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서 8장 1절-38절>
<1절-10절 : 사천 명을 먹이시다>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6장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내용이 거의 비슷합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기적은 한 번 밖에 없었고, 그 내용이 서로 다른 경로로 전해지다가 복음서에 따로 기록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의 세부 묘사에 많은 차이가 있고, 8장 19절-20절의 예수님 말씀에도 기적은 두 번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문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냥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두 기적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지만 같은 기적을 다르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 비슷한 기적이 두 번 있었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1절..<그 무렵에 다시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그 무렵'이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막연하고 불확실한 표현입니다. '다시' 라는 말은 6장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비슷한 기적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지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먹을 것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동안에 먹을 것이 다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6장 35절-36절에서는 제자들이 먼저 사람들의 배고픔을 걱정했습니다.)
2절..<"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6장 34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이유가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들의 굶주림을 가엾게 여기십니다.
사람들이 '벌써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 곁에 머물렀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온 그날 일어난 일입니다. '사흘 동안'의 일은 기록되지 않아서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사흘'은 이제 하느님께서 도움을 베푸실 때가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창세 40,13 ; 여호 1,11).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라는 말은 '먹을 것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라고 의 논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이 하실 일을 작정하셨으면서도 제자들의 의견을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또는 제자들로 하여금 지금의 상황은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하기 어렵고 기적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3절..<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곳은 사람들이 주변 마을에 가서 각자 먹을 것을 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6,36). 그러나 지금 이곳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곳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해산시키면 굶은 채로 집으로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 데서 온 사람들'이라는 말은 이방인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에 먹을 것을 살 수 있는 마을도 없고,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그냥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4절..<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이 구절의 제자들의 반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6장 37절의 반문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체험했으면서도 제자들의 믿음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그 기적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반문한 것이라면 제자들의 말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말은 '사람의 힘'으로는 빵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주님의 기적'으로만 빵을 구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예수님 말고 누가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말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5절..<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제자들은 '일곱 개'가 있다고 대답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는데, 여기서는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흔히 '7'이라는 숫자가 '완전함, 충만함'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가지고 있는 빵이 몇 개 안 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완전함이나 충만함을 상징하는 숫자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일곱 개의 빵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먹기에도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낼 뿐입니다.
6절..<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6장 39절에서는 군중을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는데, 여기서는 그냥 '땅에' 앉으라고 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풀들이 모두 말라버려서 없는 계절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서는 사람들을 앉게 한 것은 제자들이었는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앉으라고 분부하신 것으로 되어 있고, 또 여기서는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앉게 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아마도 장소가 달라서 상황도 달라진 것 같습니다. 군중을 땅에 앉게 하신 다음의 예수님의 행동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때와 거의 같습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습니다.
6장 41절에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의 식사 관습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감사를 드리신 것은 음식을 축복해 달라고 하느님께 비는 기도로서 이것은 그리스인들의 식사 관습을 반영한 것입니다.제자들은 여기에서도 예수님의 보조자로서 기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적으로 양이 많아진 빵을 예수님에게서 받아서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7절..<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여기서는 6장과 달리 물고기 이야기가 따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물고기 몇 마리를 축복하시는데, 이것은 하느님을 향한 기도가 아니라 물고기를 향한 축복이고, 기적을 일으키는 말이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빵을 나누어 준 것처럼 물고기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8절..<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정도로 빵과 물고기를 많이 받았고, 남은 음식은 일곱 바구니였습니다. 여기서 '바구니'는 6장 43절의 '광주리'보다는 작은 것입니다. (여기서도 바구니가 어디서 갑자기 생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사람들의 반응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남은 조각이 일곱 바구니라고 했는데, 역시 '7'이라는 숫자를 상징적인 숫자로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떻든 음식이 일곱 바구니나 남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기적의 위대함을 나타냅니다.
9절..<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여기서도'사천 명가량'은 여자와 어린이들을 빼고 남자들의 수만 기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성경에서 '4'는 동서남북, 모든 민족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 그런 상징으로 사용되었는지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어떻든 아주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6장 45절에서처럼 여기서도 직접 군중을 해산시킵니다.
10절..<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예수님께서는 6장 45절과는 달리 여기서는 군중을 해산시킨 뒤에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십니다. '달마누타'는 갈릴래아 호수 서북쪽에 있던 도시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11절-13절 :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요구하다>
11절..<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예수님의 기적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예수님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적대감도 점점 더 커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진짜 예언자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라는 말은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다는 뜻입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라는 말을 공동번역 성서는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원문과는 거리가 먼 번역입니다. '시험하려고' 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여기서 '시험하다.' 라는 말의 원문 단어에는 '유혹하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다는 말도 시비를 걸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오는 표징'은 하느님께서 직접 행하시는 어떤 특수한, 또는 우주적인 사건을 뜻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에게 그런 표징을 통해서 스스로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표징'은 기적과는 다른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서의 '기적'이라는 번역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에게는 그가 메시아라는 하늘의 표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아라고 분명하게, 또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또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님께서 그동안 행한 기적들도 메시아의 표징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대로 예수님께서 표징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들은 '예수는 가짜 예언자다.' 라고 선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리사이들의 요구는 사탄의 유혹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하느님을 시험하는 일이 되고, 그들의 요구를 거 부한다면 그들이 바라는 대로 될 것입니다.
12절..<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마음속으로 고통스러워 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믿음도 없고, 악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탄식입니다. '이 세대' 라는 말은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신앙심 없고, 악한 태도를 지닌, 현재 살아 있는 이 세대'를 뜻합니다. 지금 예수님에게 와서 시비를 걸고 있는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이지만, 예수님의 탄식은 '이 세대' 전체를 향한 것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리사이들과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라는 말은 '믿음도 없으면서 이 세대 사람들은 왜 표징을 원하는가?' 라는 뜻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기적'이라고 번역했는데, '표징'으로 바꿔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는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인데, 이 말은 엄숙하게 선언할 때 사용되는, 아주 단호한 표현입니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만일에 이 세대에게 표징이 주어진다면...'입니다.
원문 문장에서 생략되어 있는 말은 '내가 저주를(천벌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맹세를 할 때의 형식을 사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리사이들의 요구대로 표징을 보여주는 일은 천벌을 받을 일이라는 말인데, '절대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바리사이들의 요구를 강하게 거절하신 것은 진리에 대해 완고하게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진리를 이해시키고자 다른 표징을 주시지는 않겠다는 뜻입니다.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표징이나 기적을 행하시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13절..<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떠나십니다. 처음부터 믿지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들과는 논쟁 자체가 무의미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이 무력한 모습으로 떠나고 바리사이들이 승리자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불신앙에 대한 판결이 내려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논쟁의 결론은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결코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그들을 남겨두고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호수 동쪽으로 가셨을 것입니다.
<14절-21절 :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14절..<그런데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배 안에 빵이 한 개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선교활동을 위해 파견되었을 때에는 아무것도 지참하지 말고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평소에 예수님과 함께 다닐 때에는 빵이 나 물고기 등 먹을 것을 가지고 다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먹을 것이 없어서 제자들이 걱정을 하게 됩니다. 일부 학자들은 배 안에 있는 한 개의 빵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 해석이 올바른지에 상관없이 예수님과 함께 있다면 우리는 끼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15절..<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이 구절의 예수님 말씀은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린 것과는 상관이 없고,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당파의 위선과 율법주의, 또는 형식주의적 종교생활 등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 때문에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는 것을 더 걱정하게 됩니다.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당파는 자기들끼리는 서로 적대적이었지만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나 종교생활이나 윤리적인 면은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유대교에서는 흔히 누룩을 '악한 영향, 인간의 나쁜 성향, 성질'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의 나쁜 영향력을 뜻하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조심하라고 하시는 것은 그들에게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16절..<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누룩'이라는 말 때문에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는 것만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영적인 문제보다는 물질적인 문제, 즉 육신의 배고픔을 더 걱정하고 있습니다.
17절..<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무엇 때문에 수군거리는지 아시고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라는 말은 이미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두 번이나 빵의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왜 아직도 여전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먹을 것을 걱정하느냐? 라는 꾸중입니다.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둔하고, 무지하고,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들에게 없는 것은 빵이 아니라 '믿음, 이해력, 지혜, 열린 마음'입니다.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라는 말은 '왜 믿으려고 하지 않고 이해하고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느냐?' 라는 꾸중입니다.
18절..<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이 구절은 예레미야 5장 21절, 또는 에제키엘 12장 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말씀과 기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지만, 백성들도, 종교계와 정치 지도자들도, 친척들과 고향 사람들도, 그리고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글자 그대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라는 말은 두 번의 빵의 기적을 다시 생각해보라는 말씀입니다.
19절-21절..(19)<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21)<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말씀하셨다.>--예수님께서는 두 번이나 행하신 빵의 기적을 이야기하시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그 일을 다시 생각하게 하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라는 말은, 그런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지금 함께 계시는데 빵이 없다고 걱정하는 것은 믿으려는 노력도, 깨닫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부족한 것이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사실 사도들은 날마다 먹을 것을 걱정하면서 지내야 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예수님과 사도들을 돕지 않으면, 즉 후원자가 없으면 예수님의 일행은 매일 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제자들을 위해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하는 것을 크게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걱정에도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무엇을 먼저 걱정해야 할지,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반대로 전혀 걱정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셔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아주 잘못하는 일입니다. 믿음을 갖고 하느님께 의지하되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자신이 노력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 하여간에 물질적인 문제에 너무 빠져버리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따르면서, 자신의 일은 자신이 다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제자들을 제대로 보게 하시려고 그랬는지 다음 이야기에서 눈먼 이를 고쳐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그 결과 제자들이 비로소 시력을 되찾았는지, 그 다음 대목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어집니다.
<22절-26절 :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치시다>
22절..<그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벳사이다'는 요르단 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 들어오는 입구 동쪽 호숫가에 자리 잡은 어촌인데 베드로, 안드레아, 필립보의 고향입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데리고 와서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한 것은 그 사람을 고쳐 달라고 청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낫는 것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데리고 온 눈먼 이도 그렇게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23절..<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
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예수님께서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데리고 가시는 것은 눈이 안 보이기 때문에 혼자서는 잘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서이고, 이것은 예수님의 따뜻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라는 말은 앞의 7장 33절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실 때처럼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따로 데리고 나가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병 고치는 기적가로만 생각하는 것을 피하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고쳐주시는 것은 기적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다만 자비와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예수님께서는 7장 33절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실 때처럼 여기서도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십니다.고대 유대교에서 침은 특히 안질에 특효가 있는 약재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침을 약으로 사용하신 것은 아니고, 곧 도움을 받게 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랍비들은 침을 바르고 주문을 외웠는데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에게 손을 얹으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이 눈먼 이에게 옮겨 간다는 것을 나타내는 동작입니다. 이것도 역시 그에게 믿음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치료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눈먼 이 자신이 스스로 보려는 노력을 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스스로 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법입니다. 영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24절..<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치유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처음에는 어렴풋이 보이다가 차츰 분명하게 시력을 되찾게 됩니다. 이것은 치유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한 것일 뿐 다른 뜻은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눈먼 이가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나무 같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인 것 같다고 짐작하는 것은 그가 선천적인 시각장애자는 아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25절..<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이제 기적이 완성됩니다. 믿음을 가지게 되고,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된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고' 이제 그는 '똑똑히' 보게 됩니다. 즉 완전히 치유됩니다.
26절..<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지금 예수님과 그 눈먼 이는 마을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23절).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십니다. 이 명령은 다른 기적 이야기에서 자주 나왔던 침묵 명령과 같은 내용의 명령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라는 명령입니다. 그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벳사이다 사람인지, 다른 마을 사람인지, 벳사이다 사람이라면 마을 밖 외딴집에서 살고 있는지, 그런 것은 알 수 없지만, 집(사적인 곳, 은밀한 곳)과 마을(공적인 곳)이 대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부터 이 이야기는 자주 상징적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은 불신앙에 젖어있는 마을에서, 또는 눈먼 이의 과거의 삶에서 그를 분리시키는 것으로, 손을 얹는 것은 신앙에 접근시키는 것으로, 또는 자신의 약함에 대한 인식이나 선행의 격려 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눈먼 이가 차츰 단계적으로 보게 되는 것은 신앙의 단계적인 발전을 나타내는 것으로, 마침내 분명하게 보게 된 것은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깨달은 것으로, 마을로 가지 말고 집으로 가라는 명령은 과거의 삶과 세속의 삶을 버리고 하늘의 집을 향해 나아가라는 권고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해석은 성서학의 해석은 아니고, 강론할 때(또는 강의나 설교할 때) 자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27절-30절 :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27절..<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앞의22절-26절은 벳사이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은 벳사이다를 떠나 북쪽으로 갑니다.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의 이복형제인 헤로데 필리포스가 기원전 2년경에 세운 도시인데 벳사이다에서 북쪽으로 40Km쯤 떨어진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리아 필리피까지 가셨다가 거기에서부터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자주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다니셨지만, 이제부터는 예루살렘을 향한 '길'을 걷게 됩니다. 그 길은 죽음을 향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하신 질문은 사람들이(또는 제자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겪게 될 수난을 예고 하시기 위해서, 또 제자들이 그동안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하신 질문입니다.
28절..<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이미 앞의 6장 14절-15절에서도 나왔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엘리야가 재림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해 있다가 종말의 심판에 앞서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내려올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6,15). 또 예수님을 구약시대의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옛 예언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여간에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통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메시아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군중에 대한 예수님의 활동이 실패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실패의 탓은 군중에게 있습니다. 군중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경청하지도 않았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의 깊은 뜻을 깨달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29절..<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는데, 이 질문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너희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줄곧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고, 많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 때가 되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깨달을 때도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외국인은 '예수'라는 설문조사가 있었습니다. 정말 널리 알려진 이름이지만,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지는 사람마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있는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역사 속의 인물인 예수'와 '신앙의 대상인 그리스도'를 잘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모두에게 질문하셨는데, 대답은 베드로가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대답한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여러 예언자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메시아)라는 고백입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우리 교회 전체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신앙고백은 우리 교회의 믿음의 핵심이며 출발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서양식 이름으로 생각해서, '그리스도'는 성으로, '예수'는 이름으로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라는 말은 '그리스도(구세주)이신 예수', 또는 '예수는 그리스도(구세주)이시다.' 라는 뜻의 존칭입니다.>여기서 '스승님'이라고 번역된 말을 공동번역 성서는 '선생님'으로 번역했는데, 원문에는 그냥 '당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30절..<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받아들이십니다. 즉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은 맞지만 부귀영화를 누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고난을 겪으실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에서 해방시킬 정치적인 구세주, 즉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이 있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에 대해서 침묵을 지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즉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31절-33절 :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했지만 예수님 입장에서는 어떤 그리스도이신지 보충설명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다려왔고, 기대하고 있었던 영광스러운 개선장군 같은 메시아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메시아이십니다.
31절..<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그 뒤에' 라는 말은 원문에 없습니다.)'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메시아를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특별히 '고난을 당하는' 메시아를 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겪어야 할 일은 3단계입니다.
1) 많은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음--신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 등 온갖 괴로움을 겪어야 하고, 유대인들의 최고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게 될 것입니다.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유대 최고의회의 구성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배척을 받는다는 것은 최고의회의 배척을 받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배척을 받아' 라고 번역된 말을 공동번역 성서는 '버림을 받아' 라고 번역했는데, 이 말은 '배척을 받아'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2) 죽음--예수님은 부당하고 억울한 죽음(사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3)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예수님은 승리자로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사흘 만에' 라는 말은 원문대로 번역하면 '3일 후에' 또는 '제3일에'입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 아침까지 무덤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만 사흘'은 아닙니다. 금요일을 첫날로 생각한다면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하셨습니다.
여기서 '...해야 한다.' 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뜻은 틀림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과 그 하느님의 뜻에 예수님께서 순종하셔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라는 말은 마르코의 독특한 말투인데 다른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아니고, '가르치셨다.' 라는 뜻입니다.
32절..<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
하기 시작하였다.>--'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라는 말은 마르코의 설명인데, 그동안 자주 비유를 사용해서 가르치셨던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는 비유를 쓰지 않고 명백하게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바로 알고 고백하긴 했지만,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메시아를 영광의 왕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고통 받는 메시아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승을 붙들고 말리려고 합니다. 여기서 '반박하다.' 라고 번역한 말의 원문 단어는 '책망하다, 비난하다, 나무라다.' 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그만큼 강하게 예수님을 설득하려고 했음을 나타냅니다.
33절..<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이라는 말은 지금 베드로에게 하시는 꾸중은 다른 제자들 모두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사탄'은 진리를 왜곡하거나 거짓말을 하고, 유혹을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예수님의 길을 막으려는 그의 행동이 예수님을 유혹하던 사탄과 같은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내 뒤로 물러가라.'입니다.이 말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길을 가면 스승은 앞서 가고 제자는 뒤를 따르는 상황을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신 것은 제자의 위치로 돌아가서 스승을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일'은 예수님의 사명, 예수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일 전부, 하느님의 계획 등을 가리킵니다. '사람의 일'은 인간적인 감정, 판단 등을 뜻합니다.
사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말린 것은 무슨 나쁜 뜻으로 한 것도 아니고, 진짜 사탄처럼 예수님을 유혹한 것도 아닙니다. 스승에 대한 깊은 사랑이 베드로가 그렇게 행동한 진짜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간적인 사랑, 또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이해 부족이 결과적으로는 '사탄의 유혹'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사탄의 영향력에 사로잡혔다든지, 사탄의 사주를 받았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사탄이 바라는 대로 행동했다고 할 수도 있고,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너무 베드로를 깎아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일부 종파에서는 교황제도를 부정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자꾸 베드로를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사도들이 자주 예수님께 야단맞긴 했지만, 열두 사도 중에 사탄에게 사로잡힌 것은 배반자 유다 한 명뿐입니다.
우리도 너무 인간적인 감정에 치우치다보면 본의 아니게 사탄이 바라는 대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언제든지 단호하게 우리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호통을 치실 것입니다. 또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우리의 신앙생활을 그렇게 사탄처럼 방해하는 가족, 친구, 친척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일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나 친구, 친척이 사탄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단호하게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이 사탄이 바라는 대로 가게 될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4절-38절 :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34절..<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카이사리아 필리피에는 유대인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군중'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호기심 때문에 사람들이 조금 모여 있는 것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은 그 사람들이 아니라 우선 제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듯이 제자들과 군중을 가까이 오라고 부르신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대한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든지' 라는 말은 지금 하시는 말씀에서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즉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 뒤를 따른다는 말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을 포함해서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일을 모두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 뒤를 따르려면'이라는 말은 '나를 믿는 신자가 되려면'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라는 말은 무조건 자기를 모두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방해되는 자아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제 십자가를 지고' 라는 말은 온갖 고통과 시련과 죽음까지도 각오하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글자 그대로 '죽을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아주 끔찍한 현실이었습니다. 로마군대는 식민지 사람들을 자주 십자가형에 처했고,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수들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뒤따라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아포기'와 '십자가'는 혼자서 겪어야 하는 고통은 아닙니다. 우리가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은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앞서 가신 길이고, 지금, 여기,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 가고 계시는 길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길을 따라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35절..<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이 말은 명량해전을 앞두고 '필사즉생, 필생즉사' 라고 한 충무공의 훈시와 비슷한데,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라는 말씀은 '세속적인 목숨, 일시적인 목숨에 집착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 참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지금의 일시적이고 세속적인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 참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세속적인 목숨'이라는 말은 돈이나 권력 같은,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세속적인 것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대립되는 것은 '육신과 영혼'이 아니라 '시간 속에 한정된 생명'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없고, 타협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둘 다 가질 수는 없는가? 왜 꼭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가? 라고 물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안 죽고 지상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는가? 라고 물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하느님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갈림길에 서게 되는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몰랐다면, 우리는 그냥 적당히 즐기면서, 또는 나름대로 그럭저럭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알고 있고,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갈림길을 놓아주셨고,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도록 하십니다. 사라져버릴 허무한 생명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을 선택할 것인가, 즉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생명을 선택할 것인가의 갈림길입니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는 각자 알아서 할 일이지만, 선택의 결과, 또는 선택의 책임은 피할 수 없습니다.
36절..<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이 구절의 원문 문장은 상업적인 용어들로 되어 있습니다. '온 세상을 얻는다.' 라는 말은 원문에서는 '온 세상을 다 벌어들인다.'로 되어 있고, '제 목숨을 잃는다.' 라는 말은 '제 목숨을 손해 본다.'로 되어 있습니다. 또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말의 원문은 '무슨 이익이 있느냐?'로 되어 있습니다.
어떻든 36절은 세속적인 온갖 부귀영화를 다 얻는다고 해도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제 목숨을 잃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루카복음 12장 15절의 말씀과 비슷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37절..<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 참 생명과 비교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 가치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목숨(영원하고 참된 생명)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온 세상을, 또는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다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헛된 일입니다. 그 사람은 죽는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8절..<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여기서 '절개 없다.' 라는 말의 원문 단어는 '음란하다.'입니다.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는 흔히 하느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배반하고 바람을 피운다는 뜻에서의 '음란함'입니다.) 그래서 '음란하고 죄 많은 이 세대'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세대라는 뜻입니다.
'이 세대에서' 라는 말은 '그런 세대에 속해 살면서'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라는 말은 예수님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모든 세대,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이라는 말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으면'이라는 뜻입니다.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다.' 라는 말은 루카복음 12장 9절의 '나를 모른다고 하다.' 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종말에 심판관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아버지'는 하느님입니다. 사람의 아들의 아버지가 하느님이기 때문에 사람의 아들은 곧 하느님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거룩하신 하느님의 천사들을 거느리고 심판관으로 재림하실 때' 라는 뜻입니다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끊은 사람에 대해서는 심판 때에 예수님 쪽에서도 그와의 관계를 끊을 것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구원받을 가능성이나 희망이 차단당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심판 때에 예수님께서는 증인이 아니라 심판자로서 오실 것입니다.
따라서 심판대에 선 인간의 운명은 지금 그가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 또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 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즉 예수님 뒤를 따르는가? 거부하는가? 또 세속적인 목숨을 선택하느냐?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느냐? 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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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어떤 무당이 자기 제단에 영험하다고 소문난 신들을 모두 모셨는데, 그 중에는 예수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무당에게는 예수님도 여러 잡신 중의 하나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 태도가 달라집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혁명가로만 생각하고, 어떤 이는 예수님을 자선사업가로만 생각하고, 어떤 이는 예수님을 철학자로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혁명 사업에 매진하기도 하고, 자선사업에 일생을 바치기도 하고, 온갖 신학 책과 성서학 책들을 파고들기도 합니다.
2천 년 전 이스라엘에서 3년 정도 활동했던 '예수'라는 한 인물에 대해서 우리는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 내 삶을 지배하고 내 삶의 중심이 되신 그리스도, 그분에게 마음을 열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려고 노력한다면,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저절로 알게 되고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역사책을 펴놓고 공부해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삶에서, 기도 속에서, 체험 속에서 만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먼 옛날 중동지방의 예언자였던 예수가 아니라, 지금 내 삶 한가운데 살아계시는 그리스도, 그분이 중요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