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서 4장 1-41절>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2015. 4. 13. 오전 9:4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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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서 4장 1-41절>

<1절-9절 :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1절..<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앞의 2장 13절과 3장 7절에 이어서 세 번째로 예수님은 다시 호숫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처음에는 물가에 앉아서 가르치셨던 것 같은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배 위에 올라가 앉으셔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그대로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앞의 3장 9절과 비슷한 모습입니다. 여기서는 병자를 고치는 등의 기적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여든 군중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다.

2절..<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다.>--비유로 가르치는 것은 당시 랍비들의 관습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이용해서 가르치십니다.

3절..<"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뒤의 14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이 비유에서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 또는 선교사이고, '씨'는 하느님의 말씀, 곧 복음입니다.

4절-7절..(4)<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5)<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이스라엘에서는 10월 말경이나 11월 초순에 첫 비가 내리는데, 그때 농부들은 보리와 밀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씨를 뿌리고 그 다음에 밭을 갈았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 말씀에서 씨가 여러 가지 다른 상황으로 뿌려지는 것은 과장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실제 상황입니다.

농부들은 5월쯤에 보리와 밀을 추수한 뒤에 10월까지 밭을 묵혀둡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밭으로 질러 다녀서 길이 나는 수도 있었습니다. 4절에서 말하는 '길'은 그렇게 생긴 길로 해석되는데, 밭 옆에 있는 길도 포함될 것입니다. 길에 떨어진 씨를 새들이 먹어버린다는 말에 대해서는 뒤의 15절에 설명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대부분 겉은 흙으로 덮여 있지만, 속은 바위가 깔린 박토입니다. 5절-6절은 바로 그런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흙이 깊지 않아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싹이 바로 말라죽는 것에 대해서는 뒤의 16절-17절에 설명이 나옵니다. 7절의 가시덤불에 숨이 막혀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에 대해서는 뒤의 18절-19절에 설명이 나옵니다. 가시나무는 밀이나 보리보다 더 빨리 자라고 더 무성해집니다. 그래서 가시나무가 있는 곳에 떨어진 씨는 싹이 트고 자랄 수는 있지만 가시덤불 때문에 숨이 막혀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8절..<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배의 열매를 맺었다.">--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싹이 나고 자라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좀 과장된 표현이긴 한데, 이것은 모든 것이 풍성하게 열매를 거두는 메시아 시대를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9절..<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가르침, 또는 계시는 귀로 들어와서 마음에 이르는 것이므로,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아듣기 위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들을 귀' 라는 말은, 귀를 사용해서 듣겠다는 소망, 즉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파악하려는 노력, 반성하고 생각하는 노력을 뜻합니다. 그래서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라는 말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  다.' 라는 뜻입니다.

 

<10절-12절 :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10절..<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라는 말은 앞의 1절에서 말했던 많은 군중과 떨어져서 혼자 계실 때를 뜻합니다. (군중과 떨어져 있지만 제자들은 옆에 함께 있습니다.)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은 열두 제자보다 넓은 범위의 다른 제자들을 뜻합니다.

이 대목은 예수님이 다른 때에 제자들과 함께 다른 곳에 계실 때에 있었던 일로 생각되는데 편집 과정에서 이 자리에 삽입된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비유들'의 뜻을 묻고 있는데, 이것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다른 비유들의 뜻에 대해서도 질문했다는 뜻입니다.

11절..<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 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의 기원, 본성, 가치, 그 나라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 그 나라에 참여할 때 수행해야 할 의무 등에 대한 가르침을 뜻합니다.

그래서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이라는 말은 '제자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여러 가지 것들을 직접 가르쳐주고 설명해 주었지만'이라는 뜻입니다. '바깥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뜻에서 '바깥사람들'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번역했는데, 잘못된 번역입니다. '바깥사람들'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저 바깥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라는 말은, 바깥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기 때문에 비유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당시 사람들이 상상하던   것과는 다릅니다. 군중은 정치적인 성격의 하느님 나라, 즉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이스라엘이 독립하게 되는 그런 나라를 기대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는 영적인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비유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데,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이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반감과 거부감만 갖기 때문에 비유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2절..<'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예수님께서는 11절에서 말한 '바깥사람들'도 잘 알아들을 수 있게 하려고 비유를 사용해서 가르치셨습니다. 12절은 이사야서 6장 9절-10절을 인용한 것인데, 예수님께서 당신이 비유로 가르치시는 이유를 설명하고 그 결과까지 이야기하기 위해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잘 알아듣게 하려고 쉬운 비유를 이용해서 가르치시는데, 제자들과는 달리 '바깥사람들'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깨달으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따라서 회개하지도 않았고, 용서를 얻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일부러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또 깨닫지 못하도록 비유를 사용하시고, 그들이 용서받지 못하게 막으신 것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흔히 나오는 히브리식 표현 방식입니다. 사람들의 모든 행동의 원인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표현이 구약성경에 흔히 나오는데, 예를 들면, 탈출기에서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이 내릴 때 파라오가 계속 고집을 부려서 그 다음 재앙을 초래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장면에서 고집을 부리는 것은 분명히 파라오인데도 성경 표현은 "주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므로(탈출 9,12)" 라고 되어 있습니다. 12절도 바로 그런 방식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 책임은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쉬운 비유를 자주 사용하시면서 사람들이 잘 알아듣게 가르치려고 애를 쓰신 분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12절의 후반부를'그들이 알아보고 알아듣기만 한다면 나에게 돌아 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뜻은 맞는데 원문과는 거리가 먼 번역입니다.)

 

<13절-20절 :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시다>

13절..<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이 구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꾸짖는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비유의 뜻을 설명하기 위한 반문입니다. (너희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으니 내가 설명해 주겠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이해한다면 다른 비유들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어떻든 제자들이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직접 설명해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14절..<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씨 뿌리는 사람'은 첫째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그 다음에는 사도들과 선교사들을 가리킵니다. '씨'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마태오 13,19), 또는 하느님의 말씀(루카 8,11)입니다. 말씀을 뿌린다는 것은 복음을선포한다는 뜻입니다.

15절..<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버린다.>--앞의 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길에 떨어진 씨를 새들이 와서 먹어버린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곧 사탄에게 말씀을 빼앗기는 사람을 뜻한다고 설명해 주십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 말씀에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사람들이고, 말씀에 대해서 게으르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탄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이 와서 말씀을 앗아 간다는 것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마음이 사탄 쪽으로 기울어진다는 뜻입니다.

16절-17절..(16)<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17)<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16절과 17절은 앞의 5절과 6절을 설명한 것입니다.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끈기가 없고 변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말씀이 싹을 내긴 하지만 뿌리를 내리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박해나 시련을 만나게 되면 신앙을 잃고 맙니다. 요즘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초대교회 때에도 복음 말씀을 듣고 쉽게 신자가 되었다가 신앙생활에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박해를 받게 되면 금방 냉담자가 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18절-19절..(18)<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19)<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18절과 19절은 앞의 7절을 설명한 것입니다. 말씀이 싹이 트고, 어느 정도 성장하기는 하지만, 가시덤불에 막혀 질식해 버린다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여서 어느 정도는 신앙생활을 하지만 '세상 걱정, 재물의 유혹, 여러 가지 욕심'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초대교회 때나 지금이나 먹고사는 일에 대한 걱정, 재물에 대한 욕심, 또는 여러 가지 세속적인 욕망들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욕망, 욕심, 걱정 등은 신앙생활을 질식시키는 가시덤불과 같다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20절..<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준비되지 않은 땅에 씨가 떨어지면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없듯이 하느님 말씀도 준비되지 않은 마음에 떨어지면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착하고, 잘 준비된 마음에 떨어지면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같은 말씀이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 상태와 준비 상태의 차이에 따라 다른 결과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땅'은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을 뜻하고, '열매'는 올바른 신앙생활(신앙인의 삶)을 뜻합니다.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 라는 말은 풍성함을 강조하는 표현이고, 그 말 자체에 특별한 뜻은 없습니다.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은 두 가지로 생각됩니다.

1) 선교활동의 성과가 선교사들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 성과가 기대에 못 미친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는 위로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2) 청중에 대한 경고의 말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을 주시는데,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상태는 어떤가?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즉 각자 자기의 상태를 반성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품과 성덕이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고 고정된 것은 아닙니다. 본인의 노력에 따라서 좋은 인간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인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밭은 처음부터 비옥한 땅이거나 황무지일 수 있지만, 인간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지금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반성해야 합니다. 냉담자들의 냉담 원인은 첫째는 자기 자신입니다. 흔히 본당신부 때문에, 본당수녀 때문에, 다른 신자 때문에, 라고 핑계를 대는데, 그것은 정말로 핑계일 뿐입니다. 왜 남 탓을 합니까?)

  (성인, 성녀들이 태어날 때부터 성인, 성녀였던 것은 아닙니다. 회개하고 변화되면 누구라도 성인, 성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심하고 게으르면 하느님에게서 등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예수님의 모델을 했던 청년이 몇 년 후에 배반자 유다의 모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예수님의 모델이 될 정도로 선량했던 청년이 몇 년 후에는 배반자 유다처럼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21절-25절 : 등불의 비유>

21절..<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갈릴래아의 서민 집에서 사용되던 등잔은 질그릇으로 된 평평한 접시였습니다. 등경은 긴 다리가 있는 쇠 받침대였습니다. 등불을 사용할 때에는 등경 위에 등잔을 올려놓고 불을 켰습니다. 여기서 '함지' 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공동번역 성서처럼 '됫박'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이것은 곡식의 양을 재는 도구로서 십일조를 계산할 때 꼭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가정에는 그게 있었습니다.

등불을 가져온다는 것은 방을 밝히려고 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등잔을 등경 위에 놓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등잔을 사용하지 않는 낮 시간에는 등잔을 됫박으로 덮어 놓거나 침상 밑에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숨어 계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입니다. 또 사도들을 뽑으신 것은 무슨 비밀 집단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비추는 등불로 쓰기 위해서입니다.

22절..<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22절은 '비밀은 드러나고야 만다.' 라는 뜻의 속담인데, 이런 내용의 속담은 동양과 서양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이 구절은 지금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는 비밀처럼 보이지만 언젠가는 대낮처럼 밝게 나타날 때가 온다는 뜻이기도 하고,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복음이 빛처럼 세상을 비출 때가 올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사도들과 제자들은 자기들이 들은 가르침과 자기들이 본 것들을 세상에 전할 임무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3절..<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이 말은 앞의 9절의 말을 반복한 것인데,9절과는 약간 표현이 다릅니다. 9절은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들을 귀가 있거든'이라고 조건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뜻은 같지만 9절은 히브리식 표현이고, 23절은 그리스식 표현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이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번역했는데 적절하지 않은 번역입니다.)사도들과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더욱더 귀를 기울여서 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뽑힌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4절-25절..(24)<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25)<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4절과 25절은 앞의 '등불의 비유'와는 상관없는 독립된 말씀입니다. 학자들은 이 말씀을 '종말론적 인과율'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씀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속담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새겨들어라.' 라는 말은 마음에 새겨듣고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이라는 말은 우리가 남에게 베푸는 현재의 선행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라는 말은 종말에 하느님께서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은 보상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라는 말은, 지금 영적인 부를 성실하게 추구하는 사람은 종말이되면 더욱 영적으로 부유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영적인 부' 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선행을 베풀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삶을 뜻합니다.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말은 지금 영적인 부를 쌓는 일을 게을리 한 사람은 더욱 가난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더 많이 받겠지만, 하느님의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전에 받았던 은혜마저 잃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26절-29절 :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26절-29절..(26)<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앞의1절-9절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다른 점이 많이 있는 비유입니다.

 여기서 씨를 뿌리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냥 '어떤사람'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씨를 뿌리는 일'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의 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땅과 태양과 온도, 비 등의 작용으로 씨앗에서 싹이 나오고 자라납니다. 하느님의 섭리(하느님의 역사), 또는 하느님의 활동은 작은 씨가 그렇게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습니다. 즉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26절의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농부가) 씨를 뿌린 다음에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에서 싹이 터서 자라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는 말은, 그 농부가 게으르다는 뜻도 아니고, 씨를 뿌린 다음에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고 내버려둔다는 뜻도 아닙니다. 농부가 당연히 하게 되는 일들, 즉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잡초를 제거하는 등 밭을 가꾸고 돌보는 일들은 생략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농부는 씨에서 싹이 나오고 자라는 생명력의 원천을 알지 못합니다.

28절의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는 말은 사람이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고, 이 말은 사람이 다 파악하지 못하는 어떤 힘, 즉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줄기' 라고 번역한 말은 '싹'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싹이 나오고 자라서 이삭이 나오고 낟알이 영그는 과정에서 농부가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농부가 하는 일이 곡식의 성장 과정에 본질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협력자가 될 뿐이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십니다.

29절은 추수할 때의 모습을 말한 것인데, 성경에서 흔히 추수는 종말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종말의 심판이 아니라 추수의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씨를 뿌린 어떤 사람은 어떻게 씨에서 싹이 나오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추수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해서 곡식이 익어서 풍성한 수확을 하게 되었는지 그는 알지 못합니다. 그저 곡식을 수확하면서 기뻐할 뿐입니다. 농부의 눈에는 그 모든 과정이 경이로운 기적으로 보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들, 가르침들은 그 당시에는 작은 씨앗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점점 자랄 것이고, 종말에는 엄청난 결과를 이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들이 보기에는 경이로울 뿐입니다. 씨앗 안에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는 그 안에 스스로 발전해나갈 충분한 내재적인 힘이 있습니다. 이렇게 경이로운 하느님 나라의 성장 과정을 그저 구경만 하는 방관자가 될 것인가, 또는 전혀 무관심한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인 협력자. 또는 보조자가 될 것인가는 우리가 선택하고 결단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풍요로운 결실의 혜택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협력자에게만 돌아갈 것입니다.

 

<30절-32절 : 겨자씨의 비유>

30절..<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겨자씨의 비유'는 앞의 26절-29절의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뜻이 같습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성장 과정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처음의 모습과 나중에 크게 자란 모습의 대조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그러나 핵심 주제는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성장과 발전은 사람의 이해를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30절의 말투는 당시 랍비들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흔히 쓰던 말투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 또 청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랍비들의 말투와 방식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31절..<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랍비들은 작은 것을 비유할 때 '겨자씨처럼 작다.' 라는 표현을 자주 썼습니다. 그만큼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입니다. 실제로 보면 정말 먼지처럼 작다고 느낄 정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나라는 처음에는 거의 눈에 뜨이지도 않을 만큼 작다고 느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겨자씨가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는 말은 당시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따른 표현입니다. 과학적으로는 겨자씨보다도 더 작은 씨앗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과학 교과서가 아닙니다.

32절..<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겨자나무는 보통 1.5미터 정도 되는데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서는 3미터 높이로 자라기도 하고 큰 가지들이 있어서 새들이 깃들일 수 있을 정도가 됩니다. 여기서 '풀'이라고 번역한 말은 공동번역 성서처럼 '푸성귀' 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원문에서 이 말은 사람이 가꾸는 식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하늘의 새들'이라는 말을 온 세상의 민족들을 상징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새들이 겨자나무 그늘에 깃들인다는 말은 온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쉬게 될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처음에는 아주 작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나중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발전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앞의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에서는 어떤 농부가 어떻게 씨에서 싹이 나오고 그 싹이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는지를 몰라도 결국에는 추수의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겨자씨의 비유'에서는 아주 작은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큰 나무로 자라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결국에는 그 나무 그늘에서 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발전을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말씀, 복음의 발전, 또는 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즉 교회의 발전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신자들 각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은총의 씨를 뿌리시고, 그 씨에서 많은 덕의 꽃을 피우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나약하고, 보잘것없고, 멸시받는 사람을 선택하셔서 큰일을 해내는 도구로 쓰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하느님의 일에 협력하려는 노력과 의지, 믿음, 희망,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33절-34절 :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다>

33절..<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라는 말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제자들이 아닌 일반 청중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비유로 가르치신 것은 좀 더 잘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가르쳐도 믿음이 없고,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없었던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라는 책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아닙니다. 믿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믿으려고 노력하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가르침이 아닙니다.

34절..<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34절은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의 비유는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것이고, 그래서 제자들에게 특별히 그 뜻을 설명해주실 필요가 있었던 것이라고 오해하기 쉬운 구절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일반 청중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렵게 가르치고, 제자들에게만 쉽게 가르친 것처럼 잘못 해석하게 만드는 오해입니다.

앞의 33절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아직 믿음이 없는 일반 청중들에게는 그들 수준에 맞게 쉽게 가르치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라는 말은 뜻을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비유만 사용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일반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일일이 비유로 설명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좀 더 깊은 차원에서 하느님 나라의 비밀과 메시아의 비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라는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뜻을 감추고 제자들에게만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셨다는 말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는 일반 청중들보다는 좀 더 수준이 높고 더 깊은 가르침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믿음과 마음의 준비에 상응하는 교육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일종의'눈높이' 교육이었던 셈입니다.

  (신학생들은 신학교 입학한 후 첫 학기동안 정규과목으로 천주교 교리를 배우게 됩니다. 내용은 예비신자 교리와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 수준과 깊이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 이제 막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예비신자들, 상당한 교리 지식과 성경 지식이 있는 신자들, 본격적으로 신학이나 성서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이들을 가르치는 방법과 수준이 제각각 다를 수밖에 없고, 당연히 달라야 합니다.)

 

<35절-41절 :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35절..<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그날 저녁'은 호숫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날(1절-9절)의 저녁인데, 이 말은 실제 시간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앞의 내용과 시간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그날 저녁이 되자' 라는 말은 그날 하루가 끝나는 시간이 되었다는 뜻인데, 이것은 그리스식 표현입니다. (유대인들 시간계산법으로 표현했다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신 것은 해가 저물기 전에 군중을 돌려보내기 위해서이고, 또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전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호수 저쪽'은 갈릴래아 호수 동쪽을 뜻합니다.

36절..<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앞의 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들어서 배에 올라앉으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지금 36절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그 배에 타고 계신 그대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떠나는 상황을 설명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군중은 뭍에 그대로 남아 있고, 일부 사람들은 다른 배를 타고 예수님을 뒤따라갑니다. 어부 출신의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즉시 노를 저어서 떠납니다. 만일에 배에서 내려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라도 하려고 했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고 떠나지 못하게 말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군중을 남겨둔 채' 떠나는데, 그것을 본 일부 사람들은 다른 배를 타고 뒤따라갑니다. 좀 더 가르침을 받고 싶어 했거나, 기적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뒤따라 간 다른 배들에 대한 언급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그 배들이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37절..<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갈릴래아 호수에서는 지형상의 이유로 좁은 골짜기를 지나온 강풍이 갑자기 불어서 호수의 물결을 일으키고 2미터가 넘는 파도를 만드는 일이 가끔씩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센 돌풍'은 바로 그렇게 불어온 강한 회오리바람을 가리킵니다. 거센 돌풍 때문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에 물이 가득 차게 되었고, 배가 곧 가라앉을 것 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38절..<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고물'은 배의 뒤쪽입니다. 그곳은 다른 곳보다 조금 더 높기 때문에 아직 물이 차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베개'는 당시 선원들의 방석입니다. 예수님은 하루 종일 사람들을 가르치시느라고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또 밤이 되어 잘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무시는 것은 어부 출신 제자들에 대한 신뢰와 예수님의 권능(주권)의 표현입니다. 즉 아무리 파도가 쳐도 흔들림 없는 예수님의 고요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겁에 질려서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들은 호수의 갑작스러운 돌풍을 많이 겪었을 것이고, 그런 일에 익숙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깨우면서 죽게 되었다고 부르짖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큰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스승님'이라고 번역된 말의 원문 단어는 '선생님'이라고 번역해야 할 말입니다. 원문에서 이 말은 제자가 아닌 사람들도 사용하는 호칭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새번역 성경은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 성서는 '돌보시지 않습니까?' 라고 번역했는데, 원문대로 하면 새번역 성경처럼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공동번역 성서처럼 번역하면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되는데, 원문에는 그런 뜻이 없습니다. 지금 제자들의 말은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요청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태평하게 주무시는 것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39절..<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예수님이 바람과 호수를 꾸짖고 호령하시는 모습은 마귀를 쫓아낼 때의 모습과 같습니다. 이것은 바람과 호수의 뒤에서 악의 세력이 활동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람을 멈추게 하시고, 호수를 고요하게 만드신 것은 악의 세력에 대한 지배력(통제력)이 있다는 것과 자연에 대해서도 지배력이 있음을 동시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호수를 분명하게 구별해서 생각하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갈릴래아 호수가 바다처럼 넓다고 해서, 호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바다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호수'로 번역했는데, 원문에는 '바다'로 되어 있습니다.)

 '잠잠해져라.' 라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침묵을 지켜라.'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라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입을 닫아라.'입니다. 이 말들은 악마에게 바람과 파도를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명령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시자 즉시 바람이 멎고 호수가 고요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으로 바람과 호수를 고요하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40절..<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미 많은 시간을 함께 지냈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많은 가르침과 기적들을 듣고 보았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어떤 분이신지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라는 말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위험이 닥치자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이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위기가 닥치자 제자들이 믿음을 잃어버리는 모습은 나중에 또 나옵니다. 뒤의 14장 50절에서, 예수님이 체포될 때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나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겁을 내는 것에 대해서도 꾸짖으시는데, 그들이 겁을 냈다는 것은 곧 그들이 믿음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용기로 나타나는 법입니다.

41절..<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큰 두려움'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능력 앞에서 느끼게 되는 경외심을 뜻합니다.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많이 보았지만, 한마디 명령으로 바람이 멎고 파도가 잠잠해지는 기적은 다른 기적들보다도 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삼스럽게 예수님이라는 분에 대해 놀라움과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게 됩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을 행하신 것에 대해 놀랐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에게 하느님의 권능이 있음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라는 말은 예수님의 권능은 바람과 호수까지도 복종하는 권능이라는 것, 즉 예수님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원문에는 '호수'가 아니라 '바다'로 되어 있습니다.)

--폭풍이 불고, 배가 위험에 처했는데도 태평스럽게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구약성경 요나서에 나오는 요나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나와는 달리 기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합니다. 바로 그게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신 이유 :

1) 제자들이 자신들의 위험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체포될 때 예수님을 놓아두고 모두 도망간 것과 비슷합니다. 충실한 제자들이라면 예수님께 부르짖기만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지켜드리려고 노력했어야 합니다. 또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위험을 나누고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는 생각이 부족했습니다.

2) 제자들은 하느님을 믿듯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손에 운명을 맡겼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고 주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주무시는 동안에도 제자들을 잊지 않고 보호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울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잠을 자든지, 하던 대로 노를 저어가든지 했어야 합니다.

--겁이 많은 것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표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을 잃으면 용기도 잃게 됩니다.--사도들이 탄 작은 배는 교회를 상징하고, 풍랑은 교회가 겪는 어려움, 박해, 시련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교회라는 배의 선장은 예수님이십니다. 긴 역사를 거치면서 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고, 앞으로도 겪겠지만 우리는 배가 침몰하지나 않을까, 하고 겁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라는 배의 선장이 예수님이시고, 이 배는 영원하고 안전한 항해를 약속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여행길에서 폭풍과 파도가 전혀 없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에게서 우리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높은 산, 험한 파도를 자주 만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만날 때마다 그런 일을 겪게 한다고 하느님을 원망해서도 안 되고, 그런 것들을 아예 처음부터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시련과 고난을 만났을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산이라면 밟고 넘어가야 하고, 파도라면 헤치고 지나가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입니다.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 중인 우리의 삶의 선장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의 '삶'이라는 배가 파선하고 침몰하지나 않을까, 하고 겁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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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사는 것이 힘들다고 느낄 때',

그럴 때에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은 사도들보다 더 초라하고,

더 불쌍하고, 더 겁에 질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다 죽게 되었는데, 의지할 곳도, 하소연할 곳도 없을 때...

아무리 기도해도 하느님의 응답은 들리지 않고,

눈앞이 막막하여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사도들의 부르짖음이 그대로 우리의 울부짖음일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제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옆에서 주무시기만 해도 좋겠습니다.

아예 어디 계신지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삶의 선장, 곧 내 삶의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했는데,

그 예수님은 보이지도 않고, 만날 수도 없고,

마치 선장도 없이 혼자서 조각배에 앉아

망망대해 한 가운데에서 노를 젓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것이 우리의 삶이고, 현실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그 자체가 도전이고 시련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노력, 들리지 않는 음성을 들으려는 노력,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기한의 인내력과 기다림...> 

저는 믿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이,

내가 다 죽게 되었을 때마다,

내 기도에 응답하고 나를 건져주셨다는 것을,

폭풍우가 몰아치는 한밤중에 별빛 하나 보이지 않아도

등대 하나는 꼭 켜주시고 앞길을 인도해주신다는 것을... 

그래서 저는 지금 예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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