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서 6장 1절-56절>오천 명을 먹이시다
<1절-6절ㄱ :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다>
1절..<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그곳을 떠나' 라는 말에서 '그곳'은 앞의 5장에서 나왔던 회당장 야이로의 집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이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나자렛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고향'은 나자렛입니다. 나자렛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서쪽으로 30Km 지점에 있고, 당시에는 보잘것없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신 것은 단순히 옛집을 찾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교사로서 가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것은 예수님의 선교활동에 제자로서 동행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일을 함께 겪으면서 많은 교훈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자신들이 직접 선교활동을 할 때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예방주사를 맞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절..<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예수님은 안식일이 되자 다른 곳에서도 늘 그랬던 것처럼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감동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고, 예상하지 못한 일에 대해 '뜻밖이다.' 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반응은 부정적인 것이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들, 특히 기적에 관한 소문들을 이미 들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집안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며 정식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잘 알고 있다. 라는 그 생각이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이 놀라운 일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천한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이 직접 하셨다는 것은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라는 말은 예수님의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가? 사람에게서 온 것인가? 사탄에게서 온 것인가?(3,22) 라는 질문입니다.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라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의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지혜로운 가르침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가? 사람에게서 온 것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라는 말은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가? 사탄에게서 온 것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3절..<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당시 그곳의 '목수'는 나무든 돌이든 생활에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나 다 만들고 고치는 수공업자였습니다. 그리고 낮은 계층의 천한 노동자였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런 목수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 요셉을 언급하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요셉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은 친형제, 친누이일 수도 있고, 그냥 친척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사촌형제나 친척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으신 후에도 평생 동안 동정녀로 사셨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이고 교리입니다. (교리가 다르면 성경 해석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성경보다 교리를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언급된 형제들 중에서 '야고보'는 갈라티아서 1장 19절에 '주님의 형제'로 언급되어 있고, 사도행전 12장 등에서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이나 누이들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들은 그분에게 걸려 넘어졌다.'인데, 이 말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공동번역 성서처럼 '그분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는 번역은 원문과도 거리가 멀고 지금의 상황과도 맞지 않습니다.)
4절..<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당시에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하고, 어떤 의사도 친지들에게 의료 활동을 하지 않는다.' 라는 속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속담을 인용해서 나자렛 사람들의 태도를 설명하십니다. (아마도 4절의 속담은 나자렛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뒤의 7절에 열두 제자의 파견
이야기가 나오는데, 제자들이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의 배척을 받아도 너무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런 속담을 말씀하신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시기, 질투를 하는 것은 요즘에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시기, 질투 때문에 구원의 기회를 스스로 잃어버렸습니다.
5절..<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나자렛 사람들의 불신앙과 적대적인 태도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기적을 행하지 못하신 것은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통해 다가오시는 하느님에 대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닫아버린다면 기적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기적 안에 있는 구원이 거부되면 구원은 주어질 수 없고, 그 경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기적의 조건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기적을 체험해도 기적이라고 인정하지 못하거나,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었던 나자렛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지 '못했다.' 라는 것보다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다.' 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 중에도 그나마 몇 명은 믿음이 있었는지 병자 몇 사람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손을 얹어서' 라는 말은 치유를 위한 안수 동작을 뜻합니다.
6절ㄱ..<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여기서 '놀라셨다.' 라는 말의 원문 단어는 '이상하게 여기셨다.' 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에 대해 예수님이 '이해하지 못하셨다.'는 것은 아니고, '안타깝게 여기셨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것을 제자들도 보았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선교활동을 하면서 제자들이 겪게 될 일을 미리 실습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이제 곧 제자들도 파견되어서 선교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들은 어떤 곳에서는 환영을 받겠지만 어떤 곳에서는 거부당하거나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나자렛에서의 일은 그런 거부와 박해를 미리 실습한 것과 같습니다.
<6절ㄴ-13절 :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6절ㄴ..<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의 활동이 사실상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주변 지역으로 활동범위를 더 넓히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서 활동을 더욱 확장하고 강화시킵니다.
7절..<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열두 제자는 이미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보고 배웠습니다. 또 많은 기적을 보기도 했지만 게라사와 나자렛에서의 실패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리사이들의 적대행위도 겪었습니다. 그런 체험들이 그들에게는 충분한 학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제자들을 가르치기만 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들이 직접 실습을 할 수 있도록 파견하십니다. 여기서 '부르시어' 라는 말은 제자들을 소집했다는 뜻인데,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지배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불러 모았다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이란 악령들을 쫓아내는 권한과 능력을 뜻합니다.
마태오복음 10장 1절과 루카복음 9장 1절에서는 악령을 쫓아내는 힘뿐만 아니라 병을 고치는 능력도 주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마르코복음에서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마르코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 속에 병을 고치는 능력도 포함된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그런 권한과 능력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제자들을 당신의 사명과 능력에 참여시키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제자들도 같은 사랑과 자비를 베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는 것은 유대교의 관습을 따른 것입니다. 유대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리스도교에서도 선교사들을 파견할 때 둘씩 짝지어 파견했습니다. 둘씩 짝지어 파견하는 것은 그들이 선포하는 '말씀'에 대해 두 사람이 서로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또 서로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라는 말이 좀 어색한데, 이것은 원문 그대로 직역했기 때문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그냥 '파견하셨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8절-9절..(8)<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여행할 때 필요한 휴대 품목을 금지한 이 구절의 내용은 마태오복음이나 루카복음과 조금 차이가 있는데 세부사항의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명령에 들어 있는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길을 떠날 때'는 '선교활동을 하러 떠날 때'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지팡이'와 '신발'입니다. (마태오복음 10장 10절에서는 지팡이도 신발도 금지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루카복음 9장 3절에서는 지팡이도 금지되어 있고, 신발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지시의 핵심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당시에 '지팡이'는 들짐승이나 강도들을 막아내는 무기로도 사용하는 여행 필수품이었습니다. '빵'은 여행을 하면서 먹을 빵이고, '여행 보따리'는 주로 음식을 담는 자루입니다. 여행을 출발할 때 미리 음식을 자루에 담아 가거나 아니면 도중에 음식을 얻었을 때 담아두는 자루입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여행 필수품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최소한의 필수품마저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신발'은 원문에는 '샌들'로 되어 있습니다. 가시나 돌이 많은 땅을 돌아다니려면 샌들을 신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복음의 내용처럼 신발도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마르코가 실제 상황에 맞게 조금 수정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9절에서 새번역 성경이 '옷'으로 번역한 말은 공동번역 성서처럼 '속옷'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옷'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당시 속옷은 걸쇠로 어깨에 걸치는 긴 원피스 같은 옷이었고, 대부분 양모나 아마포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좀 여유 있게 사는 사람들 중에는 일종의 사치나 자기 과시 목적으로 속옷을 두 벌씩 껴입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속옷과 요즘의 속옷은 많이 다릅니다. 당시의 속옷은 글자 그대로 겉옷 속에 입는 옷일 뿐이고, 집에서 입는 평상복이었습니다. 겉옷은 외출할 때 입는 정장이고, 가난한 사람들 경우에는 밤에 잘 때 겉옷을 이불처럼 덮고 자기도 했습니다. (요즘에도 겉옷이든 속옷이든 굉장히 비싼 것들이 있긴 있는데, 옷을 입는 원래의 실용적인 목적 이상의 비싼 값이라면 그것은 자기 과시이며 사치일 뿐입니다. 다른 생필품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8절-9절의 내용은 '사도적 청빈'을 말하는 것으로, 지극히 가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고 지침입니다. 이 명령은 사도들(선교사들, 또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완전히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해야 하며,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자기들을 맞아주는 사람들의 도움을 순박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명령은 마태오복음 6장 25절-34절에 있는 '의식주를 걱정하지 말고,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 라는 가르침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자꾸 단서를 붙이고 조건을 다는 것은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필요 이상의 소유'를 금지한 것이 아니라, 아예 '소유'와 '휴대' 자체를 금지했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은 꼭 필요한 물건이다.' 라고 자꾸 챙기다 보면 점점 그 한계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여행에서 '꼭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일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모습에도 반성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꼭 필요하다.', '이것은 예외적인 것이다.' 등등.. 자꾸 예외를 만들고 필요를 만들면 세상에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 없게 되고, 예수님의 명령은 아주 공허하고 비현실적인 명령으로 변질될 것입니다.)
10절..<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이 구절은 사도들이 어떤 고장에 들어갔을 때 누군가가 사도들을 환대하면서 자기 집에 머물게 해준다면 그 집에만 계속 머물면서 그곳을 선교의 거점으로 삼으라는 분부입니다. (그 집에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라는 말은 집을 바꾸지 말고 한 곳에 계속 머물러 있으라는 명령인데, 이것은 더 좋은 집을 찾아다니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주는 대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11절..<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10절에서 말한 것처럼 환대를 하는 곳도 있겠지만 어쩌면 사도들은 많은 경우에 환영을 받기는커녕 거부당하고 배척당했을 것입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사도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 선포를 거부하는 곳이라면, 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을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사도들은 그곳을 떠나 '말씀'을 받아들이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리는 동작은 원래 유대인들이 이방지역을 여행하다 고향에 돌아올 때 하던 행동입니다. 이것은 부정한 지역에서 묻은 부정한 것들을 털어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들이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리는 것은 그 지역이 하느님 앞에서 부정한 지역이라는 뜻이고,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를 거부한 것은 심판 때에 구원을 줄 수 있는 이를 거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3장 51절을 보면,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안티오키아를 떠날 때 발의 먼지를 터는 장면이 나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도들의 임무이지만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 그 책임은 복음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선교활동의 성과에 대해 낙담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다는 격려와 위로의 말씀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발에서 털어 버린 먼지가 '증거'가 된다는 말은 그 먼지가 그 마을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했다는 증거로 남아 있다가 최후의 심판 때에 그들을 고발하는 증거로 사용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경고의 표시로' 라고 번역했는데, 뜻은 큰 차이가 없지만 원문과는 거리가 먼 번역입니다.)
12절..<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마태오복음 10장 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만 가라고 지시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지시를 따랐다면 사도들은 유대인 지역에서만 활동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회개하라고 선포했다는 것은, 그들이 선포한 내용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는 뜻입니다.
아직은 메시아 선포가 아니고,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했던 설교와도 다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선포하셨던 것처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회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13절..<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사도들이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행한 것은 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활동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뒤의14절을 보면 사도들의 활동의 결과로 소문이 퍼지고,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여기서 사도들이 병자들에게 '기름'을 부어서 병을 고쳐 주었다고 되어 있는데 당시의 의학에서는 기름이 중요했습니다. 루카복음 10장 34절을 보면 '착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서 응급 처치를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의술로 병자들을 고친 것이 아니라 기적으로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기름'은 치료제가 아니라 사도들이 받은 권능의 표시이고, 하느님의 은총의 표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병자들을 고친 것은 기름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입니다. 오늘날의 병자성사 때에도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는데 역시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실 때 한 말씀, 또는 한 동작으로 고치는데 사도들은 기름을 발라서 고쳤습니다. 병자를 치유하는 힘은 예수님에게서 오고, 사도들은 그 힘을 받아서 고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열두 사도가 똑같은 말씀을 전하고, 똑같은 기적을 같은 방식으로 행했다는 점입니다. 즉 그들의 활동이 완전히 일치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일치는 그들 모두가 똑같이 예수님의 권능과 지시 아래에 일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의 활동은 사실상 예수님의 활동이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절-16절 :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14절..<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여기에 등장하는 헤로데 임금은 이름이 헤로데 안티파스인데 예수님이 태어나던 당시에 이스라엘 왕이었던 헤로데 대왕의 아들입니다.
그는 요르단 강 서쪽 갈릴래아 지방과 요르단 강 동쪽 베로이아 지방의 영주였습니다. 로마 정부는 그에게 왕의 칭호를 주지 않았는데도 신하들과 백성들은 그를 왕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활동으로 인하여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고 헤로데 왕도 그 소문을 듣게 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나서 활동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복음서에는 세례자 요한이 기적을 행했다는 내용이 없는데, 지금 14절을 보면 세례자 요한도 기적을 행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기적을 행했었는데 이제 예수님도 같은 일을 하니까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다음부터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15절..<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열왕기 하권 2장을 보면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2열왕 2,11). 그리고 종말 심판에 앞서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르게 인도하기 위해 다시 내려올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습니다(말라 3,23-24).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이 혹시 엘리야가 아닐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옛날의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16절..<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는 자기가 목을 베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헤로데의 말 속에는 자기가 요한을 죽인 일에 대한 미신적인 불안감 같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마르코는 헤로데의 말을 계기로 해서 다음 대목에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의 경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7절-29절 : 세례자 요한의 죽음>
17절..<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이스라엘 역사서에는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백성들 사이에 요한의 인기가 높아지자 그것이 반란이나 폭동으로 이어질까 두려워해서 요한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요한이 헤로데의 결혼문제를 비판하다가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내용이었습니다.
헤로데 대왕은 왕비가 열 명이었고, 그 왕비들에게서 여러 왕자들이 태어났습니다. 그 중에 아르스토불로스라는 아들에게서 헤로디아가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헤로디아는 헤로데 대왕의 손녀이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조카입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대왕의 또 다른 아들과 결혼했는데 그 결혼에서 딸 살로메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헤로데 안티파스와 눈이 맞아서 남편과 이혼을 하고 안티파스와 결혼했습니다.
살로메는 나중에 필리포스와 결혼합니다. 필리포스도 헤로데 대왕의 아들입니다. 17절의 필리포스는 헤로디아의 남편이 아니고 살로메의 남편입니다. 물론 헤로데 안티파스의 이복동생인 것 은 맞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원래 이스라엘의 동쪽에 있는 나바태아 왕국의 공주와 결혼했었는데 이혼하고 헤로디아와 재혼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헤로디아는 조카이기도 하고 동생의 아내이기도 했는데, 두 사람의 결혼은 레위기 20장 21절의 율법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레위기 20장 21절은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을 금지한 율법입니다.
18절-19절..(18)<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던 요한이 헤로데 왕실의 악행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헤로데의 불륜을 공공연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런 요한에 대해서 헤로데보다는 헤로디아가 더 요한을 죽이고 싶어 하는데, 헤로데 때문에 죽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헤로디아가 더 악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헤로데 안티파스가 선량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회개하라고 외치는 예언자의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그 예언자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0절..<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헤로데는 세례자 요한과 자주 사적인 대화를 즐겼던 것 같습니다. 그는 사치를 좋아하고 쾌락을 즐기며, 잔인하고 교활한 사람으로 전해집니다. 또 일종의 미신적인 두려움도 품고 살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예언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요한을 죽이지 못합니다.
그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았다는 것은 요한을 하느님의 예언자로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다는 것은 미신적인 두려움 때문에 그 자신도 요한을 죽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헤로디아 등이) 죽이려고 하는 것도 막았다는 뜻입니다. 요한의 말을 들을 때에 그가 몹시 당황했다는 것은 죄책감을 느꼈다는 뜻이 아니라 입장이 난처해져서 당혹스러워 했다는 정도의 뜻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서의 '몹시 괴로와하면서도' 라는 번역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원문 단 어에는 그런 뜻이 없고, 내용과도 맞지 않습니다. 그런 헤로데의 태도를 세례자 요한에 대한 존경심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요한과 사적인 대화를 즐기고 요한의 말을 '기꺼이' 들었다는 것도 요한의 가르침을 듣는 태도는 아니고, 뭔가 특이한 자극을 즐기는(쾌락을 즐기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21절..<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싶어 하던 헤로디아에게는 헤로데의 생일잔치가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헤로데는 관습대로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지역의 유지들을 초대해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22절..<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헤로디아의 딸은 '살로메'입니다. 아마도 헤로디아는자기 딸 살로메를 이용해서 세례자 요한을 죽이려는 계획을 실행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남자들의 술자리에서 춤을 추는 것은 창녀들이나 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주가 그런 자리에서 춤을 추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춤은 매우 음란한 춤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당시 살로메의 나이는 14-15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헤로데는 공주의 춤에 빠져서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주겠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당시에 왕의 잔치 때에는 어떤 부탁도 거절하지 않는다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23절..<"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헤로데는 맹세까지 하면서 살로메가 청한다면 왕국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하는데, 당시에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지역의 영주가 할 수 있는 약속은 아닙니다. 헤로데의 이 말은 실천할 수 없는 헛된 호언장담일 뿐입니다.
24절..<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살로메가 헤로디아에게 가서 의논하는 것은 이 모든 음모의 중심에 헤로디아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헤로디아는 처음부터 일이 이렇게 진행될 것을 알고 자기 딸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라고 시키는 것은 헤로디아라는 여자가 얼마나 잔인하고 악랄한 여자였는지를 보여줍니다.
25절..<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살로메는 단순한 하수인일 수도 있고, 공범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헤로디아와 살로메는 처음부터 함께 계획을 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남자들 앞에서 수치심도 없이 대담하게 음란한 춤을 춘 살로메가 왕에게 '서둘러' 가서 명령조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 모든 일이 모녀가 함께 꾸민 음모일 수도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살로메는 왕에게 생각할 여유도, 발뺌할 틈도 주지 않고 '당장' 약속을 실천하라고 요구합니다. 헤로디아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라고 시켰을 뿐인데, 살로메는 '쟁반에 담아' 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살로메도 잔인하고 악랄한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26절..<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지금 헤로데가 몹시 괴로웠다고 되어 있는데,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인다는 사실을 괴로워한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라는 말은 자기의 경솔한 약속이 손님들에게 비웃음을 사지나 않을까, 하고 괴로워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손님들이 자기를 비웃는 것이 두려워 살인을 선택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일 뜻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존심입니다. 그래서 그는 딸의 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살인자가 되는 쪽을 선택합니다.
(경솔한 약속과 어리석은 결정이 예언자 살해로 이어집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순간의 실수나 판단착오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수를 더 큰 실수로 이어간다는 점입니다. 잘못한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더 큰 잘못으로 덮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뻔히 알면서도점점 더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에게서도 그런 모습이 있었습니다. 인간들은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도 그런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27절-28절..(27)<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여기서 경비병은 왕 옆에 있는 근위병일 것입니다. 경비병은 헤로데의 명령대로 요한의 목을 베어 가져오고, 요한의 머리는 살로메의 손을 거쳐 헤로디아에게 전해집니다.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마르코는 요한의 죽음을 담담하게, 아니 너무나도 간단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 간단한 묘사는 오히려 살인자들의 잔인함을 더욱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요한은 죄인들의 회개를 외치다가(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다가) 그 죄인들의 손에 의해 정식 재판도 없이 죽음을 당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 또는 순교자의 삶과 죽음입니다.
29절..<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감옥으로 가서 스승을 면회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스승이 사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치릅니다. 여기서 '소문'이라고 번역한 말은 공동번역 성서처럼 '소식'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원문에는 '소식'이라는 말은 없고 그냥 '듣고 가서' 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요한의 시신은 성경 내용대로 제자들에 의해 무덤에 묻혔다고 전해지기도 하고, 이교도들에 의해서 불에 태워졌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의 잘린 머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죽음을 당한 세례자 요한의 순교는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30절-44절 : 오천 명을 먹이시다>
30절..<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세례자 요한이 체포된 때는 서기 28년의 4월-5월쯤, 사형당한 때는 서기 28년 말, 또는 29년 초라고 추정됩니다. 앞의 7절에서 파견되었던 사도들이 예수님께 돌아온 것은 29년 4월초쯤으로 추정됩니다. 사도들이 돌아와서 예수님을 만난 곳이 어디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카파르나움이 활동의 본거지였으니 카파르나움일 가능성이 큽니다. (7절에서 사도들을 파견한 곳이 어디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의 활동성과를(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고, 그리고 아마도 세례자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도 전했을 것입니다.
31절-32절..(31)<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앞의 3장 20절에도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나, 제자들을 파견하고 혼자 계실 때에나 항상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이' 바쁘게 지내신 것 같습니다.
이 말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으로 모여들었음을 나타냅니다.예수님 자신은 제대로 쉬지도 못했지만 이제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는 휴식을 주고 피로를 회복시키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명령하십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함께 좀 쉬자.' 라고 번역했는데, 원문대로 하면 '가서 쉬어라.' 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쉬는 것'은 오늘날의 '피정'이라는 말을 풀이한 뜻과 같습니다. '피정'이란 '한적한 곳에서 쉬면서 고요히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평화를 얻는 일'입니다. 바쁜 활동 뒤에는 항상 고요한 피정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외딴곳'이 어디인지는 불확실합니다. 루카복음 9장 10절에는 '벳사이다'로 되어 있는데, 마르코복음에서는 빵의 기적 후에 벳사이다로 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45절). 뒤의 36절의 제자들의 말대로라면 주변에 마을이 있지만 마을과는 떨어진 외딴곳, 그러나 사람들이 육로로 예수님 일행을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곳(33절)입니다. 그렇다면 갈릴래아 호수 북쪽의 어느 한적한 곳일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14장 13절을 보면 세례자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헤로데를 피해서 가신 것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벳사이다를 거쳐서 호수 동쪽으로 가게 되면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 안티파스의 통치 영역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헤로데를 피해서 가셨다는 말을 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서 외딴 곳으로 가신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또 앞에서 말한 대로 호수 동쪽 지역으로 가신 것 같지도 않습니다. 복음서마다 이렇게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은 전승의 차이입니다.
33절..<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33절의 원문에는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라는 구절 다음에 '그들이 알고' 라는 구절이 더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그 구절을 '그들이 예수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고는'이라고 의역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새번역 성경에는 그 구절이 아예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떠나는 순간에도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 사람들을 놓아둔 채 그냥 떠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일행이 떠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고, 그 일행이 예수님과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알리면서 예수님 일행을 육로로 뒤따라갑니다. 그래서 모든 마을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배가 도착할 곳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쉬게 하려고 하셨지만 몰려든 군중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육로로 해서 예수님의 일행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상당히 느리게 간 것 같습니다.어떻든 먼저 앞질러서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휴식을 갖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34절..<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자비'는 원래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배에서 내리시어 모여 있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대로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목자 없는 양떼'는 좋은 풀밭을 찾지 못하고 굶어죽기 쉽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상태였습니다. 백성들은 올바른 정치 지도자나 종교 지도자 없이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식민지로서 왕이나 고위관료들은 모두 식민지배의 하수인들이었고, 대제사장, 사제들, 율법학자들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비참한 상황 속에 있는 백성을 측은하게 여기셨고 그들의 목자가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을 목자로 인정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몰려든 사람들은 대부분 병의 치료 같은 개인적인 기대 때문이거나 호기심 때문에 모인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 속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듣고 싶어 하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떻든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십니다. 이어지는 빵의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아무런 상관없는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고, 가르침의 일부, 또는 연속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35절-36절..(35)<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36)<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사람들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열중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배고픔도 느끼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제자들이 먼저 사람들의 배고픔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군중을 해산시키자고 건의합니다. '늦은 시간'은 아마도 저녁 시간을 뜻할 것입니다(루카 9,12).
여기서 '외딴곳'이라는 말은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시간도 이미 늦었고, 여기는 외딴곳'이기 때문에 군중을 해산시켜서 주변에 먹을 것을 살 수 있는 마을로 각자 알아서 가게 하자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지금의 상황에서는 가장 현실적이고 타당한 방법일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어야 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고, 제자들에게는 그럴 능력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먹을 것을 가져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당시 유대인들은 여행할 때에는 먹을 것을 지참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각자 자기가 먹을 것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은 준비된 여행이 아니고, 예수님을 보려고 갑자기 모여든 상황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각자 먹을 것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각자 먹을 것을 지참했다면 제자들이 군중을 해산시키자고 건의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37절..<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뜻밖의 명령을 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신앙에 대한 하나의 시험입니다. 분명히 제자들에게는 군중을 먹일 빵이 없었고, 빵을 살 수 있는 돈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런 명령을 하신 것은 뭔가 깊은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해서 반문합니다.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은 대강 계산해서 이천 오백여명 정도를 먹일 수 있는 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자들이 사람들의 수를 정확히 세어보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막연히 아주 많은 양의 빵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명령과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기적을 행하실 생각을 하시고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돈으로 빵을 사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기적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엄청나게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회사업이나 복지사업을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할 일도 없고, 예수님께서 하실 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일이 없다면 더 이상 종교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했어야 합니다. '저희에게는 빵이 없습니다. 그러니 스승님께서 저희에게 빵을 주십시오.')
38절..<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는 아마도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스승님, 저희에게는 빵도 없고, 빵을 살 돈도 없는데, 어떻게 저희보고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까?" "그러면 지금 가지고 있는 빵이라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저희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겨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인데요, 이건 저희가 먹기에도 너무 부족한 양인데,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지고 있는 빵이 몇 개나 되는지 알아보라고 시켰고, 제자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고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빵과 물고기를 어떤 아이가 가지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고(요한 6,9),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마태 14,17 ; 루카 9,13). 마르코복음에서는 누가 가지고 있었는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 빵과 물고기가 원래 누구의 것이었느냐? 가 아니라, 이백 데나리온어치 이상의 많은 빵이 필요한 상황에서 겨우 다섯 개의 빵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빵'은 가난한 유대인들이 식사 때에 주식으로 먹던 밀이나 보리로 만든 떡입니다. 그리고 굽거나 소금에 절인 물고기는 바닷가에서 살던 가난한 서민들의 음식이었습니다.
39절..<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푸른 풀밭'은 지금의 계절이 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풀밭에 앉게 한 것은, 말하자면 하나의 식사공동체를 이루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시편 23편 1절-2절,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를 암시하고,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이심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식사의 풍요로움과 기쁨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40절..<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사람들을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모여 앉게 한 것은 혼란을 피하고 빵의 분배를 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백성들을 다스리던 때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백성을 천 명, 백 명, 오십 명, 열 명씩 나누고 지도자를 임명했었습니다(탈출 18,25).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백성의 지도자로 임명된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보조자로서 사람들 수에 맞게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주는 역할을 맡았을 뿐입니다.
41절..<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은 식사공동체의 가장의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의 식사는 가장이 감사기도를 드리고 나서 식탁에 앉은 사람들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주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가장으로서 행동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라는 말은 찬미기도와 감사기도의 동작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은 그것을 다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물고기도 역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앞의 37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명령하셨는데, 41절의 제자들의 모습은 그 명령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지만.)
42절..<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사람들은 몸의 배만 부른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배부르게 되었습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빵의 기적까지 체험하게 되었고, 글자 그대로 '영육 간에' 배부름과 기쁨과 행복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43절..<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남은 음식 부스러기를 모아두는 일은 당시 유대인들 식사에서 늘 하던 일인데, 음식이 부패하지 않도록 광주리에 잘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기적의 완전함과 위대함을 나타내는 묘사입니다. 왜냐하면 먹고 남은 음식의 양이 처음에 있었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보다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열두 광주리'의 '열둘'은 예수님이 주시는 축복의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광주리 열두 개가 갑자기 어디에서 생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44절..<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빵을 먹은 사람이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는 것은 기적의 엄청난 위대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남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여자와 어린이들까지 포함한다면 모두 몇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 군중이 모두 유대인들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여간에 오천이라는 숫자는 정확한 것이 아니고,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했다는 뜻입니다.
열왕기 하권 4장 42절-44절에 나오는 엘리사의 기적 이야기가 복음서에 나오는 빵의 기적과 거의 비슷합니다. 엘리사는 보리 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이고도 남았습니다. 복음서의 빵의 기적 이야기 속에는 예수님은 엘리사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 또 모세가 광야에서 백성을 만나로 먹인 것처럼 예수님도 외딴 곳에서 기적을 행해서 백성을 먹이셨다는 것, 그리고 유대인들은 종말에 큰 잔치가 벌어지리라고 기대했는데 예수님이야말로 그 기대를 채워주실 분이라는 것, 그리고 미사(성체성사)는 이렇게 풍요로운 잔치라는 것 등의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었다는 기적 이야기를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착각하거나 집단 최면에 걸렸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정신적인 일이 아니라 물질적인 일이었고, 모든 복음서 저자가 다 함께 기록했고, 기적을 체험한 사람의 수가 대단히 많았다는 것, 또 군중이 기적에 감동을 받아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할 정도였다는 것(요한 6,15) 등의 이유로 해서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로 믿을 수 있습니다.
<45절-52절 : 물 위를 걸으시다>
45절..<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벳사이다'는 요르단 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 들어오는 입구 동쪽 호숫가에 자리 잡은 어촌이고, 베드로, 안드레아, 필립보의 고향입니다.3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외딴곳으로 가서 쉬어라.' 라고 하셨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몰려든 군중(33절) 때문에 쉬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진짜로 좀 쉬라고 하실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벳사이다로 먼저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몹시 서두르시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마르코복음에는 그 이유가 나와 있지 않은데, 요한복음 6장 14절-15절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빵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나서 군중을 해산시킵니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혼자 조용히 기도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46절..<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예수님께서는종종 외딴곳이나 산으로 가셔서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지금도 제자들을 먼저 보내신 후에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것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셨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기적의 뜻을 깨닫지도 못하고, 세속적으로만 반응을 보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기도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글자 그대로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47절..<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이 구절의 내용은 단순히 사실을 적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연락(연결, 접촉)이 끊어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시간은 '저녁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래서 지금 점점 어두워지는 시간이고,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외롭게 혼자 산에 계시는데 제자들은 제자들대로 스승도 없이 자기들끼리 호수 한가운데에서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는 상황입니다.
48절..<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맞바람이 불어서 배가 벳사이다로 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역풍에 시달리면서도 제자들은 스승이 지시한 곳으로 가려고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가 겪는 박해와 시련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많은 고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고 있는 제자들을 예수님이 보셨다는 것은 실제 육안으로 보셨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는 없고,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아셨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역풍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을 돕기 위해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 쪽으로 가십니다. 욥기 9장 8절에 하느님은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셨다는 것은 곧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물 위를 걸으신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타고 가실 다른 배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새벽녘'은 원문에는 '밤 네 시'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시간으로는 새벽 세 시에서 여섯 시 사이입니다. 성경에서 '아침이 되기 전의 시간(동틀 녘)'은 '하느님의 구원의 시간'을 뜻합니다(이사 17,14 ; 시편 46,6).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제자들을 돕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신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탈출기 33장 18절-23절과 열왕기 상권 19장 11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나타나신 것을 '지나가셨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지나가려고 하셨다는 말은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뜻하는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49절..<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도 유령을 보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호수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에 대해서 보통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입니다. 이것은 새벽 어두울 때라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아직은 제자들의 믿음이 부족해서 유령 같은 것을 보면 쉽게 겁에 질리고 두려워했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50절..<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모두' 라는 말은 제자들이 '모두'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이것은 이 일이 한 두 사람의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라는 말은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고 겁에 질렸다는 뜻이 아니라 물 위를 걷는 어떤 시커먼 그림자가 무엇인지 몰라서 겁에 질렸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그게 예수님이라는 것을 아직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나다.' 라는 말은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름 아닌 나다, 그러니 겁내지 마라.'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나다.' 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밝힐 때 쓰는 공식 표현입니다. 즉 탈출기 3장 14절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나는 있는 나다.' 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이 말은 '나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말도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함께 등장하는 말입니다(마태 28,5 ; 루카 1,13 ; 마르 16,6). '용기를 내어라.' 라는 말은 대개 병자를 고치실 때 사용하신 표현입니다(마태 9,2.22). 여기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는 유령이 아니고 너희의 스승이다. 그러니 겁내지 마라.' 라는 뜻이기도 하고, '나는 자연을 제압하는 권능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니 내가 물 위를 걷는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라.' 라는 뜻으로 하신 계시 말씀이기도 합니다.
51절..<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멎었다는 것은 저절로 바람이 멎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면서 바람을 멎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너무 놀라서 넋을 잃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라는 말은 '아주 심하게 정신이 나갔다.' 라는 말인데, 하느님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놀라고 경탄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자들이 놀라는 것은 '경탄'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52절..<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라는 말은 제자들이 빵의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예수님의 권능을 깨닫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즉 다섯 개의 빵으로 수천 명을 먹일 수 있는 예수님이라면 물 위를 걷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라는 말은 제자들의 믿음이 아직도 부족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그들 자신도 전도활동을 하면서 병을 고쳤고, 악령을 내쫓았으면서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직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고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빵의 기적을 행하실 때 그 자리에 있었고, 지금은 예수님이 물 위를 걷고, 바람과 파도를 다스리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보면서도 여전히 그들의 믿음에는 진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이런 모습을 그대로 복음서에 기록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증언이 성실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부족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유령인 줄로만 알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본 다음에도 믿음을 갖지 못하고 그저 놀라서 넋을 잃기만 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53절-56절 :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53절..<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입니다. 호수를 건넌 다음에 배가 닿은 곳은 겐네사렛입니다. '겐네사렛'은 갈릴래아 수도 티베리아스와 예수님의 활동 근거지였던 카파르나움 사이에 있는 평야입니다. 당시에는 살기 좋은 곳이어서 인구가 많았고, 또 과일 생산지로도 유명했습니다.
앞의 4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벳사이다로 가게 하셨는데, 지금 도착한 곳은 겐네사렛입니다. 지금 이 대목과 앞의 이야기가 하나로 연결된 이야기라면 제자들이 호수에서 역풍에 시달리다가 목적지가 아닌 다른 곳에 도착한 것이 되지만, 앞의 이야기와 연결되지 않는 전승 자료를 수집해서 이 자리에 배치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54절-55절..(54)<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금방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그래서 그 지방의 사람들이 병자들을 들것에 눕힌 채 예수님에게 데려오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은 병의 치유 같은 개인적인 목적이나 기적에 대한 호기심 등의 이유로 예수님을 주시하면서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 어디에 계시든 따라다니거나 몰려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두루 뛰어다녔다는 말은 앞의 33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 육로로 달려갔다는 말과 비슷하고,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왔다는 말은 앞의 1장 32절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한 곳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계속 이동하셨음을 나타내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든지 몰려들었다는 뜻입니다.
56절..<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당시 도시들에는 그리스어로 ‘아고라’ 라고 하는 광장이 있었고, 집회 장소나 장터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의사에게 갈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이 병자들을 그런 광장에 내다 놓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병에 대해(치료법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위로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이 어느 마을이든 고을이든 들어가기만 하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았다는 것은 그런 풍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하는 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고 위대한 기적가인 예수님의 도움으로 병이 낫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앞의 5장 28절에서 하혈증 앓던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옷자락 술'은 민수기 15장 38절-39절, 또는 신명기 22장 12절의 규정을 따른 것으로 흰 실과 푸른 실을 꼬아서 옷자락 네 곳에 달았던 술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잊지 않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옷자락에 이런 술을 달았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옷자락'이라고 번역했는데, '옷자락 술'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고 있고, 그들이 '믿음'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고, 그들의 소망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또는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병이 낫게 됩니다. (병자들의 병이 나은 것은 예수님을 만졌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된 일이 아니라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낫게 해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았다.' 라는 말은 병이 나았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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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백지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차츰 차츰 깨달음과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모두 위대한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 사도들이 전해준 믿음과 증언들, 수많은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 그 외에도 수많은 신앙의 보화를 가득 전해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들처럼 백지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세례를 받을 때 이미 성령을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깊어지는 과정은 사도들보다 더 더디고, 더 둔하고, 그리고 늘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그다지 절실하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 세상이 너무 화려하고 재미있어서 예수님 뒤를 따르는 것이 힘들게만 느껴져서인지...
내 안에 이미 금은보화가 가득한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허망하고 쓸데없는 잡동사니에 한눈을 팔고 있습니다.
송영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