는데, 로마 시민들도 반역죄인이나 탈영병, 성전강도 등 같은 중죄인들은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십자가는 보통 T형이나 십자형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십자가형에 앞서 채찍질 같은 고문이 먼저 집행되었고, 죄수는 십자가나 또는 십자가의 횡목을 도시 밖 처형장까지 지고 가야 했습니다. 그때 죄목을 적은 명패를 목에 걸거나 앞에 들고 갔습니다. 처형장에 도착하면 옷을 모두 벗기고 알몸으로 만든 다음 팔을 벌린 모습으로 횡목에 묶거나 못을 박아 매달았습니다.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는 흔히 며칠 동안 살아 있는 경우가 많았고, 숨이 끊어지면 시체가 썩을 때까지, 또는 맹수의 먹이가 될 때까지 십자가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16절-20절 : 군사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다> 

16절..<군사들은 예수님을 뜰 안으로 끌고 갔다. 그곳은 총독 관저였다. 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군사들은 예수님을 뜰 안으로 끌고 갔다. 그곳은 총독 관저였다.' 라는 말은 지금까지 총독관저 바깥뜰(또는 광장)에서 재판이 진행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십자가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준비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십자가형 집행 준비를 기다리는 시간을 이용해서 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에 예수님을 뜰 안으로 끌고 갑니다. 부대원이 모두 예수님을 조롱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한 군사는 몇 명이었을 것이고, 나머지 부대원들은 그것을 구경했을 것입니다. 부대원의 수는 600-1,000명 정도였고,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군복무가 면제되었습니다.) 

17절..<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서는,>--'자주색 옷'은 그리스 지역의 임금들이 입었던 옷인데, 마태오복음 27장 28절을 보면 군인들이 예수님께 입힌 옷은 자주색 옷이 아니라 자기들의 군복인 진홍색 망토였습니다. (아마도 자기들의 군복을 예수님께 입히면서 왕의 옷이라고 조롱했을 것입니다.)

'가시관'은 그 지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가시나무, 또는 엉겅퀴나 가시가 돋친 식물로 왕관을 흉내 내서 만든 관입니다. (마태오복음 27장 29절에는 '가시나무'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 임금들은 황금 잎사귀로 만든 왕관을 썼습니다. 군인들이 왕관을 흉내 내어 가시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운 것은 신체적인 고통을 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롱하기 위해서입니다. 

18절..<"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인사하기 시작하였다.>--지금 군인들의 행동은 예수님의 죄목이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걸 조롱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입니다. 그들은 임금의 옷을 흉내 내서 자기들의 외투를 예수님께 입히고, 왕관을 흉내 내서 가시관을 씌운 다음에, 이제는 왕에게 경배하는 모습을 흉내 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사하기 시작하였다.' 라는 말은 인사하는 모습을 흉내 냈다는 뜻입니다. 

19절..<또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고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절하였다.>--마태오복음 27장 29절에 의하면 '갈대'는 왕의 지팡이, 즉 왕홀을 흉내 낸 것입니다. 당시에 왕홀은 불복종하는 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매질을 할 때 사용하기도 했기 때문에 군인들은 그것을 흉내 내면서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때립니다.

'침을 뱉는 것'은 극심한 경멸을 뜻합니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했다.' 라는 말은 앞의 18절에서 말한 '인사하였다.' 라는 말을 다시 설명한 것인데, 왕에게 경배하는 모습을 흉내 낸 것입니다.

20절..<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자주색 옷을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동안 십자가형을 집행할 준비가 끝납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다시 입히고 십자가형을 집행하기 위해서(십자가에 못 박으러) 예수님을 처형장으로 끌고 갑니다.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이 모든 고난과 모욕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사형수가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가는 것은 당시 로마의 관습이었는데, 대개는 십자가의 기둥은 형장에 세워두고 죄수는 십자가의 횡목만 지고 갔습니다.

 

<21절-32절 :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21절..<그들은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그는 키레네 사람 시몬으로서 알렉산드로스와 루포스의 아버지였는데,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이었다.>--'그들'은 로마 군인들입니다. 십자가형은 도시 밖에서 공개적으로 집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에는 어느 정도 십자가를 지고 가셨지만, 채찍질을 너무 많이 당해서 끝까지 지고 갈 수 없을 정도로 탈진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은 지나가는 어떤 사람을 붙잡아서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로마 군인에게는 백성을 징용할 권한이 있었습니다.'키레네'는 북아프리카, 지금의 리비아에 있던 도시입니다. 당시 그곳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키레네 출신 유대인들의 회당이 따로 있었을 정도로 그 수가 많았습니다.

시몬은 키레네에서 살다가 이스라엘로 돌아와 정착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예루살렘 근처 시골에서 살았거나 시골에 볼 일을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시몬이 강제로 십자가를 지기는 했지만, 그가 한 일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의 모범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형과 죽음의 현장에도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시몬의 가족은(알렉산드로스와 루포스라는 이름의 두 아들도 포함해서)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신자가 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시몬의 이름과 두 아들의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들이 초대 교회 공동체가 잘 알던 사람들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로마서 16장 13절에 '루포스' 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시몬의 아들 루포스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22절..<그들은 예수님을 골고타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이는 번역하면 '해골 터'라는 뜻이다.>--'해골'은 히브리어(또는 아람어)로 '골고타', 그리스어로 '크라니온', 라틴어로 '갈바리아'입니다. 처형 장소는 바위 언덕인데 그 지형의 모습이 해골 모양이었기 때문에 골고타(해골터)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으로 추정합니다. 

23절..<그들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건넸지만 그분께서는 받지 않으셨다.>--'몰약'은 아라비아산의 값비싼 향유입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는 마취제였는데,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그것을 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죄수에 대한 친절한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받지 않으신 이유는 맑은 정신으로 고난을 감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4절..<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고 나서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는데 누가 무엇을 차지할지 제비를 뽑아 결정하였다.>--처형 장소에 도착하면 죄수의 옷을 벗긴 다음 팔을 벌리게 하여 횡목에 끈으로 묶거나 손목에 못을 박았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손목에 못을 박아 고정시켰습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세운 다음에는 기둥에 발을 묶거나 못을 박아 고정시켰고, 마지막으로 십자가 위에 죄목을 적은 명패를 붙였습니다. 당시에는 옷감이 무척 귀한 시대였기 때문에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군인들이 죄수의 옷을 나누어가지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보는 십자고상에는 예수님의 허리에 천 조각이 둘러져 있는데, 실제로는 그런 것도 없이 완전히 발가벗겨진 상태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요한복음 19장 23절-24절을 보면, 군인들이 예수님의 겉옷은 네 몫으로 나누어 가지고, 속옷은 제비를 뽑아 차지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마르코는 이것을 간략하게 기록했습니다. 아마도 요한복음의 기록이 정확할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옷을 군인들이 나누어 가진 것은 시편 22편 19절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25절..<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마르코는 예수님이 아침 아홉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열두 시부터 온 땅이 어두워지고(33절), 오후 세 시에 숨이 끊어진 것으로(37절) 기록했는데, 이것은 실제 상황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인 의도를 가지고 기록한 시간으로 생각됩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수난당하고 운명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9장 14절을 보면, 빌라도가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낮 열두 시쯤으로 되어 있습니다. 

26절..<그분의 죄명 패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쓰여 있었다.>--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다음에는 누구나 잘 볼 수 있도록 죄수의 이름과 죄목을 적은 죄명 패를 십자가 위에 붙여 놓았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0절을 보면 죄목을 적은 명패에 히브리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유대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 라고 적혀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유대인들의 공용어이고, 라틴어는 로마제국의 공용어이고, 그리스어는 당시 대중적으로 사용되던 말입니다. 죄목이 '유대인들의 임금'이라는 것은 '반역죄'로 처형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십자고상에 INRI 라고 적혀 있는 것은 라틴어의 머리 글자를 모은 것인데, Iesus(예수스 - 예수) Nazarenus(나자레누스 - 나자렛의) Rex(렉스 - 왕)  Iudaeorum(유대오룸 - 유대인들의) 입니다. 

27절..<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강도 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기회에 다른 죄수들도 함께 처형하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만일에 의도적으로 다른 죄수들을 예수님과 함께 처형하려고 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평범한 범죄자로 깎아내리려는, 즉 모욕을 주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못 박혀서 십자가에 매달린 두 사람은 글자 그대로 강도일 수도 있고, 민족독립을 위해서 투쟁한 열혈당원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두 사람이 열혈당원이었다면 바라빠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28절..<그리하여 '그는 죄인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일부 필사본에는 28절이 들어 있는데, 대부분의 필사본에는 이 구절이 없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구절을 성경 본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고, 그래서 거의 모든 번역서에서 빠져 있습니다.) 

29절-30절..(29)<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그분을 이렇게 모독하였다. "저런!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더니.> (30)<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십자가형은 대개 사람들의 통행이 잦은 도로변에서 집행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머리를 흔들며' 라는 말은 시편 22편 8절에서 온 표현인데, 조롱하고 모욕하는 몸짓을 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재판 중에 나왔던 성전에 관한 증언을 이야기하면서,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세울 힘이 있다면 그 능력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자신의 목숨이나 구하라고 예수님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31절..<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함께 조롱하며 서로 말하였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여기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말은 예수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십자가에서 좀 떨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등의 기적을 행하신 것을 가리킵니다.'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이라는 말은 십자가 죽음에서 자기 자신을 구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그동안 예수님 때문에 마음졸였던 자들이 이제는 안심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승리감을 느끼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32절..<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그분께 비아냥거렸다.>--그들은 예수님께서 지금 십

자가에서 내려온다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로 믿겠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의 임금 메시아' 라는 말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정치적인 메시아를 뜻합니다. 어떻든 32절의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또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 와 보라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즉 메시아가 아니니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예수님을 안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기적도 안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보고 놀라면서도 믿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온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사람도 예수님과 같은 처지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모독하고 비아냥거립니다. 이것은 그들의 악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루카복음 23장 39절-43절을 보면, 두 죄수 중 하나는 예수님을 모독하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옹호하고 구원을 약속 받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차이가 생긴것은 아마도 복음서를 기록할 때 전승 수집과정에서 서로 다른 전승 자료를 사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33절-41절 : 숨을 거두시다> 

33절..<낮 열두 시가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낮 열두시' 와 '오후 세 시'는 앞의 25절에서 말한 것처럼 신학적인 의도에서 표현된 시각으로 해석됩니다. 즉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시각입니다. 여기서 '온 땅'은 이스라엘 땅을 뜻할 수도 있고, 온 세상을 뜻할 수도 있는데 이스라엘 땅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세 시간 동안 어둠이 온 땅에 덮였다는 것은 일식 현상은 아닙니다.

그날은 보름날이었기 때문에 낮 시간에 달이 뜰 수 없고, 따라서 일식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심하게 짙은 구름이 하늘을 덮었거나 지중해에서 불어온 모래 폭풍으로 어두워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입증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온 땅이 어둠에 덮인 현상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우주적인 기적(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이것은 아모스서 8장 9절, 요엘서 2장 10절 등의 영향을 받은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어둠'은 슬픔, 종말, 심판 등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창조를 나타내는 표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배척한 인간들에 대한 하느님의 노여움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34절..<오후 세 시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번역하면,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마르코는 오후 세 시에 예수님께서 마지막 기도를 바치시고 숨을 거두신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는 시편 22편 2절을 아람어로 바친 것입니다. 마르코는 이 구절을 그리스어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시편 22편은 곤경에 처한 의인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야훼의 도우심을 간청하고,  마침내 구원을 확신하고 감사드리는 내용의 시편입니다. 따라서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이 구절만 놓고 보면 고독과 절망의 울부짖음처럼 보이지만, 시편 22편 전체를 보면 희망과 신뢰의 기도입니다. 

35절..<곁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저것 봐! 엘리야를 부르네." 하고 말하였다.>--십자가 곁에 서 있던 자들 몇 사람이 예수님의 기도를 듣고 엘리야를 부른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엘리야가 곤경에 처한 의인을 구해준다는 민간신앙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외침을 듣고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착각했거나 아니면 일부러 왜곡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36절..<그러자 어떤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신 다음, 갈대에 꽂아 예수님께 마시라고 갖다 대며, "자,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봅시다." 하고 말하였다.>--누군가가 예수님에게 '신 포도주'를 마시라고 갖다 댑니다. '신 포도주'는 당시 로마 군인들이 마시던 음료수인데, 포도주에 물과 식초를 섞은 것입니다. 사형수가 의식을 잃었을 때 이것을 마시게 하면 다시 정신을 차렸다고 합니다.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갈대에 꽂아서 갖다 대는 것은 십자가의 높이가 꽤 높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준 것은 자비심에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기적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예수님의 생명을 약간 연장시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봅시다.' 라는 말도 호기심과 비웃음이 섞인 말로 해석됩니다. 

37절..<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예수님께서 큰소리로 무슨 말을 외치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시편 22편을 계속 바치면서 숨을 거두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으로 루카복음은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또 요한복음은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는 피가 하반신으로 몰리면서 뇌의 혈액 결핍증과 심근경련에 따른 호흡 곤란, 질식, 심장마비, 실신에 이어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 대개는 하루 이상 숨이 붙어 있는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심한 채찍질 등으로 탈진했기 때문에 그 시간이 짧았습니다. 

38절..<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여기서 '성전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 사이의 휘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구약의식의 폐지를 나타내며, 낡은 시대가 가고 새 시대가 열린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예수님이 예고하셨던 성전 파멸과 하느님의 심판의 시작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또 이것은 지성소에는 대사제만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누구나 다 들어가서 하느님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으로도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느님은 지성소에 숨어 계시지 않고 만백성에게(이방인들에게)도 당신을 드러내신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이방인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이 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39절..<그리고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이라는 말은 백인대장이 십자가형 집행을 지휘하고 감독하면서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백인대장'은 사형을 집행했던 군인들의 지휘관입니다. 그는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하는 유대인들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믿음을 갖게 됩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소리를 지르고'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필사본의 차이입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라는 말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 와 같은 종류의 신앙고백입니다. 아마도 백인대장은 최고의회의 재판부터 빌라도의 재판까지 재판의 전 과정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고의회가 하느님의 아들로 자처했다는 죄로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그가 보기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 자처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자기는 그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직후에 최초로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이방인이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제 교회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 속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고백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에 대한 재판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선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백인대장의 이름은 '론지노'이고, 나중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백인대장과 군인들이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고 두려워하면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마태오복음의 기록대로라면 그런 현상에 압도되어서 어느 정도 공포심이 섞인 신앙고백을 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마르코복음의 기록대로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신앙고백을 한 것이라면, 재판의 전체 과정과 사형집행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어떤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보고 그 모습에 감동하게 되어서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과연 그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40절..<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여자들은 달아나버린 사도들과  는 달리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인들이 그들을 밀어내기도 했을 것이고, 그들 자신도 사람들 속에 섞여 있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멀리서' 지켜보면서 이 비극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티베리아 북쪽에 있는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인데,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주셨던(루카 8,2) 여자입니다. '작은 야고보'와 '요세' 라는 사람과 그들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요셉'으로 번역했는데, 원문에는 '요세'로 되어 있습니다. '요세'는 '요셉'의 축소형입니다.)

'작은'이라는 말은 키가 작거나 나이가 어린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작은 야고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제배대오의 아들 야고보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살로메'는 '제배대오 아들들의 어머니'일 것입니다(마태 27,56). 다른 여자들이 더 있었는데, 세 사람의 이름만 말한 것은 그들이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41절..<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그분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실 때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시중을 들었던 여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루카 8,3).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물질적으로

후원했고,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까지 따라온 것은 과월절 축제를 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장소까지 따라온 것은'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뒤따르는'(8,34) 것과 같은 행동입니다.

(요한복음 19장 25절-27절에는 십자가 밑에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한 명과 성모 마리아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복음서에는 그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42절-47절 : 묻히시다> 

42절..<이미 저녁때가 되어 있었다. 그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었으므로,>--마르코는 예수님이 과월절에 처형되었고, 그날은 금요일, 즉 안식일 전날이었고,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미 저녁때가 되어 있었다.' 라는 말은 '날이 저물고 있었다.' 라는 뜻입니다. 즉 아직 저녁때가 된 것은 아닙니다. 날이 저물면 안식일이 시작되는데, 아직 안식일이 시작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라는 말은, 그날이 안식일에 노동하지 않기 위해서 미리 모든 것을 준비하는 금요일이었다는 뜻입니다. 

43절..<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빌라도에게 당당히 들어가,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명망 있는 의회 의원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열심히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아리마태아'는 유다 북방에 위치한, 사무엘의 고향 '라마다임', 오늘날의 '렌티스'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명망 있는 의회 의원'이었다고 설명되어 있는데, 최고의회 의원 일 수도 있고, 지방의회 의원일 수도 있습니다. 루카복음 23장 50절-51절의 내용을 보면 최고의회 의원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명망 있는'이라는 말은 그가 부유한 지주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열심히 기다리던 사람'이라는 것은 그가 경건한 유대인이라는 것을 나

타낼 뿐,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이 구절만으로는 그가 정말 예수님의 제자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대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라고 되어 있고, 마태오복음 27장 57절을 보면, '그도 예수님의 제자였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빌라도에게 당당히 들어가' 라는 말은, 그 동안에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숨기고 있다가 지금은 용기를 내서 당당하게 제자로서 행동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수도 있습니다.)

하여간에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공감하고,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호의적이었다는 것, 그리고 의회 의원이었지만 예수님의 사형 판결에 찬성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의 행동은 사실상 제자로서 하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뒤의 47절에서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안장할 때, 여자들이 돕지 않고 지켜보기만 한 것은, 여자들은 그를 잘 모르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사형수의 시체는 관청의 허락이 없으면 장사지낼 수가 없었는데, 요셉이 '당당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분위기로 볼 때 예수님의 공범으로 몰릴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숨을 거두고 무덤에 묻힐 때까지도 사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리마태아 요셉의 행동은 더욱 용기 있는 행동으로 보입니다. 끝까지 십자가 밑에 있었던 여자들과 아리마

태아 요셉은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신앙이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44절..<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벌써 돌아가셨을까 의아하게 생각하여, 백인대장을 불러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느냐고 물었다.>--십자가형을 받은 죄수는 보통 하루 이상, 며칠씩 살아있는 경우가 흔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이 그렇게 빨리 사망했다는 말을 듣고 놀라게 됩니다. 그는 사형을 집행한 백인대장을 불러서 예수님의 사망을 확인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망을 사형집행관과 통치자가 공식 확인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확실히 죽으셨다는 증거입니다.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예수님은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은 척 했거나, 가사 상태에 빠졌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확실히 죽으셨다는 것은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45절..<빌라도는 백인대장에게 알아보고 나서 요셉에게 시신을 내주었다.>--(공동번역 성서는 이 구절을 '그리고 백인대장에게서 예수가 분명히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시체를 요셉에게 내어 주었다.' 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필사본의 차이입니다.) 당시에 로마인들은 처형된 죄수들의 시체를 그냥 십자가에 매달아두곤 했습니다.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달라고 요구한 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방치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9장 31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시체를 치워 달라고 요청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요셉은 로마인들이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대충 처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시신을 내달라고 요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죄수의 시신을 가족이나 친척에게 넘겨주는 것은 빌라도의 권한에 속한 일이었습니다.

로마법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가족이나 친지가 사형수의 시체를 넘겨달라고 요구하면 넘겨주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할 일은 예수님의 사망을 확인하는 일 뿐이었고, 그는 규정대로 시신을 넘겨주었습니다. (빌라도가 마음이 너그러워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준 것은 아닙니다.)아리마태아 요셉이 넘겨받은 것은 살아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죽은 예수님의 시신이었다는 사실이 예수님의 사망을 확인하는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내주었다.' 라는 말은 양도증서를 작성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유대교의 장례 관습>--그 지역에서는 기후 때문에 시신의 부패가 빠르게 진행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망 당일이나 그 다음 날에 바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시신을 씻고, 향유를 바르고, 옷을 입힌 뒤에 삼베로 감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을 밖에 매장했습니다. 무덤은 대개 동굴이었는데, 동굴의 벽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시신을 눕힌다음 가는 베로 덮었고, 무덤 입구는 큰 바위로 막았습니다. 매장하고 나서 사흘 동안 시체를 살피면서 애곡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것은 최종적으로 죽음을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일 년이 지난 후에, 시체가 뼈만 남고 모두 썩으면, 뼈를 모아서 기름과 포도주를 바르고 광주리나 자루에 담아서 영구적인 매장을 합니다. 이때도 간단한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새로 매장된 장소는 무덤이라는 것을 알아보기 쉽게 석회를 칠해서 경고 표시를 해둡니다. 이 표시는 사람들이 무덤에 접근하는 것을 막고 부정 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46절..<요셉은 아마포를 사 가지고 와서, 그분의 시신을 내려 아마포로 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시고, 무덤 입구에 돌을 굴려 막아 놓았다.>--요셉은 안식일이 되기 전에 장례를 마무리하기 위해 급하게 서둘렀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니코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가지고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요한 19,39).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고(요한 19,40), 아마포로 감싼 다음에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 같은 형태의 무덤에 모십니다.

그 다음에 무덤 입구를 돌로 막아 놓았는데, 그 돌은 여자의 힘으로는 굴려내기 어려운 큰 바위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여자들이 그 돌을 어떻게 굴려 낼 것인가? 하고 걱정하게 됩니다(16,3). 그 무덤은 요셉 자신을 위해 준비했던 무덤이었고(마태 27,60), 처형 장소 근처에 있었습니다(요한 19,42).

47절..<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분을 어디에 모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장례를 돕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장례와 무덤의 위치에 대한 증인들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언급된 것은 이틀 뒤, 안식일 다음날 빈 무덤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안식일이 되기 전에 서둘러 시신을 안장해야 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장례식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안식일이 지난 뒤에 정중한 장례를 다시 행하려고 무덤을 눈여겨 보아두었고,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봅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과 시신을 모시는 것을 지켜보았다는 것은 나중에 예수님의 무덤이 아닌 다른 빈 무덤에 갈 수도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즉 여자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시는 것을 보았고, 예수님의 무덤 위치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는 여자들의 증언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신 바로 그 무덤이 비어 있는 것에 대한 증언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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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살다보면, 이 넓은 우주에서 나 혼자뿐인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 내 편은 하나도 없고,그냥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외로움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이란, 사실 정신적인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육체적인 고통이 극에 달하면

어느 순간 실신하거나 감각이 마비되거나 해서 고통을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은 끝없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리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미쳐버리기 전에는 그 고통에서 해방될 길이 없습니다.

그 고통은 겪어본 사람만이 압니다.

술이 고통을 없애줍니까? 아닙니다.

마약이 고통을 없애줍니까? 아닙니다.

피신처는 하느님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

육체적인 고통은 정말 너무나도 끔찍했겠지요.

그러나 그 고통은

그 당시에 로마제국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반란군들,

스파르타쿠스같은 노예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입니다.

예수님만이 특별하게 겪은 고통은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겪은 특별한 고통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제자들과 인간들에 대한 배신감?

모욕감, 고독, 절망, ...???...

그런 것은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그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한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인류를 구원하러 온 구세주이시면서도,

하느님에게서조차 버림받은 것 같은 절망과 고독,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의 침묵,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라고 감히 생각해 봅니다.

느님은 올리브 동산에서도 침묵을 지켰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도 침묵을 지켰습니다.

(어쩌면 아버지 하느님도 예수님과 함께 그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리 성경을 읽고 묵상해도, 아무런 응답도 없고,

하느님의 침묵이 천근만근 가슴을 누를 때,

우리는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하느님 왜 저를 버리십니까? 라고 울부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그 하느님께 기도하는 일 외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 침묵이 하나의 대답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도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대답을 들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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