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서 2장 1-28절>
<1절-12절 :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이 이야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권한'입니다. 즉 치유의 기적이 아니라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중풍 병자 치유 기적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1절..<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며칠 뒤에'는 앞의 1장 39절에서 카파르나움을 떠나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역을 돌아다니신 다음에 며칠 뒤에 카파르나움으로 돌아오셨다는 말인데, 실제로는 그보다는 기간이 더 길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몇 주간은 되었을 것입니다. 이 구절의 '집'은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1,29)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집을 숙소로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돌아오시자 금방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이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모여들게 됩니다.
2절..<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들어서 집 안팎을 가득 채웁니다.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이라는 말은, 문 앞의 뜰, 또는 집 앞의 길까지 사람들로 가득 찼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전하면서, 회개하라고 가르치셨을 것입니다(1,15).
3절..<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안식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병을 고치러 온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때 네 사람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풍 병자를 들것에 눕혀서 데리고 옵니다.
4절..<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다.>--사람이 너무 많아서 병자를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갑니다. 당시 그곳의 집들은 지붕이 허술했습니다. 갈대, 마른 풀, 나뭇가지들을 엮어서 하늘을 가리고 이슬을 막는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건물 벽에는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쉽게 지붕에 올라가서 구멍을 내고 병자를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내려 보낼 수 있었습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가서 치료 받게 하려는 그들의 행동은 그들이 이미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믿고 있음을 나타내고, 또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5절..<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여기서 '그들의 믿음'이라는 말은 병자와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믿음'은 죄를 용서받고 병이 치료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즉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병자의 죄가 용서되고 병도 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믿음은 '그들'의 믿음이지만 치유의 기적은 병자 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나의 믿음이, 또는 공동체의 믿음이 어떤 한 사람에게 은총이 내리게 할 수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얘야' 라고 부르신 것으로 번역했는데, '얘야' 라는 말의 원문 단어는 '아들아, 아이야'로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얘야' 보다는 '아들아'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아들아'(또는 '아이야') 라고 친근하게 부르신 것은 그 병자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자비 등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 호칭은 그 병자가 어린 아이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이 호칭을 아예 빼버렸는데, 잘못된 번역입니다.)
당시에는 병은 죄의 결과라는 사고방식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중풍 병자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병자의 병이 죄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지만, 병자를 위해서 먼저 죄의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그 병자 입장에서는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병도 곧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의 죄를 용서하기 전에 기도도 하지 않았고, 아버지께 청하거나 의지하지도 않았고, 당신의 권능으로 그 병자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따라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은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한다.' 라는 뜻입니다.
6절..<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루카복음 5장 17절을 보면,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의 진상을 조사하려고 왔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문제를 제기합니다. (원문에는 '의아하게' 라는 말은 없습니다.) 여기서 율법학자들이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예수님께 무슨 말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래도 이 이야기는 예수님과 율법학자들의 논쟁으로 분류됩니다
7절..<'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한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사람이 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일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비롯된 생각입니다(탈출 34,7 ; 이사 43,25).
유대인들은 메시아조차도 죄의 용서를 선언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곧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 말을 직접 할 용기는 없어서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율법학자들이 중얼거렸다고 번역했는데, '중얼거렸다.' 라는 말은 원문에 없는 말입니다.)
(지금의 고해성사에서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고 사제는 권한을 위임받아서 행할 뿐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3절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시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권한을 완전히 넘겨준 것이 아니라 위임하신 것입니다.)
8절..<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보시는 분입니다(요한 2,25). 여기서 '당신 영으로' 라는 말은 '당신의 영적인 능력으로', 또는 '당신의 직관력으로' 라는 뜻입니다.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라는 번역은 별로 적절한 번역이 아닙니다. (원문에는 '의아하게' 라는 말은 없습니다.) 지금 율법학자들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반감과 적대감을 품고 있습니다. 율법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속 생각을 대신해서 이야기하십니다. 여기서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느냐?' 라는 질문은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왜 나에게 사람의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라는 뜻으로 하신 질문입니다.
9절..<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여기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고 물으신 것은 둘 다 쉽지 않다는 뜻으로 하신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도 하느님의 권한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고, 중풍 병자를 걷게 하는 것도 하느님의 능력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둘 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는 그 두 가지 일을 모두 하실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가짜 예언자가 사람들을 속이려고 한다면,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쉬운 일입니다. 죄의 용서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이 더 쉬운 일입니다. 죄의 용서는 병자 자신의 회개와 용서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지만 병자를 걷게 하는 일은 병자의 상태를 바꾸기만 하는 단순한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그 중풍 병자가 일어나서 걷는 기적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일을 통해서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는 가짜 예언자라고 오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10절..<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다니엘서7장 13절에서 온 말인데,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하신 말입니다. 이 말에는 예수님이 고난 받는 야훼의 종으로서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말을 메시아라는 뜻으로는 알아듣지 못했고 그냥 '한 사람'이라는 뜻으로만 알아들었습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라는 말은, '내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서 사람의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을 뿐만 아니라 기적을 행할 능력도 있음을 너희에게 보여주겠다.' 라는 뜻입니다. ('땅에서' 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다면 기적을 행할 능력도 있고,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면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음이 증명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적, 즉 중풍 병자를 걷게 하는 기적을 통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죄의 용서'를 확인시켜 줍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의 자비에서, 또 치유의 기적은 하느님의 전능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일에 율법학자들이 의문을 갖지 않았다면 병자를 고쳐 주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불필요한 일입니다. 율법학자들이 그런 의문을 갖지 않았더라도, 자 비로우신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에게 전인적인 치유의 은총을 주셨을 것입니다. 즉 그의 몸과 영혼이 모두 건강하게 되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셨을 것입니다.
11절-12절..(11)<"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12)<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내가 너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권위와 권한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 자신의 권위와 권한으로 병을 고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직접 명령하시는 것은 그의 병이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병자 자신의 몸이 고장 난 상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일어나' 라는 말은 지금 그 병자가 누워 있음을 나타냅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라는 말은, 이제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한 몸이 되어 일상적인 삶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들것'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요' 라고 번역했는데,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으로 중풍 병자의 병이 치유됩니다. 그 병자는 질병과 죄에서 해방되어, 예수님 말씀대로 일어나서 들것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갑니다. 들것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는 것은 치유가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라는 말은 율법학자들을 포함해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기적을 목격했고 그 기적의 증인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모두 기적을 보고 크게 놀라면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라는 말은 '이런 놀랍고 신기한 일은 처음 본다.' 라는 뜻의 단순한 감탄사입니다.
지금 사람들의 이런 태도는 신기하고 초자연적인 일을 체험했을 때 보이는 일반적인 반응일 뿐입니다. 이 놀라움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나, 예수님의 권능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죄를 용서하고, 중풍 병자를 고침으로써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셨지만, 사람들은(특히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13절-17절 :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13절..<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쳤던 집에서 나와서 호숫가로 가셨다는 것은 장면을 전환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어떤 기대감을 품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군중에게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 가르치셨을 것입니다(1,15).
14절..<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라는 말은 호수에서 군중을 가르치신 다음에 카파르나움으로 가시던 도중에, 라는 뜻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사도 마태오입니다(마태 9,9). '세관에 앉아 있는'이라는 말은 레위가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였다는 뜻입니다. '나를 따라라.' 라는 말은 '내 제자가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1,17). 레위는 어부 출신 제자들처럼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당시에 카파르나움은 국경지역이었기 때문에 세관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세리들은 통행세와 관세를 거두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세금 징수권을 일정한 값으로 팔았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공무원이 아니라 세금 청부업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일정한 지역의 일 년 동안의 세금을 정해서 청부를 맡았고, 납부하고 남은 돈은 자신들이 가지고, 만일에 모자라게 되면 자기들의 돈으로 채워 넣어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세율과 세액에 관한 객관적이고 명백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세리들은 마음대로 사리사욕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민중들로부터 도둑으로 취급되었고, 경멸받았습니다. 또 세금을 침략자인 로마에 바쳤기 때문에 배신자, 매국노로 불렸고, 직업상 항상 이방인과 교제를 했기 때문에 율법상의 정결을 지키지 않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그런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출신성분, 신분, 직업, 계급 등을 가리지 않으신다는 하나의 표지입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어부 출신의 제자들보다 더 큰 헌신과 포기를 보여준 것입니다. 어부들은 배와 그물을 구하면 다시 옛 직업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세리는 한 번 포기한 직업으로 다시 돌아가기가 어려웠습니다. 더욱이 경제적으로 보면 레위는 현재에도 부자이고, 미래에도 보장된 부유함을 모두 포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이었던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것이나, 레위가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나 모두 놀라운 일입니다.
15절..<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라는 말에서 '그의 집'이 누구의 집인지 원문에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200주년 성서에서는 '그의 집'을 '예수님의 집'으로 해석했는데, 동의할 수 없습니다. 루카복음 5장 29절을 보면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레위의 집에서' 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에는 그냥 '그의 집'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레위는 자신을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동시에 동료들에게 이별을 고하기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잔치에 세리들이 많이 참석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참석했습니다. 여기서 '죄인'은 세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인데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도 포함된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당시에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음을 나타내는데,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죄인 취급하지 않으시고 항상 따뜻하게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16절..<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율법학자들 중에는 사두가이파에 속한 사람도 있었고, 아무 파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등장하는 율법학자들은 바리사이파에 속한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대부분 바리사이파였습니다. 그들이 그 잔치에 참석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고, 아마도 잔치 장면을 목격하고서 시빗거리를 하나 찾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식사란 거룩한 의식이었고, 한 식탁에 앉아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우정과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라는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이 아니면 한 자리에 앉아 함께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면 자기들도 죄인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율법학자들 중에서도 가장 엄격했던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려서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시비를 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직접 말할 용기는 없어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냐고 따지고 있습니다.
17절..<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질문은 제자들이 받았지만 답변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라는 말은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사용되던 격언입니다. 의사들은 자기 몸에 병이 옮을까 두려워하지 않고 환자들을 돌봅니다.
예수님도 율법의 규정들에 매이지 않고 죄인들을 만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을 영혼이 병든 병자로 취급했고, 마치 전염병자를 피하듯이 그들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혼을 치료하는 의사이기 때문에 그런 병자들을 만나셨고 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말에서 '의인'이라는 말이 글자 그대로 의인을 뜻한다면, 이 말은 '나는 의인뿐만 아니라 죄인도 부르러(구원하러) 왔다.' 라는 뜻이 됩니다. 즉 죄인이라고 해서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고, 특히 죄인일수록 더 구원할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의인'이 자칭 의인을 뜻한다면, 이 말은 '나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죄인이라고 낮추면서 회개하고 구원을 청하는 사람을 부르러(구원하러) 왔다.' 라는 뜻이 됩니다.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대부분 스스로 의롭다고 자만하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예수님의 구원사업에서 제외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병든 영혼의 소유자이고, 예수님의 치유와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선 먼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18절-22절 : 단식 논쟁 - 새것과 헌것>
18절..<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이 내용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을 하고 있었던 어느 날의 일입니다.당시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의 날에 의무적인 단식을 했고(레위 16,29), 기근, 전쟁 같은 재난을 겪을 때 슬픔과 고난의 표현으로 단식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일주일에 두 번 단식을 했는데, 고행이 아니라 신심 행위로서의 단식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바리사이들과 비슷하게 단식했는데, 아마도 스승의 엄격한 극기 고행을 본받았을 것입니다.예수님은 단식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마태 6,16-18).여기서 예수님께 와서 질문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마태오복음 9장 14절에는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질문한 것으로 되어 있고, 루카복음 5장 33절에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질문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리사이의 제자들'이라는 말은 이상한 표현입니다. 율법학자들에게는 제자가 있었지만, 바리사이들에게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후대의 필사자 중에서 누군가가 잘못 적어 넣은 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떻든 '바리사이의 제자들'이라는 말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선생님'이라고 번역한 말은 원문에는 그냥 '당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은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것은 당신이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 아닌가?' 라는 뜻으로 비난하는 질문입니다.
19절..<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메시아로 오신 신랑으로 표현하시고, 지금 제자들과 함께 있는 기간을 혼인 잔치로 표현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29절에서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표현하고 자신을 신랑의 친구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 질문한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라면 그들은 자기들의 스승이 한 말을 기억해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들이 야훼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신랑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은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 백성의 신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신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혼인 잔치 손님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킵니다.
당시에 혼인 잔치는 보통 7일 동안 계속되었고,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그 기간 동안 신랑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잔치의 즐거움에 참여했습니다. 그것은 초대를 받은 사람의 도리입니다. 따라서 지금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은 단식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단식할 때가 아니라 기뻐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20절..<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은 예수님의 죽음의 날입니다.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을 당하게 되면 제자들도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초대교회 때부터 단식을 했는데, 처음에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금요일에 단식을 했고, 나중에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을 했습니다. 이 단식은 바리사이들의 신심 과시나 허영 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절제, 극기, 예수님의 희생을 기념하기 위한 단식이었습니다.
21절..<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21절과 22절은 앞의 단식 이야기와 직접관련이 없고, 비슷한 내용이기 때문에 아마도 편집 과정에서 이 자리에 배치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단식뿐 아니라 신앙생활 전반에 관한 원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새 시대가 열렸고, 새 정신과 새 방식의 신앙생활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물에 담근 일이 없는 새 천이 한 번 물에 들어가면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헌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기운 다음 빨래를 한다면 새 헝겊이 헌 옷을 잡아당겨서 심하게 찢어지거나 구멍을 크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새로운 정신을 유대교의 낡은 형식에 맞추면 둘 다 망치는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22절..<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당시에는 양이나 염소 가죽을 통째로 벗겨내어 가죽 부대로 사용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껍질이 얇아지고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만일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게 되면 새 포도주가 발효할 때의 압력 때문에 가죽 부대는 터지게 되고, 술도 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21절과 22절의 비유는 낡은 것과 새 것이 양립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새 가르침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려면 새로운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헌 옷과 헌 가죽 부대는 낡은 유대교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새 헝겊, 새 포도주, 새 부대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과 정신을 뜻합니다. 나중에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고 낡은 유대교를 떠나서 새로운 그리스도교로 나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예수님은 유대교를 개혁하려고 했을까? 아니면 완전히 폐지하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기를 원했을까? 현재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전혀 다른 종교처럼 보이지만 구약성경을 함께 쓰고 있고, 같은 하느님 야훼를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완전히 다른 종교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마태 5,17).
따라서 유대교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유대교가 낡아진 것은 세월이 흘러서가 아니라 스스로 낡아진 것입니다. 그 점은 우리에게도 하나의 경고가 됩니다. 우리 교회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낡은 종교,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로 전락할 것입니다. 항상 새 정신을 유지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항상 새로워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게을리 했을 때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앞으로 그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23절-28절 :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23절..<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이 일은 밀이 익을 무렵, 즉 5월말이나 6월초의 어느 안식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마도 카파르나움에서 있었던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고 있는데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길을 내고 가면서' 라는 번역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길을 가면서' 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길을 내고 가면서' 라고 번역하면 길이 없는 곳에서 새로 길을 만들면서 간다는 뜻이 되는데, 그 자체로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노동이 됩니다. 원문에는 길을 낸다는 뜻이 없습니다.)
마태오복음 12장 1절을 보면,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은 것은 배가 고팠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뒤의 25절에서 다윗이 배가 고팠을 때 했던 행동을 예로 들면서 제자들을 변호하신 것도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 먹었음을 나타냅니다. (해설서들을 보면 제자들이 심심풀이로 그랬을 수도 있다고 해설한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해설입니다.)
24절..<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탈출기 34장 21절에, 안식일에는 추수도 쉬어야 한다고 되어 있고, 신명기 23장 26절에, 이웃의 밭에 있는 곡식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괜찮지만 낫을 대면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바리사이들이 문제를 삼는 것은 남의 밭에서 밀 이삭을 잘라먹은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이삭 하나, 열매 한 개를 따는 것까지도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추수, 즉 노동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지금 제자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그것은 안식일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자들의 책임자인 예수님께 그것을 따지고 있습니다.
25절-26절..(25)<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바리사이들은 성경의 권위를 거역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근거로 해서 반박하십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다윗의 이야기는 사무엘 상권 21장 1절-7절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다윗과 그의 일행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맞은 사제는 에브야타르가 아니라 아히멜렉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후대에 잘못 적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에브야타르가 다윗 시대에 가장 유명한 대사제였기 때문에(1사무 23,9), 단순히 그 시대를 표시하기 위해서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라고 적은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먹은 빵은 안식일마다 하느님께 새로 바치는 거룩한 빵으로서 사제들만이 먹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다윗과 그 일행은 그 빵을 먹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굶주렸기 때문에 사제는 그들에게 그 빵을 먹으라고 주었습니다. 굶주리는 사람을 위해서 율법 적용이 중지된 것입니다.
여기서는 다윗이 하느님의 집에 있는 제사 빵을 직접 집어 먹고 함께 있는 이들(부하들)에게도 준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사실은 다윗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아히멜렉 사제가 다윗에게 준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어긴 책임은 다윗이 아니라 아히멜렉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배가 고팠다는 것과 지금 제자들이 배가 고팠다는 것이 일치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행동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경우처럼 제자들의 행동을 율법 위반이라고 단정하기에 앞서 전후 사정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율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랑'이 라고 깨우쳐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27절..<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이것은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대한 두 번째 답변입니다.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마련하신 것은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하루의 시간을 인간에게서 빼앗아 가신 것이 아니라, 하루의 휴식을 갖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사람을 안식일의 노예로 만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정당한 사정이 있다면 사람이 안식일보다 위에 설 수 있습니다. 다만 아무나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적용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지나치게 까다롭고, 율법의 본래 정신에도 어긋나는 잘못된 규정들을 없애고 안식일의 순수한 뜻을 회복시키려고 하신 것이지, 안식일 율법 자체를 무시하신 것은 아닙니다.
28절..<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이것은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대한 세 번째 답변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원래 안식일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전권을 받아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이제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또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고, 예수님도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메시아로 오신 분입니다. 사람은 아무나 마음대로 안식일의 범위를 정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는 분(2,10)이기 때문에 안식일의 범위를 정할 권한도 있는 분입니다.
또 사람을 위해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사람을 위해 안식일 율법을 중지시키거나 바꿀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모든 억압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러 오신 분입니다.
지금 그리스도교에서 안식일(토요일)을 지키지 않고, 안식일 다음날(일요일)을 '주님의 날'(주일)로 정해서 지키는 것은 바로 28절의 말씀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안식일 다음날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지켜야 할 날이 안식일에서 안식일 다음날로 변경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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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
우리의 모든 삶의 중심은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중심은 인간입니다. 바로 '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노예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부모를 사랑하는 자녀가 부모에게 드리는 효도가 부담스러운 의무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녀에게는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신앙은 아버지 하느님께 드리는 효도입니다.
많은 율법과 규정, 계명들은 아버지 하느님께 더 잘 효도를 하기 위해서, 또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서 정한 것들이지, 인간을 얽어매고 억압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억지로 하는 효도가 진정한 효도일 수 없듯이 죄를 짓는 것이 무서워서 억지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신앙생활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뭔가를 바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도, 전례, 헌금, 봉사활동 등...
그 모든 일들은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동시에 나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에 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을 향한 내 사랑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